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는 안 된다고 했는데요.”
해경이 휴대폰을 탁자 위에 놓았다. 화면에는 해외 화보 출장 명단이 떠 있었다. 류해경. 어젯밤 분명히 거절한 사람의 이름이 맨 위였다.
소속사 실장 오기범이 물잔을 밀어줬다.
“확정본은 아니고요. 배우님이 익숙한 팀을 원하셔서.”
“그럼 배우님을 설득하셔야죠. 왜 저를 출근시켜요?”
옆에 앉은 한별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저한테는 일정 된다고 하셨는데요.”
두 사람이 동시에 기범을 봤다. 그는 물잔을 도로 가져갔다.
“조정하면 될 거라고 말씀드렸죠.”
“누구 일정을요?”
해경이 물었다. 한별도 웃지 않았다.
드라마가 해외에서 흥행하면서 현지 화보와 인터뷰가 한꺼번에 잡혔다. 원래 맡기로 한 팀은 취소됐고 출국은 사흘 뒤였다. 여기까지는 소속사 사정이었다. 해경의 주말까지 소속사 사정일 이유는 없었다.
“기존 예약을 미뤄주시면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그 고객도 자기 일정 미룰 비용을 달라고 하면요?”
한별이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정 안 되면 다른 분 알아보죠. 대신 제 옷이랑 화장 설명은 좀 해주세요.”
“자료 있어요. 보내드릴게요.”
“자료대로 해서 되는 얼굴이면 매번 직접 안 오셔도 됐겠네요.”
해경은 그를 봤다. 한별은 눈도 피하지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칭찬인 줄 알겠다. 해경에게는 안 가면 결과를 책임지라는 소리로 들렸다.
“배우님도 대본 보내주시면 다른 분이 연기해도 돼요?”
기범이 헛기침했다.
“잠깐만요. 싸우자는 자리는 아니고.”
“저도 출근할 때는 몰랐어요.”
해경은 가방을 열었다. 수첩을 꺼내는 동안 한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입을 다물면 주변에서 먼저 눈치를 봤다. 해경은 날짜부터 짚었다.
금요일에 잡힌 개인 작업이 걸렸다. 송재하와 준비한 포트폴리오 촬영이었다. 한별이 입을 옷도, 한별 얼굴에 맞춘 색도 아닌 것을 고를 첫 기회였다.
해외 화보도 탐은 났다. 자기 이름이 크레디트에 들어가고, 현지 브랜드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문제는 닷새라고 해놓고 배우 일정에 따라 하루쯤 늘어나는 일이 흔하다는 점이었다.
“귀국편부터 보여주세요.”
기범이 재빨리 태블릿을 돌렸다.
“이 편으로 확정해주시면 기존 예약은 원장님과 상의할게요. 보조 한 명 데려가고요.”
“소담 씨 말씀이시죠?”
“네. 그리고 현장에서 촬영 추가되면 저한테도 먼저 물어봐요.”
한별이 고개를 돌렸다.
“나도 현장에서 처음 듣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그 자리에서 네, 하지 마세요.”
“촬영장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 분위기 때문에 저는 밤에 옷 빨아요.”
한별의 입매가 굳었다. 얼마 전 즉석에서 추가한 먹방 촬영 뒤 셔츠 세 벌을 세탁소에 맡긴 사람이 해경이었다.
“그건 내가 세탁비 냈는데.”
“세탁소 다녀올 사람까지 사신 건 아니고요.”
기범은 더 늦기 전에 일정표를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조건을 정하는 데 사십 분이 걸렸다. 해경은 서문정 원장에게 확인하고서야 출장에 동의했다. 한별도 귀국 연장은 없다는 칸에 직접 동그라미를 쳤다. 자기 일정을 왜 여기서 결재받아야 하냐는 얼굴이었다.
기범이 계약서 양식을 찾는 동안 한별이 물었다.
“그 금요일 촬영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네.”
“일정을 하루만 옮길 수는 없고요?”
“배우님 화보도 하루 옮겨보시겠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경은 월요일 출국, 금요일 오전 귀국이라는 문구를 다시 확인했다. 이 남자는 남의 일정은 빈칸으로 보면서 자기 일정에는 사람까지 그려 넣었다.
