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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or: 레몬과 향수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

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

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내비쳤다. 노부인 처소를 나서는데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왕 세자께서는 오늘도 선주 아가씨와 나들이를 나가셨대. 오찬은 돌아와서 노부인과 함께 드신다던데, 참 자상한 분이야. 선주 아가씨는 복도 많아.”

유선주는 어릴 때부터 복덩이라는 별명을 달고 태어나, 가는 곳마다 그녀와 얽힌 사람들에게 행운이 따른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유씨 노부인이 가장 총애하는 손녀이기도 했다.

‘왜 그리 서둘러 나를 돌려보내려 하나 했더니, 내가 있어서 방해가 됐던 거였구나.’

유지영은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전생의 흐름대로라면 생모인 서 태후는 곧 황제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조정의 업무를 관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경성에 올라간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녀를 궁으로 불러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예정이었다.

그날 이후 태후는 곳곳에서 그녀를 도우며 보살펴 주었다.

“이 나라 국모의 자리는 우리 지영이 것이어야지.”

서 태후가 어느 날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전생의 그녀는 모녀간의 정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머니라는 큰 나무를 단단히 붙잡고, 자신을 짓밟았던 자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종령각으로 돌아오니 한꺼번에 시녀 넷이 사라져서인지 처소는 몹시 조용했다. 그러나 홍주 하나만 곁에 두자니 일손이 부족했다.

“혹시 사이가 좋은 자매나 친한 벗은 없느냐? 눈치가 빠르고 충성심만 확실하면 된다.”

유지영이 홍주에게 묻자, 홍주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인은 그저 하등 시녀에 불과한데, 누가 소인과 친하게 지내려 했겠어요?”

유지영은 부드럽게 홍주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앞으로는 친한 사람도 많이 생길 거야.”

그녀는 종령각의 이등, 삼등 시녀들을 불러 모았다.

유씨 노부인이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진심으로 아낀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양모인 담혜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저런 어리석고 쓸모없는 계집애만 낳고 갔다며 죽은 맏며느리의 흉을 보기도 했다.

그녀의 양부는 유국공이자 유씨 집안의 장남으로, 육 년 전 변방 수비를 맡으러 떠난 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유지영은 명목상 유국공부의 적장녀였기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집안에서 받는 물질적 대우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종령원에는 일등 시녀 네 명과 이등 시녀 여섯 명, 삼등 시녀 여섯 명, 그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어멈 두 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눈앞에 열 명이 넘는 시녀가 있었지만, 그들의 인신계약서는 유지영의 손에 없었다. 그러니 겉으로는 공손해 보여도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가… 아니, 군주님.”

눈치 빠른 한 이등 시녀가 앞으로 나서더니 아부 섞인 웃음을 지었다.

“군주님 곁에는 홍주 한 명뿐이니 일등 시녀가 세 명이나 부족하지 않습니까? 군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인이 스스로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른 시녀들도 저마다 앞으로 나섰다.

삼등 시녀인 홍주도 신분 상승을 했으니 자기라고 안 될 것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유지영은 뒷줄에 선 삼등 시녀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체격이 다부지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지영은 손을 들어 네 사람을 가리켰다.

“동금, 춘화, 그리고 임씨 어멈, 운선.”

이름이 불린 네 사람이 고개를 들더니 놀란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내 방에서 일할 사람들이다. 숙모님께 가서 너희의 인신계약서를 받아 오너라.”

유지영이 지시를 내리자마자 동금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군주님, 아무 상의도 없이 가서 시녀들의 인신계약서를 달라고 하면 둘째 부인께서 기분 상하실 겁니다.”

한 이등 시녀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유지영은 나가는 동금의 등을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숙모님께서 내줄 수 없다고 하시면, 내가 직접 처소로 찾아뵙겠다고 전해라.”

동금은 허둥지둥 달려갔다.

잠시 후 동금이 네 사람의 인신계약서를 들고 돌아와 유지영의 손에 건넸다.

유지영은 문서를 자세히 확인한 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늘부터 너희 셋은 홍주와 마찬가지로 일등 시녀로 삼겠다. 임씨 어멈은 처소 관리를 맡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군주님.”

