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후 9시 53분.“주인님은 저한테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욕망이 있으세요?”은서율의 질문에 차태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프라이빗 라운지 ‘우리 방’.검은 소파 앞에 선 서율은 자신이 작성한 명령서를 꼭 쥐고 있었다.오늘은 그녀가 주도권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그런데 정작 질문을 던진 사람은 서율인데, 긴장하는 것도 그녀였다.태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있어.”서율의 손가락이 움찔했다.“……정말요?”“네가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했잖아.”“그렇긴 한데.”“듣고 싶어?”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네.”태혁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가끔은 네가 먼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아무 말 없이 다음 명령을 기다렸으면 좋겠어.”서율의 얼굴이 붉어졌다.“그런 걸 원하셨어요?”“그래.”“그런데 왜 말씀 안 하셨어요?”“네가 스스로 원할 때까지 기다린 거야.”서율은 입술을 깨물었다.태혁이 덧붙였다.“억지로 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서율은 잠시 생각했다.그러다가 명령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그럼 지금 해볼까요?”태혁의 눈빛이 달라졌다.“은서율.”“네, 주인님.”“오늘 주도권은 네게 있어.”“알아요.”서율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그러니까 제가 결정하는 거예요.”태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확실해?”“네.”서율은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두 사람의 시선 높이가 달라졌다.태혁은 움직이지 않았다.서율이 고개를 들었다.“이렇게요?”태혁은 그녀를 내려다봤다.“그래.”“그럼 다음에는요?”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내가 명령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주인님.”잠시 정적이 흘렀다.태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서율은 괜히 손끝을 만지작거렸다.“주인님.”“왜.”“지금은 제가 명령하는 날인데요.”“알아.”“그런데 이렇게 있으니까 꼭 평소로 돌아간 것 같아요.”태혁은 짧게 웃었다.“네가 먼저 선택했잖아.”서율은 그를 올려다봤다.“……맞아요
오후 8시 43분.“차태혁 씨.”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태혁이 고개를 들었다.“왜.”“오늘은 그렇게 대답하시면 안 되죠.”서율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봤다.태혁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서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좋아요.”“그런데 서율 씨.”“네?”“아직 시작 시간 전입니다.”서율은 벽시계를 확인했다.오후 8시 43분.두 사람이 정한 역할 교대 시작 시간은 오후 9시였다.“……17분 남았네요.”“그렇죠.”태혁이 느긋하게 웃었다.“그동안은 내가 주인님인데?”서율의 표정이 굳었다.“아, 진짜!”“은서율.”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벌써부터 명령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오늘은 제 차례잖아요.”“알아.”태혁은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건드렸다.“그러니까 17분만 참아.”서율은 입술을 삐죽였다.“9시 되면 두고 보세요.”“기대하지.”그의 여유로운 대답에 서율은 더욱 승부욕이 생겼다.오늘만큼은 반드시 태혁을 당황하게 만들 생각이었다.오후 8시 56분.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프라이빗 라운지.두 사람이 ‘우리 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이었다.서율은 문을 열자마자 실내를 둘러봤다.은은한 조명.검은색 소파.벽면을 가득 채운 수납장.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고른 플레이 소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서율은 자신의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태혁이 물었다.“그건 뭐야?”“오늘의 명령서요.”“또 만들었어?”“네.”“몇 개나?”“7개요.”태혁은 헛웃음을 흘렸다.“10개에서 줄였네.”“너무 많으면 주인님이 힘드실까 봐요.”“날 걱정해 주는 거야?”“그럼요.”서율은 환하게 웃었다.“오늘은 제가 아주 잘 모실 거거든요.”태혁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그 말이 왜 이렇게 불길하지?”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오후 8시 59분.“이제 1분!”태혁은 소파에 앉았다.“기다려.”“네.”서율은 그 앞에 섰다.
