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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Autor: 양순이
last update Última actualización: 2026-02-26 17:21:10

“새 이불과 옷을 챙겨왔습니다.”

커다란 보따리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어붙은 치맛자락이 미옥음을 알려주었다. 연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 걸어오는 그녀를 응시했다.

“옷을 새로 짓기라고 한 것이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손발까지 이리 더뎌서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비단처럼 거칠고 낮았다. 하륜의 집 근처에서 습격을 당하고, 하필 이곳에 머물게 된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설계 같아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있다면 하륜과 황후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이 계집 또한 독을 품은 꽃일 터.’

하지만 물증은 없다.

그러니 그 분풀이를 눈앞의 계집에게라도 하고 싶어졌다.

“아니면, 그사이 밖에서 네 주인과 다른 수작이라도 부리고 온 것인가.”

미옥은 대답대신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이 방안에 들어와서 떨던 모습은 온간데 없었다.

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연호의 가슴팍으로 뻗었다. 옷고름을 쥔 손가락끝이 찰나의 순간 떨리는 듯 했으나, 이내 거침없이 움직였다.

“……!”

“죽여도 좋으니 일단 벗으시지요.”

“감히 뉘 몸에 손을…!”

호통에도 미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되려 흔들리는 것은 연호의 눈동자가 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불에 데인 듯했다. 젖은 치마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그녀의 체온, 그리고 상처의 열기가 뒤섞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눅진해졌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 하륜 그자가, 침소에서의 예법을 아주 지독하게 가르친 모양이다.”

연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가슴팍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저고리 너머로 그의 가파른 심장 박동이 미옥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내의 몸을 탐하는 꼴이라니.”

“입고 계신 옷이 젖어있습니다.”

“뭐?”

“그리 더 계시다간 열까지 날겁니다. 천자께서 고작 한기 따위에 무너지시려 합니까.”

미옥은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갈색 눈동자 속에는 흔한 교태 대신, 지독할 정도의 생존 본능과 기묘한 연민이 서려 있었다. 연호는 그 눈빛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가장 고단수의 연기라고 확신했다.

서걱, 윗옷이 벗겨져 내리자 연호의 창백하고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어깨를 관통했던 화살 자국 옆으로, 오래된 흉터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미옥의 숨이 순간 멎었다가 풀어졌다.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나무 가시 하나가 박혀도 며칠이 아픈데…, 귀하신 분이 어쩌다가.’

여느 때 같으면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을 자리이건만, 그녀의 손끝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흉터 위를 아주 느리게 쓸어내렸다.

거칠고 투박한 손끝이 흉터 위를 스치자, 연호의 척추를 타고 낯선 전율이 일었다. 뜨겁고도 서늘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자극이었다. 그는 잇새로 낮은 신음을 삼키며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제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연호의 서늘한 숨결이 미옥의 입술에 흩어졌다.

“아프냐고? 아니, 감미롭지. 이 상처 하나하나가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증거니까.”

그의 눈이 번들거리는 안광을 냈다.

“그런데 너는, 감히 그 살육의 흔적을 동정하는군. 네 손길이 너무 능숙해서 도무지 노비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아. 자, 말해봐라. 이 다음은 어디를 만질 생각이지?”

“오해이십니다. 제 주제에 어찌 감히 그런 발칙한 생각을…….”

“그 말을 믿으라고? 약과 앞에서는 벌벌 떨던 손이, 내 몸 위에서는 어찌 그리도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는거지?”

“제 팔을 자르신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십시오.제가 돌봐야 할 분이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을 뿐입니다. 결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연호는 쥐었던 머리채를 거칠게 내던지듯 놓아주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미옥이 짧은 신음을 삼켰다.

“믿으라? 내게 이런 상처를 남긴 자들이 마지막으로 구걸하던 말도 그것이었다.”

그는 제 손바닥에 남은 그녀의 머리카락 감촉을 느릿하게 갈무리하며 읊조렸다.

“그것들의 대가리가 흙바닥을 뒹굴며 눈을 깜빡이던 꼴이 꽤 볼만했지. 그러니 너도 처신을 잘하거라. 내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너는 물론 네 주인 놈의 목숨줄도 이 방 문턱을 넘지 못할 테니까.”

‘이쯤이면 살려달라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울 텐가.’

