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다음 날, 오후 1시 55분.
미호는 거실 한가운데서 의미 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 위로 질질 끌리는 실내용 뮬의 둔탁한 마찰음만이 이따금 정적을 깼다.
[만약 허튼소리 새어 나가면, 그땐 그 새끼고 너고 끝인 줄 알아.]
어젯밤 연호가 남긴 서늘한 경고가 귓전을 맴돌았다.
외부인.
그 단어가 주는 이질감이 새삼 거대하게 다가왔다. 온전히 그녀 혼자 유폐되어 있던 이 적막한 공간에 누군가를, 그것도 포트폴리오를 든 낯선 타인을 들인다는 사실이 닳아버린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미호는 무의식적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시 58분. 초침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무거운 정적을 쪼개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초조하게 굳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아니면 그저 말없이 캔버스 배경만 칠하고 사라질, 그림자 같은 인간이기를.
그녀가 물감이 얼룩진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주방으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딩동―.
정확히 오후 2시 정각.
적막으로 가라앉아 있던 집 안에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파열음처럼 울려 퍼졌다. 미호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곧이어 인터폰 화면 위로, 한쪽 어깨에 커다란 화구통을 멘 남자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미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버튼 위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떠밀리듯 현관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달칵. 무거운 현관문이 열리고, 바깥의 더운 공기와 함께 누군가의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안녕하세요.”
단정하게 내리깔렸던 시선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흐트러짐 없는 까만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짙고 깊은 눈동자가, 텅 빈 미호의 눈과 곧장 얽혀들었다.
“오늘 면접 보기로 한 백하윤이라고 합니다.”
앳된 태가 다 가시지 않은 반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의 질감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묵직했다.
미호는 저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 중저음이 고막을 낯설게 간질였다. 생각보다 훨씬 큰 키와 넓은 어깨 때문인지, 커다란 현관 중문이 순식간에 비좁아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들어오세요. 이쪽입니다.”
미호는 시선을 피하듯 빠르게 등을 돌려 주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실내용 뮬이 끌리는 가벼운 소리 뒤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붙는 하윤의 발소리가 묵직하게 포개졌다.
“작업실이 주방 안쪽에 있어요? 특이하네요.”
“주방은 외부인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까요.”
미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다이닝룸 가장 안쪽, 매트한 블랙 톤으로 마감된 거대한 빌트인 수납장 앞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와인셀러나 식기류가 숨겨져 있을 법한 평범하고 고급스러운 가구였다.
미호가 익숙하게 수납장 한쪽 패널을 꾹 밀어 넣었다.
딸깍-.
자석이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나무 패널이 안으로 스르륵 밀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그릇이나 식료품이 아니었다.
매끄러운 수납장의 껍데기 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벽면과 완벽하게 일체화된 차갑고 거대한 방음 철문이었다. 주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이질적인 광경에 하윤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가늘어졌다.
미호는 등 뒤로 닿아오는 낯선 사내의 시선에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끼며, 차가운 철문의 손잡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끼기긱, 철컥.
철문이 열리자마자 펜트하우스의 무균실 같던 공기가 찢어지고, 환기되지 않아 고여 있던 독한 테레빈유와 린시드 오일 냄새가 훅 끼쳐왔다.
달칵.
미호가 벽면의 스위치를 누르자, 어두웠던 화실에 백색 레일 조명이 차례로 켜지며 육중한 환기 시스템이 낮게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화실 내부는 거대한 감옥 같았다. 창문 하나 없는 벽면 곳곳에 세워진 거대한 캔버스들은, 하나같이 거무죽죽한 광목천으로 꽁꽁 가려져 있었다.
하윤의 시선이 그 가려진 캔버스들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이것부터 작성해요.”
미호는 작업대 한쪽에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과 볼펜을 그에게 내밀었다.
[비밀유지계약서]
“알다시피 여긴 차연호 작가의 자택이고, 당신 주변에 가려진 것들은 내년에 공개될 수억 원대 신작들입니다. 이 화실 구조나 미공개 작업물에 대해 단 한 줄이라도 외부에 샜다간 평생 갚아도 모자랄 위약금 물게 될 테니 꼼꼼히 읽고 하세요.”
거장의 자택이자 밀실. 그에 걸맞은 합당하고도 살벌한 경고였다.
