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띠리리리
군대 선임이었던 실장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곳을 그만둔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한결은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가 전화를 받았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펼쳐 둔 구조역학 책 위에 뺨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으… 필승… 무슨일이십니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프라*호텔 1602호. 지금 갈 수 있지?”
누구냐고 물었더니 실장이 웃었다.
“그날 오셨던 분. 손 크신 분이니까 퇴직금이라고 생각해, 인마.”
“하아아아암… 알겠습니다.” “야, 정신차려. 진짜 펑크내면 큰일나” “알았다잖습니까.”
실장의 욕이 두어 마디 이어졌다. 알았다는 대답을 몇 번이나 듣고 나서야 전화가 끊겼다.
한결은 책을 덮고는 한숨을 길게 뱉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연구실에는 그 혼자였다. 책상 다섯 개 중 네 개는 아직 비어 있었고, 그가 쓰는 하나만 불이 켜져 있었다. 사흘 전에 받은 자리였다. 가장 구석 자리. 기지개를 길게 펴고는 다시 원래대로 등을 굽혔다.
복도로 나갔다. 복도 끝 그녀의 방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문 아래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복도 바닥에 옅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 번 보고 화장실로 갔다.
— 쏴아
손을 오래 씻었다. 앞머리를 한번 넘겼다가, 누가 올까 싶어 다시 눈 위로 골라내렸다.
사흘이었다. 사흘 만에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끼니가 해결됐다. 공학관에 샤워실이 있었고, 과제비가 있는 방은 야근식대가 나왔다.
수업을 제대로 들은 것도 사흘 전부터였다.
편의점 알바비의 수십 배를 벌 수 있다는 선임의 말에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돈은 일을 정당화해 주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술 취한 여자의 손이 허벅지에 올라오는 것이 싫었다. 딱 한 번 끝까지 간 밤도 있었다. 아침에 여자가 부스스한 얼굴로 그를 고기 보듯 훑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며칠 되지 않은 연구실 생활은 한결에게 딱 맞았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고, 공부만 하면 됐다. 배고픔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구실의 간이침대가 월세 밀린 원룸 침대보다 편했다.
사흘 동안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곤 박세경 교수 뿐이었다. 수수하고 단색 계통의 옷. 칼같이 내려온 단발. 높지 않은 구두. 석 달 동안 비싼 옷과 비싸 보이는 옷을 질리게 구분했다. 그녀는 앞쪽이었다. 수수했지만 싸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계만 눈에 들어왔다. 낡고, 흠집이 나서 은색이 회색처럼 보이는 시계. 오늘 아침에도 그녀는 그의 시선이 거기 머문 걸 알고 시계를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후…”
그런데 오늘 밤 그가 가는 방의 여자는 금팔찌를 찬다.
박 교수가 말한 대로였다. 실장을 거쳤을 뿐, 윤정희가 분명했다. 아마도 그날 밤의 일을 물으려는 거겠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거절해도 되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한결에게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는 서랍 구석의 렌즈 케이스를 꺼냈다.
—
호텔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이었다. 한결은 걸었다. 걸으면서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안경 자국이 남은 콧등을 문질렀다. 세경이 사준 옷을 입었다. 몸에 맞는 옷이 되레 어색했다. 실장에게서 받은 바지는 크고 셔츠는 작았는데, 이제는 정반대였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남자는 사흘 전에 그만둔 일을 하러 가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금방.
방은 지난번 그 방이 아니었다. 더 넓었고, 더 높은 층이었다.
윤정희는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재킷은 벗어 두었고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풀어 둔 채였다. 유리 탁자 위에 반쯤 따른 와인잔과 돈. 띠지를 두른 오만원권 묶음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조명 바로 아래.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자리에.
한결은 문 안쪽에 섰다. 창문은 하나. 출입문도 하나. 그리고 돈.
윤정희는 그를 오래 봤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그만뒀다며.”
“예.” “평소에는 쓸모없어 보이더니. 비싸게 구네.”
잔을 들고 마시지 않고 손목만 돌렸다. 금팔찌 세 줄이 찰랑거렸다.
“스폰 생겼니?”
한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여기 또 온 걸 보면 돈이 필요없는것 같지는 않고…”
탑의 맨 위 묶음을 집어 손바닥에서 한 번 튕겼다. 무게를 보여 주듯이. 그리고 그의 발치로 던졌다.
—툭
“내가 해줄 수 있는데, 그런 건. 어때?”
이 여자는 돈으로 사람을 누르는 법을 안다. 어디가 비었는지 살핀 뒤 그곳을 채워준다. 한 번에 전부 내주지는 않는다. 강아지를 조련하듯이 하나씩.