네 사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승급하지 못한 자들이 불복해 입을 열려는 찰나, 유지영의 시선을 받은 동금이 대뜸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매서운 눈빛에 이등 시녀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군주님께서 그리 하라고 하시면, 그저 따르면 되지. 감히 군주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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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피안을 거슬러   제380화

    ‘유정웅이 왜 갑자기?’“가서 우리 왕부에 부족한 것이 없으니 이런 것보다 학업에 정진하라고 전하거라.” 유지영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유정웅 역시 속에 검은 속내를 품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허나 정웅 도련님께서는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갚기 위함이라며 막무가내이십니다. 소인이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습니다."홍주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또한 노부인께서 다리가 부러지신 후 매일같이 국공 어르신을 찾으신다 하셨습니다. 정웅 도련님께서는 노부인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가 요양하게 하고 싶으나, 유정랑이 절대 보내주지 않는다 하셨습니다."그 말에 유지영은 눈썹을 꿈틀했다."들라 하거라."잠시 후.허름한 무명옷 차림의 유정웅이 대청으로 들어와 유지영을 향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지영 누님. 부디 용서하십시오."한 번 생사를 오간 후로 유정웅은 무척 신중해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언행이 몹시 침착했다.허나 그럼에도 유지영은 그를 믿지 않았다.유지영은 그가 가져온 과일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마음을 많이 썼구나. 이제 셋째 삼촌네 가문을 지탱할 적자는 너 하나뿐이니, 부디 학업에 정진하여 장차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유지영이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자, 유정웅은 먼저 운을 띄웠다."누님, 할머니께서 다리가 부러지신 후 매일같이 큰아버지께서 입궁하시는 길목에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게 하는 것을 아십니까. 큰아버지께서 아무리 화가 나셨다 한들 결국 낳아주신 부모이시니, 언젠가는 그 응어리가 풀리실 것입니다."그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제가 어머니를 설득하여 자식 된 도리로 할머니를 모시겠다 청하겠습니다. 할머니를 저희 쪽으로 모셔 가면 두 번 다시 큰아버지를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확실히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다.하지만 유지영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녀는 흥미를 잃은 듯 회랑 아래 핀 꽃을

  • 피안을 거슬러   제379화

    당씨 가문의 사당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멀리서도 짙은 연기가 보일 정도였다. 앞에서 걸음을 재촉하던 당씨 노부인은 사당 문 앞에 이르러 참상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쓰러질 뻔했다."어서, 어서 불을 꺼라!"시종들은 쉴 새 없이 물을 길어 나르며 진화에 나섰다.다급해진 당응성은 뒤에 있던 부관을 걷어차며 호통쳤다."수십 년간 멀쩡하던 사당이, 어찌 불이 났단 말이냐!"부관 역시 영문을 몰라 바닥에 엎드렸다."대인, 소인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한편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사당으로 온 당윤은 무심한 눈으로 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선 당학이 입을 열었다."아우야, 조부께서 살아계실 적에 널 무척이나 아끼셨던 것으로 안다. 내가 적장자가 되는 것을 막겠다고 조부와의 정마저 저버린 것이냐?"당윤은 고개를 들어 당학을 노려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한 사람은 경멸에 찬 시선으로, 다른 한 사람은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이미 곽 낭자를 얻었거늘, 어째서 내 앞길을 막으려 드는 것이냐?"당학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당윤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형님, 제가 곽 낭자와 혼인하게 되었다고 어찌 질투심을 품고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르실 수 있습니까!"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당학에게 쏠렸다.당학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수백 년간 멀쩡하던 사당이 하필 제가 곽 낭자와 혼약을 맺은 오늘 불에 탔고, 선산에도 변고가 생겼습니다. 헌데 형님은 어찌하여 방금 조상님들께서 이 혼사를 반대하시어 노하신 거라 말씀하십니까?"당윤은 화가 난 얼굴로 당학을 노려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들 불길에 신경 쓰느라 두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인 이가 없었다."형님이 아무리 불만이 있으셔도 이미 정해진 혼사입니다!"당윤은 이를 악물었다."조부께서 형님께 박하게 대하지도 않으셨거늘, 어찌 돌아가신 조부마저 편히 쉬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멀지 않은 곳에 있던 당응성은 의미심장한 눈

