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옷을 지을 줄 아나?”
“바느질은 꽤 합니다만, 천자님의 마음에 들만한 옷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꿈도 야무지구나. 누가 너 같은 것이 만든 옷을 입고 싶다더냐. 버리기 아까운 이불이니 홑청으로 옷이나 한 벌 지어보아라.”
“이 귀한 비단 이불을 버린다고요? 차라리 빨아서 쓰심이.”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거늘!”
화들짝 놀란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번은 그냥 넘어가나, 앞으로 내 말에 어떤 토도 달지 말아라.”
“저…, 그러면 누구의 옷으로 할까요?”
“그런 것까지 알려주랴? 그냥 네 마음대로 해.”
“예, 알겠습니다.”
미옥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연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한참을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미옥은 목을 빼내어 연호의 모습을 살폈다.
‘진짜 잠이 들었나?’
거칠지만 일정한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미옥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연호를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썹 한 가닥의 미동도 없었다.
“그나저나 높으신 분이라 그런지 사람을 부리는 것은 타고 난 것 같네. 내가 쉬기라도 할까 봐서 옷을 지으라니.”
이불 천을 뜯어낼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곧 생길 저녁밥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 아무렴 어때. 자고로 밥 많이 주는 주인이 최고라고 했는데.”
**
“이게…, 밤새 만든 거라고?”
미옥이 내미는 옷에 연호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제 옷이나 해 입으라는 것도 모르고.’
“네, 아직도 천이 많이 남아서 몇 벌은 더 만들 수 있습니다. 너무 귀엽지요?”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미옥은 자랑스럽게 옷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갓난아이를 싸둘 수 있는 작은 싸개 보자기와 삼, 사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 한 벌이었다.
“어째서 애들 옷을 지은 거지? 천이 별로였나?”
“예에? 그럴 리가요. 제 생전에 이리 고운 천에다가 바느질을 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낡은 무명이나 만져본 제가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습니까.”
행여 또 오해라도 살까 싶어서 과장되게 손까지 크게 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왜 네 옷을 해 입지 않은 거지?”
“어른 옷은 한 두벌이지만, 아이들 옷은 여러 벌이 나오니까요. 그리고 험한 일을 하는 제가 이렇게 하늘거리는 옷을 입으면 하루도 못가서 찢어지거나 해질 겁니다.”
“네게 험한 일을 시킨다고 누가 그러 더냐? 혹시 날 돌보는 것이 험한 일인가?”
연호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아닙니다! 다만, 이 넓은 별채 안에 노비는 저 하나입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연호의 표정을 본 미옥은 작은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밖에서 길어온 물을 들여놓는 것도, 약을 달이는 것도, 밤새 아궁이를 지키며 불을 조절하는 것도, 마당을 쓸고, 별채 안을 닦는 것까지 모두 저 혼자서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옷 짓는 것 외에 또 무슨 일을 더 시킬까 싶은 걱정에 미옥은 과장된 몸짓으로 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본인이 자는 사이에 내가 쉴 거라는 생각은 안 하겠지?’
“이런 망할 놈이 있나.”
“예? 아, 아니 저는 그게 힘들다는 게 아니라 그저 바쁘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어린 요행으로 행여나 그를 또 화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미옥은 바싹 얼어붙은 몸을 움츠렸다.
“당장 하륜에게 가서 힘 좋은 놈 한 명을 별채로 보내라고 전해라.”
“잘못했습니다, 하나도 힘들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를 다시 내보내지 마세요.”
‘이번에는 아예 대 놓고 힘 좋은 놈을 요구했으니, 장형을 맞고 노예상인에게 팔릴 것이 분명해.’
미옥의 등줄기로 땀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내가 언제 널 내보낸다고 했느냐, 난 그저 노비 한 명을 더 들이라고 했다.”
질끈 감을 두 눈을 뜬 미옥은 잠시 멍하니 연호를 바라보았다.
“하, 한 명 더…, 말씀입니까?”
