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플레이 가이드라인 (Play Guideline): Chapter 1 - Chapter 10

40 Chapters

1화. 계약의 시작

“한서인 씨 대역 맞으시죠?” 스튜디오 복도 한쪽에 서 있던 서율은 건네받은 수건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닦았다. “네. 오늘 체형 대역으로 왔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원비가 또 밀렸다. 집주인은 이번 주까지 월세를 입금하지 않으면 방을 빼 달라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평소 일당의 세 배를 준다는 대역 배우 제안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장면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문제는 대기실에 도착한 뒤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시놉시스 첫 장에는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파격적인 BDSM 소재의 멜로 영화. 서율은 빠르게 다음 장을 넘겼다. 손목 결박. 눈가리개. 상대 배우와의 밀착 장면. 실제 수위는 높지 않다고 적혀 있었지만, 사전에 들었던 내용과는 확연히 달랐다. 더구나 상대 배우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에는 종이를 놓칠 뻔했다. 차태혁. 데뷔 이후 줄곧 정상의 자리를 지킨 톱배우였다. 사생활도, 스캔들도, 흔한 구설조차 없었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까다롭기로 유명했고, 촬영 현장에서 타협하지 않는 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똑똑. 짧은 노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짙은 우디 향이 공기 속으로 은은하게 번졌다. 180cm가 훌쩍 넘는 큰 체격과 반듯하게 뻗은 어깨. 조각처럼 선명한 턱선과 감정을 읽기 어려운 서늘한 눈매. 차태혁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넓었던 대기실이 한순간에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서율에게 머물렀다. “은서율 씨.” 서율의 손이 굳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계약서에서 봤습니다.” 태혁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살핀 뒤 테이블 위 시놉시스로 시선을 옮겼다. “장면 설명은 들었습니까?” “얼굴이 나오지 않는 체형 대역이라고만 들었습니다.” 태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결박 장면이라는 얘기도 못 들었고요?” 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혁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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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섯 가지 규칙

차태혁이 작성한 규칙은 모두 다섯 가지였다.첫째,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접촉은 하지 않는다.둘째, 불편함을 느끼면 즉시 말한다.셋째, ‘멈춰요’라는 말이 나오면 이유를 묻지 않고 중단한다.넷째, 촬영이 끝난 뒤 반드시 상태를 확인한다.다섯째, 동의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서율은 종이를 읽은 뒤 태혁을 바라봤다.“이걸 직접 만드신 거예요?”“네.”“보통 촬영할 때마다 이렇게까지 해요?”“이런 장면을 찍는다면 반드시 합니다.”태혁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서율은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단순한 약속이라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마치 그가 과거에 이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던 현장을 직접 겪은 사람처럼 느껴졌다.“제작사 계약서도 있는데 이게 필요해요?”“계약서는 제작사를 보호합니다.”태혁이 펜을 내려놓았다.“이건 배우를 보호하는 겁니다.”그 말에 서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그녀가 살아오며 서명했던 계약서들은 언제나 돈을 지급하는 사람의 편이었다. 일하다 다쳐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 갑작스럽게 일이 취소돼도 일당을 받을 수 없다는 조항.서율 자신을 위한 규칙은 처음이었다.“여기 서명하면 되는 거죠?”“내용을 전부 이해한 뒤에요.”“이해했어요.”서율은 종이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은서율.태혁도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차태혁.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종이 위에 나란히 놓였다.“한 가지 더 확인하겠습니다.”태혁이 물었다.“접촉이 가능한 부위는 어디까지입니까?”서율은 당황해 손가락을 움찔했다.“아까 말씀하신 손목하고 어깨 정도요.”“허리는?”“잠깐 닿는 건 괜찮아요.”“목은요?”그 순간 서율의 표정이 굳었다.아주 짧은 변화였지만 태혁은 놓치지 않았다.“안 됩니까?”“아니요. 괜찮아요.”“지금 표정은 괜찮지 않은데요.”서율은 애써 웃었다.“그냥 낯설어서 그래요. 실제로 잡는 것도 아니잖아요.”태혁은 곧바로 동의하지 않았다.“목 주변은 제외하겠습니다.”“그럴 필요 없어요.”“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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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멈춰요

