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별이 카메라 화면을 들여다봤다. 해경은 확대해놓은 사진을 서둘러 줄였다. 그의 얼굴만 화면에 꽉 차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왜 하필 지금 와.'
“내 얼굴부터 확인했어요?”
“배우님 사진이니까요.”
“실장님도 나왔는데.”
“제 얼굴은 제가 알아요.”
한별이 화면을 다시 확대했다. 해경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놀라서 잡았다고, 소매를 일부러 당긴 건 아니라고 설명할 준비까지 했다.
“이건 쓰면 안 되겠네요.”
“알아요. 재하가 지운댔어요.”
“내가 너무 놀랐잖아요. 재킷 광고가 아니라 안전교육 같아서.”
해경은 화면에서 손을 뗐다.
'누가 쓰자고 했나.'
재하가 사진을 삭제했다. 한별이 재킷을 벗어 건네자 해경은 옷걸이에 걸었다. 안쪽에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소매 자국을 확인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후엔 선 정리해둘게요. 안 놀라시게.”
“넘어지지만 마요. 그게 빠르겠네.”
“오늘 아침부터 아주 바쁘시네요. 구경도 하고 잔소리도 하고.”
“그러게. 커피 사러 왔는데.”
한별은 테이블에 둔 커피를 들고 나갔다. 해경이 문 쪽을 보자 재하가 다른 한 잔을 그녀에게 밀었다.
“이거 네 거 아니야?”
“그런 말 없었어.”
“그럼 내가 마신다.”
해경은 대답하려다 시안부터 집었다.
'마시든가. 나 주려고 샀으면 말을 했겠지.'
컵에 손이 갈까 봐 가방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후에는 세린까지 합류했다. 두 배우가 나란히 서자 재하의 말수가 줄었다. 짧게 방향만 알려줘도 한별과 세린은 동시에 몸을 틀었다.
“오빠, 나 어깨 내려도 돼?”
“응. 내가 맞출게.”
세린이 자세를 풀자 한별이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해경은 모니터를 보며 재킷의 주름을 확인했다.
'저쪽은 말 한마디면 되네.'
자기한테는 얼마나 기울이냐고 되묻던 사람이었다.
해경은 소매를 고치러 들어갔다. 세린이 한별의 손목을 잡고 웃었다.
“오빠, 이쪽 손은 어디 둘 거야?”
“네가 편한 쪽.”
해경은 손목 위로 접힌 소매를 폈다. 한별의 손이 조금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위치를 물어보지 않았다.
“이 정도요?”
“네.”
해경은 확인도 하기 전에 대답하고 다시 소매를 봤다. 알맞은 높이였다. 그게 왜 조금 짜증 나는지 몰랐다.
'빨리 찍고 끝내자.'
촬영은 예정보다 늦게 끝났다. 재하는 남은 장비를 정리하고, 해경은 의상 케이스를 차에 싣기로 했다. 보조는 먼저 반납 차량을 타고 출발했다.
케이스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다른 손이 먼저 걸렸다.
한별이었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요.”
“두고 가세요. 옷 순서 확인해야 해요.”
“확인해요. 들고 가는 건 내가 하고.”
그는 케이스를 세워 그녀 쪽으로 열어줬다. 해경은 목록을 꺼냈다. 이렇게 나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뭐야. 아침엔 실컷 약 올리더니.'
옷 수를 맞추고 지퍼를 닫자 한별이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어디까지요?”
“주차장인데요. 배우님 차는 반대쪽이고.”
“멀어요?”
“조금요.”
“그럼 같이 가요.”
해경은 그를 따라 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저 못 드는 거 아니에요.”
한별도 멈춰 섰다. 케이스를 내려놓고 해경의 손을 봤다. 손잡이 자국이 손바닥 아래에 붉게 남아 있었다.
해경은 목록을 접어 그 위에 올렸다.
“원래 이 정도는 생겨요.”
“드실 수 있는 거 알아요.”