“그래, 별채 내 잡일은 모두 그놈에게 맡기거라.”
미옥의 광대가 탐스러운 복숭아처럼 솟아올랐다.
“알겠습니다! 당장 주인님께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나가보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미옥은 함박웃음을 날리며 달음박질을 쳤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연호는 미옥이 남기고 간 작은 아기 옷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거칠고 투박한 바느질이었으나, 그 안에는 주인을 향한 교태 대신 기묘할 정도의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겨우 이런 것이었나.’
사경을 헤매는 황후가 마지막까지 하륜과 머리를 맞대며 설계한 독을 품은 꽃의 정체가 고작 이런 것이었는지.
연호의 머릿속에 홀로 남겨질 어린 아들, 상이의 얼굴이 스쳤다.
“아이를 지극히 여기는 천한 여인이라….”
연호는 미옥이 지은 싸개 보자기를 손끝으로 느리게 쓸어내렸다.
“내 아들의 어미가 되기에, 이보다 더 다루기 쉬운 패는 없겠군.”
그의 눈에 서늘한 이성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스치며 갈무리되었다.
“주인님! 주인님!”
안채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미옥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가득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은 햇살 아래 잘 익은 살구처럼 보드라운 빛을 냈다. 하륜은 서책을 넘기던 손길을 멈추고, 문밖에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호들갑이냐.”
“그게…, 손님께서 별채에 힘 좋은 사내놈을 한 명 더 들이라 명하셨습니다! 그에게 잡일을 다 맡기라고요!”
미옥은 제게 쏟아질 고생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에만 취해 아이처럼 웃었다. 하지만 하륜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힘 좋은 사내를 들여 잡일을 맡겨라?’
그것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었다. 황제가 미옥을 부려 먹는 노비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 곁에 두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 단단한 철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제 뜻대로 되어가는 판국이었으나, 하륜의 가슴 한구석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그것은 기분 좋은 간지러움이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듯 불쾌한 자극이었다. 마치 정성껏 길들여온 매를 사냥터에 내놓아야 하는 사냥꾼의 심정이 딱 이럴 듯 했다.
“옷을 지을 줄 아나?”“바느질은 꽤 합니다만, 천자님의 마음에 들만한 옷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꿈도 야무지구나. 누가 너 같은 것이 만든 옷을 입고 싶다더냐. 버리기 아까운 이불이니 홑청으로 옷이나 한 벌 지어보아라.”“이 귀한 비단 이불을 버린다고요? 차라리 빨아서 쓰심이.”“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거늘!”화들짝 놀란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한번은 그냥 넘어가나, 앞으로 내 말에 어떤 토도 달지 말아라.”“저…, 그러면 누구의 옷으로 할까요?”“그런 것까지 알려주랴? 그냥 네 마음대로 해.”“예, 알겠습니다.”미옥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연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한참을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미옥은 목을 빼내어 연호의 모습을 살폈다.‘진짜 잠이 들었나?’거칠지만 일정한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미옥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연호를 쳐다보았다.다행히도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썹 한 가닥의 미동도 없었다.“그나저나 높으신 분이라 그런지 사람을 부리는 것은 타고 난 것 같네. 내가 쉬기라도 할까 봐서 옷을 지으라니.”이불 천을 뜯어낼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곧 생길 저녁밥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뭐, 아무렴 어때. 자고로 밥 많이 주는 주인이 최고라고 했는데.”**“이게…, 밤새 만든 거라고?”미옥이 내미는 옷에 연호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제 옷이나 해 입으라는 것도 모르고.’“네, 아직도 천이 많이 남아서 몇 벌은 더 만들 수 있습니다. 너무 귀엽지요?”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미옥은 자랑스럽게 옷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갓난아이를 싸둘 수 있는 작은 싸개 보자기와 삼, 사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 한 벌이었다.“어째서 애들 옷을 지은 거지? 천이 별로였나?”“예에? 그럴 리가요. 제 생전에 이리 고운 천에다가 바느질을 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낡은 무명이
