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피안을 거슬러
피안을 거슬러
Author: 레몬과 향수

제1화

Author: 레몬과 향수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

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

털썩!

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읍….”

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

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한 일을 당한 것 같군. 참 어여쁜 처자였는데 안됐어.”

유지영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흘 전, 그녀는 사찰로 불공을 드리러 가다가 중도에 납치를 당해 눈이 가려진 채 인적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 뒤로 매일이 고통이었다.

죽도록 맞았고, 고통 속에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깨어나면 또다시 고통이 이어졌다.

그렇게 그녀에게 지옥을 선물한 자들은 사흘째 되던 날, 마차에 그녀를 싣고 번화가로 가 짐짝처럼 내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유지영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독을 당해 목소리를 잃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뻔뻔하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 정신이 제대로 된 처자라면 결백을 잃은 후에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을 테야. 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 세상인데.”

마침내 한 시진 후, 소식은 정왕부에 전해졌다.

정왕부에서는 마차를 한 대 보내왔다. 두 시종은 그대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마차 위로 끌어올렸다.

그중 한 명은 그녀의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차라리 밖에서 죽지. 정왕부의 명성에까지 먹칠하면서 살아 돌아올 건 뭐야.”

유지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들것에 실어 왕부로 끌고 갔다.

태비는 지팡이를 짚은 채 음침한 얼굴로 내전으로 들어섰다.

마침 병풍 뒤에서 시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달려나온 시녀는 노태비의 싸늘한 눈빛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태… 태비마마, 세자비께서 하혈이 심하신데, 어의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막돼먹은 것! 외간사내에게 순결이 더럽혀진 불결한 것이 무슨 자격으로 어의의 진찰을 받는단 말이냐! 여기서 집안 망신을 더 시키라고!”

태비의 분노한 호통에 내전 안에는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태비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는 배준형을 불러 세웠다.

“준형아, 세자비 유씨는 이미 순결이 더럽혀졌는데 너는 어찌 처리할 생각이냐?”

배준형이 놀란 얼굴로 태비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유씨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거의 벌거벗겨진 채 성문 앞에 내던져졌다. 이 상황에서도 저 아이를 두둔할 생각이냐?”

말을 마친 태비는 지팡이로 힘껏 바닥을 쳤다.

“폐하께서 중병으로 앓아누우시고 슬하에 황위를 이을 황자가 없으신 상황이다. 최근 들어 태후께서 네 아버지를 빈번히 궁으로 부르시어 너를 태자로 책봉하실 뜻을 내비치셨다. 유씨의 상황이 안타깝긴 해도 제 팔자인 것을… 어찌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태비의 눈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겁에 질린 시종들이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할머니,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배후에 숨은 범인을 찾는 일이 아닙니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마차는 경왕 세자의 마차였다고 합니다. 제가 경왕부를 찾아가 지영이의 억울한 한을 풀어줄 것입니다!”

짝!

듣고 있던 태비가 배준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고 하얀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 일을 어전까지 끌고 갈 생각이냐? 어차피 증거를 잡는다고 해도 태후께서는 곤장 몇 대 치고 끝내실 것이다. 이미 명성이 더럽혀진 아이다. 네가 일을 크게 만들수록 우리 정왕부의 체면만 깎이는 것을 왜 모르느냐! 어찌 이리 어리석으냐!”

태비는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유지영은 병풍 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하반신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깨문 채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병풍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끝에는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했다.

태비의 각박한 말들이 예리한 칼이 되어 그녀의 지친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결백을 잃은 여인은 죽어 마땅하다!”

태비는 병풍을 노려보며 거침없이 악담을 이어갔다.

“준형아, 유선주 그 아이도 너와 어린 시절부터 정을 쌓아온 아이 아니더냐. 그 아이의 아버지와 오라비 모두 조정의 중임을 맡은 대신들이고 어여쁘기까지 하니, 그 아이와 혼인한다면 네 앞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유지영 저 아이는 그냥 잊어버리거라.”