오후 10시 23분.“은서율. 앉아.”차태혁의 낮은 목소리에 서율이 소파 끝에 앉았다.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태혁이 그녀의 앞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그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서율이 직접 작성한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은서율의 명령 목록》제1명령. 주인님은 오늘 밤 서율에게 먼저 부탁해야 한다.서율은 종이를 내려다보다 웃었다.“주인님, 아직 안 잊으셨죠?”“안 잊었어.”“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태혁은 팔짱을 꼈다.“네가 어떤 부탁을 듣고 싶은지 생각하고 있었지.”“그건 주인님이 정하셔야죠.”“그래?”“네. 제가 다 알려드리면 재미없잖아요.”태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은서율.”“네, 주인님.”“네가 오늘 뭘 시킨 건지 정확히 알고 있어?”“주인님이 저한테 부탁하는 거요.”“그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건?”서율은 잠시 생각했다.“……그렇죠.”“좋아.”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지금부터 네가 적은 명령을 실행한다.”서율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그런데 태혁이 그녀 앞에 멈춰 서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은서율.”“네.”“오늘 밤,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서율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네!”“아직 뭔지도 안 들었잖아.”“아, 맞다.”태혁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대답은 듣고 해.”“네, 주인님.”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리고 낮게 말했다.“오늘은 나한테 먼저 다가와 줘.”서율의 눈이 커졌다.“……네?”“네가 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네가 먼저 선택해 줬으면 좋겠어.”서율은 입술을 달싹였다.“그게 부탁이에요?”“그래.”“그럼 지금 다가가면 돼요?”“네가 원하면.”서율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그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한 걸음.또 한 걸음.태혁의 앞에 선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이렇게요?”태혁은 고개를 숙였다.“그래.”서율은 그의 입술에 짧게
오후 9시 56분.“주인님, 이거 정말이에요?”은서율은 검은색 카드를 들고 차태혁을 바라봤다.카드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다음 플레이에서는 은서율이 먼저 명령한다.》태혁은 소파에 앉아 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다.“글씨 못 읽어?”“아니, 읽었는데요.”“그럼 왜 물어.”“제가 주인님한테 명령해도 된다는 거잖아요.”“오늘 첫 번째 명령만.”서율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딱 하나요?”“그래.”“너무 치사한데.”태혁이 고개를 들었다.“은서율.”“네, 주인님.”“그 하나를 잘 생각해서 써.”서율은 카드를 내려다봤다.어젯밤부터 고민했던 순간이었다.그런데 막상 태혁이 허락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잠깐만요.”“기다리지.”“웃지 마세요.”태혁은 입술을 다물었다.서율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지금 그거 명령 아니에요.”“알아.”“제가 정식으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세요.”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율은 심호흡했다.그리고 태혁의 앞으로 걸어갔다.“차태혁.”그의 눈썹이 올라갔다.“뭐?”“오늘 첫 번째 명령이에요.”서율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저한테 주인님이 아니라 태혁 씨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세요.”태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게 네 명령이야?”“네.”“이유는?”서율이 웃었다.“주인님이 당황하시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요.”태혁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별걸 다 생각하는군.”“명령 들어주셔야죠.”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좋아.”서율의 눈이 반짝였다.태혁은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율.”“네, 주인님.”“지금부터 나를 태혁 씨라고 불러.”서율은 입술을 달싹였다.“…….”“왜 대답이 없지?”“그게…….”“네가 원한 명령이잖아.”서율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태…….”태혁은 기다렸다.“태혁 씨.”그 순간 태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그래.”서율은 얼굴이 붉어졌다.“아, 이상해요!”“뭐가?”“
