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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Author: 이스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3 09:08:29

“세린이가 오늘 무슨 말 하려는지도 알고 옷 골라줬어요?”

해경은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고백하고 싶다고는 들었어요.”

“그런데 잘 다녀오라고 한 거예요?”

“제가 만나보시라고 했어요? 옷만 봐드렸죠.”

한별은 창밖을 보다가 다시 해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실장님은 나한테 관심 없다는 걸 꼭 이렇게까지 보여줘야 해요?”

해경은 가방끈에서 손을 뗐다.

'옷 골라준 게 왜 거기까지 가.'

“배우님한테 관심 가져야 하는 것도 제 일이에요?”

“일 얘기 아니잖아요.”

“그럼 더더욱 저한테 그러시면 안 되죠.”

한별의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세린이 작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해경은 한 발 물러나 자리를 내줬다.

“두 분 다녀오세요.”

이번에는 한별을 보지 않았다. 계단 쪽으로 가는데 세린이 무슨 얘기 중이었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별의 대답에 해경은 계단 문을 조금 세게 밀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왜 붙잡아.'

재하와는 라운지에서 최종 포스터를 확인하기로 했다. 해경이 내려갔을 때 그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와? 좀 쉬다 올 줄 알았는데.”

“할 거 하고 쉬려고.”

해경은 맞은편에 앉았다. 재하가 화면을 돌렸다. 수선집의 낡은 벽을 배경으로 한별과 세린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입은 옷의 색이 해경의 시안과 거의 같았다.

“좋다. 이 안감 보이는 거 진짜 잘 나왔네.”

마지막 컷을 고르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재하가 출력본을 책상에 두겠느냐고 묻자 해경은 자기 이름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잘 보이게. 액자도 할까?”

“그럼 한별 씨랑 세린 씨 얼굴도 같이 걸리는데.”

“밑에만 자를까.”

“첫 포스터가 하반신 사진이네.”

해경이 웃다가 휴대폰 진동에 손을 뻗었다. 의상 보조의 반납 완료 메시지였다.

'이 연락 기다린 거야.'

답장을 쓰고 휴대폰을 뒤집었다. 곧 다시 울렸다. 그녀의 손이 먼저 움직이자 재하가 화면을 짚었다.

“저 사람 사진 자른다면서 연락은 왜 이렇게 바쁘게 받아?”

“보조야. 반납 확인.”

“알아. 물어본 건데 범인처럼 대답하네.”

해경은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냥 물어본 거면 그냥 물어봐.'

마지막 컷은 얼굴까지 남겼다. 한별이 잘 나와서가 아니라, 옷 전체를 봐야 하는 사진이니까.

재하가 돌아간 뒤 해경은 빈 컵을 치웠다. 집게로 종이컵을 집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별이 들어왔다.

해경은 시계를 확인했다. 나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세린은 뒤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끝났나?'

컵이 찌그러졌다. 해경은 쓰레기통에 넣었다.

“벌써 오셨어요?”

한별은 라운지 입구에서 멈췄다.

“몇 시에 와야 되는데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나도 그냥 대답한 건데.”

해경은 겹친 종이컵 두 개를 그에게 건넸다.

“대답하시면서 이것 좀 빼주세요.”

한별이 컵을 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붙인 거예요?”

“네. 배우님 오시면 시키려고요.”

해경은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줬다.

“조금 돌려서 빼세요.”

“알아요.”

컵 하나가 쑥 빠졌다. 한별이 빈 컵을 내밀자 해경은 엄지를 세웠다.

“잘하셨어요.”

“이 칭찬 말고.”

해경은 집게를 내려놓았다. 웃으면 또 자신만 싸우러 온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저 먼저 올라갈게요.”

“아까는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발을 떼려던 해경이 그를 봤다. 한별은 탁자 끝에 놓인 냅킨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거뒀다.

“옷 골라준 걸 실장님한테 따질 일은 아니었는데.”

“네. 저도 기분 나빠서 말이 세게 나갔고요.”

“그럴 만했어요.”

그는 남은 컵도 쓰레기통에 넣었다. 사과받고 정리까지 끝났다. 해경은 가방을 들었다.

'물어보면 또 관심 있냐고 하겠지.'

그래서 묻지 않았다.

“세린 씨는요?”

다른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해경은 가방 지퍼를 괜히 확인했다.

“차에서 통화해요. 곧 들어올 거예요.”

“아. 네.”

한별은 그녀의 짧은 대답을 듣고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더 물어볼 건 없어요?”

“제가 뭘 더 물어봐요.”

“아까는 잘 다녀오라면서요.”

“인사였어요. 결과 보고해달라는 뜻 아니고요.”

해경은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한별이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한 자신부터 그만두고 싶었다.

“앞으로 개인적인 일은 제가 신경 안 쓸게요. 배우님도 그러세요.”

“어떤 개인적인 일.”

“짐 들어주시고, 손 괜찮냐고 물으시고. 그런 거요.”

손잡이 자국이 어디 났었는지까지 떠올랐다. 해경은 얼른 말을 멈췄다.

'이걸 왜 다 말해. 그냥 올라가면 되는데.'

그녀는 가방끈을 당겼다.

“괜히 서로 불편해지니까요.”

한별은 잠깐 가방을 보더니 해경과 눈을 맞췄다.

“불편했어요?”

“그런 뜻은 아니고요.”

“아까는 그렇게 말했잖아요.”

이럴 때도 하나하나 따졌다. 해경은 고마웠다는 말까지 거짓말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신 건 감사해요. 그런데 평소에는 꼭 한마디씩 비꼬시면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시면—”

“무슨 말.”

“덜 힘들어도 된다고 하신 거요.”

한별이 그 말을 떠올리는 듯 해경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손을 가방 뒤로 옮겼다.

“어제 힘들어 보였으니까.”

“알아요. 그런데…… 헷갈리게 하시잖아요.”

텔레비전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해경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업무 얘기야. 그렇게 들리면 돼.'

“업무 구분이요. 어디까지 부탁드려도 되는지—”

“해경 씨.”

한별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녀가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해경은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내가 누구한테나 그러는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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