유지영은 숨이 턱 막힐 듯했다.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지만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배준형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와 혼인하고 3년, 한때는 서로를 공경하고 연모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작게 들린 “알겠다”는 한마디가 청천벽력처럼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버렸다.

태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을 내렸다.

“여봐라! 가서 유씨 집안 사람들을 불러 세자비가 위독하니 속히 왕부로 오라고 전하여라!”

분부를 받든 시종은 허겁지겁 대문을 향해 달려가며 세자비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유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다름 아닌 유선주였다. 그녀는 병풍을 돌아 유지영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멀찍이 서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더니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언니,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짓을 하였나요. 할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시겠어요.”

목소리는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가득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깝게 되었네요. 의원 말을 들어 보니 사내아이였다고 하던데, 이 아이를 3년이나 바라왔던 언니는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유지영은 증오에 찬 눈으로 유선주를 노려보았지만 비명 한마디 지를 수 없었다. 납치를 당한 당일, 그녀는 혼란을 틈타 납치범들의 입에서 유선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납치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히 유선주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언니, 안심하고 가세요. 미래의 태자비, 아니 미래의 황후 자리는 내가 언니를 대신해 잘 지킬 테니까요.”

유선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 참. 그래도 한때 가족이었는데 가기 전에 왜 이리 되었는지 연유는 알려줘야겠죠? 언니 곁의 시녀들은 모두 내가 매수했어요. 언니가 산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날 언니를 납치한 사람도 경왕 세자가 아닌 내 아버지 사람들이고요.”

“경왕 세자를 끌어들인 것은 준형 오라버니를 그 자리에 올리기 위함이었죠. 그 멍청한 놈은 언니가 청운산에서 길을 잃고 갇혔다는 말을 듣더니 정말 사흘 밤낮을 청운산을 떠나지 않고 수색했더라고요? 흔적을 잔뜩 남겨서 우리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죠. 언니가 떠나 있는 동안 세자 오라버니의 곁을 지킨 것도 나예요. 나와 세자 오라버니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었다고요.”

“하!”

유지영은 안간힘을 써서 손을 뻗어 유선주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비녀 하나가 쥐어졌고, 유선주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제 어깨를 힘껏 찔렀다.

“언니!”

그러더니 유선주가 당황한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주저 없이 주먹을 유지영의 어깨에 휘둘렀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녀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선주야, 괜찮느냐?”

배준형은 안쓰러운 얼굴로 유선주를 부축했다.

유선주는 다친 왼쪽 어깨를 손으로 잡더니 배준형의 품에 몸을 기댔다.

“제가 오라버니의 세자비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언니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배준형은 잔뜩 실망한 눈으로 유지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실망이다, 지영아! 내가 선주와 혼인하려 한 것도 모두 정왕부의 명예를 위함이었거늘. 어찌 죄 없는 선주를 원망할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넌 선주를 괴롭히고 매사에 선주에게 시비를 걸었지. 오늘 네가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하늘이 알고 천벌을 내린 것이야!”

천벌이라는 말에 유지영은 그저 웃고만 싶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눈을 찌르고만 싶었다.

‘내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너희는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고 나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구나.’

“더 이상 입씨름할 것도 없다.”

태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병풍 뒤에서 전해졌다.

“처결하거라!”

손에 비수를 든 어멈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자 오라버니, 저… 너무 무섭습니다.”

유선주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배준형은 그런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며 작은 소리로 위안했다.

“살아서 모두의 비난을 받으며 목숨만 붙어 있기보다는 차라리 열녀라는 명성을 남기고 세상을 뜨는 것이 지영이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우리도 지영이를 위해서 이러는 게야.”

어멈들은 양쪽에서 유지영의 어깨를 꽉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유지영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었다.

예리한 칼끝이 피부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관통했다. 유지영은 오래전 혜공대사의 말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전반생에 일생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대사의 예언이 맞았던 것 같았다.