촬영장 중앙에는 붉은색 소파가 놓여 있었다.낮게 깔린 조명과 검은 커튼, 금속 장식이 달린 소품들이 영화 속 공간을 현실처럼 만들어 놓고 있었다.서율은 가운을 벗어 스태프에게 건넸다. 몸에 붙는 검은색 원피스가 드러나자 자신도 모르게 팔로 몸을 가렸다.차태혁이 그녀의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았다.카메라와 스태프의 시선이 그의 넓은 등 뒤로 가려졌다.“추우면 말해요.”“안 추워요.”“긴장한 겁니까?”서율은 부정하려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요.”“그건 괜찮습니다.”태혁이 낮게 말했다.“무서운데 괜찮은 척하는 것만 하지 마요.”감독이 두 사람을 불렀다.“우선 리허설부터 갈게요. 서율 씨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면 태혁 씨가 손목을 잡고 소파 쪽으로 밀어붙이는 동선입니다. 그다음 목 근처로 손을 올리고요.”태혁의 표정이 굳었다.“목은 제외하기로 했습니다.”감독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직접 잡는 거 아니고 가까이만 대는 건데요?”“그 동작도 뺍니다.”“태혁 씨, 이게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장면이라서—”“카메라 각도로 처리하세요.”짧고 단호한 말에 감독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리허설이 시작됐다.태혁이 서율의 손목을 잡았다.강한 힘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화면에서는 충분히 제압하는 것처럼 보일 각도였다.“뒤로 한 걸음.”서율이 움직였다.“한 걸음 더.”종아리 뒤로 소파가 닿았다.태혁이 가까이 다가왔다.우디 향이 짙어졌다. 그의 그림자가 서율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주변에 수십 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다른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나만 봐요.”서율은 아래로 떨어졌던 시선을 들었다.태혁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그때 감독이 외쳤다.“좋아요. 태혁 씨, 원래 동작대로 목 가까이 손 올려 볼게요. 직접 닿지만 않으면 되니까.”태혁은 움직이지 않았다.하지만 감독의 말만으로도 서율의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오래전 기억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술에 취한 아버지.벽으로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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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등록되지 않은 이름

“제작사 명단에 은서율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습니다.”매니저의 말이 떨어지자 촬영장 입구의 공기가 싸늘하게 굳었다.태혁은 잡고 있던 서율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그게 무슨 뜻이죠?”“오늘 등록된 대역 배우는 윤채린이라는 사람입니다. 한서인 씨와 체형이 비슷한 전문 대역 배우고요.”매니저가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출연자 명단에는 분명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윤채린.그 아래에는 프로필 사진과 연락처, 소속 업체까지 등록되어 있었다. 서율과 관련된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서율은 입술을 달싹였다.“저는 분명 은서율 이름으로 계약했어요.”“계약서를 가지고 있습니까?”태혁의 질문에 서율이 급히 가방을 열었다.메일로 받은 전자 계약서를 보여 주려 했지만, 아무리 화면을 내려도 해당 메일이 보이지 않았다.“분명 있었는데…….”검색창에 업체 이름을 입력해도 결과는 없었다. 계약서를 전달했던 담당자와의 메시지 역시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서율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삭제한 적 없어요.”태혁은 말없이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메일 휴지통에도, 보관함에도 흔적이 없었다.“처음 연락은 어떻게 받았습니까?”“대역 배우 구인 사이트에 올린 프로필을 보고 연락했다고 했어요. 어제 저녁에 전화가 왔고, 오늘 아침에 계약서를 보냈어요.”“계약금은요?”서율이 고개를 저었다.“촬영이 끝난 뒤에 전액 지급한다고 했어요.”“신분증 사본이나 계좌번호는 보냈습니까?”그 질문에 서율의 얼굴이 굳었다.“보냈어요.”매니저가 낮게 욕설을 삼켰다.태혁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졌다. 그러나 그가 차분해질수록 주변의 긴장은 더 짙어졌다.“연락한 번호로 전화해 보세요.”서율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잠시 후 기계음이 흘러나왔다.‘고객님의 사정으로 현재 수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두 번째도 같았다.세 번째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누가 일부러 이 사람을 현장에 들여보낸 겁니다.”매니저가 말했다.“그런데 왜죠?”서율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저 같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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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숨겨진 카메라

