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
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
“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
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해.”
매몰찬 대꾸에 동기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잘 생각해 봐. 노 씨는 상급 하인이잖아. 따로 살 집도 있고 돈도 꽤 모았을걸? 인물도 저 정도면 훤칠하고.” “그렇게 괜찮으면 네가 가지 그래?” “어머머, 정말 몰라서 물어? 노 씨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너만큼만 예뻤어도 벌써 꼬셨지.”
미옥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종년이 예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평민인 노 씨가 노비랑 혼인이라도 해줄 것 같아? 헛꿈 꾸지 마.”
퍽, 퍽! 미옥의 방망이질 소리가 거칠어지자 동기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미옥아! 미옥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멀리서 노 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 봐, 저렇게 애타게 부르잖아.” “입 닫으랬지? 누가 들을까 겁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노 씨는 미옥의 앞에 서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주인님께서 널 찾으신다! 일각을 넘기지 말고 오라 하셨으니 어서 뛰어!”
“예? 무슨 일로요?”
옆에 있던 동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일어섰다. 하지만 노 씨는 대답할 여유도 없다는 듯 미옥의 팔을 낚아챘다.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그의 손길에 휩쓸린 미옥이 그만 반석에 걸려 냇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음물 같은 냉기가 치맛자락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으아, 차가워! 옷이라도 갈아입고 갈 테니 먼저 가세요!” “안 돼! 늦으면 장형이라 하셨단 말이다. 무슨 일인지는 나도 모르니 일단 뛰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엊그제 어멈이 먹어도 된다고 해서 슬쩍한 떡 때문인가? 아니면 설마 내가 저지른 다른 잘못이 있나? 머릿속이 하얗게 번지는 사이, 노 씨가 안채를 지나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잠깐,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긴, 별채지.”
미옥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별채. 높으신 귀빈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자, 그들이 머물 때마다 노비가 하나둘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 무성한 금단의 구역이었다. 상급 하인들만 출입하며 온갖 진귀한 보물과 일 년 내내 시들지 않는 꽃이 가득하다는 그 기괴한 낙원.
좁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자, 한겨울임에도 눈이 시리도록 붉은 꽃들이 미옥을 반겼다. 아찔한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메마른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늦었구나.”
미옥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꽁꽁 얼어붙은 흙바닥의 냉기가 무릎을 타고 올라왔지만, 눈앞에 선 사내가 뿜어내는 기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빨래터가 멀어 그만…….” “이 년이 따라오다 물에 빠지는 바람에 지체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애를 태우던 노 씨의 목소리는 비겁할 정도로 차가웠다. 미옥은 배신감에 욕지거리가 치밀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바들바들 떨며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그 명령에 미옥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미옥은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눈앞에 선 사내, 하륜은 환관의 관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가 풍기는 아우라는 결코 거세된 사내의 것이 아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넓은 어깨였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관복이 어깨선을 따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뻗은 큰 키는 미옥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누가…… 이 자를 환관이라 하겠는가.’
미옥은 멍하니 하륜의 얼굴을 응시했다.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 위에 얹어진 이목구비는 얼음 호수를 벼려 만든 검처럼 날카롭고 매끄러웠다. 짙은 눈썹 아래로 깊게 자리 잡은 눈매는 서늘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고,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굳게 다물린 얇은 입술은 그가 얼마나 정에 무관심하고 냉혹한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내치고는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나, 그것은 감탄보다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륜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미옥을 훑어내렸다.
“그리 겁먹을 것 없다. 나는 쓸모 있는 자에겐 관대하니까.”
“예……?”
“내 너를 이 집에 두지 않으려 했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거두었다. 이제 네가 약인지, 그냥 버릴 오물인지 확인해 봐야겠구나.”
그의 목소리엔 감정이 없었다.
“이 집안에 빨래할 종은 차고 넘친다. 사내 놈들이라면 네 얼굴을 보고 첩이라도 삼겠지만, 내게 계집의 얼굴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느냐. 쓸모없다면 돈을 더 쳐주는 곳에 팔아넘길 뿐이지.”
미옥은 숨을 죽였다.
“네 운명은 저 안에 계신 분께 달렸다. 들어가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미옥은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졌다. 등 뒤에서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퇴로는 없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방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연기로 자욱했다. 뜨거운 증기가 피부에 닿자 얼음장 같던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코끝을 찌르는 향취는 기이했다. 달콤하면서도 비릿하고, 약재 냄새 같으면서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기묘한 증기.
미옥은 매캐한 공기에 기침을 참으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때, 연막처럼 깔린 연기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겨울에, 물에 젖은 꽃이라……. 하륜, 그놈이 제대로 작정을 했군.”
무심한 듯 서늘한 목소리. 미옥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사내의 실루엣이 천천히 선명해졌다.
