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가 아는 건 옷 취향이에요.”
해경은 세린이 꺼둔 화면을 가리켰다.
“한별 씨가 좋아하는 사람까지는 몰라요. 그건 직접 물어보셔야죠.”
“그렇죠. 그래도 옷은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세린이 다시 사진을 띄웠다. 첫 번째는 장식이 많은 검은 원피스, 두 번째는 어깨가 드러나는 파란 원피스였다.
“저라면 두 번째요. 지난번에 이 색 입으셨을 때 좋아하셨잖아요.”
“오빠가요?”
“세린 씨가요.”
세린이 잠시 화면을 보더니 웃었다.
“맞아요. 그랬어요.”
해경은 휴대폰을 돌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걸로 골라요. 계속 옷 신경 쓰느라 할 말 놓치지 마시고.”
“내일 저녁에 얘기하려고요. 오빠한테 밥 먹자고 했어요.”
해경은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약속 잡으셨으면 옷은 천천히 정하셔도 되겠네요.”
세린이 고맙다고 하자 해경도 웃어줬다.
방으로 돌아와 해경은 파란 원피스 사진을 다시 열었다.
옷만 보려던 건데, 검색창에는 어느새 '한별 이상형'이 적혀 있었다.
'내가 이걸 왜 검색해.'
지웠다. 세린도 옛날 인터뷰까지 부탁하지는 않았다.
세수하고 돌아오니 휴대폰에 한별의 얼굴이 떠 있었다. 지운 건 검색어뿐이었다.
해경은 화면을 엎었다.
'잘생긴 건 알겠고. 잠이나 자자.'
다음 날, 한별의 촬영은 점심 전에 끝났다. 해경은 의상 사진을 남기려고 재킷을 정리했다. 한별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어제 손은 괜찮아요?”
해경은 손바닥을 펼쳤다가 도로 접었다.
“괜찮아요. 자국도 없어졌고요.”
“그럼 됐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화면을 봤다. 해경은 옷걸이를 반대로 걸었다가 방향을 바꿨다.
'물어볼 거면 얼굴도 보고 물어보든가.'
쳐다봤으면 또 뭘 보냐고 했을 텐데. 해경은 옷걸이에서 손을 뗐다.
한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다음 옷은 저거죠? 지금 갈아입을까요?”
“내일 입으시는 거예요. 오후엔 세린 씨만 촬영 있고요.”
“알아요. 다음 옷 미리 보자고 했잖아요.”
어제 해경이 남긴 요청이었다. 한별은 재킷을 받아 탈의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왜 이렇게 순순해.'
금방 답이 떠올랐다. 저녁 약속이 있었다.
해경은 그 생각을 밀어내고 카메라를 켰다. 한별이 나오자 소매부터 맞췄다. 그는 옷깃을 손으로 들고 기다렸다.
“목은 그냥 두세요. 제가 볼게요.”
“실장님 손이 여기까지 와야 하잖아요.”
그가 고개를 낮추자 해경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바로 앞에 그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이러면 더 불편해요.”
한별이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그럼 앉을게요.”
그가 뒤에 있던 바퀴 의자를 당겼다. 앉는 순간 의자가 뒤로 밀렸다. 해경은 반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잡았다. 한별은 테이블을 짚고 버텼다.
“실장님. 목.”
해경은 손을 놓았다.
“옷 늘어나겠어요.”
“나는 목이 늘어날 것 같은데.”
그녀가 웃자 한별이 의자 바퀴를 발로 고정했다.
“웃지만 말고 여기 좀 잡아줘요.”
“가만히 계시면 편하다고 했잖아요.”
“가만히 있는 건 나고, 움직인 건 의자예요.”
이번에는 해경이 의자를 잡아줬다. 앉고 나니 옷깃에 손이 쉽게 닿았다.
“이 높이는 편해요?”
그가 뒤집힌 깃을 잡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방금 목이 졸렸으면서도 그걸 먼저 물었다.
'꼭 웃고 나면 저러더라.'
“오늘 저녁에 나가시죠?”
옷깃을 펴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런 걸 먼저 물었을까.