“새 이불과 옷을 챙겨왔습니다.”커다란 보따리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어붙은 치맛자락이 미옥음을 알려주었다. 연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 걸어오는 그녀를 응시했다.“옷을 새로 짓기라고 한 것이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손발까지 이리 더뎌서야.”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비단처럼 거칠고 낮았다. 하륜의 집 근처에서 습격을 당하고, 하필 이곳에 머물게 된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설계 같아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누군가가 있다면 하륜과 황후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이 계집 또한 독을 품은 꽃일 터.’하지만 물증은 없다.그러니 그 분풀이를 눈앞의 계집에게라도 하고 싶어졌다.“아니면, 그사이 밖에서 네 주인과 다른 수작이라도 부리고 온 것인가.”미옥은 대답대신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이 방안에 들어와서 떨던 모습은 온간데 없었다.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연호의 가슴팍으로 뻗었다. 옷고름을 쥔 손가락끝이 찰나의 순간 떨리는 듯 했으나, 이내 거침없이 움직였다.“……!”“죽여도 좋으니 일단 벗으시지요.”“감히 뉘 몸에 손을…!”호통에도 미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되려 흔들리는 것은 연호의 눈동자가 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불에 데인 듯했다. 젖은 치마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그녀의 체온, 그리고 상처의 열기가 뒤섞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눅진해졌다.“이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 하륜 그자가, 침소에서의 예법을 아주 지독하게 가르친 모양이다.”연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가슴팍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저고리 너머로 그의 가파른 심장 박동이 미옥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내의 몸을 탐하는 꼴이라니.”“입고 계신 옷이 젖어있습니다.”“뭐?”“그리 더 계시다간 열까지 날겁니다. 천자께서 고작 한기 따위에 무너지시려 합니까.”미옥은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갈색 눈동자 속에는 흔한 교태 대신, 지독할 정도의 생존
“모실 아이를 보내었는데, 어찌 저를 찾으십니까.”문을 열고 들어선 하륜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네 놈의 집에서 네 놈을 찾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쓸모가... 없으셨습니까.”낮게 깔리는 하륜의 음성에는 묘한 박동이 섞여 있었다. 연호는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답했다.“쓸모라…, 누구든 와서 대체 할 수 있는 거라면 없다고 봐야겠지.”하륜이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극진한 태도였으나, 연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사냥감을 살피는 맹수처럼 예리했다.“두통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군요. 땀도 멎으시고.”“그러고 보니 기분이 한결 낫군.”연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니, 가벼워진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팔의 통증조차 안개 너머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그 풀떼기가 효과가 있긴 한가보군.’조금 전 미옥이 두고 간 거친 잎사귀에서 나던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에 남은 듯했다. 연호는 하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그 아이, 어디서 구했지?”하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미옥이 말입니까. 제 양부가 북원 평정 때 데려온 아이입니다. 어미 잃은 짐승을 거두는 게 그 노인의 취미였지요.”“북원이라… 어쩐지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더군. 황갈색 눈이라니, 타오르는 불을 가둔 것 같지 않으냐.”연호의 시선이 하륜의 얼굴을 훑었다. 하륜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소매 안으로 감춘 손가락이 단단히 말려 올라갔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미옥에 대한 감상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그저 비천한 노비일 뿐입니다. 인물이 아깝다 한들 환관의 집에서 부리는 것 외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소용이라… 글쎄. 내가 보기엔 그 아이, 이 집에 있기엔 지나치게 영민해 보이던데.”연호가 몸을 일으켜 하륜에게 바짝 다가갔다. 부상당한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위압적인 기운