출장이 끝나면 당분간 한별의 얼굴 말고 다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예쁜 얼굴도 오래 보면 일이었다. 요즘은 그 얼굴이 입을 열 때마다 일이 늘었다.
회의가 끝나자 그가 먼저 일어났다.
“갈 수 있으면서 너무 어렵게 가시네요.”
해경은 펜 뚜껑을 닫았다.
“배우님은 남의 시간 쓰는 게 너무 쉬우시고요.”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문을 열던 한별이 돌아봤다.
“내가 꼭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조건 보고 결정했잖아요.”
문이 닫히고 기범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해경은 한별의 빈 컵을 치우지 않고 자기 것만 들었다.
샵으로 돌아오니 소담이 영상 조회수를 보여줬다. 어제 인터뷰에서 해경이 떡볶이 얼룩을 지적한 장면이었다. 댓글은 두 사람을 부부 같다고 했다.
해경은 화면을 밀어냈다.
“저 사람 빨래를 왜 집에 가서도 해.”
소담이 웃다가 입을 막았다.
오후에는 한별이 피팅을 하러 왔다. 해경이 소매를 접자 그가 팔을 뺐다.
“그냥 입을게요.”
“렌즈 앞에서는 길어 보여요.”
“팔 뻗으면 딱 맞아요.”
“인터뷰 내내 팔 뻗고 계시게요?”
그가 다시 팔을 내줬다. 해경은 집게 두 개를 꽂았다. 소담은 웃지 않으려고 옷걸이 쪽을 보고 있었다.
피팅이 끝날 무렵 기범에게서 새 기획안이 도착했다. 오전에 합의한 화보와 인터뷰 아래 항목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인기 배우와 스타일리스트의 출장 관찰 영상.
해경이 휴대폰을 들자 한별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거 배우님이 한다고 했어요?”
“류 실장님이 허락한 줄 알았는데.”
둘은 다시 기획안을 읽었다. 맨 아래 작은 글씨가 보였다.
꾸밈없는 일상과 메이크업 전후 공개.
해경이 한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기 줘봐요.”
“왜요.”
“배우님 번호로 걸면 더 빨리 받을 것 같아서.”
한별은 잠깐 망설이다 기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스피커를 켠 채 탁자 가운데 놓았다.
이번 전화에서는 양쪽 다 웃어줄 생각이 없었다.
“배우 때문에 안 하시게요?”프로듀서는 돌려 묻지 않았다. 해경은 무릎 위 시안을 내려다봤다. 열두 벌의 옷과 네 사람의 변화가 있었다. 주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전부 덮기에는 오래 준비한 기회였다.“배우 때문만은 아니고요. 제 역할을 확인하고 싶어요.”“의상 총괄입니다. 기존 전담 업무와는 별개예요.”“한별 씨 현장 수정은 제가 봐도, 다른 배우 의상 결정 중에는 보조가 맡아야 해요. 그때마다 저를 부르면 일정이 안 돌아가요.”프로듀서는 바로 메모했다. 필요한 인원부터 잡자고 했다.해경은 한 장 더 넘겼다. 지방 촬영이 끼어 있었다. 촬영일에는 근처 숙소에 머물고, 쉬는 날에는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샵 예약을 정리할 수는 있었다. 대신 몸이 두 개가 될 수는 없었다.“배우분들한테도 먼저 설명해주세요. 준비 시간이 모자라면 제가 밤새우면 된다는 식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요.”“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해경은 그제야 자료를 덮었다. 당장 계약서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인력과 예산을 확인할 하루를 달라고 했다.회의실 밖에 한별이 남아 있었다. 승재가 차를 가져오는 동안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해경이 지나가자 그가 물었다.“할 거예요?”“배우님은요?”“대본은 괜찮아서요.”“저도 일은 괜찮아서요.”두 사람 사이에서 엘리베이터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다.