“당신이 여기서 할 일은 간단합니다. 차 작가님은 작업할 때 타인이 화실에 들어오는 걸 극도로 꺼려요. 그래서 아내인 제가 화실 관리를 맡아, 메인 작업이 들어가기 전 아주 기초적인 젯소칠과 배경 밑작업만 해두고 있죠.”
“…….”
“당신은 내가 지시하는 구역에 배경색만 까는 겁니다. 그 위에 차 작가님이 뭘 어떻게 그리실지는 알 필요도 없고, 물어봐서도 안 됩니다. 질문 있나요?”
미호의 목소리는 기름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낯선 이에게 단 한 뼘의 틈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지독하게 방어적이고 철저한 선 긋기였다.
하지만 하윤은 빼곡하게 적힌 독소 조항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종이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펜 뚜껑을 뽑았다.
사각, 사각.
거침없이 미끄러지는 펜 끝에서 '백하윤'이라는 세 글자가 힘 있게 새겨졌다.
“질문 없습니다. 거장 밑에서 일하는데 이 정도 보안은 당연하죠.”
하윤이 나직하게 웃으며 계약서를 미호 쪽으로 밀어주었다.
“게다가 사모님께서 직접 면접까지 보시며 화실을 지키고 계시는데, 딴생각 품을 틈이 어딨겠습니까.”
‘사모님.’
그 호칭에 미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틀린 말은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묘한 뉘앙스였다.
무해하고 순진해 보이는 미소.
하지만 그 안을 채운 하윤의 까만 눈동자는, 마치 이 견고한 철문 안에 숨겨진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 집요하게 그녀의 시선을 옭아매고 있었다.
“입 무거운 사람 찾으시는 거, 잘 압니다. 걱정 마세요.”
그가 계약서를 미호 쪽으로 밀어주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포트폴리오 바인더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미호는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마른 침을 삼키며 바인더를 펼쳤다.
한 장, 또 한 장.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미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단순히 기본기가 탄탄한 수준이 아니었다. 인체의 곡선을 잡아내는 과감한 선과 빛을 쪼개어 얹는 감각적인 터치. 고작 스물두 살짜리 미대생이 남의 캔버스 밑작업이나 도우며 썩히기에는 턱없이 아까운 재능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물감이 짓이겨진 거친 마티에르(질감)와 붓 터치 끝에 묻어나는 특유의 습관들. 처음 보는 낯선 사내의 포트폴리오에서, 미호는 아주 오래전 깊은 무의식 속에 묻어두었던 누군가의 흔적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혹시…….”
포트폴리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미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달싹였다.
“우리, 만난 적 있나요?”
순간, 하윤의 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숨 막히는 화실 안으로 아주 찰나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내 그의 단정한 입꼬리가 유려하게 호선을 그렸다.
“사모님.”
나직하게 떨어지는 중저음.
“플러팅 치고는 멘트가 너무 올드한 거 아닌가요?”
“……네?”
미호가 당황해 고개를 들자, 하윤이 작업대 모서리에 골반을 가볍게 기대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보통 면접 볼 때는 포트폴리오를 칭찬하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작업 거시진 않거든요.”
“그런 뜻이 아니라, 화풍이 어딘가 익숙해서…….”
“제 그림이 사모님 취향인가 보네요. 다행입니다.”
미호의 창백했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철저하게 둘러쳐두었던 방어벽이, 고작 스물두 살짜리 남자의 농담 한마디에 어이없이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그 무해한 미소 뒤에 숨겨진 시선이 묘하게 끈적거려 당혹감은 배가 되었다.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일단 캔버스 앞에서 선 쓰는 것부터 볼게요.”
미호는 겉잡을 수 없이 덜컹거리는 심장 박동을 감추려 급히 몸을 돌렸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녀가 이젤 옆 트레이에 놓인 나이프를 다급하게 집어 들려던 찰나였다.
창그랑―!
초조함에 굳어 있던 손끝이 미끄러지며, 팔레트 위에 덜어두었던 진득한 카드뮴 레드 유화 물감 통이 테레빈유 병과 함께 뒤엉켜 넘어졌다. 핏빛처럼 붉고 질척한 물감이 미호의 걷어 올린 셔츠 소매와 창백한 손목 안쪽을 사정없이 덮쳤다.