  • 피안을 거슬러   제378화

    "부마의 말이 맞습니다. 정세가 불확실하니, 만일 배현준이 정말 태자가 된다면...."조령 장공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폐하의 슬하에 황자가 있고, 내 듣자 하니 이번에 회임한허 귀비도 상태가 아주 안정적이라 하더군요.""세상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니, 매사에 퇴로를 열어두어야 합니다."류명홍이 부드럽게 권했다.그 말에 조령 장공주도 고집을 꺾었다."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당씨 가문에 다녀오지요. 서둘러 이 혼사를 매듭지어야겠습니다."그 시각, 당씨 가문.당 부인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회랑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당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어찌 나와 있는 게냐?""어머니께서 오실 때가 된 듯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당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당 부인을 살피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당 부인의 뒤에는 당학이 따라오고 있었다. 당학은 시선을 내리깔아 눈에 담긴 경멸을 숨기고는 당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바깥에 바람이 찬데, 아우는 고뿔을 조심하거라."영락없이 다정한 형의 모습이었다.당윤도 마주 웃었다."바람이나 쐴 겸 나온 것입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혼사를 하명하는 교지가 당씨 가문에 당도했다. 당윤과 곽운연의 혼인을 5월 초여드레로 정한다는 내용이었다.당씨 가문 식구들이 모두 나와 교지를 받들었다.내관은 교지를 다 읽고 나서 당윤에게 당부했다."태후 마마께서는 의용후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혼례 날에 마마께서 친히 축배를 들러 오시겠다 하셨지요.""감사합니다."당윤은 뒤에 선 수하에게 눈짓했다. 수하가 다가와 내관에게 은자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무척이나 가벼웠지만, 거액의 은표임을 직감한 내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당윤은 같이 온 호위들에게도 은자를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내관 일행은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다.무리 속에 있던 첩실 류씨는 고개를 들어 당학을 바라보았다."태후 마마께서 어찌 네게는 혼사

  • 피안을 거슬러   제377화

    임 태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경왕비 역시 조원금이 나타난 이후로 자신을 대하는 경왕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서재에 머무는 날이 잦아졌다.이따금 보양탕을 끓여 서재로 찾아가 은연중에 배현준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경왕이 전처럼 그를 질색하거나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그게 정녕 조원금 때문인 걸까."네가 먼저 나서서 첩으로 들이겠다고 한다면 현숙하다는 명성이라도 얻을 수 있다."임 태비는 여유롭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그 아이가 저택에 머무는 이상,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어찌 알겠느냐?"경왕비는 입술을 깨물었다."어머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그래. 마침 너도 다쳤으니 당분간 푹 쉬며 경왕과 부딪히지 말거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임 태비는 화제를 돌려 당씨 가문 이야기를 꺼냈다."당학은 이제 당당한 적장자다. 그의 어미와 조령 장공주는 친척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 경왕부의 사위가 된다면 출세하는 건 시간문제야."임 태비의 설득에 경왕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명심하겠습니다. 당장 당씨 가문으로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겠습니다.""아니다. 조령 장공주에게 전하여 서둘러 혼약을 맺거라. 형의 혼례가 동생보다 늦어서야 되겠느냐."임 태비가 일렀다.장공주부.저택으로 돌아온 조령 장공주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유영 현주가 곁에서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니, 태후 마마께서는 어찌하여 유지영을 그토록 아끼시는 걸까요? 정말 돌아가신 국공 부인 때문입니까?""그런 모양이다."조령 장공주는 이마를 짚었다."그 아이가 경성에 온 뒤로 숱한 사람들이 곤욕을 치렀지.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배준형이다. 입지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느냐."장공주 역시 그가 장차 대통을 이어받게 될 거라고 눈여겨 보고 있었건만, 알고 보니 구제 불능이 따로없었다.다행히 깊게 엮이기 전이어서 발을 뺄 수 있었지, 자칫하면 같이 발목을 잡힐 뻔했다.눈앞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

