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한결은 완전히 알몸인 채 윤정희 앞에 서 있었다. 근육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윤정희의 눈이 그 몸을 위에서 아래로 쟀다. 키까지 커서, 덮이면 웬만한 여자는 형체도 남지 않을 몸이었다.
단단한 윤곽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흉터가 드러났고, 팔과 다리만 검게 그을린 피부는 경계가 뚜렷했다.
밤의 일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 거기 있었다. 살아남느라 버틴 시간이.
“가만 있어.”
윤정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긴 손톱 끝으로 그의 턱을 들었다.
“몸은 쓸 만하네. 가게에서는 왜 그렇게 했어. 재수 없게 점잖 떨고 있는 이유가 뭐야. 몸 팔아서 먹고사는 주제에.”
그녀가 남은 손으로 묶음 하나를 더 집어 그의 어깨 너머로 던졌다. 등 뒤 카펫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윤정희는 돌아보지 말라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밥때를 정하는 건 자기라는 눈빛으로.
“말주변이… 없습니다.”
“거짓말.”
그녀가 턱을 놓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나란히 모았다. 급할 게 없는 사람의 자세였다.
그녀의 손이 자기 목으로 갔다. 블라우스 단추 하나가 풀렸다. 그다음 것도. 그녀는 그를 보면서 풀었다. 옷깃이 벌어지고 검은 브라의 가장자리와 그 사이로 그늘진 골이 드러났다. 숨을 쉴 때마다 그 그늘이 조금씩 깊어졌다 얕아졌다. 그녀는 거기까지만 풀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치마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는 치마를 내리지 않고 올라가는 대로 두었다. 소파 가죽에 허벅지 안쪽이 닿는 소리가 났다.
그녀에게 가 있던 한결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왜? 봐.”
한결은 봤다. 그녀가 보라는데로. 보라는 곳으로.
그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처음 벗었을 때 그대로였다. 붉어지지도, 단단해지지도 않은 채. 윤정희의 입꼬리가 잠깐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날 말이야.”
윤정희가 와인잔을 들었다. 살짝 입에 머금고는 내려놓는 손길에 블라우스의 한쪽이 더 깊게 흘러내렸다.
“네 옆에 앉은 여자. 약은 먹였어?”
한결의 눈이 잠깐 커졌다. 시킨 사람이 이제야 짐작 되는 얼굴이었다.
“예.”
“그래서. 올라가서 뭐 했어.”
그는 대답을 고르는 데 시간을 썼다.
“잤…죠.”
윤정희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손이 내려왔다.
그의 중심으로.
묵직하게 손에 잡히는 그것은 잡히자마자 안에서 피가 돌기 시작했고, 또 점점 무겁게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누가 그걸 몰라. 어떻게 잤냐고.”
“방에 갔을 때는 거의 인사불성이었습니다.”
—
그녀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하나 곱씹듯 듣고 있었다. 거짓인지 아닌지를 재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한결의 중심을 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상자의 문고리를 당겨 보듯, 그날 밤의 일을 틈으로 훔쳐보고 싶은 듯한 손으로.
“일… 어서니까 약 기운이 더 빨리 퍼진 것 같습니다.”
윤정희가 가만히 있었다. 그래 보이긴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박세경은 얼굴만 붉게 달아 있었을 뿐 인사불성은 아니었다. 몽롱하게 풀린, 난처하면서도 어딘가 떠 있는 듯한 얼굴이었으니까.
—즈븍… 즈븍…
그녀의 손 안에서 한결의 그것은 이제 단단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앞뒤로 흔들며 그를 몰아갔다. 한결은 입술을 물고 있었다. 참으려는 것인지, 더 하지 못해 안타까운 것인지.
“그래서?”
“올라가서, 엘리베이터에서… 크음… 내렸을 때에는 이미… 인사불성이라.”
한결은 자신의 중심을 잡고 흔드는 손을 내려다봤다. 중년 여자의 마른 손. 윤정희의 적당히 풍만한 몸과는 다르게 손가락은 말라서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 주름을 가리려는 듯 금붙이가 주렁주렁 빛났다.
그 손이 쭉 올라와 끝을 감싸 쥐고 한 번 쓸어내리자, 차가운 반지가 갈라진 틈에 잠깐 걸렸다가 비켜났다.
“뭐 해. 계속해.”
“침대에 눕히고… 벗, 벗겼습니다.” “순순히? 뭐 다른 이상한 건.” “끌어안았을 때 조금 반항했지만, 크게 저항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시계는 절대 못 풀게 했습니다. 인사불성인데도.”
