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피안을 거슬러
피안을 거슬러
Author: 레몬과 향수

제1화

Author: 레몬과 향수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

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

털썩!

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읍….”

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

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한 일을 당한 것 같군. 참 어여쁜 처자였는데 안됐어.”

유지영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흘 전, 그녀는 사찰로 불공을 드리러 가다가 중도에 납치를 당해 눈이 가려진 채 인적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 뒤로 매일이 고통이었다.

죽도록 맞았고, 고통 속에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깨어나면 또다시 고통이 이어졌다.

그렇게 그녀에게 지옥을 선물한 자들은 사흘째 되던 날, 마차에 그녀를 싣고 번화가로 가 짐짝처럼 내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유지영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독을 당해 목소리를 잃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뻔뻔하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 정신이 제대로 된 처자라면 결백을 잃은 후에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을 테야. 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 세상인데.”

마침내 한 시진 후, 소식은 정왕부에 전해졌다.

정왕부에서는 마차를 한 대 보내왔다. 두 시종은 그대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마차 위로 끌어올렸다.

그중 한 명은 그녀의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차라리 밖에서 죽지. 정왕부의 명성에까지 먹칠하면서 살아 돌아올 건 뭐야.”

유지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들것에 실어 왕부로 끌고 갔다.

태비는 지팡이를 짚은 채 음침한 얼굴로 내전으로 들어섰다.

마침 병풍 뒤에서 시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달려나온 시녀는 노태비의 싸늘한 눈빛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태… 태비마마, 세자비께서 하혈이 심하신데, 어의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막돼먹은 것! 외간사내에게 순결이 더럽혀진 불결한 것이 무슨 자격으로 어의의 진찰을 받는단 말이냐! 여기서 집안 망신을 더 시키라고!”

태비의 분노한 호통에 내전 안에는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태비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는 배준형을 불러 세웠다.

“준형아, 세자비 유씨는 이미 순결이 더럽혀졌는데 너는 어찌 처리할 생각이냐?”

배준형이 놀란 얼굴로 태비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유씨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거의 벌거벗겨진 채 성문 앞에 내던져졌다. 이 상황에서도 저 아이를 두둔할 생각이냐?”

말을 마친 태비는 지팡이로 힘껏 바닥을 쳤다.

“폐하께서 중병으로 앓아누우시고 슬하에 황위를 이을 황자가 없으신 상황이다. 최근 들어 태후께서 네 아버지를 빈번히 궁으로 부르시어 너를 태자로 책봉하실 뜻을 내비치셨다. 유씨의 상황이 안타깝긴 해도 제 팔자인 것을… 어찌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태비의 눈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겁에 질린 시종들이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할머니,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배후에 숨은 범인을 찾는 일이 아닙니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마차는 경왕 세자의 마차였다고 합니다. 제가 경왕부를 찾아가 지영이의 억울한 한을 풀어줄 것입니다!”

짝!

듣고 있던 태비가 배준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고 하얀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 일을 어전까지 끌고 갈 생각이냐? 어차피 증거를 잡는다고 해도 태후께서는 곤장 몇 대 치고 끝내실 것이다. 이미 명성이 더럽혀진 아이다. 네가 일을 크게 만들수록 우리 정왕부의 체면만 깎이는 것을 왜 모르느냐! 어찌 이리 어리석으냐!”

태비는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유지영은 병풍 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하반신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깨문 채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병풍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끝에는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했다.

태비의 각박한 말들이 예리한 칼이 되어 그녀의 지친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결백을 잃은 여인은 죽어 마땅하다!”

태비는 병풍을 노려보며 거침없이 악담을 이어갔다.

“준형아, 유선주 그 아이도 너와 어린 시절부터 정을 쌓아온 아이 아니더냐. 그 아이의 아버지와 오라비 모두 조정의 중임을 맡은 대신들이고 어여쁘기까지 하니, 그 아이와 혼인한다면 네 앞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유지영 저 아이는 그냥 잊어버리거라.”

