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 스긍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세경은 그의 팔에서 어깨를 뺐다.
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줄곧 그에게 기대어 있었다. 발이 조금 꼬이는 척, 계단 하나를 헛디디는 척. 그의 손은 그녀의 팔꿈치 아래를 받치고 있었고, 세경은 그 손에 체중의 절반쯤을 맡겼다.
문이 닫히고 거울에 둘이 비쳤다.
세경은 허리를 폈다.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남자는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어 옆으로 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 반쯤 안겨 있던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똑바로 서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그저 층수 표시등을 바라보았다.
10층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세경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넘긴 머리 아래로 이마가 넓었고, 룸의 조명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엘리베이터의 흰 불빛 아래서 보였다. 눈 밑이 어두웠다.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세경은 거울에서 눈을 뗐다. 거울 속에서 그와 눈이 마주칠까 봐.
— 띵
호텔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바닥이 카펫이라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덕분에 자신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평소보다 빠르다는 생각이 들자 세경은 걸음을 늦췄다.
남자는 한 발짝 앞, 비스듬히 왼쪽에서 걸었다. 바로 옆이 아니라서 어깨가 닿을 일이 없었고, 바로 앞이 아니라서 세경이 그의 등을 따라가는 모양이 되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세경이 걸음을 늦추자 따라서 속도를 늦췄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배려일 수도 있다는 걸, 세경은 숨을 고르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이런 일로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었다. 교수들끼리의 2차에서 호스트를 옆에 앉힌 적도, 그를 데리고 호텔방으로 올라간 적도 처음이었다.
남자가 객실 번호판 앞에서 멈췄다.
“여깁니다.”
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카드키를 꺼내지 않은 채 잠시 기다렸다.
“뭐해. 열지 않고.” 말을 많이 하면 긴장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이 문을 열어도 되는지를 묻는 것처럼 남자는 잠깐 더 기다렸다. 세경은 어서 열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남자는 곧바로 카드키를 갖다 댔다.
— 삐빅
문이 열리고 그는 열린 문과 벽 사이에 붙어 길을 냈다. 세경이 먼저 들어갔고, 남자는 센서등이 꺼지기 전에 카드키를 홀더에 끼워 넣었다. 찰나의 시차를 두고 켜졌다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는 불빛.
방은 넓지 않았다. 더블 침대 하나, 창가에 작은 테이블과 소파, 벽에 붙은 거울. 시트는 각이 잡혀 있었고 베개 위에 초콜릿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세경은 그 초콜릿을 봤다. 이런 방에도 그런 걸 놓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방을 협탁에 내려뒀다.
— 덜컥
그다음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등 뒤가 가까워지는 기분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향한 곳은 세경의 몸이 아니었다. 찬찬히 방을 둘러보는 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는지 손가락을 쓸어 보는 손짓. 열린 커튼 틈으로 밖을 한번 훑어보고는 커튼을 쳤다.
세경은 현관 쪽을 봤다. 이중잠금장치의 레버가 그대로였다. 한숨을 내쉬고 걸어가서 돌렸다.
— 철컥
돌아서자 남자가 보고 있었다. 레버를, 그다음에 세경을.
세경은 창가 소파에 앉았다. 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 가방은 무릎에 올렸다. 올리고 나서야 손이 떨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복도에서는 떨렸는데.
소파는 낮았다.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왔고, 세경은 그걸 내리지 않았다. 내리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들킬 것만 같았다.
남자는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백팔십은 훌쩍 넘었고, 어깨는 셔츠를 밀어내고 있었다. 앞머리는 뒤로 넘겼고 렌즈를 껴서인지 눈이 길고 서늘했다. 양옆으로 내린 손은 컸다. 손등에 흰 흉터가 하나. 강의실에서 본 적 없는 손이었다. 늘 이마에 대고 엎드려 있었으니.
그는 세경을 보고 있었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학교에서는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는데.
다만 그 눈이 세경의 얼굴에서 치마로, 치마에서 다시 얼굴로 한 번 다녀왔다. 그렇고 그런 손님을 보는 눈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재는 눈.
방이 조용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열한 시 이십 분.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씻을…….”
