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내가 누구한테나 그러는 줄 알았어요?”
해경은 한별의 얼굴을 살폈다. 농담을 기다렸는데, 그는 대답부터 기다렸다.
“세린 씨한테도 잘해주시잖아요.”
“세린이 얘기가 왜 나와요.”
“오늘 촬영할 때도 편하게 맞춰주시고.”
“그건 촬영이잖아요.”
해경은 가방끈을 놓았다.
'또 업무 구분을 나만 못 한 거네.'
“그럼 제 짐 들어주신 건요?”
“해경 씨가 힘들어 보여서요.”
“다른 사람이 힘들어도 도와주실 거잖아요.”
한별은 대답하려다 잠시 멈췄다. 해경은 그 틈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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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촬영이 같은 날이었다.해경은 단체방의 파일을 다시 열었다. 초안이었다. 다만 자신이 맡은 작품의 남은 실내 장면을 찍는 날이라, 확인 없이 다른 일을 받으면 안 됐다.한별이 휴대폰을 보다가 그녀를 봤다.“표정이 왜 그래요?”“새로 제안받은 촬영이랑 겹쳐요.”“날짜 바꿀 수 있대요?”“물어봐야죠.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차가 도착했다. 해경은 먼저 타고 제작팀에 메시지를 보냈다.국내 촬영일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한별은 옆에 앉았다. 아까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 그의 화면에 떠 있었다.해경은 자기 메시지의 오타를 고치다가 잠깐 그쪽을 봤다.'저걸 아직 보고 있네.'그녀는 날짜 확인 메시지부터 마저 썼다.호텔에 돌아오자 승재가 한별의 짐을 받으러 왔다.해경은 프런트에서 핀 통을 찾아 작업실로 올라갔다.국내 촬영일은 세트와 배우 일정을 맞춰 잡은 날짜라 바뀔 가능성이 작다는 답이 왔다. 확정 공지는 다음 날이라고 했다.해경은 서진에게 바로 전화했다.“그날 기존 프로젝트 촬영이 잡힐 것 같아요. 날짜를 조정할 수 있을까요?”“도윤 씨 쪽은 그날밖에 안 돼요. 다음 날 지방 일정이 있어서.”서진은 잠깐 확인하고 돌아왔다.“확답은 오늘 안에 받아야 하는데, 아직 기존 쪽도 확정 전이죠?”“네. 하지만 그날을 비워드린다고 하긴 어려워요.”말하면서 해경은 달력을 봤다.“그럼 이번에는 다른 사람 구할게요. 다음에 맞는 일이 생기면 다시 얘기해요
“그럼 내일 저랑 나가요.”해경의 말에 한별이 컵을 내려놓았다.“어디요?”“가보면 알아요.”“나한테 그런 대답 싫어한다면서.”해경은 접은 그림을 가방에 넣었다.“싫으시면 안 가셔도 돼요.”“갈 건데. 시간은 알려줘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보여줬다. 화면 한쪽에 저장해둔 해안 전망대가 떴다.한별이 화면과 해경을 번갈아 봤다.“이미 골라놨네.”'그걸 꼭 말해야 돼?'해경은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아홉 시요. 늦지 마세요.”다음 날, 서진에게 귀국 후 촬영 날짜가 왔다.해경은 달력에 표시하고 여덟 시 오십 분에 로비로 내려왔다.한별이 먼저 앉아 있었다.평소보다 단정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가, 원래 저 사람은 늘 저렇게 입었다는 걸 떠올렸다.달라진 건 자기가 보는 방식인 것 같았다.“일찍 나오셨네요.”“늦지 말라면서요.”그가 일어나자 해경은 가방 끈을 고쳐 멨다.어제 입었던 티셔츠 대신 얇은 셔츠를 골랐다. 갈아입다 구겨진 옷은 방 침대 위에 남겨뒀다.'그냥 구경 가는 건데 옷을 몇 번을 갈아입어.'한별이 그녀를 봤다.“오늘은 핀 없어요?”“있어요.”“쉴 때도 들고 다녀요?”해경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고 핀 통을 꺼냈다.정말 들어 있었다.한별이 웃었다.