미호는, 한참 동안이나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하아…….’쓴웃음을 삼킨 그녀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속옷을 주워 입고, 뜯어진 셔츠를 주섬주섬 여미는 동작에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묻어나지 않았다.‘……틀린 말도 아니지.’어차피 애도 못 가지는 몸.뼛속까지 후벼 파이는 폭언이었지만, 미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잔인한 말이 연호의 손길을 멈춰주었으니까.상처받은 비참함보다, 그의 몸무게와 체온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이 안도감이 미호를 더욱 처참하게 옭아맸다. 남편과 몸을 섞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여자라니.미호가 실밥이 터진 셔츠 깃을 움켜쥐며 헛숨을 삼켰다.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어디서부터 이 지옥이 시작된 걸까.우리를 감싸던 공기가 이토록 역겹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옷깃이, 아주 찰나의 손끝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듯 뛰고 귓바퀴가 터질 듯 달아오르던 때가 분명 있었다.쏴아아―.집안의 정적 위로, 열린 창문 너머로 쏟아지던 매미 울음소리가 아스라이 겹쳐 들었다.복도를 울리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음.낡은 선풍기가 삐걱이며 돌아가던 여름날의 냄새.옅은 물감 냄새.그리고, 텅 빈 미술실.“너, 이거 어디에도 내지 마.”캔버스에 시선을 박은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열여덟의 미호가 흠칫 어깨를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미술실 뒷문.그곳에 차연호가 서 있었다.미호가 그리던 수행평가용 풍경화를 내려다보는 연호의 눈빛은 기묘했다.“어, 그게… 이상해? 지울까?”“이상한 건 아닌데, 좀 거칠고 특이하네. 너 따로 그림 배운 적 있어?”미호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연호의 입가에 아주 옅은, 그러나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수행 평가 제출용이면 내가 다시 그리는 거 도와줄게. 대신에…… 이 그림은 나한테 줄 수 있어?”“어? 난 상관없는데……. 왜?”의아하다는 듯 되묻는 미호에게, 연호가 눈을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투둑, 툭.단추가 뜯겨 나갈 듯한 거친 손길에 미호의 얇은 실크 셔츠가 속절없이 벌어졌다.“하아…….”연호의 뜨겁고 탁한 숨결이 훤히 드러난 미호의 목덜미와 쇄골 위로 쏟아졌다. 등 뒤로 감겨든 그의 커다란 손이 브래지어 후크를 신경질적으로 비틀어 풀었다.스르륵, 얇은 속옷이 바닥으로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창백할 만큼 희고 풍만한 가슴이 공기 중으로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읏, 당신… 잠깐……!”미호가 다급하게 연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이미 달아오른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연호는 미호를 거실의 넓은 가죽 소파 위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푹신한 소파 위로 상체가 무너지자마자, 연호가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파묻었다.츕, 츄읍.거실의 정적을 찢고 타액이 얽히는 질척하고 노골적인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그가 붉게 달아오른 유두를 혀로 집요하게 핥아 올리고, 날카로운 치열로 살짝 깨물며 자극했다. 다른 여자들이었다면 쾌락에 허덕이며 신음을 내뱉었을 짙고 농염한 애무였다.하지만 미호의 몸은 차가운 대리석처럼 굳어 있었다.“보통 이러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신음소리 하나가 없어.”미호의 무감한 반응에 연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그래도 여전히 봐줄만 해.”그는 제 커다란 손을 미호의 바지 버클 사이로 밀어 넣었다.스윽.속옷 안쪽으로 파고든 연호의 손가락이 미호의 여린 살결을 갈라내며 깊숙한 곳을 꾹 눌렀다.“아……!”순간 미호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바싹 메말라 있었다.연호의 농밀한 애무에도 불구하고, 미호의 내벽은 단 한 방울의 애액도 흘려보내지 않은 지독하게 건조했다.연호는 그 완강한 거부에 오기가 생겼는지, 손가락으로 작은 음핵을 짓이기듯 강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아, 앗…! 아파……!”윤활유 하나 없는 메마른 살점 위로 가해지는 거친 마찰. 미호의 눈가에 고통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허리를 뒤틀며 연호의 팔뚝을 긁어내리듯 꽉 쥐었