한별은 해경을 봤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세린 씨가 옷 물어보셔서요.”
“실장님한테요?”
“파란색 입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한별은 더 묻지 않았다. 해경은 사진을 찍고 재킷을 벗어달라고 했다. 그가 건넨 옷을 받으며 덧붙였다.
“잘 다녀오세요.”
말하고 나서야 해경은 카메라 뒤로 얼굴을 숨겼다. 고백까지 응원한 건 아니었다.
한별이 셔츠 소매를 내렸다.
“실장님은 오늘 뭐 해요?”
“정리하고 쉬죠.”
“그러세요.”
그가 먼저 준비실을 나갔다. 해경은 닫힌 문을 보다가 사진 속 소매를 확대했다. 주름 하나 없이 잘 맞았다.
'일 잘했네. 됐어.'
그런데 찍은 사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재하에게서 최종 시안이 도착했다. 해경이 고른 안감이 화면 안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이 방향으로 갈게. 네 이름도 의상 디렉팅으로 넣었어.〉
배우 이름 아래 류해경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좋아. 나중에 출력본 하나 줘.〉
해경은 자기 이름을 확대해 저장했다. 화면을 줄이자 한별의 얼굴도 같이 나타났다.
'의자는 밀리고 얼굴은 멀쩡하네.'
입가가 올라가는 걸 느끼고 다시 크레딧만 잘랐다.
저녁 무렵, 세린이 파란 원피스를 입고 준비실에 왔다. 해경은 어깨끈 길이만 조금 맞춰줬다.
“이 정도면 괜찮아요. 앉았을 때도 불편하지 않고.”
세린이 거울을 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긴장돼서 자꾸 바꿔 입을까 싶었어요.”
“바꿔도 긴장되는 건 똑같을걸요.”
“그건 그렇네요. 옷 두 벌 갈아입으면 두 번 긴장하고.”
세린이 웃자 해경도 웃었다. 이번에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됐다.
그녀가 나간 뒤 해경은 도구를 정리했다. 어깨끈에 꽂았던 핀 두 개를 작은 통에 넣었다.
복도에서 한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린이 대답하는 소리도 이어졌다. 해경은 통의 칸을 나눠 핀을 다시 옮겼다.
'나가면 돼. 정리 다 했잖아.'
가방을 들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한별 혼자 서 있었다.
“안 가셨어요?”
“세린이 가방 가지러 올라갔어요.”
해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옆을 지나려 했다.
“해경 씨.”
실장님이 아니라 이름이었다. 해경이 멈추자 한별이 몸을 돌렸다.
“세린이가 오늘 무슨 말 하려는지도 알고 옷 골라줬어요?”
“끊기는 싫은데.”해경은 이불 끝을 만지던 손을 놓았다.“그럼 일 말고 다른 얘기 하세요.”“실장님은 뭐 하고 있었어요?”“사진 봤어요.”말해놓고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뗐다. 굳이 어떤 사진인지 해명하지는 않았다.한별이 물었다.“내 얼굴 늘려놓고 보는 건 아니죠?”“배우님 얼굴보다 제 얼굴이 더 작게 나와서요.”“작은 게 아니라 뒤에 숨었잖아요.”“키가 작으면 숨어도 되거든요.”그가 웃었다. 해경은 침대에 등을 기댔다.“도착하면 주무세요. 또 일 얘기하지 마시고요.”“실장님도 자요.”“네.”그런데 둘 다 바로 끊지 않았다.한별이 먼저 낮게 웃었다.“전화 끊는 건 실장님이 더 못하네.”“배우님이 끊기 싫다면서요.”그때 승재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가야 돼요. 도착하면 연락할게요.”통화가 끝났다.혼자 있는 방이 아까보다 덜 낯설었다.세린에게 전화가 온 건 십 분쯤 뒤였다.“실장님, 지금 혼자 있어요?”“네. 왜요?”“제가 보내는 거 먼저 봐요. 단체방에는 올리지 말고.”해경은 메시지의 링크를 열었다.시장 골목에서 찍힌 짧은 영상이었다.한별이 과자 봉투를 들고 있었고, 자신은 커다란 꽃 머