유지영은 숨이 턱 막힐 듯했다.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지만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배준형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와 혼인하고 3년, 한때는 서로를 공경하고 연모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작게 들린 “알겠다”는 한마디가 청천벽력처럼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버렸다.

태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을 내렸다.

“여봐라! 가서 유씨 집안 사람들을 불러 세자비가 위독하니 속히 왕부로 오라고 전하여라!”

분부를 받든 시종은 허겁지겁 대문을 향해 달려가며 세자비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유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다름 아닌 유선주였다. 그녀는 병풍을 돌아 유지영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멀찍이 서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더니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언니,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짓을 하였나요. 할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시겠어요.”

목소리는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가득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깝게 되었네요. 의원 말을 들어 보니 사내아이였다고 하던데, 이 아이를 3년이나 바라왔던 언니는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유지영은 증오에 찬 눈으로 유선주를 노려보았지만 비명 한마디 지를 수 없었다. 납치를 당한 당일, 그녀는 혼란을 틈타 납치범들의 입에서 유선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납치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히 유선주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언니, 안심하고 가세요. 미래의 태자비, 아니 미래의 황후 자리는 내가 언니를 대신해 잘 지킬 테니까요.”

유선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 참. 그래도 한때 가족이었는데 가기 전에 왜 이리 되었는지 연유는 알려줘야겠죠? 언니 곁의 시녀들은 모두 내가 매수했어요. 언니가 산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날 언니를 납치한 사람도 경왕 세자가 아닌 내 아버지 사람들이고요.”

“경왕 세자를 끌어들인 것은 준형 오라버니를 그 자리에 올리기 위함이었죠. 그 멍청한 놈은 언니가 청운산에서 길을 잃고 갇혔다는 말을 듣더니 정말 사흘 밤낮을 청운산을 떠나지 않고 수색했더라고요? 흔적을 잔뜩 남겨서 우리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죠. 언니가 떠나 있는 동안 세자 오라버니의 곁을 지킨 것도 나예요. 나와 세자 오라버니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었다고요.”

“하!”

유지영은 안간힘을 써서 손을 뻗어 유선주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비녀 하나가 쥐어졌고, 유선주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제 어깨를 힘껏 찔렀다.

“언니!”

그러더니 유선주가 당황한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주저 없이 주먹을 유지영의 어깨에 휘둘렀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녀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선주야, 괜찮느냐?”

배준형은 안쓰러운 얼굴로 유선주를 부축했다.

유선주는 다친 왼쪽 어깨를 손으로 잡더니 배준형의 품에 몸을 기댔다.

“제가 오라버니의 세자비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언니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배준형은 잔뜩 실망한 눈으로 유지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실망이다, 지영아! 내가 선주와 혼인하려 한 것도 모두 정왕부의 명예를 위함이었거늘. 어찌 죄 없는 선주를 원망할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넌 선주를 괴롭히고 매사에 선주에게 시비를 걸었지. 오늘 네가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하늘이 알고 천벌을 내린 것이야!”

천벌이라는 말에 유지영은 그저 웃고만 싶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눈을 찌르고만 싶었다.

‘내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너희는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고 나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구나.’

“더 이상 입씨름할 것도 없다.”

태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병풍 뒤에서 전해졌다.

“처결하거라!”

손에 비수를 든 어멈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자 오라버니, 저… 너무 무섭습니다.”

유선주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배준형은 그런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며 작은 소리로 위안했다.

“살아서 모두의 비난을 받으며 목숨만 붙어 있기보다는 차라리 열녀라는 명성을 남기고 세상을 뜨는 것이 지영이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우리도 지영이를 위해서 이러는 게야.”

어멈들은 양쪽에서 유지영의 어깨를 꽉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유지영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었다.

예리한 칼끝이 피부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관통했다. 유지영은 오래전 혜공대사의 말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전반생에 일생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대사의 예언이 맞았던 것 같았다.