“옷을 지을 줄 아나?”“바느질은 꽤 합니다만, 천자님의 마음에 들만한 옷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꿈도 야무지구나. 누가 너 같은 것이 만든 옷을 입고 싶다더냐. 버리기 아까운 이불이니 홑청으로 옷이나 한 벌 지어보아라.”“이 귀한 비단 이불을 버린다고요? 차라리 빨아서 쓰심이.”“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거늘!”화들짝 놀란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한번은 그냥 넘어가나, 앞으로 내 말에 어떤 토도 달지 말아라.”“저…, 그러면 누구의 옷으로 할까요?”“그런 것까지 알려주랴? 그냥 네 마음대로 해.”“예, 알겠습니다.”미옥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연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한참을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미옥은 목을 빼내어 연호의 모습을 살폈다.‘진짜 잠이 들었나?’거칠지만 일정한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미옥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연호를 쳐다보았다.다행히도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썹 한 가닥의 미동도 없었다.“그나저나 높으신 분이라 그런지 사람을 부리는 것은 타고 난 것 같네. 내가 쉬기라도 할까 봐서 옷을 지으라니.”이불 천을 뜯어낼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곧 생길 저녁밥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뭐, 아무렴 어때. 자고로 밥 많이 주는 주인이 최고라고 했는데.”**“이게…, 밤새 만든 거라고?”미옥이 내미는 옷에 연호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제 옷이나 해 입으라는 것도 모르고.’“네, 아직도 천이 많이 남아서 몇 벌은 더 만들 수 있습니다. 너무 귀엽지요?”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미옥은 자랑스럽게 옷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갓난아이를 싸둘 수 있는 작은 싸개 보자기와 삼, 사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 한 벌이었다.“어째서 애들 옷을 지은 거지? 천이 별로였나?”“예에? 그럴 리가요. 제 생전에 이리 고운 천에다가 바느질을 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낡은 무명이
“새 이불과 옷을 챙겨왔습니다.”커다란 보따리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어붙은 치맛자락이 미옥음을 알려주었다. 연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 걸어오는 그녀를 응시했다.“옷을 새로 짓기라고 한 것이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손발까지 이리 더뎌서야.”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비단처럼 거칠고 낮았다. 하륜의 집 근처에서 습격을 당하고, 하필 이곳에 머물게 된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설계 같아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누군가가 있다면 하륜과 황후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이 계집 또한 독을 품은 꽃일 터.’하지만 물증은 없다.그러니 그 분풀이를 눈앞의 계집에게라도 하고 싶어졌다.“아니면, 그사이 밖에서 네 주인과 다른 수작이라도 부리고 온 것인가.”미옥은 대답대신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이 방안에 들어와서 떨던 모습은 온간데 없었다.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연호의 가슴팍으로 뻗었다. 옷고름을 쥔 손가락끝이 찰나의 순간 떨리는 듯 했으나, 이내 거침없이 움직였다.“……!”“죽여도 좋으니 일단 벗으시지요.”“감히 뉘 몸에 손을…!”호통에도 미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되려 흔들리는 것은 연호의 눈동자가 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불에 데인 듯했다. 젖은 치마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그녀의 체온, 그리고 상처의 열기가 뒤섞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눅진해졌다.“이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 하륜 그자가, 침소에서의 예법을 아주 지독하게 가르친 모양이다.”연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가슴팍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저고리 너머로 그의 가파른 심장 박동이 미옥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내의 몸을 탐하는 꼴이라니.”“입고 계신 옷이 젖어있습니다.”“뭐?”“그리 더 계시다간 열까지 날겁니다. 천자께서 고작 한기 따위에 무너지시려 합니까.”미옥은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갈색 눈동자 속에는 흔한 교태 대신, 지독할 정도의 생존
“모실 아이를 보내었는데, 어찌 저를 찾으십니까.”문을 열고 들어선 하륜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네 놈의 집에서 네 놈을 찾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쓸모가... 없으셨습니까.”낮게 깔리는 하륜의 음성에는 묘한 박동이 섞여 있었다. 연호는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답했다.“쓸모라…, 누구든 와서 대체 할 수 있는 거라면 없다고 봐야겠지.”하륜이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극진한 태도였으나, 연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사냥감을 살피는 맹수처럼 예리했다.“두통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군요. 땀도 멎으시고.”“그러고 보니 기분이 한결 낫군.”연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니, 가벼워진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팔의 통증조차 안개 너머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그 풀떼기가 효과가 있긴 한가보군.’조금 전 미옥이 두고 간 거친 잎사귀에서 나던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에 남은 듯했다. 연호는 하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그 아이, 어디서 구했지?”하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미옥이 말입니까. 제 양부가 북원 평정 때 데려온 아이입니다. 어미 잃은 짐승을 거두는 게 그 노인의 취미였지요.”“북원이라… 어쩐지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더군. 황갈색 눈이라니, 타오르는 불을 가둔 것 같지 않으냐.”연호의 시선이 하륜의 얼굴을 훑었다. 하륜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소매 안으로 감춘 손가락이 단단히 말려 올라갔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미옥에 대한 감상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그저 비천한 노비일 뿐입니다. 인물이 아깝다 한들 환관의 집에서 부리는 것 외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소용이라… 글쎄. 내가 보기엔 그 아이, 이 집에 있기엔 지나치게 영민해 보이던데.”연호가 몸을 일으켜 하륜에게 바짝 다가갔다. 부상당한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위압적인 기운