단독 저택의 높은 담벼락을 끼고 도는 길.조금 전까지 한껏 움츠러들었던 순진한 조수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윤의 까만 눈동자에는 선명한 희열이 맺혀 있었다.‘여전하네. 그래서 더…… 좋아졌어.’기분 좋은 콧노래가 하윤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그의 발걸음은 묘하게 경쾌했다.“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적막을 깨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사혁.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에, 투블럭으로 밀어 올린 뒷머리 위로 긴 머리칼을 살짝 묶어 내린 사내. 그는 하윤의 곁에 나란히 서는 대신, 그림자처럼 정확히 한 발짝 뒤로 거리를 둔 채 따라붙고 있었다.“응. 선생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고.”하윤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칭찬도 받았어. 노력한 보람이 있네.”“……노, 노력이요? 누가요? 제가요?”사혁의 황당하다는 반문에, 하윤이 픽 비실거리는 웃음을 흘렸다.“응. 그런데 다음엔 조금 더 잘했으면 좋겠어. 하마터면 한 번에 들킬 뻔했잖아.”“…….”“아니다. 그건 내 선생님의 안목이 탁월해서일까.”사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켰다. 도련님의 그 빌어먹을 노력을 돕느라, 사혁의 손끝에는 아직도 뻑뻑한 젯소의 감촉이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사혁, 빨리 그림을 좀 그려야겠어.”“네? 제 업무는 경호…….”“아니지. 네 진짜 업무는, 내가 숨만 쉬고 하는 짓거리들을 낱낱이 회장님께 보고하는 거잖아.”정곡을 찔린 그가 입을 다물자, 하윤이 나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아무 보고 없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실 걸? 차라리 그림이나 그리고 자빠져 있다고 하면, 오히려 수긍하실 거야.”그럴듯한 논리였다.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 이내 사혁은 난감한 얼굴로 제 크고 투박한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런데 제가 그림은 좀…….”“그러니까 시키는 거야. 내 재능이 워낙 출중해서 말이야. 그걸 좀 숨겨야겠거든.”‘저런 게 재벌들의 오만인가. 어린 새끼가 가끔 재수가 없단
저벅, 저벅.거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연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아앗……!”다짜고짜 미호의 손목을 낚아챈 연호가 그녀를 제 품으로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억센 손아귀가 붉게 달아오른 맥박 위를 부서져라 짓눌렀다.“당신, 갑자기…….”“읏, 읍!”미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연호가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키스라기보다는 마치 제 영역을 표시하는 듯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탐닉이었다.미호를 우악스럽게 껴안은 연호의 오른손이 그녀의 얇은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손목 너머로, 그의 길고 억센 손가락이 미호의 목통을 틀어쥔 채 턱을 억지로 꺾어 올렸다.츕, 츄으읍―.조용한 화실 안으로 혀가 노골적으로 얽히고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미호는 숨이 막혀 헐떡이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쾌락 따위는 섞여 있지 않은, 그저 굳어버린 두 눈.그녀의 반사적인 시선이 연호의 어깨너머를 향했다.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하윤과 오롯이 시선이 얽혔다.‘보고 있어?’하윤이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서, 남편에게 목이 졸린 채 입술을 유린당하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피해야 하는 건 외부인인 하윤 쪽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윤의 까만 눈동자에는 일말의 당혹감조차 없었다. 마치 유리관 너머의 전시를 관람하는 듯한 집요한 관찰자의 시선이었다.그 노골적인 시선 아래 완벽히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느끼며, 미호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하아…….”이내 연호가 끈적하게 얽혀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미호의 입술은 거친 마찰에 짓눌려 붉게 부어올랐다.숨을 몰아쉬는 미호의 젖은 입술을 엄지로 거칠게 문지르며, 연호가 하윤을 향해 고개만 비스듬히 돌렸다. 그의 눈빛은 승자의 여유로움과 오만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마음에 안 들어.”연호가 미호의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싸늘하게 툭 내뱉었다.“새로 뽑아.”그의 일방적인 통보에, 미호가 억눌린 숨을