두 촬영이 같은 날이었다.해경은 단체방의 파일을 다시 열었다. 초안이었다. 다만 자신이 맡은 작품의 남은 실내 장면을 찍는 날이라, 확인 없이 다른 일을 받으면 안 됐다.한별이 휴대폰을 보다가 그녀를 봤다.“표정이 왜 그래요?”“새로 제안받은 촬영이랑 겹쳐요.”“날짜 바꿀 수 있대요?”“물어봐야죠.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차가 도착했다. 해경은 먼저 타고 제작팀에 메시지를 보냈다.국내 촬영일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한별은 옆에 앉았다. 아까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 그의 화면에 떠 있었다.해경은 자기 메시지의 오타를 고치다가 잠깐 그쪽을 봤다.'저걸 아직 보고 있네.'그녀는 날짜 확인 메시지부터 마저 썼다.호텔에 돌아오자 승재가 한별의 짐을 받으러 왔다.해경은 프런트에서 핀 통을 찾아 작업실로 올라갔다.국내 촬영일은 세트와 배우 일정을 맞춰 잡은 날짜라 바뀔 가능성이 작다는 답이 왔다. 확정 공지는 다음 날이라고 했다.해경은 서진에게 바로 전화했다.“그날 기존 프로젝트 촬영이 잡힐 것 같아요. 날짜를 조정할 수 있을까요?”“도윤 씨 쪽은 그날밖에 안 돼요. 다음 날 지방 일정이 있어서.”서진은 잠깐 확인하고 돌아왔다.“확답은 오늘 안에 받아야 하는데, 아직 기존 쪽도 확정 전이죠?”“네. 하지만 그날을 비워드린다고 하긴 어려워요.”말하면서 해경은 달력을 봤다.“그럼 이번에는 다른 사람 구할게요. 다음에 맞는 일이 생기면 다시 얘기해요
“그럼 내일 저랑 나가요.”해경의 말에 한별이 컵을 내려놓았다.“어디요?”“가보면 알아요.”“나한테 그런 대답 싫어한다면서.”해경은 접은 그림을 가방에 넣었다.“싫으시면 안 가셔도 돼요.”“갈 건데. 시간은 알려줘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보여줬다. 화면 한쪽에 저장해둔 해안 전망대가 떴다.한별이 화면과 해경을 번갈아 봤다.“이미 골라놨네.”'그걸 꼭 말해야 돼?'해경은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아홉 시요. 늦지 마세요.”다음 날, 서진에게 귀국 후 촬영 날짜가 왔다.해경은 달력에 표시하고 여덟 시 오십 분에 로비로 내려왔다.한별이 먼저 앉아 있었다.평소보다 단정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가, 원래 저 사람은 늘 저렇게 입었다는 걸 떠올렸다.달라진 건 자기가 보는 방식인 것 같았다.“일찍 나오셨네요.”“늦지 말라면서요.”그가 일어나자 해경은 가방 끈을 고쳐 멨다.어제 입었던 티셔츠 대신 얇은 셔츠를 골랐다. 갈아입다 구겨진 옷은 방 침대 위에 남겨뒀다.'그냥 구경 가는 건데 옷을 몇 번을 갈아입어.'한별이 그녀를 봤다.“오늘은 핀 없어요?”“있어요.”“쉴 때도 들고 다녀요?”해경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고 핀 통을 꺼냈다.정말 들어 있었다.한별이 웃었다.