하지만 미옥의 행동은 늘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얼른 새 옷을 주워들어 그를 덮었다.

“아픈 팔은 소매에 넣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자꾸 건드리면 덧날 수도 있으니까요.”

“내 말이 무섭지 않아?”

“원래 노비란 언제 죽어도 이상할 바가 없습니다. 무서워한다고 달라질 처지도 아니니, 그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밖에요.”

덤덤하게 대답하는 미옥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다. 연호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보았다. 그의 바지춤을 잡으려 다가오는 미옥의 손가락 끝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는 것을.

‘입으로만 강한 척을 하는군.’

얄궂은 흥미가 연호의 눈가에 서렸다.

“푸는 건 혼자 할 수 있으니, 나중에 끈을 묶는 것만 도와주면 된다.”

그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미옥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전 이불을 새로 정돈해 놓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미옥은 빠른 손놀림으로 이불을 걷어내고 새 이불을 펼쳤다.

“누워 보시고 불편하시거든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이미 반듯한 이불 끝을 몇 번이나 당겼다 놓았다 하는 그 뒷모습에서 초조함이 고스란히 읽혔다. 저러다간 비단 이불에 구멍이라도 날 기세였다.

“그만해라. 이불이 터지겠구나.”

연호의 지적에 미옥이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이제 가까이 와서 끈을 묶어라.”

미옥이 주춤주춤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듭을 짓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연호가 낮게 중얼거렸다.

“믿어주마. 적어도 날 유혹하려던 수작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

고개를 번쩍 든 미옥의 눈에 안도와 처연함이 교차했다. 그 짧은 찰나의 표정이 연호의 가슴 한구석을 기묘하게 긁고 지나갔다.

“아무렴요! 내일은 머리를 감겨드리겠습니다.”

“알아서 해라. 이제부터 난 잘 것이니 내 반상이 오거든, 네가 먹도록 해.”

햇살의 냄새를 머금은 옷의 감촉이 느껴지니, 멀리 제쳐두었던 노곤함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 아직도 젖은 옷을 입고 있군.’

자리에 눕던 연호의 눈에 얼어붙어서 딱딱해진 그녀의 치맛자락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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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6화.

    “옷을 지을 줄 아나?”“바느질은 꽤 합니다만, 천자님의 마음에 들만한 옷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꿈도 야무지구나. 누가 너 같은 것이 만든 옷을 입고 싶다더냐. 버리기 아까운 이불이니 홑청으로 옷이나 한 벌 지어보아라.”“이 귀한 비단 이불을 버린다고요? 차라리 빨아서 쓰심이.”“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거늘!”화들짝 놀란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한번은 그냥 넘어가나, 앞으로 내 말에 어떤 토도 달지 말아라.”“저…, 그러면 누구의 옷으로 할까요?”“그런 것까지 알려주랴? 그냥 네 마음대로 해.”“예, 알겠습니다.”미옥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연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한참을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미옥은 목을 빼내어 연호의 모습을 살폈다.‘진짜 잠이 들었나?’거칠지만 일정한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미옥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연호를 쳐다보았다.다행히도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썹 한 가닥의 미동도 없었다.“그나저나 높으신 분이라 그런지 사람을 부리는 것은 타고 난 것 같네. 내가 쉬기라도 할까 봐서 옷을 지으라니.”이불 천을 뜯어낼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곧 생길 저녁밥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뭐, 아무렴 어때. 자고로 밥 많이 주는 주인이 최고라고 했는데.”**“이게…, 밤새 만든 거라고?”미옥이 내미는 옷에 연호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제 옷이나 해 입으라는 것도 모르고.’“네, 아직도 천이 많이 남아서 몇 벌은 더 만들 수 있습니다. 너무 귀엽지요?”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미옥은 자랑스럽게 옷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갓난아이를 싸둘 수 있는 작은 싸개 보자기와 삼, 사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 한 벌이었다.“어째서 애들 옷을 지은 거지? 천이 별로였나?”“예에? 그럴 리가요. 제 생전에 이리 고운 천에다가 바느질을 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낡은 무명이