한별이 먼저 말했다.“내가 싫다고 할 때마다 일정 얘기부터 안 하시면 좋겠는데.”해경은 그를 봤다.“싫다고만 하지 말고 뭐가 싫은지 말씀하시면 되죠.”“다 설명해야 알아요?”“제가 배우님 속마음까지 스타일링해요?”그의 턱이 조금 들렸다. 해경은 시안 모서리를 가지런히 맞췄다.“제 의견도 끝까지 들어보시고요. 오늘 다음 장에 다 있었잖아요.”한별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둘 다 옆으로 비켰다. 해경은 반대쪽 계단으로 향했다.“안 타요?”“한 층 아래 사진팀 만나러 가요.”굳이 같이 타야 할 이유도 없었다.재하는 회의실에서
“의상 총괄을 저한테요?”해경이 기획서를 다시 펼쳤다. 패션 브랜드가 제작하는 여덟 편의 짧은 드라마였다. 재하는 포스터와 화보 촬영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네 작업 사진 보고 먼저 물어봤어. 배우 누구 하느냐보다 캐릭터별로 옷을 다르게 만들 사람이 필요하대.”해경은 출연진 칸부터 확인했다. 주연 두 자리 모두 협의 중이었다.여섯 주 촬영, 주 삼 일. 촬영 없는 날에는 기존 고객을 받을 수 있었다. 예산표에는 의상팀 인건비와 구매비가 따로 잡혀 있었다. 셋을 넘기지 못하던 자기 포트폴리오가 처음으로 여러 캐릭터의 옷장이 될 기회였다.“나 이런 규모 총괄은 처음인데.”“그러니까 자료 보고 결정해.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하고.”재하가 남은 샌드위치를 밀어줬다. 해경은 한 입 먹고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주 월요일 미팅이었다.“갈게. 대신 네가 추천했다고 가격 깎아주진 않아.”“그 말을 내가 제작사에 그대로 전하면 돼?”“응. 앞에 실력 좋다는 말 붙여서.”재하가 웃었다. 해경은 일정표에 시간을 적었다.같은 시각, 한별은 차 안에서 기범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브랜드 드라마 주연 제안이었다. 해외 영상 반응이 좋아 우선 미팅을 원한다는 말에 그는 대본부터 보내달라고 했다. 소속사는 일찌감치 출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의상 쪽은 류 실장님 얘기가 나와요.”한별이 창밖에서 눈을 뗐다.“내가 추천한 거 아니에요.”“알아요. 거기도 후보로 올랐대요.”“다른 사람도 볼 수 있잖아요.”기범이 잠깐 조용해졌다.“두 분 무슨 일 있어요?”“일밖에 없죠. 그게 문제지.”그는 전화를 끊고 대본을 열었다. 오래된 동네 수선집에 돌아온 아들과 그 건물을 맡은 건축가의 이야기였다. 전작의 말끔한 검사와는 달랐다. 옷을 잘 입는 장면보다 남의 옷을 만지는 장면이 많았다.세 장만 보려다가 끝까지 읽었다.이틀 뒤 대본 미팅에서 한별은 윤세린을 만났다. 서른두 살, 예전에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춘 배우였다. 그녀는 먼저 와서 대본에 표시하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 두 시, 해경은 한별의 전화를 끊었다.정확히는 받지 않고 무음으로 돌렸다. 모델이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귀걸이를 찾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의 촬영장이 아니었다.“안 받아도 돼?”재하가 조명을 옮기며 물었다.“응. 오전에 인계 끝냈어.”해경은 의자 밑에서 귀걸이를 찾아 소독 솜으로 닦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소담을 먼저 보내고, 샵에 짐을 내려놓고, 씻고 나온 게 한 시간 전이었다.몸은 피곤했다. 그런데 행거에 걸린 옷을 보면 잠이 달아났다. 자신이 고른 질감과 색이었다. 한별에게 어울리는지부터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재하가 모델의 어깨에 걸친 장식을 가리켰다.“그거 그대로 갈 거야?”“왜. 어제는 좋다며.”“사진으로 볼 때랑 달라. 조명 받으니까 얼굴을 가려.”해경이 모니터 앞에 섰다. 테스트 사진의 은색 장식이 턱 옆에서 빛났다. 