모레 귀국.해경은 변경된 일정표에서 그 부분을 다시 봤다.남은 실내 촬영은 국내 세트에서 진행하고, 정확한 날짜는 귀국 후 공지한다고 했다. 당장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그런데 옆방에서 소리가 나면 누구인지 알던 생활은 끝났다.한별이 젖은 타월을 들고 다가왔다.“실장님은 짐 많겠네.”“정리해둬서 괜찮아요.”“벌써요?”“늘 정리해놓죠.”그는 타월을 바구니에 넣었다.“돌아가면 좀 쉬겠어요.”“서진 실장님 일정 맞으면 그쪽 일도 해보려고요.”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그 짧은 반응이 아쉬웠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자신도 몰랐다.“아직 확정은 아니고요.”덧붙이자 그가 그녀를 봤다.“좋은 일이라면서요.”“네. 그렇죠.”왜 그 말을 해놓고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일은 좋은데.'그 다음 말은 속으로도 끝내지 않았다.해가 지기 전에 야외 촬영이 마무리됐다.호텔 식당 한쪽에는 제작팀이 마련한 저녁 자리가 있었다. 내일은 장비를 포장해야 해서 송별 식사를 하루 당겼다고 했다.해경은 보조들과 옷을 정리하고 내려왔다.재하가 입구에서 마지막 촬영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끝났어?”“응. 너는?”“이거 보내면. 먼저 앉아.”해경은 빈자리를 찾았다.한별 옆 의자에는 그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누굴 기
다음 날 아침, 해경은 큰 우산을 의상 차량에 실었다.구름은 없었다. 햇빛이 눈부셨다.보조가 하늘을 보고 물었다.“실장님, 오늘 비 온대요?”“혹시 모르니까.”설명은 짧게 했지만 우산은 어젯밤 호텔에서 빌려둔 것이었다.한별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해경은 손잡이를 짐 사이로 밀었다.이미 늦었다.“오늘은 실장님 차례예요?”“촬영용이에요.”“우산 나오는 장면 없는데.”“그늘도 만들고요.”한별이 우산을 꺼내 펼쳤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한참 남을 크기였다.“이건 너무 먼데.”“뭐가요?”“들어가도 서로 안 닿겠네.”해경은 우산을 접어 그의 손에서 뺏었다.“그게 정상이에요.”'아침부터 무슨 말을 저렇게 해.'보조가 트렁크 안을 유난히 열심히 정리했다. 해경은 못 들은 척해주는 게 더 민망했다.촬영장은 해변 끝의 낮은 선착장이었다.오늘은 한별이 세린을 붙잡으려다 얕은 물에 발을 빠뜨리는 장면을 찍었다. 안전요원이 물높이와 바닥을 확인하고, 배우들은 먼저 마른 곳에서 동선을 맞췄다.해경은 젖는 옷과 마른 옷을 따로 걸어놓았다.한별이 운동화를 벗고 물가로 내려갔다.“차갑네.”발목까지 들어간 그가 해경을 봤다.“실장님은 안 들어와요?”“배우님이 나오시면 됩니다.”“옷 봐야죠.”
“본인은 뭘 했는지는 말 안 했을 텐데.”도윤이 의자에 앉았다. 한별은 물잔을 제 쪽으로 당겼다.“네가 얘기하면 되겠네.”“감독님 앞에서 사람 무안하게 한 건 기억하지?”해경은 숟가락을 들다가 내려놓았다.도윤이 그녀를 봤다.“같이 찍던 작품에서 제가 동선을 좀 바꿨어요. 감정이 그렇게 가길래. 그런데 이 친구가 감독님 듣는 데서 합의한 대로 하자고 딱 잘라버리더라고요.”“좀 바꿨다고?”한별이 물었다.“카메라 다시 놓고 조명 다시 잡았어요. 그날 두 시간 더 찍었는데.”“결과는 좋았잖아.”“다른 사람들 시간도 네 감정 따라가야 돼요?”도윤은 웃었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짧았다.“그 말을 따로 해도 됐다는 거지.”해경은 두 사람 사이의 물병을 옆으로 옮겼다. 어느 쪽 손에도 걸리지 않게.도윤이 물었다.“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저 그 현장에 없었는데요.”“그냥 얘기 듣고 판단해보라는 거죠.”“그럼 두 분 다 피곤하신 걸로 할까요? 저 지금 밥 먹다가 심사위원 됐어요.”한별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식사를 너무 방해했네요.”“네. 식기 전에 먹으려고 골랐는데 식었어요.”서진이 도윤의 의자 등받이를 두드렸다.“그러니까 그만하고 네 자리 앉아. 사람 밥 앞에서 옛날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