취명향 덕에 어깨의 고통은 둔감해졌지만, 이따금 머리를 찌르는 통증에 절로 눈살이 찡그려졌다. 다시 하륜을 부르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미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것 좀 보세요!”미옥은 품 안에 가득 찬 이름 모를 풀들을 한 움큼 들고 다가와 연호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이게 뭐지?”연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길쭉한 이파리에서는 모과처럼 상큼하면서도 박하처럼 매운 향이 훅 끼쳤다. 피와 취명향에 절여진 방 안의 공기를 뚫고 들어오는 생경한 냄새였다.“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천자님의 두통을 낫게 해줄 겁니다. 제게는 만병통치약 같은 거니까요.”“내가 머리가 아픈 건 어찌 알았지?”“당연한 것을 물어보십니다.”“뭐라?”연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으나 미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 방에 들어온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저도 머리가 아픈걸요. 보나 마나 저 독한 향 연기 때문이겠지만, 추위 때문에 환기를 할 수도 없으니. 이 풀을 코 가까이에 대고 맡으세요. 상처 부위에 올려두셔도 시원하실 겁니다.”들뜬 목소리의 미옥과 달리, 연호의 표정은 급격히 가라앉았다.하륜이 보낸 여인이라기에 어떤 대단한 수작을 부릴까 싶었더니, 고작 산천에 널린 풀떼기를 가져와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이제 네 할 일은 다 한 것이냐?”“예? 네... 행여 더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천진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답. 연호는 허탈함 섞인 실소를 삼켰다.“가서 네 주인 놈이나 불러오너라.”자신이 가져온 풀을 들여다보지도 않는 냉담한 태도를 보며, 미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연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취명향의 부작용이 이딴 풀로 해결될 것 같으면 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느냐.”그는 바닥에 떨어진 풀잎 하나를 발끝으로 툭 쳤다.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행동거지를 보니 영락없는 노비였다. 아무리 고운들, 색과 향이 없는 꽃이라면 종이로 접은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연호는 등 뒤를
'주인님을 놈이라고 부르다니 필시 높으신 분이구나.'미옥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신분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시, 신선님입니까?”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흑발 사이로, 갈증에 젖은 눈동자가 번뜩였다.“신선이라…… 하긴, 이 향에 취하면 이곳이 극락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가긴 하지.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거라. 내가 신선인지, 아니면 너를 잡아먹을 괴물인지.”미옥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발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지, 바닥에서 손이 올라와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지 착각마저 들었다.‘별채가 이리 컸었나?’열 걸음 정도를 앞으로 나가니, 사내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의 앞에 놓인 화로에서 끝없이 피어나는 연기 때문에 이따금 흐려지긴 했지만, 선명한 이목구비까지는 가리지 못했다.서늘할 정도로 매끄러운 콧날은 마치 잘 벼려진 백자의 선 같았고, 짙게 그늘진 눈매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은 창백한 뺨 위에 정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흑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그의 비현실적인 안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의원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도 아픈 사람인 것 같았으나, 환자라기엔 지나치게 수려하고, 고결한 기품이 흐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앞에선 미옥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었다.발갛다 못해 금방이라도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은 볼과 마디마디가 불거진 손을 가진 여인.‘칼바람에 얼어 터져도 본판은 그대로구나.’형편없는 꼴이었지만, 황갈색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하륜이 혼자서 저지를 일은 아니고, 분명 황후가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지? 아무리 미색이 있다 해도 노비라니.'취명향(醉冥香) 때문인지 연호는 생각을 깊게 하기가 어려웠다.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도 내가 신선으로 보이느냐?”“아닙니다.”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미옥은 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해.”매몰찬 대꾸에 동기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잘 생각해 봐. 노 씨는 상급 하인이잖아. 따로 살 집도 있고 돈도 꽤 모았을걸? 인물도 저 정도면 훤칠하고.” “그렇게 괜찮으면 네가 가지 그래?” “어머머, 정말 몰라서 물어? 노 씨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너만큼만 예뻤어도 벌써 꼬셨지.”미옥의 눈매가 서늘해졌다.“종년이 예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평민인 노 씨가 노비랑 혼인이라도 해줄 것 같아? 헛꿈 꾸지 마.”퍽, 퍽! 미옥의 방망이질 소리가 거칠어지자 동기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미옥아! 미옥아!”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멀리서 노 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거 봐, 저렇게 애타게 부르잖아.” “입 닫으랬지? 누가 들을까 겁난다.”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노 씨는 미옥의 앞에 서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주인님께서 널 찾으신다! 일각을 넘기지 말고 오라 하셨으니 어서 뛰어!”“예? 무슨 일로요?”옆에 있던 동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일어섰다. 하지만 노 씨는 대답할 여유도 없다는 듯 미옥의 팔을 낚아챘다.“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그의 손길에 휩쓸린 미옥이 그만 반석에 걸려 냇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음물 같은 냉기가 치맛자락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으아, 차가워! 옷이라도 갈아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