예쁘기는 했지만 시선이 그쪽으로만 갔다.“등으로 넘겨볼게. 없애지는 말자.”“응. 그렇게 한 번.”재하는 카메라를 들었다. 해경이 장식을 고쳐 달자 바로 다음 컷이 이어졌다. 안 된다는 말 뒤에 왜 안 되는지가 붙었고, 바꾼 다음에는 확인했다. 일이라는 게 늘 싸워야만 굴러가는 건 아니었다.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승재였다.해경은 모델에게 잠깐 쉬라고 한 뒤 전화를 받았다.“네. 무슨 문제 있어요?”“실장님, 내일 시사회 재킷이요. 배우님이 다른 걸 입고 싶다고 하셔서.”“원장님께 사진 세 개 보내놨어요. 지금 샵에 계세요?”“네. 그런데 배우님이 실장님이랑 얘기를.”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바뀌었다.“이거 소매가 짧아요.”해경은 눈을 감았다 떴다.“소매 안쪽에 시침해놨어요. 원장님께 풀어달라고 하세요.”“아까 다른 사람한테 물었는데 모르던데.”“신입한테 물으신 거 아니에요? 원장님께 여쭤보세요.”“그냥 잠깐 와서 보면 안 돼요? 오래 안 걸리는데.”해경은 스튜디오 안쪽을 봤다. 모델이 거울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대관은
“연인 설정은 빼주세요.”해경이 말하자 한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모처럼 의견이 맞았다. 원인은 아주 분명했다. 서로의 옆에 붙여놓은 하트 그림이었다.영상 담당자는 실제 연애가 아니라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삼십 초짜리 옷 고르기 영상이고, 두 사람의 말싸움이 자연스러워서 떠올렸다고 했다.해경은 시안의 제목을 짚었다.“직원과 배우로 찍어도 되는 거잖아요.”한별이 옆에서 덧붙였다.“제가 옷 고르고 이분이 반대하는 건 연기 안 해도 되는데.”“배우님이 고르시는 걸 보면 반대할 만해요.”담당자가 웃었다. 통역도 웃다가 곧장 말을 옮겼다.결국 콘셉트는 배우의 취향과 스타일리스트의 선택을 비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해경의 얼굴이 나오는 만큼 별도 출연료를 받기로 했다. 분량은 짧았고 금요일 귀국에도 지장이 없었다.해경은 완성본에서 자신의 이름과 직함이 어떻게 나오는지까지 확인했다. 한별은 그동안 휴대폰으로 대본을 읽었다.“다 됐어요?”“네.”“저는 여기 앉아 있는 시간도 출연료 나와요?”“소속사에 물어보세요.”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경도 기획안을 접었다. 같은 편이었던 시간은 정확히 십칠 분이었다.다음 날 촬영은 호텔의 작은 연회장에서 시작됐다. 한쪽 벽에 행거를 세우고 브랜드 로고를 붙였다. 해경은 대기 중인 한별에게 회색 바지를 건넸다.“이게 제 선택인 거죠?”“배우님이 고르신 검은 바지는 저쪽이에요.”“이건 누가 봐도 회색이 더 어울리게 준비했잖아요.”해경은 검은 바지에 맞는 상의를 하나 더 가져왔다.“이제 이겨보세요.”첫 촬영은 한별이 검은색 옷을 고르는 장면이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자 능숙하게 소매를 들어 보였다. 편하고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설명했다.해경의 차례가 되자 감독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마이크를 단 쪽을 옷걸이로 가린 탓이었다.“다시 갈게요.”해경이 옷걸이를 내렸다. 이번에는 말을 너무 빨리했다. 통역을 붙일 틈이 없었다. 세 번째에는 시선이 카메라 옆 모니터로 갔다.한별이 행거에 기대