삐삑, 삑, 삐비빅― 철컥!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신경질적으로 떨렸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연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백색소음조차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집안의 공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고요하고 서늘했다.하지만 연호의 시선은 현관 대리석 바닥 한구석에 꽂힌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회색 캔버스화.앞코에 물감이 군데군데 튄, 투박한 남자의 신발.자신의 공간에 불쑥 끼어든 그 이질적인 물건이 연호의 비틀린 신경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마치 발가벗은 두 남녀가 엉켜있는 것을 목도한 것만큼이나 불쾌했다. 그러나 이내 피식, 옅은 조소를 흘렸다.“하아…….”옛날이면 모를까.이제는 시들어서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는 너.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동할 리가 없다.‘하지만……, 너는 어떨까?’연호는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끌어 내리며 캔버스화를 구둣발로 짓밟고 지나쳤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 안쪽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빌트인 수납장 앞에 다다른 연호가 나무 패널을 주먹으로 치듯 밀어냈다. 드러난 차가운 방음 철문의 손잡이를 거칠게 낚아채 당겼다.끼기긱―!철문이 열리자마자, 평소보다 훨씬 독하고 매캐한 테레빈유 냄새가 코를 찌르듯 훅 끼쳐왔다.“미호, 너……!”연호의 날 선 목소리가 화실의 찬 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매섭게 쏘아보던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미호는 온데간데없었고, 거대한 캔버스 앞 대리석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앳된 사내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바닥의 참상은 기괴했다. 엎질러진 테레빈유가 붉은 유화 물감을 녹여내며, 마치 묽은 핏물처럼 대리석 바닥 위로 흉악하게 번져 있었다.독한 냄새를 풍기는 그 붉은 웅덩이를 걸레로 훔쳐내고 있던 남자가,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 듯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들었다.“…….”연호의 미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하얗고 앳된 얼굴, 티 없이 맑고
질척, 찌걱.가죽 소파 위로 끈적한 마찰음과 거친 숨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켰다.벽면을 가득 채운 파노라마 통유리창 너머로,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발밑에서 일렁였다.침실과 응접실이 아득하게 분리된 거대한 공간.묵직한 우디 향이 밴 두꺼운 카펫이 바깥의 소음을 완벽하게 집어삼킨 정적 속에서, 끈적한 마찰음과 거친 숨소리만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었다.거실 한가운데 놓인 기다란 가죽 소파. 그 위에 기대앉은 연호의 위에서, 태성그룹의 막내딸 하유라가 헐떡이며 허리를 들썩이고 있었다.“하아, 읏, 연호야아…….”쾌락에 잔뜩 달아오른 유라가 열기에 취해 반쯤 흐려진 눈으로 연호의 어깨를 짚고 엉덩이를 짓눌렀다.척척하게 젖은 살덩이가 부딪칠 때마다 야릇한 소음이 룸 안을 가득 채웠다.하지만 정작 아래에서 그녀를 깊숙이 꿰뚫고 있는 연호의 얼굴은 소름 끼칠 정도로 무감했다. 그는 마치 지루한 포르노라도 감상하듯, 오르락내리락하는 유라의 나체를 감흥 없는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연호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허리의 움직임에 맞춰 출렁거리는 유라의 젖가슴을 억세게 움켜쥐었다.“아앙, 읏!”유라가 자지러지는 교성을 내지르며 허리를 더 바짝 붙여왔다. 손아귀를 꽉 채우는 부드럽고 풍만한 감촉. 하지만 연호의 입술 사이로는 서늘하고도 권태로운 실소가 새어 나왔다.‘아, 가슴은 미호가 더 크네.’한 손에 다 쥐어지지도 않던 미호의 희고 묵직한 가슴. 자신이 억센 손아귀로 거칠게 주무를 때마다 수치심과 공포에 잘게 떨리던 그 붉으스름한 유두.미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아랫도리에 열기가 쏠렸다. 연호가 유라의 얄팍한 허리를 틀어쥐고 거칠게 위로 쳐올리기 시작했다.“하윽! 이제야 할 기분이 드는 거야?”연호는 대답 대신 픽 실소를 흘리며, 소파 위에 널브러진 유라의 몸을 거칠게 뒤집어 일으켰다.“아앗…! 잠깐, 연호야…!”그는 유라를 앞에 놓인 차가운 대리석 테이블 쪽으로 밀어붙였다.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 상체가 꺾인 유라의 뒤로, 연호가 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