“뭐? 씻어? 학생 주제에 이런 데서 뭘 하는 거야. 그리고 뭐, 시우?”『22:40 입실.방은 지난번 그 방이 아니었다. 더 넓었고, 더 높은 층이었다.문을 열자 돈이 먼저 보였다. 유리 탁자 위, 조명 바로 아래. 띠지를 두른 오만원권 묶음 여섯 개가 탑으로 쌓여 있었다. 윤 교수는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재킷은 벗어 두었고 블라우스 단추는 하나 풀려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안쪽에 섰다. 창문 하나. 출입문 하나. 욕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리고 돈.(…)“나머지도 벗어. 전부”속옷까지 다 벗고 섰다. 윤 교수의 눈이 내 몸을위에서 아래로 쟀다.“가만 있어.”윤 교수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긴 손톱으로 내 턱을 들었다.“몸은 쓸 만하네. 가게에서는 왜 그렇게 점잖 빼고 있었니?”말주변이 없다고 대답했다.“거짓말.”윤 교수가 턱을 놓고 등받이에 기댔다. 자기 손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복잡하게 박음질된 검은 브라의 가장자리가 보였다. 가슴 윗부분은 망사였다.거기까지 풀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다리를 벌렸다. 치마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지 않았다. 팬티가 살짝 보이길래 고개를 돌렸다.“왜? 봐.”시키는대로 했다.다리가 점점 더 벌어졌다. 치마 사이로 보이는 팬티의 골이 드러났다. 윤 교수가 눈을 놓아주지 않았다.윤 교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날 옆자리 앉은 여자 약은 먹였니?”그랬다고 대답했다.“그래서. 올라가서 뭐 했어.”잠깐 망설이다 ‘잤다’고만 대답했다. 윤 교수의 눈이 더 달라고 했다.윤 교수의 손이 내려왔다. 내 중심으로. 참아보려고 했는데, 잡히자마자 완전히 발기해버렸다.손바닥이 조금 차가웠고, 깡말라 있었다. 손가락과 손목에 낀 금붙이들이 피부에 닿아서 닭살이 돋았다. 큰 다이아 두 알이 박힌 반지는 오른손 약지에, 작은 큐빅이 촘촘한 반지는 중지에 끼워져 있었다.윤 교수가 자세한 이야기를 원했다. 약기운이 올라왔는지 방에 갔을 때는
윤정희의 방은 세경의 방에서 복도 반대쪽 끝이었다. 교수연구실 두 개를 합친 것만큼 넓은 방. 세경은 문 앞에서 재킷을 슥슥 쓸어내리고 단추를 다시 채웠다. 노크를 하기 전, 손목시계를 한번 쓰다듬었다.— 똑똑 “들어와요.”윤정희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을 손짓으로 권하고, 세경이 앉는 동안 한 번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그 눈이 어디서 뭘 듣고와서 자신을 보는 지 세경은 알았다.윤정희 역시 서랍 속 보고서에 적힌 그 얼굴이었다. 세경은 다리를 꼬지 않고 무릎을 붙였다.“그날은 잘 들어갔지?” “……네. 괜찮았습니다.” “괜찮았구나. 취한것 같아서 걱정했잖아.”윤정희가 찻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고 손목만 돌렸다. 팔찌가 반짝였다.“나는 그날 박 교수가 그렇게 빨리 자리를 뜰 줄 몰랐는데. 실장이 택시는 잘 잡아줬지? 내가 나가본다는걸, 김단장이 하도 잡아서…” “네. 바로 택시 잡아주더군요.” “그래. 하… 나도 이제 그런자리 힘들어서 못하겠어. 학과장도 이제 그만할때가 됐나봐. 우리 박교수 같은 사람이 빨리 이 자리 물려받았으면 좋겠어.”윤정희는 자기방을 둘러보며 소파 가죽을 한번 쓸어내렸다.“과찬이십니다.”세경은 단발을 귀 뒤로 넘겼다. 넘기는 손목에 윤정희의 시선이 걸렸다.“그 시계 참 오래 끼고 다니네. 이제 새 걸로 하나 바꿔 끼지 그래? 옷은 좋은 거 입고 다니면서. 내가 하나 사 줘?” “끼던 게 편해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래… 그래…편한 거 좋지. 사람도 그렇고.”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 다 같은 밤을 떠올리면서 전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고 있었다. 교수들이 하는 대화란 원래 그랬다.세경도 윤정희를 봤다. 보고서에 적혀 있던 젖은 눈. 소리를 내던 입. 그 애의 몸을 잡았다던 손끝. 그 손목에 걸린 세 줄짜리 금팔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세경은 어금니로 눌렀다.“팔찌… 예쁘네요. 까르띠에 맞죠?” “박 교수 이