다음 생이 정말 존재한다면, 반드시 내게 해를 가한 모두에게 피의 복수를 하리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Nicx Valdelleon
is there an English translation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피안을 거슬러   제764화

    건양제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허비는 용기를 내어 간청했다."신첩이 듣기로 팔공주는 의술에 능하다 들었습니다. 신첩은 그저……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허비는 새빨간 얼굴을 하고서도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요한 익곤궁 내전에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달그락.건양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허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신첩은 입궁한 이래 줄곧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핏줄을 원했습니다. 그저 아이에게 시와 서화를 가르치며 곁에 두고 싶을 뿐, 딴 마음은 없습니다. 부디 신첩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건양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허비를 부축해 일으켰다."그건 내가 조금 더 생각해 보마."그때 상 내관이 안으로 들었다."폐하, 조회에 드실 시간입니다."건양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밤을 새웠으니 푹 쉬거라."말을 마친 건양제는 밖으로 나갔다.허비는 무릎을 굽혀 황제를 배웅했다. 건양제가 멀어진 뒤에야 그녀는 궁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마마, 너무 직설적인 요구인데 폐하께서 승낙하시겠습니까?"허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 역시 건양제가 허락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북영주를 데려올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일개 후궁이 북신의 팔공주와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았다.건양제는 익곤궁을 나선 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는 상 내관에게 툭 던졌다."어선방에 일러서 어마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장미떡과 부용떡을 올리고 보양식도 달여 올리라 하거라."상 내관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연회가 끝난 뒤, 자녕궁에 들렀언 건양제가 딱딱하게 굳은 다과를 맛보고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이 떠올랐다.*오시.조회를 마친 건양제는 다시 자녕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반 시진쯤 머물다 쫓겨나고 말았다

  • 피안을 거슬러   제763화

    조령 장공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씨 노부인에게 쏠렸다.내로라하는 가문에서 후대의 혼담을 꺼낼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법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몸이 허약한 것은 기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허씨 가문은 오히려 몸이 약한 육가의 적장녀와 굳이 혼약을 맺으려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허씨 노부인."조령 장공주가 재촉하듯 불렀다.허씨 노부인은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저희 가문은 육 소저가 재색을 겸비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몸이 병약한 줄은 미처 몰라 이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노부인은 건양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폐하, 비록 그렇다 해도 저는 손자를 위해 육 소저를 손주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습니다!"바닥에 머리를 거듭 찧은 탓에 노부인의 이마는 금세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허비도 치맛자락을 쥐고 바닥에 꿇어앉아 눈물을 쏟았다."폐하, 그저 사소한 오해일 뿐인데 어찌 장공주와 현왕 부부까지 나서서 신첩을 이리 몰아세우는 것입니까."허비는 고개를 든 채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며칠째 은총을 입고 있는 터라, 건양제가 현왕을 어디까지 감싸고도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속셈도 있었다."신첩이 먼저 혼사를 청한 것이 이런 식으로 곡해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허비는 서러운 얼굴로 건양제의 옷소매를 붙잡았다.건양제는 허비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미간을 찌푸린 채 허씨 노부인을 내려다보았다."방금 노부인이 말한 그 소문이라는 게 무엇인지 말해보라."군왕의 싸늘한 위압감에 허씨 노부인은 숨이 막혔다. 노부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건양제의 곁에 앉은 서 태후를 힐끗 쳐다보았다.서 태후는 싸늘한 눈빛을 하고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순간 노부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제가 우연히 듣기로 육씨 가문과 현왕비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막역한 사이라고 합니다."하지만 자세한 관계에 대해서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럴듯한 변명으로 적당히 얼버무린 것이다.이를 본 건양제는 속을