윤정희의 손이 멈췄다. 눈이 그제야 반짝였다.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조금 풀리는 눈이었다.
“그거 걔네 엄마 유품이야.”
“…….”
손아귀가 칭찬하듯 그것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흘러나온 것을 엄지 끝으로 살살 펴 바르며 그녀가 물었다.
“어땠어?”
“큼… 뭐가…….” “걔 어땠냐고.” “별다를 거 없었습니다. 다른 여자하고” “하핫!”
윤정희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다리를 완전히 활짝 열었다. 브라와 같은색. 검은색 란제리 팬티의 골이 활짝 드러났다.
그리고는 한결을 잡고 있던 손으로 탁자에서 묶음 하나를 집어 그의 가슴에 던졌다.
— 탁
“해 봐.” “뭘…….” “박 교수한테 한 거. 나한테도 해 보라고.”
그녀가 블라우스를 완전히 벗어버렸다. 검정색 브라와 대비되는 그녀의 피부는 희었고, 목에도 가는 금줄이 있었고, 향수 냄새가 짙었다. 꽃 냄새. 백화점 일층에서 나는 냄새.
그날 밤의 세경한테서는 비누 냄새가 났는데.
윤정희의 방은 세경의 방에서 복도 반대쪽 끝이었다. 교수연구실 두 개를 합친 것만큼 넓은 방. 세경은 문 앞에서 재킷을 슥슥 쓸어내리고 단추를 다시 채웠다. 노크를 하기 전, 손목시계를 한번 쓰다듬었다.— 똑똑 “들어와요.”윤정희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을 손짓으로 권하고, 세경이 앉는 동안 한 번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그 눈이 어디서 뭘 듣고와서 자신을 보는 지 세경은 알았다.윤정희 역시 서랍 속 보고서에 적힌 그 얼굴이었다. 세경은 다리를 꼬지 않고 무릎을 붙였다.“그날은 잘 들어갔지?” “……네. 괜찮았습니다.” “괜찮았구나. 취한것 같아서 걱정했잖아.”윤정희가 찻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고 손목만 돌렸다. 팔찌가 반짝였다.“나는 그날 박 교수가 그렇게 빨리 자리를 뜰 줄 몰랐는데. 실장이 택시는 잘 잡아줬지? 내가 나가본다는걸, 김단장이 하도 잡아서…” “네. 바로 택시 잡아주더군요.” “그래. 하… 나도 이제 그런자리 힘들어서 못하겠어. 학과장도 이제 그만할때가 됐나봐. 우리 박교수 같은 사람이 빨리 이 자리 물려받았으면 좋겠어.”윤정희는 자기방을 둘러보며 소파 가죽을 한번 쓸어내렸다.“과찬이십니다.”세경은 단발을 귀 뒤로 넘겼다. 넘기는 손목에 윤정희의 시선이 걸렸다.“그 시계 참 오래 끼고 다니네. 이제 새 걸로 하나 바꿔 끼지 그래? 옷은 좋은 거 입고 다니면서. 내가 하나 사 줘?” “끼던 게 편해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래… 그래…편한 거 좋지. 사람도 그렇고.”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 다 같은 밤을 떠올리면서 전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고 있었다. 교수들이 하는 대화란 원래 그랬다.세경도 윤정희를 봤다. 보고서에 적혀 있던 젖은 눈. 소리를 내던 입. 그 애의 몸을 잡았다던 손끝. 그 손목에 걸린 세 줄짜리 금팔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세경은 어금니로 눌렀다.“팔찌… 예쁘네요. 까르띠에 맞죠?” “박 교수 이
— 똑똑09:00결재판이 두 손으로 들어왔다. 세경은 한 손으로 받았다. 어제보다 두꺼웠다.“방에 가 있어.”그가 멈칫했다. 어제까지는 앞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오늘은 나가라고 했다.이유는 묻지 않았다. 한결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나갔다.— 철컥소리를 들었는데도 세경은 일어나서 손잡이를 당겨 봤다. 닫혀 있었다. 그 문에 등을 댔다. 잠깐.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표지를 넘겼다.결재판은 어제보다 무거웠다. 종이도 늘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세경은 그걸 책상에 올려놓고 잠깐 보기만 했다. 표지. ‘논문 검토 보고서.’첫 장은 어제와 같았다. 시각, 돈 묶음, 재킷, 구두. 둘째 장도 같았다. 셋째 장부터 달랐다.처음 몇 줄은 어제 오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시각이 있고, 동작이 있고, 그 여자가 한 말이 있었다.그런데 어느 줄부터인가 시각이 없어졌다. 동작만 남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손가락이 어디를 쥐었는지, 어디서 소리가 났고 어디서 소리가 안 났는지.세경은 그걸 읽었다. 문이 닫힌 방에서, 빨간 펜을 쥔 채로.손목시계를 치던 펜이 멈춰 있었다.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꼬았다. 창문을 봤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종이로 돌아왔다. 사 층이었다. 누가 볼 리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했다.“하?!”넷째 장에서 세경은 한 번 종이를 덮었다. 손바닥으로. 덮고 나서 자기 손바닥이 뜨거운 걸 알았다. 귀가 뜨거웠다. 숨이 나오는 곳이 코인지 입인지도 헷갈렸다.“후우……크흠.”세경은 깊게 한숨을 내뱉다가 헛기침을 했다. 목에 가래가 잔뜩 걸려 있었다. 빨간 펜으로 윤정희의 말, 그리고 반응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또 물음표를 그렸다. 뒤로갔다가 앞으로 돌아왔다. 몇 번을.상상도 못했던 윤정희의 반응에는 아래에 줄을 긋고 별표를 체크해 뒀는데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읽었다.— 탁『윤정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전