다음 생이 정말 존재한다면, 반드시 내게 해를 가한 모두에게 피의 복수를 하리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피안을 거슬러   제380화

    ‘유정웅이 왜 갑자기?’“가서 우리 왕부에 부족한 것이 없으니 이런 것보다 학업에 정진하라고 전하거라.” 유지영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유정웅 역시 속에 검은 속내를 품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허나 정웅 도련님께서는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갚기 위함이라며 막무가내이십니다. 소인이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습니다."홍주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또한 노부인께서 다리가 부러지신 후 매일같이 국공 어르신을 찾으신다 하셨습니다. 정웅 도련님께서는 노부인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가 요양하게 하고 싶으나, 유정랑이 절대 보내주지 않는다 하셨습니다."그 말에 유지영은 눈썹을 꿈틀했다."들라 하거라."잠시 후.허름한 무명옷 차림의 유정웅이 대청으로 들어와 유지영을 향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지영 누님. 부디 용서하십시오."한 번 생사를 오간 후로 유정웅은 무척 신중해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언행이 몹시 침착했다.허나 그럼에도 유지영은 그를 믿지 않았다.유지영은 그가 가져온 과일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마음을 많이 썼구나. 이제 셋째 삼촌네 가문을 지탱할 적자는 너 하나뿐이니, 부디 학업에 정진하여 장차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유지영이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자, 유정웅은 먼저 운을 띄웠다."누님, 할머니께서 다리가 부러지신 후 매일같이 큰아버지께서 입궁하시는 길목에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게 하는 것을 아십니까. 큰아버지께서 아무리 화가 나셨다 한들 결국 낳아주신 부모이시니, 언젠가는 그 응어리가 풀리실 것입니다."그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제가 어머니를 설득하여 자식 된 도리로 할머니를 모시겠다 청하겠습니다. 할머니를 저희 쪽으로 모셔 가면 두 번 다시 큰아버지를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확실히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다.하지만 유지영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녀는 흥미를 잃은 듯 회랑 아래 핀 꽃을

  • 피안을 거슬러   제379화

    당씨 가문의 사당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멀리서도 짙은 연기가 보일 정도였다. 앞에서 걸음을 재촉하던 당씨 노부인은 사당 문 앞에 이르러 참상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쓰러질 뻔했다."어서, 어서 불을 꺼라!"시종들은 쉴 새 없이 물을 길어 나르며 진화에 나섰다.다급해진 당응성은 뒤에 있던 부관을 걷어차며 호통쳤다."수십 년간 멀쩡하던 사당이, 어찌 불이 났단 말이냐!"부관 역시 영문을 몰라 바닥에 엎드렸다."대인, 소인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한편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사당으로 온 당윤은 무심한 눈으로 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선 당학이 입을 열었다."아우야, 조부께서 살아계실 적에 널 무척이나 아끼셨던 것으로 안다. 내가 적장자가 되는 것을 막겠다고 조부와의 정마저 저버린 것이냐?"당윤은 고개를 들어 당학을 노려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한 사람은 경멸에 찬 시선으로, 다른 한 사람은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이미 곽 낭자를 얻었거늘, 어째서 내 앞길을 막으려 드는 것이냐?"당학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당윤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형님, 제가 곽 낭자와 혼인하게 되었다고 어찌 질투심을 품고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르실 수 있습니까!"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당학에게 쏠렸다.당학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수백 년간 멀쩡하던 사당이 하필 제가 곽 낭자와 혼약을 맺은 오늘 불에 탔고, 선산에도 변고가 생겼습니다. 헌데 형님은 어찌하여 방금 조상님들께서 이 혼사를 반대하시어 노하신 거라 말씀하십니까?"당윤은 화가 난 얼굴로 당학을 노려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들 불길에 신경 쓰느라 두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인 이가 없었다."형님이 아무리 불만이 있으셔도 이미 정해진 혼사입니다!"당윤은 이를 악물었다."조부께서 형님께 박하게 대하지도 않으셨거늘, 어찌 돌아가신 조부마저 편히 쉬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멀지 않은 곳에 있던 당응성은 의미심장한 눈