“그런데 왜 자꾸—”
“오늘은 좀 덜 힘들어도 되잖아요.”
해경의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별은 이미 케이스를 들고 계단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걸 알아채고 돌아섰다.
“차 키는 실장님이 갖고 있죠?”
“네. 제가 열게요.”
해경은 그보다 앞서 걸었다.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무겁다고 했으면 됐다. 자기도 손이 있다고, 맡겨보라고 했어도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을 텐데.
차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켰다. 한별이 케이스를 싣고 손잡이를 안쪽으로 돌려놓았다.
“이쪽으로 해두면 꺼내기 편하죠?”
해경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번엔 두 번 안 시켜요. 피곤해 보여서.”
그는 차 문을 닫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해경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가 나오자 볼륨부터 줄였다.
해경은 핸들을 잡았다가 손바닥을 뒤집어 봤다. 케이스는 매번 들던 무게였다. 아까 그 말만 아니었으면 손에 자국이 났다는 것도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원래 사람 짐도 잘 들어주나?'
물어볼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걸 재하에게 묻는 건 더 이상했다.
'피곤해서 말이 없었던 건 아닌데.'
혼잣말로라도 정정하고 싶어졌다. 누구에게 설명할 일인지도 모르면서.
숙소에 돌아오니 세린이 공용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실장님, 잠깐 얘기할 수 있어요?”
해경은 의상 수정 얘기인 줄 알고 옆에 앉았다. 세린이 휴대폰에 저장해둔 원피스 두 벌을 보여줬다.
“이런 스타일 중에 오빠가 좋아할 만한 게 있을까요?”
“다음 촬영 의상이요?”
“아뇨. 제가 입으려고요.”
해경은 화면을 다시 봤다. 대본 속 세린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옷이었다.
“그럼 세린 씨가 편한 걸 고르세요. 배우님 취향을 왜—”
“고백하려고요.”
세린이 화면을 끄고 해경을 마주 봤다.
“이번에는 그냥 동료로 끝내고 싶지 않아서요.”
해경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폈다. 붉은 자국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세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도와주실 수 있어요? 실장님이 오빠 취향은 제일 잘 아시잖아요.”
“국내 촬영 전에 소속사랑 같이 만나야겠습니다.”제작팀 책임자의 말에 해경은 의자에 앉았다.“어떤 내용을 확인하시려고요?”“현장에 영향이 없도록 대응을 맞추자는 겁니다. 광고주 쪽에서도 연락이 왔고요.”“제가 일을 하지 않았다는 글도 확인하셨어요?”“네. 촬영표와 의상팀 인계 기록부터 정리하겠습니다.”해경은 그제야 가방에서 일정표를 꺼냈다.그날 마지막 옷을 반납한 시간, 보조들과 다음 촬영 준비를 마친 시간. 모두 적혀 있었다.사람들이 본 건 퇴근한 뒤의 몇 초였다.'이렇게 길게 일했는데.'그녀는 필요한 기록을 보냈다. 입장문에 자기 이름을 다시 적어 신원을 더 퍼뜨리지는 말아달라고 덧붙였다.책임자는 귀국 다음 날 오전에 만나자고 했다.통화를 마친 해경은 침대에 누웠다.잠들려고 눈을 감았는데 꽃 머리끈이 떠올랐다.그걸 고르며 웃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게 싫었다.그날은 좋았다. 누가 이상하게 붙여놓은 말 때문에 그 기억까지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다음 날 아침, 한별은 입국장을 나오기 전에 메시지를 확인했다.해경이 보낸 링크를 열었다. 승재는 옆에서 소속사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국내 홍보 담당자가 전화 너머로 사실관계 확인 내용을 설명했다.“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입장부터 내겠습니다. 두 분은 업무로만 접촉한 사이로…….”한별은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그건 아니죠.”“배우님, 일단 추측을 차단해야 해서요.”“같이 나간 건 맞아요
