LOGIN오전 9시 42분.은서율은 연극 《책갈피를 돌려드립니다》의 대본을 출력하고 있었다.프린터에서 마지막 장이 나오자 그녀는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했다.총 38페이지.아직 완성본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첫 번째 초고였다.“생각보다 많이 썼네.”그때 최태혁이 문을 두드렸다.“서율아, 택배 온 거 있어?”“아니요. 왜요?”“공방에서 연락 왔는데 우리가 만든 유리 장식 사진을 홍보용으로 써도 되냐고 물어보네.”서율은 고개를 들었다.“사진이요?”“응. 완성 작품 사진만.”“우리 이름은 안 나오는 거죠?”“그렇대.”서율은 잠시 생각했다.“그럼 괜찮아요. 대신 집에 걸어놓은 사진은 안 되고, 공방에서 찍은 작품 사진만요.”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답할게.”서율은 다시 대본을 바라봤다.“주인님.”“응?”“저 오늘 대본 읽는 거 도와주실래요?”“배역은?”“주인님이 서이강이요.”태혁은 웃었다.“또 내가 첫 번째 관객이네.”“오늘은 관객 말고 배우예요.”오전 11시 16분.작은 도서관의 테이블 위에는 대본 두 부가 놓였다.서율은 차보배의 대사를, 태혁은 서이강의 대사를 맡았다.“이 책은 왜 따로 빼놓으셨어요?”서율이 대본을 읽었다.태혁이 이어받았다.“오래전에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싶었던 책이라서요.”“누구한테요?”“이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서율은 다음 대사를 읽으려다 멈췄다.“주인님, 잠깐만요.”“왜?”“방금 대사 좋았어요.”“그냥 읽었는데?”“아니요. 마지막에 조금 망설이셨잖아요.”태혁은 대본을 내려다봤다.“이강이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아서.”서율은 곧바로 여백에 적었다.서이강 — 대답 전 짧은 침묵.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역시 직접 읽어보니까 다르네요.”오후 12시 38분.두 사람은 마지막 장면까지 읽었다.서율은 대본을 덮으며 물었다.“어떠셨어요?”태혁은 잠시 생각했다.“대사는 자연스러운데, 중간에 조금 지루한 부분이 있어.”“어디요?”“보배
오전 9시 24분.은서율은 작은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켰다.어젯밤 연락을 주었던 공연 제작팀으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제목은 《2027년 봄 창작극 기획 공연 제안서》.첨부파일은 2개였다.하나는 공연 기획안, 다른 하나는 집필 조건을 정리한 문서였다.서율은 먼저 기획안을 열었다.공연 장소는 서울의 소극장.공연 시간은 약 70분.출연 배우는 2~4명.무대 전환을 최소화하고, 인물 간의 관계와 대사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창작극을 찾고 있었다.“어?”서율은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자신이 준비하던 《책갈피를 돌려드립니다》와 상당히 잘 맞는 조건이었다.그때 최태혁이 문을 두드렸다.“서율아, 아침 먹자.”“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태혁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제안서 왔어?”“네. 그런데 제가 쓰던 연극이랑 조건이 비슷해요.”태혁은 기획안을 읽었다.“출연 인원도 맞고, 공간도 한 군데면 되겠네.”“그렇죠?”“집필 조건은?”서율은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잠시 후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그런데 이 부분은 확인해야겠어요.”오전 10시 16분.서율은 집필 조건을 출력해 식탁에 펼쳐놓았다.태혁은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어떤 부분이 걸려?”“초연 이후 공연권이요.”서율은 문서의 한 문장을 가리켰다.공연 제작 및 향후 활용 범위는 별도 협의를 통해 확정한다.“이렇게만 적혀 있어요.”태혁은 문장을 읽었다.“범위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네.”“네. 초연만 허락하는 건지, 재공연까지 포함하는 건지 모르겠어요.”“그럼 미팅 때 물어봐야겠어.”서율은 수첩에 질문을 적었다.초연 공연권과 재공연권의 범위.대본 수정 권한.작가명 표기와 수익 배분.공연 영상 촬영 및 활용 여부.태혁이 말했다.“그리고 네가 이미 쓰고 있던 작품이라는 점도 분명히 해.”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이번 제안을 받기 전에 구상한 작품이니까요.”그녀는 질문 하나를 더 적었다.기존 창작 작품을 제안할 경우 저작권