“저거 내려요.”태혁의 목소리가 촬영장 안을 가르자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그가 가리킨 곳은 세트 천장과 검은 커튼이 맞닿은 구석이었다. 조명 장비 사이로 작은 붉은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고 있었다.촬영감독이 고개를 들었다.“저 위치에는 카메라가 없는데요.”“그러니까 확인하라는 겁니다.”보안요원 두 명이 사다리를 가져왔다. 한 명이 위로 올라가 장비 사이에 숨겨진 물건을 떼어 냈다.손바닥보다 작은 검은색 카메라였다.렌즈는 정확히 붉은 소파를 향하고 있었다.서율은 자신도 모르게 가운의 앞섶을 움켜쥐었다.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였다.손목에 스트랩을 차고, 태혁과 마주 보고 있던 모습이 저 안에 고스란히 담겼을지도 몰랐다.“메모리 카드가 있습니다.”보안요원이 말했다.“무선 송신 장치도 연결돼 있고요.”“지금도 전송 중입니까?”태혁의 질문에 보안요원이 장비를 확인했다.“전원이 꺼졌습니다. 방금 전화가 끊긴 시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누군가가 이곳을 보고 있었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서율이 태혁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몰래카메라 화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면 모든 상황이 설명됐다.서율의 숨이 다시 가빠졌다.태혁이 곧바로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여기서 나갑시다.”“하지만 경찰이 오면—”“기다릴 장소를 옮기는 겁니다.”그는 매니저에게 고개를 돌렸다.“경찰에게 발견된 장비와 출입 기록 전부 넘겨요. 누구도 촬영장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감독이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태혁 씨, 스태프들까지 잡아 두는 건 너무 과합니다.”“불법 촬영 장비가 발견됐습니다.”태혁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누군가 설치했고, 누군가는 봤을 겁니다. 과한지 아닌지는 경찰이 판단하겠죠.”더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태혁은 서율을 데리고 자신의 개인 대기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란이 한 겹 멀어졌다.서율은 소파 끝에 앉아 손을 내려다봤다.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태혁이 생수병을 열어 건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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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첫 번째 규칙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 문장은 짧았다.첫 번째 규칙은 이미 어겼습니다.서율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일주일 전 병원 복도였다.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있던 자신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누군가 바로 맞은편에서 촬영한 것처럼 각도도 정확했다.“이 영상을 누가 찍은 거예요?”목소리가 떨렸다.매니저가 고개를 저었다.“파일 정보가 지워져 있습니다. 촬영 기기와 위치 정보도 없고요.”태혁은 휴대전화를 받아 영상을 처음부터 다시 재생했다.서율이 병실 앞에 앉아 있었다.간호사가 지나갔고, 보호자 한 명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영상은 특별한 움직임 없이 삼 분 가까이 이어졌다.그러다 마지막 순간, 화면 구석으로 검은 구두 한 켤레가 잠깐 비쳤다.태혁이 영상을 멈췄다.“확대할 수 있습니까?”매니저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늘렸다.화질은 흐릿했지만 구두 옆에 떨어진 출입증 일부가 보였다. 붉은색 줄과 희미한 로고.서율이 눈을 좁혔다.“저거…… 병원 직원 출입증 아니에요.”“확실합니까?”“제가 매일 가는 병원이에요. 직원 출입증은 파란색이에요.”태혁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누군가 외부인 신분으로 병원에 들어왔고, 서율을 기다려 촬영했다.우연일 가능성은 없었다.“첫 번째 규칙이 뭘 뜻하는 걸까요?”서율이 물었다.태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바라봤다.두 사람이 작성한 가이드라인.첫 번째 항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사전 동의가 없는 접촉은 하지 않는다.“우리가 만든 규칙을 말하는 건 아닐 겁니다.”태혁이 말했다.“그 사람은 이 종이의 내용을 알 수 없잖아요.”“카메라로 봤다면요?”“계약서를 쓰던 곳은 대기실입니다. 발견된 카메라는 촬영장 세트에 있었고요.”태혁은 잠시 생각하다 서율에게 물었다.“가짜 계약서에서 기억나는 조항이 있습니까?”서율은 눈을 감았다.아침에 급하게 읽었던 문장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촬영 시간.일당 지급.보안 유지.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상한 문장이 하나 있었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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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두 번째 실수