  • 환관의 비   5화

    “새 이불과 옷을 챙겨왔습니다.”커다란 보따리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어붙은 치맛자락이 미옥음을 알려주었다. 연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 걸어오는 그녀를 응시했다.“옷을 새로 짓기라고 한 것이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손발까지 이리 더뎌서야.”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비단처럼 거칠고 낮았다. 하륜의 집 근처에서 습격을 당하고, 하필 이곳에 머물게 된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설계 같아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누군가가 있다면 하륜과 황후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이 계집 또한 독을 품은 꽃일 터.’하지만 물증은 없다.그러니 그 분풀이를 눈앞의 계집에게라도 하고 싶어졌다.“아니면, 그사이 밖에서 네 주인과 다른 수작이라도 부리고 온 것인가.”미옥은 대답대신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이 방안에 들어와서 떨던 모습은 온간데 없었다.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연호의 가슴팍으로 뻗었다. 옷고름을 쥔 손가락끝이 찰나의 순간 떨리는 듯 했으나, 이내 거침없이 움직였다.“……!”“죽여도 좋으니 일단 벗으시지요.”“감히 뉘 몸에 손을…!”호통에도 미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되려 흔들리는 것은 연호의 눈동자가 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불에 데인 듯했다. 젖은 치마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그녀의 체온, 그리고 상처의 열기가 뒤섞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눅진해졌다.“이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 하륜 그자가, 침소에서의 예법을 아주 지독하게 가르친 모양이다.”연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가슴팍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저고리 너머로 그의 가파른 심장 박동이 미옥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내의 몸을 탐하는 꼴이라니.”“입고 계신 옷이 젖어있습니다.”“뭐?”“그리 더 계시다간 열까지 날겁니다. 천자께서 고작 한기 따위에 무너지시려 합니까.”미옥은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갈색 눈동자 속에는 흔한 교태 대신, 지독할 정도의 생존

  • 환관의 비   4화.

    “모실 아이를 보내었는데, 어찌 저를 찾으십니까.”문을 열고 들어선 하륜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네 놈의 집에서 네 놈을 찾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쓸모가... 없으셨습니까.”낮게 깔리는 하륜의 음성에는 묘한 박동이 섞여 있었다. 연호는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답했다.“쓸모라…, 누구든 와서 대체 할 수 있는 거라면 없다고 봐야겠지.”하륜이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극진한 태도였으나, 연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사냥감을 살피는 맹수처럼 예리했다.“두통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군요. 땀도 멎으시고.”“그러고 보니 기분이 한결 낫군.”연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니, 가벼워진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팔의 통증조차 안개 너머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그 풀떼기가 효과가 있긴 한가보군.’조금 전 미옥이 두고 간 거친 잎사귀에서 나던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에 남은 듯했다. 연호는 하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그 아이, 어디서 구했지?”하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미옥이 말입니까. 제 양부가 북원 평정 때 데려온 아이입니다. 어미 잃은 짐승을 거두는 게 그 노인의 취미였지요.”“북원이라… 어쩐지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더군. 황갈색 눈이라니, 타오르는 불을 가둔 것 같지 않으냐.”연호의 시선이 하륜의 얼굴을 훑었다. 하륜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소매 안으로 감춘 손가락이 단단히 말려 올라갔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미옥에 대한 감상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그저 비천한 노비일 뿐입니다. 인물이 아깝다 한들 환관의 집에서 부리는 것 외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소용이라… 글쎄. 내가 보기엔 그 아이, 이 집에 있기엔 지나치게 영민해 보이던데.”연호가 몸을 일으켜 하륜에게 바짝 다가갔다. 부상당한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위압적인 기운

  • 환관의 비   3화.