그는 몸을 굽혀 돈을 주웠다. 주우면서 눈을 들었다. 손님이 지갑을 열 때 지어주어야 하는 얼굴. 윤정희가 입꼬리를 올렸다. 됐다, 하는 표정이었다.
“이리 와.”
윤정희가 손을 내밀었다. 손목을 돌릴 때마다 가느다란 세겹의 금팔찌가 소리를 냈다.
“이거 저기 걸어.”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재킷에서 꽃 냄새가 났다. 백화점 일층에서 나는 냄새.
“구두.”
무릎을 굽히고 벗겼다. 한 짝, 또 한 짝. 발은 작았고 스타킹 너머로 체온이 올라왔다.
— 툭
돈 뭉치 하나가 무릎 옆에 떨어졌다. 주웠다. 두 손에 돈을 쥔 채로 올려다봤다.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얼굴로.
“감사합니다.”
“벗어봐.”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었다. 서두르지도, 일부러 늦추지도 않았다. 윤정희의 시선이 그의 몸에서 멈췄다. 어깨. 등. 갈비 아래 길게 남은 흰 자국.
쓸모없어 보이던 애의 몸이 아니었다.
윤정희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잔을 들어 이번에는 마셨다. 한 모금. 그리고 묶음 하나가 아까보다 세게 날아와 가슴에 맞고 떨어졌다. 주웠다.
“바지.”
한결은 버클에 손가락을 걸고 멈췄다.
윤정희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왜? 못하겠니?”
재촉이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얼굴이었다.
한결은 시선을 내렸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윤정희는 만족한 듯 다리를 바꿔 꼬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나머지도.”
『22:40 입실.방은 지난번 그 방이 아니었다. 더 넓었고, 더 높은 층이었다.문을 열자 돈이 먼저 보였다. 유리 탁자 위, 조명 바로 아래. 띠지를 두른 오만원권 묶음 여섯 개가 탑으로 쌓여 있었다. 윤 교수는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재킷은 벗어 두었고 블라우스 단추는 하나 풀려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안쪽에 섰다. 창문 하나. 출입문 하나. 욕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리고 돈.(…)“나머지도 벗어. 전부”속옷까지 다 벗고 섰다. 윤 교수의 눈이 내 몸을위에서 아래로 쟀다.“가만 있어.”윤 교수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긴 손톱으로 내 턱을 들었다.“몸은 쓸 만하네. 가게에서는 왜 그렇게 점잖 빼고 있었니?”말주변이 없다고 대답했다.“거짓말.”윤 교수가 턱을 놓고 등받이에 기댔다. 자기 손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복잡하게 박음질된 검은 브라의 가장자리가 보였다. 가슴 윗부분은 망사였다.거기까지 풀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다리를 벌렸다. 치마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지 않았다. 팬티가 살짝 보이길래 고개를 돌렸다.“왜? 봐.”시키는대로 했다.다리가 점점 더 벌어졌다. 치마 사이로 보이는 팬티의 골이 드러났다. 윤 교수가 눈을 놓아주지 않았다.윤 교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날 옆자리 앉은 여자 약은 먹였니?”그랬다고 대답했다.“그래서. 올라가서 뭐 했어.”잠깐 망설이다 ‘잤다’고만 대답했다. 윤 교수의 눈이 더 달라고 했다.윤 교수의 손이 내려왔다. 내 중심으로. 참아보려고 했는데, 잡히자마자 완전히 발기해버렸다.손바닥이 조금 차가웠고, 깡말라 있었다. 손가락과 손목에 낀 금붙이들이 피부에 닿아서 닭살이 돋았다. 큰 다이아 두 알이 박힌 반지는 오른손 약지에, 작은 큐빅이 촘촘한 반지는 중지에 끼워져 있었다.윤 교수가 자세한 이야기를 원했다. 약기운이 올라왔는지 방에 갔을 때는
윤정희의 방은 세경의 방에서 복도 반대쪽 끝이었다. 교수연구실 두 개를 합친 것만큼 넓은 방. 세경은 문 앞에서 재킷을 슥슥 쓸어내리고 단추를 다시 채웠다. 노크를 하기 전, 손목시계를 한번 쓰다듬었다.— 똑똑 “들어와요.”윤정희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을 손짓으로 권하고, 세경이 앉는 동안 한 번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그 눈이 어디서 뭘 듣고와서 자신을 보는 지 세경은 알았다.윤정희 역시 서랍 속 보고서에 적힌 그 얼굴이었다. 세경은 다리를 꼬지 않고 무릎을 붙였다.“그날은 잘 들어갔지?” “……네. 괜찮았습니다.” “괜찮았구나. 취한것 같아서 걱정했잖아.”윤정희가 찻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고 손목만 돌렸다. 팔찌가 반짝였다.“나는 그날 박 교수가 그렇게 빨리 자리를 뜰 줄 몰랐는데. 실장이 택시는 잘 잡아줬지? 내가 나가본다는걸, 김단장이 하도 잡아서…” “네. 바로 택시 잡아주더군요.” “그래. 하… 나도 이제 그런자리 힘들어서 못하겠어. 학과장도 이제 그만할때가 됐나봐. 우리 박교수 같은 사람이 빨리 이 자리 물려받았으면 좋겠어.”윤정희는 자기방을 둘러보며 소파 가죽을 한번 쓸어내렸다.“과찬이십니다.”세경은 단발을 귀 뒤로 넘겼다. 넘기는 손목에 윤정희의 시선이 걸렸다.“그 시계 참 오래 끼고 다니네. 이제 새 걸로 하나 바꿔 끼지 그래? 옷은 좋은 거 입고 다니면서. 내가 하나 사 줘?” “끼던 게 편해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래… 그래…편한 거 좋지. 사람도 그렇고.”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 다 같은 밤을 떠올리면서 전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고 있었다. 교수들이 하는 대화란 원래 그랬다.세경도 윤정희를 봤다. 보고서에 적혀 있던 젖은 눈. 소리를 내던 입. 그 애의 몸을 잡았다던 손끝. 그 손목에 걸린 세 줄짜리 금팔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세경은 어금니로 눌렀다.“팔찌… 예쁘네요. 까르띠에 맞죠?” “박 교수 이