​"선택권이 있다고 믿는 게 두 번째 실수입니다."​변조된 음성이 끊기자마자 대기실 안은 차가운 정적에 휩싸였다.​경찰관이 즉시 서율의 휴대전화를 넘겨받아 추적 프로그램을 가동했지만, 발신지는 이미 해외 가상 IP로 우회되어 추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서율은 손끝에 남아 있는 서늘한 진동을 느끼며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상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등골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흘러내렸다.​"……지금도 보고 있다는 거네요."​서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태혁은 아무 말 없이 대기실 내부의 천장과 벽면, 조명 사이를 눈으로 훑었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면 단순히 세트장뿐만 아니라 이 대기실 내부, 혹은 건물 복도 전체가 감시 영역이라는 뜻이었다.​"서율 씨."​태혁이 서율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짙은 우디 향이 밀려들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서율의 호흡이 겨우 정돈되었다.​"집으로 가겠다고 한 약속, 기억합니까?"​"네. 집 앞까지만 동행하기로 했잖아요."​"상대는 당신이 혼자 있는 순간을 노리고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찰나조차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태혁은 서율을 압박하지 않았다. 아까 서율이 지적했던 것처럼, 그녀의 선택권을 강제로 빼앗으려 하지 않고 직시해야 할 현실을 담담하게 짚어줄 뿐이었다.​"그래도 혼자 들어가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게 당신이 선택한 일곱 번째 규칙이라면요."​서율은 입술을 짓씹었다. 태혁의 말이 맞았다. 혼자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순간, 자신이 그 감시자의 의도대로 태혁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된다는 사실도 명확했다.​"……집 앞까지만 같이 가요."​서율이 단단하게 말을 덧붙였다.​"단,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건 제가 혼자 해요.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도어록을 잠그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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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

쿵-!태혁이 서율의 집 앞 복도로 올라섰을 때, 서율은 주저앉은 채 굳어 있었다.열린 상자 안에는 서율의 개인 소지품과 함께 도어록 비밀번호가 선명하게 적힌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태혁은 지체 없이 서율의 어깨를 감싸 안아 일으켰다.그의 거친 숨소리와 단단한 체온이 서율의 서늘해진 몸으로 밀려들어 왔다."서율 씨. 괜찮습니까?""……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비밀번호는……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서율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누군가 자신의 삶 전체를 거머쥐고 들여다보고 있다는 불쾌함과 공포가 전율처럼 몸을 훑고 지나갔다.태혁은 서율의 손에서 상자를 빼앗아 바닥으로 밀어버렸다.그러고는 서율의 두 손을 꼭 쥐었다.힘이 들어가 있는 단단한 아귀힘에 서율은 비로소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을 느꼈다."이 집은 이제 안전하지 않습니다. 들어가면 안 됩니다.""하지만…… 아버지 물건이랑 정리해야 할 게…….""지금 당장 필요한 건 내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하겠습니다.당신은 내 집으로 갑니다."태혁의 말투에는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깔려 있었다.아까 작성했던 '혼자 있지 않기를 원하는 경우에만 함께한다'는 일곱 번째 규칙을 들먹일 상황이 아니었다.상대를 거부하기에는 현관문 앞에 놓인 비밀번호 메모지가 너무도 치명적인 위협이었다."……알겠어요."서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혁의 눈빛에 지독한 안도감과 함께 깊은 어둠이 내리앉았다.태혁의 집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최고급 주상복합 펜트하우스였다.철저한 보안 시스템을 몇 차례나 거쳐 들어온 내부 공간은, 거대하고 완벽했지만 동시에 기이할 정도로 정적만이 가득했다."이곳의 보안 코드는 매일 변경됩니다.등록된 인원이 아니면 엘리베이터조차 동작하지 않습니다."태혁은 서율을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직접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서율이 컵을 받아 들며 웅얼거렸다. 태혁은 서율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은 방금 전까지 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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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균열과 틈