열 시가 넘어 있었다.모니터에는 워드 창이 하나 떠 있었고,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윤 교수는 눈을 감고...』거기까지 썼다. 기억은 분명했다. 글자로 옮기는 게 다른 일이었다.낮에 파쇄기가 돌아가던 소리를 떠올렸다. 벗으라고 하던 윤정희보다, 몇 시간을 들여 써 간 종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갈아 버린 세경 쪽이 더 오래 남았다.‘숨소리 하나까지.’숨소리라면 기억했다. 들이켜기만 하고 내쉬지 못하던 숨. 그다음에 터지던 숨. 거기까지는 사실이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어디까지 써야 하나.“후우…”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 소리를 냈다. 천장 형광등이 모니터 위로 희게 번져 있었다. 저 불을 끄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탁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이 꺼지고 모니터만 남았다. 깜빡이는 커서가 아까보다 크게 보였다.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는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둘러봤다. 아직 주인이 없는 책상들과 창문. 창문 너머로 가로등, 그 사이의 주차장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허리를 펴고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등에서 소리가 났다.— 뚜뚝 “으으으…”몸이 굳어 있었다. 책상 앞에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수색훈련에서는 두 시간을 한자리에 엎드려 있어도 이러지 않았는데. 몸은 엎드리는 데 익숙했고 앉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출입문 위 문틀에 손을 걸었다. 손가락 네 개가 걸릴 만큼의 턱. 몸을 당겨 올렸다.한 번. 두 번.내려올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부터 내렸다. 열 번째에서 손을 놓았다.문틀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는데 그가 손가락을 걸었던 자리만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한결은 손을 툭툭 털고는 복도로 나갔다.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고 센서등이 그를 따라 하나씩 켜졌다. 끝까지 가기 전에 멈췄다. 복도 끝, 412호. 문 아래
— 똑똑09:00세경은 펜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맹해보이는 차림. 세경이 시킨 그대로어젯밤 윤정희의 방에 있던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세경 자신도 그날 밤 그를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테니까.그가 결재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맨 위는 비품 신청서였다. 세경은 품명 옆 칸에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말했다.“과 행정조교한테 물어본거니?”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 “품명에는 모델명이 아니고 규격을 쓰는 거야. 그 조교한테 묻지말고 내가 결재했던 서류들만 찾아서 참고해. 다시 해 와.”그 한장을 빼내 한결에게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이건…”종이를 받아 든 한결이 주춤거리고 서 있자 세경은 턱으로 그의 뒤를 가리켰다. 서류파쇄기.“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종이는 갈려나갔다.비품 신청서를 걷어내고 나니 ‘논문 검토 보고서’라는 표지가 나왔다.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세경. 앞머리 사이로 눈이 슬쩍 올라왔다가 다시 서류판으로 내려왔다.— 스륵넘어가는 표지10.24. 22:40 P호텔 1602호. 윤 교수 단독. 23:50경 휴대폰 문자 다수 수신(이사장 긴급 호출). 윤 교수 통화 1건, 상대는 재단 사무처 김 실장(으로 추정). 통화내용: 압수수색 예정 확인, 서류 준비 지시, 신 사장 출국 지시. 박세경 교수 언급 1회(“입단속”). 통화 종료 후 퇴실 지시. 00:20 퇴실.세경은 두 번 읽었다. 시간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고, 순서가 있었다. 그가 그 방에서 뭘 듣고 뭘 봤는지가 한 장에 들어 있었다. 간단했고 쓸 만했다.압수수색. 세경은 그 네 글자를 펜 끝으로 짚었다. 늘 이런식이었다.미리 알려주고 하는 압수수색.재단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사장, 아니 그 사람의 방에. 그 방에 뭐가 있는지 세경은 몰랐다. 측근이라는 윤정희도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입단속