    취명향 덕에 어깨의 고통은 둔감해졌지만, 이따금 머리를 찌르는 통증에 절로 눈살이 찡그려졌다. 다시 하륜을 부르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미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것 좀 보세요!”미옥은 품 안에 가득 찬 이름 모를 풀들을 한 움큼 들고 다가와 연호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이게 뭐지?”연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길쭉한 이파리에서는 모과처럼 상큼하면서도 박하처럼 매운 향이 훅 끼쳤다. 피와 취명향에 절여진 방 안의 공기를 뚫고 들어오는 생경한 냄새였다.“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천자님의 두통을 낫게 해줄 겁니다. 제게는 만병통치약 같은 거니까요.”“내가 머리가 아픈 건 어찌 알았지?”“당연한 것을 물어보십니다.”“뭐라?”연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으나 미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 방에 들어온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저도 머리가 아픈걸요. 보나 마나 저 독한 향 연기 때문이겠지만, 추위 때문에 환기를 할 수도 없으니. 이 풀을 코 가까이에 대고 맡으세요. 상처 부위에 올려두셔도 시원하실 겁니다.”들뜬 목소리의 미옥과 달리, 연호의 표정은 급격히 가라앉았다.하륜이 보낸 여인이라기에 어떤 대단한 수작을 부릴까 싶었더니, 고작 산천에 널린 풀떼기를 가져와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이제 네 할 일은 다 한 것이냐?”“예? 네... 행여 더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천진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답. 연호는 허탈함 섞인 실소를 삼켰다.“가서 네 주인 놈이나 불러오너라.”자신이 가져온 풀을 들여다보지도 않는 냉담한 태도를 보며, 미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연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취명향의 부작용이 이딴 풀로 해결될 것 같으면 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느냐.”그는 바닥에 떨어진 풀잎 하나를 발끝으로 툭 쳤다.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행동거지를 보니 영락없는 노비였다. 아무리 고운들, 색과 향이 없는 꽃이라면 종이로 접은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연호는 등 뒤를

  • 환관의 비   2화.

    '주인님을 놈이라고 부르다니 필시 높으신 분이구나.'미옥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신분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시, 신선님입니까?”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흑발 사이로, 갈증에 젖은 눈동자가 번뜩였다.“신선이라…… 하긴, 이 향에 취하면 이곳이 극락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가긴 하지.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거라. 내가 신선인지, 아니면 너를 잡아먹을 괴물인지.”미옥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발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지, 바닥에서 손이 올라와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지 착각마저 들었다.‘별채가 이리 컸었나?’열 걸음 정도를 앞으로 나가니, 사내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의 앞에 놓인 화로에서 끝없이 피어나는 연기 때문에 이따금 흐려지긴 했지만, 선명한 이목구비까지는 가리지 못했다.서늘할 정도로 매끄러운 콧날은 마치 잘 벼려진 백자의 선 같았고, 짙게 그늘진 눈매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은 창백한 뺨 위에 정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흑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그의 비현실적인 안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의원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도 아픈 사람인 것 같았으나, 환자라기엔 지나치게 수려하고, 고결한 기품이 흐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앞에선 미옥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었다.발갛다 못해 금방이라도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은 볼과 마디마디가 불거진 손을 가진 여인.‘칼바람에 얼어 터져도 본판은 그대로구나.’형편없는 꼴이었지만, 황갈색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하륜이 혼자서 저지를 일은 아니고, 분명 황후가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지? 아무리 미색이 있다 해도 노비라니.'취명향(醉冥香) 때문인지 연호는 생각을 깊게 하기가 어려웠다.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도 내가 신선으로 보이느냐?”“아닙니다.”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미옥은 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 환관의 비   1화.

    “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해.”매몰찬 대꾸에 동기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잘 생각해 봐. 노 씨는 상급 하인이잖아. 따로 살 집도 있고 돈도 꽤 모았을걸? 인물도 저 정도면 훤칠하고.” “그렇게 괜찮으면 네가 가지 그래?” “어머머, 정말 몰라서 물어? 노 씨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너만큼만 예뻤어도 벌써 꼬셨지.”미옥의 눈매가 서늘해졌다.“종년이 예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평민인 노 씨가 노비랑 혼인이라도 해줄 것 같아? 헛꿈 꾸지 마.”퍽, 퍽! 미옥의 방망이질 소리가 거칠어지자 동기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미옥아! 미옥아!”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멀리서 노 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거 봐, 저렇게 애타게 부르잖아.” “입 닫으랬지? 누가 들을까 겁난다.”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노 씨는 미옥의 앞에 서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주인님께서 널 찾으신다! 일각을 넘기지 말고 오라 하셨으니 어서 뛰어!”“예? 무슨 일로요?”옆에 있던 동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일어섰다. 하지만 노 씨는 대답할 여유도 없다는 듯 미옥의 팔을 낚아챘다.“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그의 손길에 휩쓸린 미옥이 그만 반석에 걸려 냇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음물 같은 냉기가 치맛자락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으아, 차가워! 옷이라도 갈아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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