— 똑똑09:00결재판이 두 손으로 들어왔다. 세경은 한 손으로 받았다. 어제보다 두꺼웠다.“방에 가 있어.”그가 멈칫했다. 어제까지는 앞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오늘은 나가라고 했다.이유는 묻지 않았다. 한결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나갔다.— 철컥소리를 들었는데도 세경은 일어나서 손잡이를 당겨 봤다. 닫혀 있었다. 그 문에 등을 댔다. 잠깐.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표지를 넘겼다.결재판은 어제보다 무거웠다. 종이도 늘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세경은 그걸 책상에 올려놓고 잠깐 보기만 했다. 표지. ‘논문 검토 보고서.’첫 장은 어제와 같았다. 시각, 돈 묶음, 재킷, 구두. 둘째 장도 같았다. 셋째 장부터 달랐다.처음 몇 줄은 어제 오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시각이 있고, 동작이 있고, 그 여자가 한 말이 있었다.그런데 어느 줄부터인가 시각이 없어졌다. 동작만 남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손가락이 어디를 쥐었는지, 어디서 소리가 났고 어디서 소리가 안 났는지.세경은 그걸 읽었다. 문이 닫힌 방에서, 빨간 펜을 쥔 채로.손목시계를 치던 펜이 멈춰 있었다.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꼬았다. 창문을 봤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종이로 돌아왔다. 사 층이었다. 누가 볼 리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했다.“하?!”넷째 장에서 세경은 한 번 종이를 덮었다. 손바닥으로. 덮고 나서 자기 손바닥이 뜨거운 걸 알았다. 귀가 뜨거웠다. 숨이 나오는 곳이 코인지 입인지도 헷갈렸다.“후우……크흠.”세경은 깊게 한숨을 내뱉다가 헛기침을 했다. 목에 가래가 잔뜩 걸려 있었다. 빨간 펜으로 윤정희의 말, 그리고 반응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또 물음표를 그렸다. 뒤로갔다가 앞으로 돌아왔다. 몇 번을.상상도 못했던 윤정희의 반응에는 아래에 줄을 긋고 별표를 체크해 뒀는데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읽었다.— 탁『윤정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전
열 시가 넘어 있었다.모니터에는 워드 창이 하나 떠 있었고,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윤 교수는 눈을 감고...』거기까지 썼다. 기억은 분명했다. 글자로 옮기는 게 다른 일이었다.낮에 파쇄기가 돌아가던 소리를 떠올렸다. 벗으라고 하던 윤정희보다, 몇 시간을 들여 써 간 종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갈아 버린 세경 쪽이 더 오래 남았다.‘숨소리 하나까지.’숨소리라면 기억했다. 들이켜기만 하고 내쉬지 못하던 숨. 그다음에 터지던 숨. 거기까지는 사실이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어디까지 써야 하나.“후우…”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 소리를 냈다. 천장 형광등이 모니터 위로 희게 번져 있었다. 저 불을 끄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탁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이 꺼지고 모니터만 남았다. 깜빡이는 커서가 아까보다 크게 보였다.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는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둘러봤다. 아직 주인이 없는 책상들과 창문. 창문 너머로 가로등, 그 사이의 주차장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허리를 펴고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등에서 소리가 났다.— 뚜뚝 “으으으…”몸이 굳어 있었다. 책상 앞에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수색훈련에서는 두 시간을 한자리에 엎드려 있어도 이러지 않았는데. 몸은 엎드리는 데 익숙했고 앉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출입문 위 문틀에 손을 걸었다. 손가락 네 개가 걸릴 만큼의 턱. 몸을 당겨 올렸다.한 번. 두 번.내려올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부터 내렸다. 열 번째에서 손을 놓았다.문틀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는데 그가 손가락을 걸었던 자리만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한결은 손을 툭툭 털고는 복도로 나갔다.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고 센서등이 그를 따라 하나씩 켜졌다. 끝까지 가기 전에 멈췄다. 복도 끝, 412호. 문 아래