  • 피안을 거슬러   제762화

    말을 마친 허비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훌쩍이며 애처롭게 건양제를 바라보았다.건양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말이 없었다.허비는 시선을 돌려 배현준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예전에 현왕비는 신첩을 이리 홀대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오늘 현왕이 대승을 거두고 돌아니……."허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씨 노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폐하, 저는 허비 마마 앞에서 육 소저가 훌륭하다고 몇 번 칭찬한 적이 있습니다. 규수가 훌륭하면 여러 가문에서 혼처를 묻는 것이 당연한 이치거늘, 현왕비가 뜻을 곡해할 줄은 몰랐습니다. 현왕비의 태도를 보니, 얼마 전 경성에 떠돌던 소문이 떠오르는군요."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대전에 정적이 감돌았다.사람들은 숨죽인 채 눈치만 살폈다. 경사스러운 연회가 순식간에 기싸움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허씨 노부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흘끗 바라보았다.그때 정씨가 연회석에서 나와 바닥에 엎드렸다."허비 마마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육씨 가문의 장녀는 몸이 약해 오랜 세월 탕약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혼약을 맺지 못한 것인데, 어찌 감히 허 공자의 앞길을 막겠습니까."정씨는 대전에 꿇어앉아 바들바들 떨었다.허비는 육씨 일가를 비웃듯 힐끗 바라보고는 도발적인 시선으로 서 태후를 쳐다보았다.서 태후는 담담한 눈빛을 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폐하."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배현준이 입을 열었다."신은 허비 마마께서 어찌하여 저렇게까지 서럽게 눈물을 흘리시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설마 신이 승전보를 울린 것이 잘못이란 말씀이십니까?"허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배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배현준은 한발 앞서 말을 이었다."경성에는 훌륭한 규수들이 차고 넘치거늘, 허씨 가문은 왜 굳이 육씨 가문의 적녀만을 고집하며 억지를 부리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군요. 설마 허씨 가문은 후궁에 계신 허비 마마의 총애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억압하려는 겁니까."배현준의 말은

  • 피안을 거슬러   제761화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허비와 서 태후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건양제는 이따금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배현준을 칭찬할 뿐, 허비의 제안은 모른 척하며 어느 쪽도 편들지 않았다.하지만 허비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평소의 단아하고 우아한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건양제의 팔에 찰싹 매달리며 귓가에 속삭였다."폐하, 신첩에게 약조하신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건양제의 귓가를 간질였다.건양제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으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오늘은 경축 연회이니, 사혼은 짐이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폐하, 신첩은 싫습니다."허비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건양제에게 매달렸다.허비가 입궁한 지 수년이 지났으나, 이런 모습은 다들 처음이었다. 평소 허비는 말수가 적고 언행이 단아하여 무관 가문의 적녀다운 기품이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그저 총애를 믿고 기고만장한 후궁의 교태였다. 보는 눈이 많은데도 건양제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태후 마마께서 시비를 가려주십시오. 얼마 전 신첩은 폐하와 바둑을 두어 겨우 한 판을 이겼습니다. 그때 폐하께서 신첩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약조하셨습니다."허비는 건양제의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내밀고 서 태후를 쳐다보았다.마치 시어머니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철없는 며느리 같은 모양새였다.서 태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허비를 힐끗 바라보았다."제왕의 약조는 천금과도 같지. 허나 나는 허비가 분수를 알아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믿는다."풋!허비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지당하신 훈계입니다, 태후 마마. 신첩과 폐하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가 몇 해인데, 어찌 제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들겠습니까."허비는 서 태후의 경고를 가볍게 넘기고 하고 싶은 말만 이어갔다."최근 허씨 가문에 불운한 일이 잦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점을 쳐보니 가문에 좋은 혼사를 들여야 액운을 깰 수 있다 하더군요. 하여, 신첩이 친히 조카에게

