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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하나 약속해요

Author: 노에빌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2 16:55:26

태준은 USB를 손에 쥔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해린 역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서로의 어깨가 닿을 거리.

“정말 열 거예요?”

해린이 물었다.

“당신이 옆에 있는데 안 열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옆에 있어서 더 위험할 수도 있죠.”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인정.”

“그런데도요?”

“그래도 옆에 있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해린은 순간 말을 잃었다. 태준이 USB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화면에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

HK_0917_FINAL

해린의 손끝이 굳었다. 태준이 파일을 열었다. 영상이 재생됐다.

3년 전 그날 밤. 바. 두 사람이 처음 마주 앉았던 순간. 그리고 영상 속 태준이 해린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다. 해린이 화면을 바라보다 낮게 말했다.

“소리가 없어요.”

“일부러 지운 것 같습니다.”

태준이 영상을 멈췄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뭐가요?”

“카메라 위치.”

“……”

“호텔 CCTV가 아닙니다.”

태준이 화면을 확대했다.

“이건 객실 맞은편에서 찍은 겁니다.”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가 직접 찍었다는 거네요.”

“그렇죠.”

잠시 침묵. 그때 해린이 화면을 다시 바라보다 말했다.

“잠깐.”

영상 속 태준이 해린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해린 역시 그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보던 해린이 무심코 숨을 내쉬었다.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기억납니까?”

“뭐가요?”

“저때.”

“……기억나죠.”

“전부?”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요?”

태준은 대답 대신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하나도 안 잊었습니다.”

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날 당신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한 걸음.

“어떤 목소리였는지.”

또 한 걸음.

“내가 가까워졌을 때 피하지 않았던 것도.”

해린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게 왜 지금 중요하죠?”

“중요합니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날 밤까지 누군가가 계획한 거였다면…”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적어도 내가 당신에게 끌린 건 내 의지였으니까.”

해린의 눈이 흔들렸다.

“그건 어떻게 확신해요?”

태준이 웃었다.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순간 해린의 숨이 멎었다. 태준의 손이 그녀 옆 책상 위에 놓였다. 그는 그녀를 가두려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닿지 않았다. 그 애매한 거리가 오히려 더 긴장감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가 낮게 말했다.

“당신 가까이에 있으면 그날 밤 생각납니다.”

해린이 태준을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가까이 오지 마요.”

“싫습니다.”

“강태준.”

“네.”

“정말 싫다고요.”

태준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해린이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태준이 웃었다.

“대신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오지 마세요.”

“무슨 뜻이에요?”

“당신도 나한테 끌리고 있으니까.”

 

해린이 피식 웃었다.

“자신감이 지나치네요.”

“그럼 증명해봐요.”

“뭘요?”

“아무렇지도 않은지.”

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내 눈 피하지 말고.”

해린은 그대로 그를 바라봤다.

5초.

10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해린이 먼저 웃었다.

“됐어요?”

“아니요.”

“뭐가 더 필요해요?”

태준이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이번에는 해린이 물러나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태준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아직 멀었는데.”

“뭐가요?”

“내가 당신을 흔드는 데.”

해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착각하지 마요.”

“그럼 가까이 와도 됩니까?”

해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은 그녀의 침묵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대답 안 하면 안 움직입니다.”

해린은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태준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해린이 낮게 말했다.

“그럼 움직이지 마요.”

둘 사이에 숨소리만 남았다. 그때— 딸깍. 노트북에서 새로운 파일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두 사람이 동시에 화면을 바라봤다. 영상 속에는 그날 밤의 객실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영상에는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예상보다 빨리 가까워졌군.”

해린의 얼굴이 굳었다. 태준이 즉시 화면을 응시했다. 영상 속 카메라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잠시 후.

“둘 중 한 명만 믿게 만들면 되니까.”

영상이 끝났다. 해린이 천천히 태준을 바라봤다.

“한 명만…”

태준이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믿게 만든다고 했죠.”

그리고 둘 사이의 공기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태준이 해린의 손에서 천천히 자신의 셔츠 깃을 빼냈다. 그런데 손을 놓기 직전. 그가 그녀의 손끝을 잠깐 붙잡았다.

“차해린.”

“왜요?”

태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누가 우리 중 한 명을 속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손을 놓았다.

“적어도 당신한테 속을 생각은 없습니다.”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그럼 나를 의심하지 마요.”

태준이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어렵겠네요.” 

“왜?”

태준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낮게 말했다.

“당신을 의심하는 것보다, 당신을 믿고 싶어지는 게 더 위험하니까.”

태준의 말이 끝났는데도 해린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봤다. 한참 동안.

“그럼 믿지 마요.”

해린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당신답게 하세요.”

“어떻게?”

“의심하고, 파고들고, 내가 숨기는 게 있으면 끝까지 찾아내요.”

태준이 웃었다.

“그런데?”

해린이 다시 그를 바라봤다.

“찾아낸 뒤에도 내가 옆에 있으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는 믿어도 되잖아요.”

태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말.”

“왜요?”

“반칙인 거 압니까?”

“뭐가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더 의심하게 되잖아요.”

“왜요?”

태준이 천천히 다가왔다.

“믿고 싶어지니까.”

해린이 웃었다.

“그럼 참아요.”

“싫습니다.”

그가 바로 대답했다. 해린의 눈썹이 올라갔다.

“뭘 그렇게 싫어해요?”

“당신 말 안 듣는 거.”

“원래 잘 안 듣잖아요.”

“당신 말은 더 안 듣고 싶어요.”

태준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 머물렀다.

“대신 다른 건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뭔데요?”