띡, 띡, 띡—거실 대형 모니터 위로 검은 배경의 텍스트 상자가 떠올랐다.자동으로 재생된 영상 속에는 지금 서율이 앉아 있는 소파, 그리고 그녀의 턱을 쥔 채 다가서 있는 태혁의 뒷모습이 실시간으로 담겨 있었다.[새로운 환경이 마음에 드십니까, 은서율 씨?]기계로 변조된 음성이 모니터 스피커를 타고 넓은 거실 안에 울려 퍼졌다.서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혁이 말했던 '완벽한 보안'의 펜트하우스 내부조차 이미 감시당하고 있었다."……어떻게 이 공간까지."서율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몸을 떨었다.태혁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두고, 소파에서 일어나 모니터 앞으로 걸어갔다.그의 뒷모습은 오싹할 만큼 정적에 싸여 있었지만, 굳게 쥐어진 주먹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태혁이 리모컨을 들어 화면의 전원을 완전히 꺼버렸다.거실은 순식간에 다시 어둠과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보안팀에 연락하겠습니다.이 집의 내부 IP 및 스마트홈 네트워크 전체를 단선시키라고 지시하죠."태혁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하지만 그 평온함 뒤에는 스토커를 향한 살기에 가까운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태혁 씨."서율이 그를 불렀다.태혁이 돌아보자, 서율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그 사람은 태혁 씨의 완벽함을 깨뜨리는 게 목적인 것 같아요.""……무슨 뜻입니까?""저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차태혁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서 당신을 흔들고 있어요."태혁의 서늘한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서율의 말이 맞았다.스토커는 서율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동시에, 태혁의 완벽한 통제력에 계속해서 균열을 내고 있었다.태혁이 구축해 놓은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조차 보란 듯이 감시망을 뚫고 들어오면서.태혁은 서율의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 뼘 남짓으로 좁아졌다."그렇다면 더더욱 내 방식대로 해야겠습니다.""네?""상대가 내 통제의 균열을 노린다면, 허점 따위는 조금도 남기지 않으면 됩니다."태혁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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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밀실의 규칙

10화. 밀실의 규칙펜트하우스 내부 네트워크가 완전히 차단된 후,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대형 모니터의 불빛이 차갑게 꺼졌다.전자음 하나 들리지 않는 공간 속에는 오직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정적이 짙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서율의 감각은 한층 더 예민하게 곤두섰다.태혁은 서율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아프지 않을 만큼의 정확한 악력.하지만 결코 뿌리칠 수 없는 명확한 주도권의 감촉이었다.태혁은 서율을 이끌고 거실을 지나 복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서재 겸 침실로 향했다.문이 열리자 은은한 백단향과 오래된 가죽 냄새가 섞인 고요한 공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이곳은 스마트홈 기기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수동 공간입니다."태혁이 낮게 읊조리며 서율을 침대 가에 안착시켰다.푹신한 매트리스가 내려앉으며 서율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외부와 연결된 네트워크 라인도, 카메라나 도청 장치도 들어올 수 없는 밀실이죠.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나와 당신만 알 수 있습니다."서율은 침대 끝에 앉아 태혁을 올려다보았다.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는 복도에서 흘러들어오는 옅은 불빛만이 두 사람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태혁은 서율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었다.그의 넓은 어깨와 압도적인 체구가 서율의 시야 전체를 가려왔다."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게 될 겁니다.""태혁 씨는요……?""문 바로 앞 소파에서 자리를 지킵니다."태혁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서율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탑배우이자, 이 웅장한 펜트하우스의 주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문 앞 소파에서 밤을 지새우겠다는 선언이었다."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방도 넓고…….""규칙입니다, 서율 씨."태혁의 손가락이 서율의 입술 중앙을 가볍게 짓눌렀다. 닿아오는 체온이 서늘한 방 안 공기와 대비되어 아찔할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당신은 지금 스토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내 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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