열두 시 사십 분.세경은 412호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리뷰할 논문이 펼쳐져 있었고, 빨간 펜은 한 시간째 같은 줄에 놓여 있었다.창밖은 어두웠다. 공학관은 캠퍼스 가장 안쪽이라 밤에는 가로등 두 개가 전부였다. 그 두 개 사이로 주차장이 보였고, 주차장 너머로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세경은 그 길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블라인드를 내렸다가 다시 반쯤 올렸다.집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내일 1교시 수업이 있었고, 며칠째 붙들고 있는 리뷰논문은 하루쯤 더 본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이 건물에서 이 시간까지 불을 켜 놓은 방은 자기 방 뿐이었다. 남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표면적으론열 시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었다. 건물 전체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연구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화장실 물소리, 엘리베이터 소리까지도 희미하게 올라왔다. 세경은 그때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다.윤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세경은 알았다. 돈을 쓰는 법도, 사람을 세워 놓고 기다리는 법도, 기다리게 해 놓고 즐기는 법도. 그 애가 그 방에서 뭘 하고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정하고 나서도 떠오르는 장면이 종이 위의 글자를 자꾸 흔들었다.세경은 쓰던 펜을 내려놓고 같은 종류의 다른 펜을 집어들었다. 논문의 같은 줄에 한 번 더 밑줄을 그었다. 이미 그어진 줄 위에. 줄이 굵어졌다. 세경은 그 굵어진 줄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하아…”사흘 전 이 방에서 그 애한테 한 말을 떠올렸다. ‘더한 일도 있을 거야. 더 더럽고.’ 그 말을 할 때 세경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나. 사실 구체적인 건 없었다. 그렇고 그런 일이겠거니 했을 뿐,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려질 줄은 몰랐다.어쨌든 보낸 건 자신이었다. 등록금과 하찮은 생활비 몇 푼으로. 그 아이는 누군가 책임져 주겠다는 말만 믿고 지금까지 살아 왔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게 등록금 절반을 걱정하는 생활이었고.‘나는 적어도
“아침 09:00. 공학관 412호.”명함 뒤에 적어준 자기 글씨를 떠올려 보고 있었다. 어젯밤 저 글자를 쓰고 나온 뒤로 성급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여덟 시 오십 분. 세경은 학사 시스템을 열고 있었다. 창밖으로 1교시 학생들이 공학관 앞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애, 이어폰을 낀 애, 뛰는 애. 그 틈에 그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지한결. 건설환경공학과 3학년. 지도교수 란에 정 교수 이름이 있었다. 지난 학기 정년퇴임, 후임 배정은 비어 있었다. 아무도 안 데려간 학생이었다.상담 이력 한 줄. 2학년 1학기, 휴학 상담. 사유 ‘경제적 사정’. 그다음 줄은 입대였다. 해병대. 복무 기간은 삼 년이 넘었다. 의무 복무보다 길었다. 전역일은 올해 봄. 제대하고 한 학기 만에 그 지하에 서 있었다는 얘기였다.지난 학기 성적은 세경이 준 구조역학 C를 포함해 전부 C와 D 사이였다. 세경이 준 C 때문에 장학금을 놓친 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 선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똑똑아홉 시 정각이었다.“들어와.”문이 다 열리지는 않았다. 몸이 들어올 만큼만 열고 들어와서, 닫히기 직전에 멈췄다. 한 뼘쯤 열린 채로.뿔테 안경. 눈을 덮는 앞머리. 두 치수는 큰 체크 남방 위에 늘어난 후드 집업. 굽은 어깨, 한쪽 끈만 멘 낡은 백팩. 어젯밤 열한 시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같은 키라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등이 굽어보여 훨씬 작아보였다.“앉아.”그는 방을 한번 주욱 둘러봤다. 책장, 파쇄기, 창가의 테이블. 문에서 창까지 한 번, 창에서 문까지 한 번. 그리고 맞은편이 아니라 한 칸 어긋난 곳에 앉았다. 어제처럼. 부담스럽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백팩은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렸다.세경은 모니터를 돌렸다. 학사 기록이 그에게 보이게.“지도교수가 없네.” “……네.” “상담 한 번. 휴학. 입대. 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