“당신이 지금 나한테서 멀어지라고 하면…”

그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건 안 들을 겁니다.”

해린은 웃음을 참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말 뻔뻔하네요.”

“당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태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작은 먼지를 떼어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해린은 움직이지 못했다. 태준 역시 손을 내리지 않았다. 손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 하는 거예요?”

“먼지.”

“그걸 굳이…” 

“굳이 하고 싶었습니다.”

해린이 그를 바라봤다.

“강태준 씨.”

“네.”

“지금 사건 조사 중인 거 잊었어요?”

“전혀.”

“그런데 왜 이래요?”

태준이 낮게 웃었다.

“사건은 사건이고.”

그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당신이니까.”

해린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때 노트북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화면을 바라봤다. 새로운 파일이 생성되어 있었다.

파일명은 단 하나. CHA_HAERIN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

“내 이름…”

태준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열지 마요.”

“왜?”

“당신에 관한 파일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더 열어봐야죠.”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각오해요.”

“뭘요?”

“이 안에 당신이 몰랐던 당신의 과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해린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요.”

파일이 재생됐다. 처음 나온 것은 오래된 문서였다. 그리고 화면 한쪽에 찍힌 날짜. 3년 전 8월 29일. 해린이 숨을 멈췄다.

“이건…”

태준이 문서를 확대했다. 그곳에는 사건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담당 변호사. 차해린.

“내가 맡았던 사건이에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 사건은…”

해린이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맡기 전에 이미 종료된 사건인데.”

태준이 문서를 넘겼다.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말을 잃었다. 사건 의뢰인의 이름. 윤상혁. 3년 전 사망한 서진그룹 전 회장이었다. 태준이 천천히 해린을 바라봤다.

“당신은 윤상혁을 직접 만난 적 있습니까?”

“아니요.”

“확실해요?”

“네.”

해린이 문서를 다시 바라봤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에 짧은 메모가 하나 있었다.

‘차해린 강태준 변호사와 반드시 접촉하게 만들 것.’

정적. 해린이 천천히 화면에서 눈을 떼었다. 태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둘 다 농담할 수 없었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이제 알겠네요.”

“뭘요?”

“우리가 왜 만났는지.”

해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우리가 왜 만났는지는 아직 몰라요.”

그리고 화면을 다시 바라봤다.

“대신 누군가가…”

해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만날 걸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건 확실해요.”

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해린의 손을 잡았다. 해린이 놀라 그를 바라봤다. 태준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제 혼자 조사하지 마요.” 

“명령이에요?”

“부탁입니다.”

“강태준 씨가 부탁도 해요?”

태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당신한테만.”

해린은 잠시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손을 빼지 않았다.

 

“그럼 하나 약속해요.” 

“뭐든.”

“나한테 숨기는 거 없기.”

태준이 잠시 생각했다.

“하나만 빼고.” 

“뭔데요?”

그가 그녀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게 됐는지는…”

해린의 눈이 커졌다. 태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아직 나도 당신한테 말할 생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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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해린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여기서 말씀하세요.”남자의 미소가 희미해졌다.“경계가 심하시네요. 이도하 씨와 가까운 사이라서 그런 겁니까?”“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여기서 못 할 이유도 없겠죠.”“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오래 이야기할 생각은 없거든요.”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단정한 셔츠에 검은 코트,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하지만 해린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마주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웠고, 도하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부터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최민석입니다. 이도하 씨 소속사에서 전략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해린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소속사 전략기획팀. 배우의 외부 일정과 광고 계약, 촬영 관련 자료를 관리하는 부서라면 내부 일정에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김도윤 씨를 아십니까?”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압니다. 같은 회사에서 일했으니까요.”“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셨나요?”“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습니다.”“어떻게요?”“회사 내부에서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도하 씨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이야기까지요.”해린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그런데 변호사님.”최민석이 목소리를 낮췄다.“김도윤이 혼자 움직였다고 생각하십니까?”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을 확인한 남자가 작게 웃었다.“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팀장님은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죠?”“진실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회사에 제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그랬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겠죠.”남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하지만 이도하 씨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 곁에

  •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42화. 의심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월요일 아침.해린은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쌓인 서류부터 정리했다. 주말 동안 잠시 미뤄 두었던 사건 기록을 다시 펼치자,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의문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김도윤. 그가 납치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해린은 여전히 그의 진술을 믿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도하의 일정과 이동 경로, 촬영이 끝난 뒤의 동선까지. 우연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더구나 김도윤은 회사 내부에 공범이 있느냐는 질문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혼자 저지른 일이라면 왜 그렇게까지 숨기려고 하는 걸까. 해린은 펜 끝으로 서류의 한 부분을 짚었다.도하의 회사에서 제공받은 촬영 일정표였다. 외부에 공개된 일정과 내부 직원들만 확인할 수 있는 일정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었다.납치범이 알고 있던 정보는 대부분 후자에 속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회사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거나, 내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해린은 휴대전화를 들어 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도하 씨, 오늘 회사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변호사님, 아침부터 저를 찾으시다니. 혹시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해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중요한 일 때문에 여쭤보는 겁니다.][아쉽네요. 저는 중요한 일보다 변호사님이 보고 싶으신 줄 알았는데.][장난 그만하시고요.][오전에는 회사에 있습니다. 오후에는 외부 미팅 하나 있고요. 무슨 일이십니까?]해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회사 내부 자료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말씀드릴게요.]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화면을 내려다보던 해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몇 초 뒤, 전화가 걸려 왔다.“변호사님.”평소보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회사 자료를 확인하시겠다고요?”“네. 김도윤 씨가 알고 있던 정보가 어디에서 유출됐는지 확인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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