“끊기는 싫은데.”해경은 이불 끝을 만지던 손을 놓았다.“그럼 일 말고 다른 얘기 하세요.”“실장님은 뭐 하고 있었어요?”“사진 봤어요.”말해놓고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뗐다. 굳이 어떤 사진인지 해명하지는 않았다.한별이 물었다.“내 얼굴 늘려놓고 보는 건 아니죠?”“배우님 얼굴보다 제 얼굴이 더 작게 나와서요.”“작은 게 아니라 뒤에 숨었잖아요.”“키가 작으면 숨어도 되거든요.”그가 웃었다. 해경은 침대에 등을 기댔다.“도착하면 주무세요. 또 일 얘기하지 마시고요.”“실장님도 자요.”“네.”그런데 둘 다 바로 끊지 않았다.한별이 먼저 낮게 웃었다.“전화 끊는 건 실장님이 더 못하네.”“배우님이 끊기 싫다면서요.”그때 승재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가야 돼요. 도착하면 연락할게요.”통화가 끝났다.혼자 있는 방이 아까보다 덜 낯설었다.세린에게 전화가 온 건 십 분쯤 뒤였다.“실장님, 지금 혼자 있어요?”“네. 왜요?”“제가 보내는 거 먼저 봐요. 단체방에는 올리지 말고.”해경은 메시지의 링크를 열었다.시장 골목에서 찍힌 짧은 영상이었다.한별이 과자 봉투를 들고 있었고, 자신은 커다란 꽃 머
두 촬영이 같은 날이었다.해경은 단체방의 파일을 다시 열었다. 초안이었다. 다만 자신이 맡은 작품의 남은 실내 장면을 찍는 날이라, 확인 없이 다른 일을 받으면 안 됐다.한별이 휴대폰을 보다가 그녀를 봤다.“표정이 왜 그래요?”“새로 제안받은 촬영이랑 겹쳐요.”“날짜 바꿀 수 있대요?”“물어봐야죠.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차가 도착했다. 해경은 먼저 타고 제작팀에 메시지를 보냈다.국내 촬영일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한별은 옆에 앉았다. 아까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 그의 화면에 떠 있었다.해경은 자기 메시지의 오타를 고치다가 잠깐 그쪽을 봤다.'저걸 아직 보고 있네.'그녀는 날짜 확인 메시지부터 마저 썼다.호텔에 돌아오자 승재가 한별의 짐을 받으러 왔다.해경은 프런트에서 핀 통을 찾아 작업실로 올라갔다.국내 촬영일은 세트와 배우 일정을 맞춰 잡은 날짜라 바뀔 가능성이 작다는 답이 왔다. 확정 공지는 다음 날이라고 했다.해경은 서진에게 바로 전화했다.“그날 기존 프로젝트 촬영이 잡힐 것 같아요. 날짜를 조정할 수 있을까요?”“도윤 씨 쪽은 그날밖에 안 돼요. 다음 날 지방 일정이 있어서.”서진은 잠깐 확인하고 돌아왔다.“확답은 오늘 안에 받아야 하는데, 아직 기존 쪽도 확정 전이죠?”“네. 하지만 그날을 비워드린다고 하긴 어려워요.”말하면서 해경은 달력을 봤다.“그럼 이번에는 다른 사람 구할게요. 다음에 맞는 일이 생기면 다시 얘기해요
“그럼 내일 저랑 나가요.”해경의 말에 한별이 컵을 내려놓았다.“어디요?”“가보면 알아요.”“나한테 그런 대답 싫어한다면서.”해경은 접은 그림을 가방에 넣었다.“싫으시면 안 가셔도 돼요.”“갈 건데. 시간은 알려줘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보여줬다. 화면 한쪽에 저장해둔 해안 전망대가 떴다.한별이 화면과 해경을 번갈아 봤다.“이미 골라놨네.”'그걸 꼭 말해야 돼?'해경은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아홉 시요. 늦지 마세요.”다음 날, 서진에게 귀국 후 촬영 날짜가 왔다.해경은 달력에 표시하고 여덟 시 오십 분에 로비로 내려왔다.한별이 먼저 앉아 있었다.평소보다 단정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가, 원래 저 사람은 늘 저렇게 입었다는 걸 떠올렸다.달라진 건 자기가 보는 방식인 것 같았다.“일찍 나오셨네요.”“늦지 말라면서요.”그가 일어나자 해경은 가방 끈을 고쳐 멨다.어제 입었던 티셔츠 대신 얇은 셔츠를 골랐다. 갈아입다 구겨진 옷은 방 침대 위에 남겨뒀다.'그냥 구경 가는 건데 옷을 몇 번을 갈아입어.'한별이 그녀를 봤다.“오늘은 핀 없어요?”“있어요.”“쉴 때도 들고 다녀요?”해경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고 핀 통을 꺼냈다.정말 들어 있었다.한별이 웃었다.