오전 9시 17분.은서율은 작은 도서관에서 연극 《책갈피를 돌려드립니다》의 대본을 정리하고 있었다.어제 최태혁에게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 뒤,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니 수정할 부분이 적지 않았다.특히 차보배와 서이강이 2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설정에 비해 중간 과정이 부족했다.“마지막만 좋으면 안 되는데…….”서율은 대본에 표시된 장면들을 확인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한유리였다.“유리 씨?”“작가님, 안녕하세요.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네. 무슨 일이에요?”“저번에 말씀드린 연극 있잖아요.”“《여름의 마지막 편지》요?”“네. 제작진하고 미팅 날짜가 확정됐어요.”서율은 반갑게 웃었다.“잘됐네요!”“그런데 그쪽에서 작가님 이야기를 하셨어요.”“제 이야기요?”“네. 《없는 역에서 내리는 여자》를 보셨대요. 혹시 작가님께서 연극 대본도 쓰시는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서율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그걸 왜 물어보셨을까요?”“소극장 기획 공연에 참여할 새로운 작가를 찾고 있대요.”오전 10시 03분.통화를 마친 서율은 거실로 나왔다.태혁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주인님.”“응?”“저한테 연극 관련 제안이 들어올 수도 있대요.”태혁은 신문을 접었다.“어떤 제안?”“유리 씨가 만나는 공연 제작진이 새로운 작가를 찾고 있대요.”“정식으로 연락이 온 거야?”“아직은 아니에요. 유리 씨한테 제가 관심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대요.”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관심 있다고 전했어?”“네. 다만 자세한 조건을 먼저 알고 싶다고 했어요.”“잘했네.”서율은 맞은편에 앉았다.“주인님, 그런데 조금 신기해요.”“뭐가?”“어제까지만 해도 혼자 연극 대본을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까요.”태혁은 그녀를 바라봤다.“기회가 생겼다고 무조건 서두를 필요는 없어.”“알아요.”“네가 쓰고 싶은 작품인지부터 확인해.”서율은 미소 지었다.“네.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보
오전 9시 34분.은서율은 주방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있었다.달걀, 버섯, 치즈, 토마토.필요한 재료를 하나씩 꺼내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작은 메모지를 붙였다.《오늘의 요리 대결 — 최태혁 셰프》그 아래에는 심사 기준까지 적혀 있었다.맛 50점, 창의성 30점, 플레이팅 20점.최태혁이 주방으로 들어왔다.“이게 뭐야?”“어제 말씀드린 요리 대결이요.”“내가 요리하고 네가 심사한다는 그 대결?”“네.”태혁은 메모지를 읽더니 웃었다.“상대 선수는 어디 있는데?”서율은 당당하게 자신을 가리켰다.“저요.”“넌 요리 안 한다며.”“심사위원도 중요한 역할이잖아요.”“그럼 내가 몇 점 받아야 이기는 건데?”서율은 잠시 고민했다.“90점 이상이요.”“89점이면?”“재도전입니다.”태혁은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상당히 까다로운 대회네.”오전 10시 06분.태혁은 냉장고에서 꺼낸 재료를 살펴보다 서율에게 물었다.“메뉴는 내가 정해도 돼?”“네. 대신 제한 시간은 40분이에요.”“언제부터?”“지금부터요.”서율이 휴대전화 타이머를 눌렀다.태혁은 달걀을 풀고 버섯을 볶기 시작했다.서율은 식탁에 앉아 심사표를 만들었다.그러다 슬그머니 주방으로 다가갔다.“주인님, 뭐 만드세요?”“비밀.”“힌트 하나만요.”“달걀이 들어가.”“그건 저도 봤거든요?”태혁이 웃었다.“심사위원이 조리 과정에 개입하면 감점 아니야?”서율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알겠습니다, 셰프님.”잠시 후 태혁은 팬에서 부드러운 오믈렛을 접시로 옮겼다.속에는 볶은 버섯과 치즈가 들어 있었고, 옆에는 구운 토마토가 놓였다.서율은 감탄했다.“우와. 진짜 예뻐요.”“아직 심사 전이야.”“외관 점수는 벌써 높아요.”오전 10시 48분.서율은 포크로 오믈렛을 잘랐다.부드러운 달걀 사이로 녹은 치즈가 흘러나왔다.한 입 먹은 그녀는 눈을 감았다.태혁이 물었다.“어때?”“잠깐만요. 심사 중이에요.”서율은 진지한 얼굴로 점수를 적었다.맛 49점