모레 귀국.해경은 변경된 일정표에서 그 부분을 다시 봤다.남은 실내 촬영은 국내 세트에서 진행하고, 정확한 날짜는 귀국 후 공지한다고 했다. 당장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그런데 옆방에서 소리가 나면 누구인지 알던 생활은 끝났다.한별이 젖은 타월을 들고 다가왔다.“실장님은 짐 많겠네.”“정리해둬서 괜찮아요.”“벌써요?”“늘 정리해놓죠.”그는 타월을 바구니에 넣었다.“돌아가면 좀 쉬겠어요.”“서진 실장님 일정 맞으면 그쪽 일도 해보려고요.”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그 짧은 반응이 아쉬웠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자신도 몰랐다.“아직 확정은 아니고요.”덧붙이자 그가 그녀를 봤다.“좋은 일이라면서요.”“네. 그렇죠.”왜 그 말을 해놓고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일은 좋은데.'그 다음 말은 속으로도 끝내지 않았다.해가 지기 전에 야외 촬영이 마무리됐다.호텔 식당 한쪽에는 제작팀이 마련한 저녁 자리가 있었다. 내일은 장비를 포장해야 해서 송별 식사를 하루 당겼다고 했다.해경은 보조들과 옷을 정리하고 내려왔다.재하가 입구에서 마지막 촬영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끝났어?”“응. 너는?”“이거 보내면. 먼저 앉아.”해경은 빈자리를 찾았다.한별 옆 의자에는 그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누굴 기
다음 날 아침, 해경은 큰 우산을 의상 차량에 실었다.구름은 없었다. 햇빛이 눈부셨다.보조가 하늘을 보고 물었다.“실장님, 오늘 비 온대요?”“혹시 모르니까.”설명은 짧게 했지만 우산은 어젯밤 호텔에서 빌려둔 것이었다.한별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해경은 손잡이를 짐 사이로 밀었다.이미 늦었다.“오늘은 실장님 차례예요?”“촬영용이에요.”“우산 나오는 장면 없는데.”“그늘도 만들고요.”한별이 우산을 꺼내 펼쳤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한참 남을 크기였다.“이건 너무 먼데.”“뭐가요?”“들어가도 서로 안 닿겠네.”해경은 우산을 접어 그의 손에서 뺏었다.“그게 정상이에요.”'아침부터 무슨 말을 저렇게 해.'보조가 트렁크 안을 유난히 열심히 정리했다. 해경은 못 들은 척해주는 게 더 민망했다.촬영장은 해변 끝의 낮은 선착장이었다.오늘은 한별이 세린을 붙잡으려다 얕은 물에 발을 빠뜨리는 장면을 찍었다. 안전요원이 물높이와 바닥을 확인하고, 배우들은 먼저 마른 곳에서 동선을 맞췄다.해경은 젖는 옷과 마른 옷을 따로 걸어놓았다.한별이 운동화를 벗고 물가로 내려갔다.“차갑네.”발목까지 들어간 그가 해경을 봤다.“실장님은 안 들어와요?”“배우님이 나오시면 됩니다.”“옷 봐야죠.”
“본인은 뭘 했는지는 말 안 했을 텐데.”도윤이 의자에 앉았다. 한별은 물잔을 제 쪽으로 당겼다.“네가 얘기하면 되겠네.”“감독님 앞에서 사람 무안하게 한 건 기억하지?”해경은 숟가락을 들다가 내려놓았다.도윤이 그녀를 봤다.“같이 찍던 작품에서 제가 동선을 좀 바꿨어요. 감정이 그렇게 가길래. 그런데 이 친구가 감독님 듣는 데서 합의한 대로 하자고 딱 잘라버리더라고요.”“좀 바꿨다고?”한별이 물었다.“카메라 다시 놓고 조명 다시 잡았어요. 그날 두 시간 더 찍었는데.”“결과는 좋았잖아.”“다른 사람들 시간도 네 감정 따라가야 돼요?”도윤은 웃었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짧았다.“그 말을 따로 해도 됐다는 거지.”해경은 두 사람 사이의 물병을 옆으로 옮겼다. 어느 쪽 손에도 걸리지 않게.도윤이 물었다.“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저 그 현장에 없었는데요.”“그냥 얘기 듣고 판단해보라는 거죠.”“그럼 두 분 다 피곤하신 걸로 할까요? 저 지금 밥 먹다가 심사위원 됐어요.”한별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식사를 너무 방해했네요.”“네. 식기 전에 먹으려고 골랐는데 식었어요.”서진이 도윤의 의자 등받이를 두드렸다.“그러니까 그만하고 네 자리 앉아. 사람 밥 앞에서 옛날 얘기
“두 분, 같이 일만 하는 사이 맞아요?”해경은 도윤이 내민 컵을 받았다.“배우님하고도 같이 일만 하는 사이죠.”도윤이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맞는 말이네요. 제가 너무 빨리 물었죠?”“네. 첫날인데요.”“그럼 다음 질문은 좀 아껴둘게요.”그가 옷을 챙겨 탈의 공간으로 들어갔다.해경은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뭘 다음까지 물어.'같이 일하는 사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나니 한별과의 저녁 약속이 괜히 설명해야 할 일이 된 것 같았다.그냥 밥을 먹는 건데.해경은 가방을 챙기면서 그 말을 한 번 더 생각했다.오후 두 시 샘플 반납을 마치고 다시 리조트로 돌아왔다.수정한 재킷은 잘 맞았다. 서진이 확인하고 다음 옷을 넘기는 동안 해경은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빨리 끝내고 싶어서 서두르면 오히려 실수할 것 같았다.다섯 시 반, 마지막 컷을 찍기 시작할 때 비가 왔다.테라스 촬영을 안으로 옮기느라 시간이 밀렸다. 해경은 젖은 바닥에 옷이 닿지 않도록 행거를 옮겼다.'오늘도 길어지네.'아까는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볼 때마다 마음이 급해졌다.한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비 때문에 늦어져요. 먼저 드셔도 돼요.]답은 금방 왔다.[얼마나 늦어요?][아직 몰라요.][그럼 나도 아직 안 먹어요.]해경은 화면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미안하다는 말부터 써야 하는데 웃음이 먼저 나왔다.'배고프다면서 화내기만 해봐.'그녀는 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