모레 귀국.해경은 변경된 일정표에서 그 부분을 다시 봤다.남은 실내 촬영은 국내 세트에서 진행하고, 정확한 날짜는 귀국 후 공지한다고 했다. 당장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그런데 옆방에서 소리가 나면 누구인지 알던 생활은 끝났다.한별이 젖은 타월을 들고 다가왔다.“실장님은 짐 많겠네.”“정리해둬서 괜찮아요.”“벌써요?”“늘 정리해놓죠.”그는 타월을 바구니에 넣었다.“돌아가면 좀 쉬겠어요.”“서진 실장님 일정 맞으면 그쪽 일도 해보려고요.”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그 짧은 반응이 아쉬웠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자신도 몰랐다.“아직 확정은 아니고요.”덧붙이자 그가 그녀를 봤다.“좋은 일이라면서요.”“네. 그렇죠.”왜 그 말을 해놓고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일은 좋은데.'그 다음 말은 속으로도 끝내지 않았다.해가 지기 전에 야외 촬영이 마무리됐다.호텔 식당 한쪽에는 제작팀이 마련한 저녁 자리가 있었다. 내일은 장비를 포장해야 해서 송별 식사를 하루 당겼다고 했다.해경은 보조들과 옷을 정리하고 내려왔다.재하가 입구에서 마지막 촬영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끝났어?”“응. 너는?”“이거 보내면. 먼저 앉아.”해경은 빈자리를 찾았다.한별 옆 의자에는 그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누굴 기
다음 날 아침, 해경은 큰 우산을 의상 차량에 실었다.구름은 없었다. 햇빛이 눈부셨다.보조가 하늘을 보고 물었다.“실장님, 오늘 비 온대요?”“혹시 모르니까.”설명은 짧게 했지만 우산은 어젯밤 호텔에서 빌려둔 것이었다.한별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해경은 손잡이를 짐 사이로 밀었다.이미 늦었다.“오늘은 실장님 차례예요?”“촬영용이에요.”“우산 나오는 장면 없는데.”“그늘도 만들고요.”한별이 우산을 꺼내 펼쳤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한참 남을 크기였다.“이건 너무 먼데.”“뭐가요?”“들어가도 서로 안 닿겠네.”해경은 우산을 접어 그의 손에서 뺏었다.“그게 정상이에요.”'아침부터 무슨 말을 저렇게 해.'보조가 트렁크 안을 유난히 열심히 정리했다. 해경은 못 들은 척해주는 게 더 민망했다.촬영장은 해변 끝의 낮은 선착장이었다.오늘은 한별이 세린을 붙잡으려다 얕은 물에 발을 빠뜨리는 장면을 찍었다. 안전요원이 물높이와 바닥을 확인하고, 배우들은 먼저 마른 곳에서 동선을 맞췄다.해경은 젖는 옷과 마른 옷을 따로 걸어놓았다.한별이 운동화를 벗고 물가로 내려갔다.“차갑네.”발목까지 들어간 그가 해경을 봤다.“실장님은 안 들어와요?”“배우님이 나오시면 됩니다.”“옷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