오후 10시 18분.은서율은 침실 문을 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차태혁이 어젯밤 보여줬던 검은 봉투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주인님!”태혁은 고개만 들었다.“왜.”“드디어 열어보는 거예요?”“문부터 닫아.”서율은 얼른 문을 닫았다.“닫았어요.”“이리 와.”그녀가 다가가자 태혁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어제 내가 뭐라고 했지?”“다음번에 직접 읽어주신다고요.”“기억은 잘하네.”서율은 기대에 찬 눈으로 봉투를 바라봤다.“그럼 읽어주세요.”“은서율.”“네, 주인님.”“허락 없이 재촉하지 마.”서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태혁은 의자를 가리켰다.“앉아.”그녀가 앉았다.“허리 펴.”서율은 자세를 바로잡았다.“손은 무릎 위.”그녀가 손을 올렸다.태혁은 그제야 봉투를 열었다.안에는 검은색 카드 3장이 들어 있었다.“오늘은 선택지가 3개야.”서율의 눈이 반짝였다.“뭔데요?”태혁은 첫 번째 카드를 들어 보였다.《명령》두 번째 카드.《침묵》마지막 카드.《고백》서율은 고개를 갸웃했다.“고백이요?”“그래.”“사랑 고백이요?”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율이 웃음을 참았다.“주인님, 설마 저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입 다물어.”짧고 단호한 목소리였다.서율은 곧장 입술을 다물었다.태혁이 카드를 내려놓았다.“오늘 네가 선택할 건 없어.”“……네?”“이 3가지 중 무엇을 먼저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서율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전부요?”“그래. 시작 전에 합의한 범위 안에서.”그는 서율의 눈을 마주 봤다.“오늘도 주도권을 맡길 거야?”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주인님.”“그럼 시작하지.”오후 10시 31분.태혁이 첫 번째 카드를 집어 들었다.《침묵》“일어나.”서율은 의자에서 일어섰다.“내 앞으로 와.”그녀가 다가갔다.“손 내밀어.”서율은 오른손을 내밀었다.태혁은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검은 가죽 팔찌를 내려다봤다.며칠 전 함께 맞춘 커플 팔찌였다.“
오후 10시 21분.“은서율. 문 닫고 이리와 .”차태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서율은 침실 문을 닫고 돌아섰다.“네, 주인님.”태혁은 검은 셔츠 차림으로 창가에 서 있었다.침대 옆 테이블에는 검은색 안대와 케인, 작은 검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그런데 이상했다.어제까지 있던 규칙서가 보이지 않았다.“주인님, 오늘은 점수 안 매기시는 거죠?”“그래.”“그럼 제가 잘했는지는 어떻게 알아요?”태혁이 돌아섰다.“오늘은 네가 직접 판단해.”서율은 눈을 깜빡였다.“제가요?”“그래.”“그럼 저 무조건 잘했다고 할 건데요?”“은서율.”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지금부터 장난은 끝이야.”서율의 미소가 멈췄다.태혁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어제 네가 뭐라고 했지?”“솔직하게 말하겠다고요.”“그럼 오늘도 지켜.”“네, 주인님.”“이리 와.”서율은 곧장 다가갔다.태혁이 손가락으로 바닥의 작은 표시를 가리켰다.“거기 서.”서율은 표시 위에 섰다.“손은 뒤로.”그녀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았다.“고개 들어.”서율이 턱을 들었다.태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오늘 네가 원하는 건?”“주인님이 주도하시는 플레이요.”“어떤 방식으로?”“단호하게 명령하시고, 제가 일부러 도발한다고 쉽게 넘어가지 않는 거요.”“좋아.”태혁은 테이블 위의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오늘은 특별히 준비한 게 있어.”서율의 눈이 반짝였다.“뭔데요?”“아직 질문 허락 안 했어.”그녀는 입술을 다물었다.“……네, 주인님.”태혁은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작은 금속 종이 들어 있었다.서율은 눈을 크게 떴다.“종이요?”“그래.”“이걸로 뭘 해요?”태혁이 눈썹을 올렸다.서율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죄송해요.”“오늘 네 과제는 간단해.”태혁은 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내가 지시를 내리면 정확하게 수행해. 하지만 질문이 있거나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네.”“그리고 이 종은 네가 원할 때 울릴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