  • 피안을 거슬러   제376화

    "그게 무슨 소리인가?"경왕비는 불쾌한 기색으로 받아쳤다."이들은 피가 섞인 가족이거늘….""지영이와 유리 아가씨가 무슨 피가 섞였단 말입니까?"조원금은 턱을 치켜들며 조롱 섞인 어조로 쏘아붙였다."애먼 짓만 하다가 체면을 다 구겨놓고는, 이제 와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군요. 정 억울하거든 아까 궁에서는 왜 따져 묻지 못했습니까?"말문이 막힌 경왕비는 미간을 찌푸렸다."남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본인 딸부터 똑바로 가르치십시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조원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매섭게 호통쳤다.배유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내 딸을 어찌 가르치든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경왕비는 손을 뻗어 배유리를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조원금을 쏘아보았다.조원금은 유지영의 손을 다정하게 다독였다."이모가 네게 어울릴 만한 장신구를 몇 개 골라두었단다. 이따가 한번 보거라."말을 마친 그녀는 시녀들을 이끌고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어머니."배유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경왕비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배유리를 밀어내고는 아무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채찍 서른 대를 맞은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곱씹어 볼수록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배유리의 어리석음이었다."어머니."붉어진 눈시울로 뒤따라온 배유리는 경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소녀가 못난 탓에 어머니까지 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허나, 저는 정말 당학 공자와 혼인하기 싫습니다."경왕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정 싫다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천으로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깔끔하겠지."싸늘한 말에 배유리는 겁에 질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왕비 마마, 고정하십시오. 유리 아가씨도 한순간 판단이 흐려진 것뿐입니다."눈치를 보던 시녀가 조심스레 거들었다."한순간 판단이 흐려져?"경왕비는 돌연 언성을 높였다."유지영은 저 아이보다 고작 몇 달 먼저 태어났을

  • 피안을 거슬러   제375화

    경왕비는 애지중지 키운 적녀가 서장자와의 혼인을 반강제로 맺게 된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청란이는 제가 아우의 손에서 빼내어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이따가 경왕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아까는 사태가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니, 부디 마마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당학은 머리를 숙이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사죄했다.그제야 경왕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조령 장공주까지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하니, 경왕비는 억울함을 꾹 삼키고 억지로 이 혼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연못가.몇몇 부인들은 아까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는 은밀히 코웃음을 쳤다."저 서장자란 놈, 참으로 대단한 위인이로군.""당 대인이 하도 감싸고 도니, 태후 마마 앞에서도 저리 간 큰 수작을 부리는 게지."아까는 굳이 나서서 들춰내는 이가 없었을 뿐이었다.이제 저 서장자의 맹랑한 야심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적모를 압박하여 사람들 앞에서 기어코 적자로 인정받았으니, 그 속내가 여간 검은 것이 아니었다.한편, 유지영과 곽운연은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매화를 감상했다. 단단히 화가 난 곽운연이 유지영을 향해 속마음을 토로했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재작년에 제 곁에 손버릇이 나쁜 시녀가 한 명 있어 물건을 제법 잃어버렸었지. 그 향낭도 그중 하나였다. 헌데 그 향낭이 당학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찌 그리 추악한 속셈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곽운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진저리를 쳤다.옥패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옥패는 절에 갔을 때 잃어버린 것다. 은밀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는데, 그걸 당윤 공자가 주웠을 줄이야.""그게 아닙니다."유지영은 고개를 저었다."그 옥패는 의용후가 저잣거리에서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곽 낭자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저 지나가는 길에 사둔 것이지요."곽운연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똑같이 그녀의 물건이건만, 한

  • 피안을 거슬러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털썩!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읍….”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

  • 피안을 거슬러   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방으로

  • 피안을 거슬러   제8화

    “지영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송씨는 못 말리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날은 오해가 좀 있었단다. 선주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어.”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어찌 작은어머니와 선주에게 화를 내겠어요. 운부 비단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부 무늬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던데, 구하시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감동이에요, 작은어머니.”그 말을 들은 송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역시 그 멍청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유지영은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의 맏언니로서 당연히 동

  • 피안을 거슬러   제7화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짝!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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