  • 피안을 거슬러   제378화

    "부마의 말이 맞습니다. 정세가 불확실하니, 만일 배현준이 정말 태자가 된다면...."조령 장공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폐하의 슬하에 황자가 있고, 내 듣자 하니 이번에 회임한허 귀비도 상태가 아주 안정적이라 하더군요.""세상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니, 매사에 퇴로를 열어두어야 합니다."류명홍이 부드럽게 권했다.그 말에 조령 장공주도 고집을 꺾었다."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당씨 가문에 다녀오지요. 서둘러 이 혼사를 매듭지어야겠습니다."그 시각, 당씨 가문.당 부인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회랑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당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어찌 나와 있는 게냐?""어머니께서 오실 때가 된 듯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당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당 부인을 살피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당 부인의 뒤에는 당학이 따라오고 있었다. 당학은 시선을 내리깔아 눈에 담긴 경멸을 숨기고는 당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바깥에 바람이 찬데, 아우는 고뿔을 조심하거라."영락없이 다정한 형의 모습이었다.당윤도 마주 웃었다."바람이나 쐴 겸 나온 것입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혼사를 하명하는 교지가 당씨 가문에 당도했다. 당윤과 곽운연의 혼인을 5월 초여드레로 정한다는 내용이었다.당씨 가문 식구들이 모두 나와 교지를 받들었다.내관은 교지를 다 읽고 나서 당윤에게 당부했다."태후 마마께서는 의용후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혼례 날에 마마께서 친히 축배를 들러 오시겠다 하셨지요.""감사합니다."당윤은 뒤에 선 수하에게 눈짓했다. 수하가 다가와 내관에게 은자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무척이나 가벼웠지만, 거액의 은표임을 직감한 내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당윤은 같이 온 호위들에게도 은자를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내관 일행은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다.무리 속에 있던 첩실 류씨는 고개를 들어 당학을 바라보았다."태후 마마께서 어찌 네게는 혼사

  • 피안을 거슬러   제377화

    임 태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경왕비 역시 조원금이 나타난 이후로 자신을 대하는 경왕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서재에 머무는 날이 잦아졌다.이따금 보양탕을 끓여 서재로 찾아가 은연중에 배현준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경왕이 전처럼 그를 질색하거나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그게 정녕 조원금 때문인 걸까."네가 먼저 나서서 첩으로 들이겠다고 한다면 현숙하다는 명성이라도 얻을 수 있다."임 태비는 여유롭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그 아이가 저택에 머무는 이상,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어찌 알겠느냐?"경왕비는 입술을 깨물었다."어머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그래. 마침 너도 다쳤으니 당분간 푹 쉬며 경왕과 부딪히지 말거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임 태비는 화제를 돌려 당씨 가문 이야기를 꺼냈다."당학은 이제 당당한 적장자다. 그의 어미와 조령 장공주는 친척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 경왕부의 사위가 된다면 출세하는 건 시간문제야."임 태비의 설득에 경왕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명심하겠습니다. 당장 당씨 가문으로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하겠습니다.""아니다. 조령 장공주에게 전하여 서둘러 혼약을 맺거라. 형의 혼례가 동생보다 늦어서야 되겠느냐."임 태비가 일렀다.장공주부.저택으로 돌아온 조령 장공주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유영 현주가 곁에서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니, 태후 마마께서는 어찌하여 유지영을 그토록 아끼시는 걸까요? 정말 돌아가신 국공 부인 때문입니까?""그런 모양이다."조령 장공주는 이마를 짚었다."그 아이가 경성에 온 뒤로 숱한 사람들이 곤욕을 치렀지.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배준형이다. 입지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느냐."장공주 역시 그가 장차 대통을 이어받게 될 거라고 눈여겨 보고 있었건만, 알고 보니 구제 불능이 따로없었다.다행히 깊게 엮이기 전이어서 발을 뺄 수 있었지, 자칫하면 같이 발목을 잡힐 뻔했다.눈앞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