— 똑똑09:00결재판이 두 손으로 들어왔다. 세경은 한 손으로 받았다. 어제보다 두꺼웠다.“방에 가 있어.”그가 멈칫했다. 어제까지는 앞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오늘은 나가라고 했다.이유는 묻지 않았다. 한결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나갔다.— 철컥소리를 들었는데도 세경은 일어나서 손잡이를 당겨 봤다. 닫혀 있었다. 그 문에 등을 댔다. 잠깐.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표지를 넘겼다.결재판은 어제보다 무거웠다. 종이도 늘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세경은 그걸 책상에 올려놓고 잠깐 보기만 했다. 표지. ‘논문 검토 보고서.’첫 장은 어제와 같았다. 시각, 돈 묶음, 재킷, 구두. 둘째 장도 같았다. 셋째 장부터 달랐다.처음 몇 줄은 어제 오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시각이 있고, 동작이 있고, 그 여자가 한 말이 있었다.그런데 어느 줄부터인가 시각이 없어졌다. 동작만 남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손가락이 어디를 쥐었는지, 어디서 소리가 났고 어디서 소리가 안 났는지.세경은 그걸 읽었다. 문이 닫힌 방에서, 빨간 펜을 쥔 채로.손목시계를 치던 펜이 멈춰 있었다.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꼬았다. 창문을 봤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종이로 돌아왔다. 사 층이었다. 누가 볼 리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했다.“하?!”넷째 장에서 세경은 한 번 종이를 덮었다. 손바닥으로. 덮고 나서 자기 손바닥이 뜨거운 걸 알았다. 귀가 뜨거웠다. 숨이 나오는 곳이 코인지 입인지도 헷갈렸다.“후우……크흠.”세경은 깊게 한숨을 내뱉다가 헛기침을 했다. 목에 가래가 잔뜩 걸려 있었다. 빨간 펜으로 윤정희의 말, 그리고 반응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또 물음표를 그렸다. 뒤로갔다가 앞으로 돌아왔다. 몇 번을.상상도 못했던 윤정희의 반응에는 아래에 줄을 긋고 별표를 체크해 뒀는데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읽었다.— 탁『윤정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전
열 시가 넘어 있었다.모니터에는 워드 창이 하나 떠 있었고,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윤 교수는 눈을 감고...』거기까지 썼다. 기억은 분명했다. 글자로 옮기는 게 다른 일이었다.낮에 파쇄기가 돌아가던 소리를 떠올렸다. 벗으라고 하던 윤정희보다, 몇 시간을 들여 써 간 종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갈아 버린 세경 쪽이 더 오래 남았다.‘숨소리 하나까지.’숨소리라면 기억했다. 들이켜기만 하고 내쉬지 못하던 숨. 그다음에 터지던 숨. 거기까지는 사실이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어디까지 써야 하나.“후우…”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 소리를 냈다. 천장 형광등이 모니터 위로 희게 번져 있었다. 저 불을 끄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탁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이 꺼지고 모니터만 남았다. 깜빡이는 커서가 아까보다 크게 보였다.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는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둘러봤다. 아직 주인이 없는 책상들과 창문. 창문 너머로 가로등, 그 사이의 주차장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허리를 펴고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등에서 소리가 났다.— 뚜뚝 “으으으…”몸이 굳어 있었다. 책상 앞에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수색훈련에서는 두 시간을 한자리에 엎드려 있어도 이러지 않았는데. 몸은 엎드리는 데 익숙했고 앉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출입문 위 문틀에 손을 걸었다. 손가락 네 개가 걸릴 만큼의 턱. 몸을 당겨 올렸다.한 번. 두 번.내려올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부터 내렸다. 열 번째에서 손을 놓았다.문틀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는데 그가 손가락을 걸었던 자리만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한결은 손을 툭툭 털고는 복도로 나갔다.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고 센서등이 그를 따라 하나씩 켜졌다. 끝까지 가기 전에 멈췄다. 복도 끝, 412호. 문 아래