— 똑똑09:00세경은 펜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맹해보이는 차림. 세경이 시킨 그대로어젯밤 윤정희의 방에 있던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세경 자신도 그날 밤 그를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테니까.그가 결재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맨 위는 비품 신청서였다. 세경은 품명 옆 칸에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말했다.“과 행정조교한테 물어본거니?”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 “품명에는 모델명이 아니고 규격을 쓰는 거야. 그 조교한테 묻지말고 내가 결재했던 서류들만 찾아서 참고해. 다시 해 와.”그 한장을 빼내 한결에게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이건…”종이를 받아 든 한결이 주춤거리고 서 있자 세경은 턱으로 그의 뒤를 가리켰다. 서류파쇄기.“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종이는 갈려나갔다.비품 신청서를 걷어내고 나니 ‘논문 검토 보고서’라는 표지가 나왔다.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세경. 앞머리 사이로 눈이 슬쩍 올라왔다가 다시 서류판으로 내려왔다.— 스륵넘어가는 표지10.24. 22:40 P호텔 1602호. 윤 교수 단독. 23:50경 휴대폰 문자 다수 수신(이사장 긴급 호출). 윤 교수 통화 1건, 상대는 재단 사무처 김 실장(으로 추정). 통화내용: 압수수색 예정 확인, 서류 준비 지시, 신 사장 출국 지시. 박세경 교수 언급 1회(“입단속”). 통화 종료 후 퇴실 지시. 00:20 퇴실.세경은 두 번 읽었다. 시간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고, 순서가 있었다. 그가 그 방에서 뭘 듣고 뭘 봤는지가 한 장에 들어 있었다. 간단했고 쓸 만했다.압수수색. 세경은 그 네 글자를 펜 끝으로 짚었다. 늘 이런식이었다.미리 알려주고 하는 압수수색.재단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사장, 아니 그 사람의 방에. 그 방에 뭐가 있는지 세경은 몰랐다. 측근이라는 윤정희도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입단속
열두 시 사십 분.세경은 412호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리뷰할 논문이 펼쳐져 있었고, 빨간 펜은 한 시간째 같은 줄에 놓여 있었다.창밖은 어두웠다. 공학관은 캠퍼스 가장 안쪽이라 밤에는 가로등 두 개가 전부였다. 그 두 개 사이로 주차장이 보였고, 주차장 너머로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세경은 그 길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블라인드를 내렸다가 다시 반쯤 올렸다.집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내일 1교시 수업이 있었고, 며칠째 붙들고 있는 리뷰논문은 하루쯤 더 본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이 건물에서 이 시간까지 불을 켜 놓은 방은 자기 방 뿐이었다. 남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표면적으론열 시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었다. 건물 전체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연구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화장실 물소리, 엘리베이터 소리까지도 희미하게 올라왔다. 세경은 그때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다.윤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세경은 알았다. 돈을 쓰는 법도, 사람을 세워 놓고 기다리는 법도, 기다리게 해 놓고 즐기는 법도. 그 애가 그 방에서 뭘 하고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정하고 나서도 떠오르는 장면이 종이 위의 글자를 자꾸 흔들었다.세경은 쓰던 펜을 내려놓고 같은 종류의 다른 펜을 집어들었다. 논문의 같은 줄에 한 번 더 밑줄을 그었다. 이미 그어진 줄 위에. 줄이 굵어졌다. 세경은 그 굵어진 줄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하아…”사흘 전 이 방에서 그 애한테 한 말을 떠올렸다. ‘더한 일도 있을 거야. 더 더럽고.’ 그 말을 할 때 세경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나. 사실 구체적인 건 없었다. 그렇고 그런 일이겠거니 했을 뿐,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려질 줄은 몰랐다.어쨌든 보낸 건 자신이었다. 등록금과 하찮은 생활비 몇 푼으로. 그 아이는 누군가 책임져 주겠다는 말만 믿고 지금까지 살아 왔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게 등록금 절반을 걱정하는 생활이었고.‘나는 적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