  • 피안을 거슬러   제376화

    "그게 무슨 소리인가?"경왕비는 불쾌한 기색으로 받아쳤다."이들은 피가 섞인 가족이거늘….""지영이와 유리 아가씨가 무슨 피가 섞였단 말입니까?"조원금은 턱을 치켜들며 조롱 섞인 어조로 쏘아붙였다."애먼 짓만 하다가 체면을 다 구겨놓고는, 이제 와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군요. 정 억울하거든 아까 궁에서는 왜 따져 묻지 못했습니까?"말문이 막힌 경왕비는 미간을 찌푸렸다."남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본인 딸부터 똑바로 가르치십시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조원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매섭게 호통쳤다.배유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내 딸을 어찌 가르치든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경왕비는 손을 뻗어 배유리를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조원금을 쏘아보았다.조원금은 유지영의 손을 다정하게 다독였다."이모가 네게 어울릴 만한 장신구를 몇 개 골라두었단다. 이따가 한번 보거라."말을 마친 그녀는 시녀들을 이끌고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어머니."배유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경왕비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배유리를 밀어내고는 아무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채찍 서른 대를 맞은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곱씹어 볼수록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배유리의 어리석음이었다."어머니."붉어진 눈시울로 뒤따라온 배유리는 경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소녀가 못난 탓에 어머니까지 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허나, 저는 정말 당학 공자와 혼인하기 싫습니다."경왕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정 싫다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천으로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깔끔하겠지."싸늘한 말에 배유리는 겁에 질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왕비 마마, 고정하십시오. 유리 아가씨도 한순간 판단이 흐려진 것뿐입니다."눈치를 보던 시녀가 조심스레 거들었다."한순간 판단이 흐려져?"경왕비는 돌연 언성을 높였다."유지영은 저 아이보다 고작 몇 달 먼저 태어났을

  • 피안을 거슬러   제375화

    경왕비는 애지중지 키운 적녀가 서장자와의 혼인을 반강제로 맺게 된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청란이는 제가 아우의 손에서 빼내어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이따가 경왕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아까는 사태가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니, 부디 마마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당학은 머리를 숙이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사죄했다.그제야 경왕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조령 장공주까지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하니, 경왕비는 억울함을 꾹 삼키고 억지로 이 혼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연못가.몇몇 부인들은 아까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는 은밀히 코웃음을 쳤다."저 서장자란 놈, 참으로 대단한 위인이로군.""당 대인이 하도 감싸고 도니, 태후 마마 앞에서도 저리 간 큰 수작을 부리는 게지."아까는 굳이 나서서 들춰내는 이가 없었을 뿐이었다.이제 저 서장자의 맹랑한 야심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적모를 압박하여 사람들 앞에서 기어코 적자로 인정받았으니, 그 속내가 여간 검은 것이 아니었다.한편, 유지영과 곽운연은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매화를 감상했다. 단단히 화가 난 곽운연이 유지영을 향해 속마음을 토로했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재작년에 제 곁에 손버릇이 나쁜 시녀가 한 명 있어 물건을 제법 잃어버렸었지. 그 향낭도 그중 하나였다. 헌데 그 향낭이 당학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찌 그리 추악한 속셈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곽운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진저리를 쳤다.옥패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옥패는 절에 갔을 때 잃어버린 것다. 은밀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는데, 그걸 당윤 공자가 주웠을 줄이야.""그게 아닙니다."유지영은 고개를 저었다."그 옥패는 의용후가 저잣거리에서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곽 낭자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저 지나가는 길에 사둔 것이지요."곽운연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똑같이 그녀의 물건이건만, 한

  • 피안을 거슬러   제3화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으로 달려왔다. 송씨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지영이는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에요. 분명 마음속에 세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세자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지 뭐예요. 내일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우리 유씨 집안은 온 인주의 웃음거리가 될 텐데 말이에요.”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영아, 세자께 사죄드리거라.”양모가 돌아가신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슬하에 두고 보살

  • 피안을 거슬러   제2화

    종령각 이층 누각.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전생의 배준형도 성년

  • 피안을 거슬러   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방으로

  • 피안을 거슬러   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