오전 9시 21분.은서율은 작은 도서관에 앉아 연극 《책갈피를 돌려드립니다》의 등장인물 설정을 정리하고 있었다.어제까지는 이름 없이 ‘여자’와 ‘남자’로만 적어두었지만, 오늘은 인물에게 구체적인 삶을 만들어줄 생각이었다.여자는 43세의 출판 편집자.남자는 45세의 오래된 서점 운영자.두 사람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지만 서로를 기억하지 못한다.서율은 남자의 직업을 적다가 펜을 멈췄다.“서점 운영자면 도서관에 자주 올 이유가 부족한가?”그때 최태혁이 들어왔다.“뭐가 부족해?”“주인님, 남자 주인공 직업이요.”태혁은 수첩을 살펴봤다.“서점 운영자도 도서관에 갈 수 있지.”“그렇긴 한데, 20년 동안 같은 책을 찾는 이유가 조금 더 설득력 있었으면 좋겠어요.”태혁이 맞은편에 앉았다.“그 책이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되잖아.”“예를 들면요?”“처음 자기 생각을 누군가 이해해준 책이라든지.”서율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그리고 수첩에 적었다.그는 책을 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처음 답장을 보내준 사람의 안부를 확인하러 왔다.“주인님, 이거예요.”태혁이 웃었다.“그럼 아침 먹으러 갈까?”“잠깐만요. 이름만 정하고요.”“어제도 한 줄만 더 쓴다고 했는데.”“오늘은 진짜예요.”오전 11시 08분.서율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정했다.여자, 차보배.남자, 서이강.두 사람은 20년 동안 책을 매개로 짧은 글을 주고받았다.하지만 매번 같은 날짜에 편지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어떤 해에는 답장이 늦었고, 어떤 해에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그럼에도 편지는 이어졌다.서율은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을 적었다.‘이 책을 읽고 나니 떠나고 싶어졌습니다.’그 아래에는 두 번째 사람의 답장이 있었다.‘저는 이 책을 읽고 돌아오고 싶어졌습니다.’서율은 두 문장을 나란히 바라봤다.“같은 책인데 정반대네.”그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조금 선명해졌다.오후 1시 17분.정이현에게
오전 9시 38분.은서율은 작은 도서관 바닥에 책 여섯 권을 펼쳐놓고 있었다.모두 오래된 시집이었다.어떤 책에는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어떤 책에는 오래전에 붙인 듯한 메모지가 남아 있었다.최태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서율아, 책 정리해?”“아니요. 조사 중이에요.”“무슨 조사?”“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사람들이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요.”태혁은 바닥에 놓인 책들을 살펴봤다.“공공도서관 책에는 낙서하면 안 되잖아.”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래서 어제 생각한 연극 설정을 바꾸려고요.”“어떻게?”“책에 직접 편지를 쓰는 게 아니라,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익명 독서 편지함을 이용하는 거예요.”태혁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럼 편지는 누가 전달해?”“사서가요. 책 제목을 적어두면 다음에 그 책을 빌리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인 거죠.”“20년 동안 운영되기는 어렵지 않을까?”서율은 잠시 멈췄다.“그렇죠?”“운영자가 바뀔 수도 있고, 도서관이 문을 닫을 수도 있잖아.”서율은 수첩을 펼쳤다.“그럼 그게 사건이 되면 되겠네요.”“뭐가?”“도서관이 폐관하면서 편지함이 사라지는 거예요.”그녀는 빠르게 문장을 적었다.마지막 편지를 전달하지 못한 사서.20년 동안 답장을 기다린 두 사람.폐관 전날, 주인을 찾지 못한 편지 한 통.서율은 펜을 멈추고 태혁을 바라봤다.“주인님, 이거 괜찮은데요?”태혁이 웃었다.“그럼 이제 아침 먹자.”오전 11시 12분.서율은 연극의 구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제목은 임시로 《책갈피를 돌려드립니다》.무대는 오래된 동네 도서관 한 곳.등장인물은 2명으로 시작하되, 필요하다면 사서의 목소리를 녹음으로 활용하기로 했다.그녀는 첫 장면을 새로 썼다.폐관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여자는 반납대 위에 놓인 낡은 시집을 발견한다.책에는 마지막으로 전달되지 못한 편지가 끼워져 있다.수신인 — 매년 11월 첫째 주에 이 책을 빌리는 사람.서율은 문장을 읽다가 미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