— 똑똑09:00세경은 펜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맹해보이는 차림. 세경이 시킨 그대로어젯밤 윤정희의 방에 있던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세경 자신도 그날 밤 그를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테니까.그가 결재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맨 위는 비품 신청서였다. 세경은 품명 옆 칸에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말했다.“과 행정조교한테 물어본거니?”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 “품명에는 모델명이 아니고 규격을 쓰는 거야. 그 조교한테 묻지말고 내가 결재했던 서류들만 찾아서 참고해. 다시 해 와.”그 한장을 빼내 한결에게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이건…”종이를 받아 든 한결이 주춤거리고 서 있자 세경은 턱으로 그의 뒤를 가리켰다. 서류파쇄기.“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종이는 갈려나갔다.비품 신청서를 걷어내고 나니 ‘논문 검토 보고서’라는 표지가 나왔다.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세경. 앞머리 사이로 눈이 슬쩍 올라왔다가 다시 서류판으로 내려왔다.— 스륵넘어가는 표지10.24. 22:40 P호텔 1602호. 윤 교수 단독. 23:50경 휴대폰 문자 다수 수신(이사장 긴급 호출). 윤 교수 통화 1건, 상대는 재단 사무처 김 실장(으로 추정). 통화내용: 압수수색 예정 확인, 서류 준비 지시, 신 사장 출국 지시. 박세경 교수 언급 1회(“입단속”). 통화 종료 후 퇴실 지시. 00:20 퇴실.세경은 두 번 읽었다. 시간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고, 순서가 있었다. 그가 그 방에서 뭘 듣고 뭘 봤는지가 한 장에 들어 있었다. 간단했고 쓸 만했다.압수수색. 세경은 그 네 글자를 펜 끝으로 짚었다. 늘 이런식이었다.미리 알려주고 하는 압수수색.재단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사장, 아니 그 사람의 방에. 그 방에 뭐가 있는지 세경은 몰랐다. 측근이라는 윤정희도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입단속
열두 시 사십 분.세경은 412호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리뷰할 논문이 펼쳐져 있었고, 빨간 펜은 한 시간째 같은 줄에 놓여 있었다.창밖은 어두웠다. 공학관은 캠퍼스 가장 안쪽이라 밤에는 가로등 두 개가 전부였다. 그 두 개 사이로 주차장이 보였고, 주차장 너머로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세경은 그 길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블라인드를 내렸다가 다시 반쯤 올렸다.집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내일 1교시 수업이 있었고, 며칠째 붙들고 있는 리뷰논문은 하루쯤 더 본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이 건물에서 이 시간까지 불을 켜 놓은 방은 자기 방 뿐이었다. 남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표면적으론열 시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었다. 건물 전체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연구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화장실 물소리, 엘리베이터 소리까지도 희미하게 올라왔다. 세경은 그때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다.윤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세경은 알았다. 돈을 쓰는 법도, 사람을 세워 놓고 기다리는 법도, 기다리게 해 놓고 즐기는 법도. 그 애가 그 방에서 뭘 하고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정하고 나서도 떠오르는 장면이 종이 위의 글자를 자꾸 흔들었다.세경은 쓰던 펜을 내려놓고 같은 종류의 다른 펜을 집어들었다. 논문의 같은 줄에 한 번 더 밑줄을 그었다. 이미 그어진 줄 위에. 줄이 굵어졌다. 세경은 그 굵어진 줄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하아…”사흘 전 이 방에서 그 애한테 한 말을 떠올렸다. ‘더한 일도 있을 거야. 더 더럽고.’ 그 말을 할 때 세경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나. 사실 구체적인 건 없었다. 그렇고 그런 일이겠거니 했을 뿐,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려질 줄은 몰랐다.어쨌든 보낸 건 자신이었다. 등록금과 하찮은 생활비 몇 푼으로. 그 아이는 누군가 책임져 주겠다는 말만 믿고 지금까지 살아 왔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게 등록금 절반을 걱정하는 생활이었고.‘나는 적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