  • 피안을 거슬러   제760화

    최씨 노부인은 계속해서 말했다."우리 가문은 현왕부 쪽에 줄을 대려 그토록 애를 썼건만, 저쪽에서 틈을 주지 않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공을 들여 얻은 것이 무엇이냐."이전까지 최씨 노부인은 철저히 안정을 추구했다.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차라리 이 기회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편이 나았다. 성공한다면 최씨 가문은 제왕을 옹립한 일등 공신이 될 것이다.실패한다 해도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었다.설령 훗날 현왕부가 권력을 쥔다 해도, 이번 전란에서 최씨 가문이 세운 막대한 공로를 모조리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공신을 매몰차게 내친다면, 천하의 어느 상단이 훗날 현왕부를 위해 발 벗고 나서겠는가."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꾸나."최씨 노부인이 당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 태후와 건양제, 허비, 덕비가 차례로 대전에 들어섰다.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폐하와 태후 마마를 뵈옵니다."건양제는 용상에 다가가 앉았다. 우측에는 서 태후가, 좌측에는 허비가 자리를 잡았다."모두 일어나거라."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자리에 앉자 가무가 서서히 잦아들었다.건양제는 술잔을 치켜들고 배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현왕은 이 년간 출정하여 북신을 함락하고 나라의 영토를 넓혔으며, 변방을 안정시켰으니 짐은 실로 기쁘기 그지없구나!"배현준은 허리를 굽히며 겸손하게 답했다."신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공로는 군의 장병들이 피땀 흘려 얻어낸 것이지, 결코 신 혼자만의 공이 아닙니다."건양제는 그 말을 듣고 호탕하게 웃었다."공은 공이지. 응당 모두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그는 즉석에서 조서를 내렸다. 삼군의 장병들을 포상하고, 명부에 기록된 장병들의 자제는 경성 내 어떤 서당이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하며 그 비용은 전액 조정에서 부담하겠다고 선포했다.자식이 없는 자들 역시 명부만 지참하면 각 성의 의원에서 무상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약값은 관

  • 피안을 거슬러   제759화

    날이 어둑해지자, 황궁에서는 성대한 경축 연회가 열렸다.대전에서는 화려한 가무가 이어졌고, 감미로운 악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배현준과 유지영이 전각에 들어서자,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배현준은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유지영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장공주 전하께 가보겠습니다."두 사람은 각자 흩어졌다.유지영은 여인들이 모인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조령 장공주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곁에서 담소를 나누던 안면 있는 부인들도 유지영을 깍듯하게 맞이했다."현왕비 마마는 참으로 복 받으셨습니다. 방금 두 분이 나란히 들어오시는 모습을 뵈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더군요.""제 생각도 같습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부인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조령 장공주는 피식 웃고는 유지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방금 어화원을 지나다 폐하와 허비를 보았다. 허비는 허씨 가문 차남에게 육씨 가문 가주의 적녀인 육안희와 맺어달라 청하고 있더군."유지영은 겉으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으나, 눈가의 웃음기는 싸늘하게 식었다."폐하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셨어."조령 장공주가 이 일을 귀띔해 준 것은 유지영이 마음의 준비를 하길 바라서였다.그녀는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의아하다는 듯 덧붙였다."폐하께서 요즘 무슨 영문인지 부쩍 허비를 총애하시는구나."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유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세상에 까닭 없는 일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그 말에 조령 장공주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지영은 조용히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육씨 가문 사람들도 연회에 참석했다.허씨 가문, 최씨 가문을 비롯해 낯익은 얼굴들이 연회장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눈길을 돌려 최 부인을 힐끗 살폈다. 최 부인은 두껍게 분칠을 하고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몹시 지쳐 보였다.그럴 만도 했다. 최씨 가문은 청하에서 권세를 누리

  • 피안을 거슬러   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 피안을 거슬러   제8화

    “지영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송씨는 못 말리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날은 오해가 좀 있었단다. 선주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어.”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어찌 작은어머니와 선주에게 화를 내겠어요. 운부 비단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부 무늬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던데, 구하시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감동이에요, 작은어머니.”그 말을 들은 송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역시 그 멍청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유지영은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의 맏언니로서 당연히 동

  • 피안을 거슬러   제7화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짝!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이내

  • 피안을 거슬러   제6화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