“그건 싫어요.”옷걸이에서 셔츠를 꺼내기도 전이었다. 해경은 한별을 봤다.“뒷면만 보셨는데요.”“앞도 대충 알 것 같아서.”해경은 셔츠를 앞으로 돌렸다. 아무 무늬 없는 흰색이었다.“대단하시네요. 맞혔어요.”아침 아홉 시, 브랜드 매장은 영업 전이었다. 현지 담당자가 직원에게 부탁해 문을 먼저 열어줬다. 소담은 사이즈별 제품을 챙겼고 승재는 차량 기사와 통화 중이었다. 한별과 해경은 문을 연 지 사 분 만에 싸우고 있었다.한별이 고른 건 검은 티셔츠였다. 해경은 다시 걸었다.“어제도 검은 옷 입었어요.”“편한 주말이라면서요. 주말에 저는 이거 입어요.”“배우님 주말을 고증하는 영상이 아니에요.”그가 팔짱을 꼈다. 해경은 연한 파란 셔츠와 회색 바지를 건넸다. 한별은 색을 한 번 보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커튼이 열렸을 때 소담이 고개를 들었다. 해경은 바지 밑단부터 접었다.“어때요.”“아까부터 제 의견 들어주시는 거예요?”“입어보지도 않고 고른다고 하셔서요.”한별은 거울을 보며 소매를 걷었다.“너무 멀쩡해요.”해경이 고개를 들었다.“찢어드려요?”“그 뜻이 아니잖아요.”그는 셔츠 단추를 두 개 더 풀었다. 해경은 그중 하나를 다시 잠갔다. 두 사람의 손이 같은 단추 앞에서 멈췄다.“덥잖아요.”“안에 흰 티 입을 거예요.”“그걸 먼저 말하면 되는데.”“말 끝나기 전에 푸시니까요.”소담이 티셔츠를 가져왔다. 한별은 다시 커튼을 닫았다. 해경은 그 앞에 벨트 두 개를 들고 섰다. 자기 샵 거울 앞과 달라진 건 외국어로 나오는 음악뿐이었다.두 번째로 나온 옷차림은 괜찮았다. 한별도 이번에는 거울을 오래 봤다. 소담이 카메라로 앞뒤를 찍었다.해경은 액세서리 진열대로 갔다. 반지를 고르는 사이 휴대폰에 재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금요일 모델 확정. 시안은 언제 줄 수 있어?해경은 사진 두 장을 보내고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두 번째는 어깨 장식 빼고 갈게. 조명으로 잡아줘. 옷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게.”뒤에서 한별의
“지금 옷을 바꾸겠다고요?”해경이 묻자 한별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움직일 수 있는 걸로요.”“브랜드에서 이걸 메인으로 골랐어요.”“그럼 브랜드 담당자한테 입혀요.”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건 네 사람뿐인데 표정은 다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승재가 물을 들고 다가왔다가 멈췄다.해경은 재킷을 집었다.“어디가 불편한데요.”“팔 올릴 때 등하고 어깨요.”“팔 올려봐요.”그가 셔츠 차림으로 팔을 들었다. 해경은 잠깐 눈을 감았다.“입고요.”한별은 다시 재킷을 입었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리자 등판에 가로 주름이 생겼다. 정면 사진에서는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었다.해경은 옆선과 암홀을 확인했다. 의상 자체가 좁았다. 피팅 때는 서 있는 모습만 확인했고, 지금 감독이 요구하는 자세는 몸을 크게 틀어야 했다.“이 자세면 한 사이즈 위가 낫겠네요.”“그러니까 아까부터.”“그런데 다음 사이즈는 없어요. 옷 바꾸거나 자세 바꾸거나 둘 중 하나예요.”“류 실장님 답은 항상 두 개밖에 없어요?”해경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세 번째는 직접 만들어보세요.”한별이 입을 다물었다. 승재가 그 틈에 물병을 꽂아줬다.해경은 감독과 통역을 불렀다. 감독은 의자에 기대는 편안한 느낌을 원했다. 브랜드 담당자는 메인 재킷의 형태가 보여야 한다고 했다. 한별은 지난 화보와 똑같이 서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세 사람의 말을 듣고 나니 재킷에 사람 셋을 넣어야 할 것 같았다.해경은 의자를 돌려 등받이가 한별의 옆으로 오게 했다.“앉아서 몸을 다 틀지 말고, 한쪽 팔꿈치만 올려봐요.”한별이 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애매해요.”“찍어보고요.”테스트 사진이 모니터에 떴다. 이번에는 옷이 살았지만 턱을 괸 얼굴이 지나치게 얌전했다. 한별은 화면을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해경은 한 걸음 비켜섰다.“그럼 배우님이 원하는 걸 보여주세요. 옷은 제가 볼게요.”그는 의자 뒤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