취명향 덕에 어깨의 고통은 둔감해졌지만, 이따금 머리를 찌르는 통증에 절로 눈살이 찡그려졌다. 다시 하륜을 부르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미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것 좀 보세요!”미옥은 품 안에 가득 찬 이름 모를 풀들을 한 움큼 들고 다가와 연호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이게 뭐지?”연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길쭉한 이파리에서는 모과처럼 상큼하면서도 박하처럼 매운 향이 훅 끼쳤다. 피와 취명향에 절여진 방 안의 공기를 뚫고 들어오는 생경한 냄새였다.“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천자님의 두통을 낫게 해줄 겁니다. 제게는 만병통치약 같은 거니까요.”“내가 머리가 아픈 건 어찌 알았지?”“당연한 것을 물어보십니다.”“뭐라?”연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으나 미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 방에 들어온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저도 머리가 아픈걸요. 보나 마나 저 독한 향 연기 때문이겠지만, 추위 때문에 환기를 할 수도 없으니. 이 풀을 코 가까이에 대고 맡으세요. 상처 부위에 올려두셔도 시원하실 겁니다.”들뜬 목소리의 미옥과 달리, 연호의 표정은 급격히 가라앉았다.하륜이 보낸 여인이라기에 어떤 대단한 수작을 부릴까 싶었더니, 고작 산천에 널린 풀떼기를 가져와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이제 네 할 일은 다 한 것이냐?”“예? 네... 행여 더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천진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답. 연호는 허탈함 섞인 실소를 삼켰다.“가서 네 주인 놈이나 불러오너라.”자신이 가져온 풀을 들여다보지도 않는 냉담한 태도를 보며, 미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연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취명향의 부작용이 이딴 풀로 해결될 것 같으면 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느냐.”그는 바닥에 떨어진 풀잎 하나를 발끝으로 툭 쳤다.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행동거지를 보니 영락없는 노비였다. 아무리 고운들, 색과 향이 없는 꽃이라면 종이로 접은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연호는 등 뒤를
'주인님을 놈이라고 부르다니 필시 높으신 분이구나.'미옥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신분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시, 신선님입니까?”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흑발 사이로, 갈증에 젖은 눈동자가 번뜩였다.“신선이라…… 하긴, 이 향에 취하면 이곳이 극락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가긴 하지.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거라. 내가 신선인지, 아니면 너를 잡아먹을 괴물인지.”미옥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발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지, 바닥에서 손이 올라와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지 착각마저 들었다.‘별채가 이리 컸었나?’열 걸음 정도를 앞으로 나가니, 사내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의 앞에 놓인 화로에서 끝없이 피어나는 연기 때문에 이따금 흐려지긴 했지만, 선명한 이목구비까지는 가리지 못했다.서늘할 정도로 매끄러운 콧날은 마치 잘 벼려진 백자의 선 같았고, 짙게 그늘진 눈매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은 창백한 뺨 위에 정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흑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그의 비현실적인 안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의원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도 아픈 사람인 것 같았으나, 환자라기엔 지나치게 수려하고, 고결한 기품이 흐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앞에선 미옥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었다.발갛다 못해 금방이라도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은 볼과 마디마디가 불거진 손을 가진 여인.‘칼바람에 얼어 터져도 본판은 그대로구나.’형편없는 꼴이었지만, 황갈색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하륜이 혼자서 저지를 일은 아니고, 분명 황후가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지? 아무리 미색이 있다 해도 노비라니.'취명향(醉冥香) 때문인지 연호는 생각을 깊게 하기가 어려웠다.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도 내가 신선으로 보이느냐?”“아닙니다.”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미옥은 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해.”매몰찬 대꾸에 동기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잘 생각해 봐. 노 씨는 상급 하인이잖아. 따로 살 집도 있고 돈도 꽤 모았을걸? 인물도 저 정도면 훤칠하고.” “그렇게 괜찮으면 네가 가지 그래?” “어머머, 정말 몰라서 물어? 노 씨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너만큼만 예뻤어도 벌써 꼬셨지.”미옥의 눈매가 서늘해졌다.“종년이 예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평민인 노 씨가 노비랑 혼인이라도 해줄 것 같아? 헛꿈 꾸지 마.”퍽, 퍽! 미옥의 방망이질 소리가 거칠어지자 동기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미옥아! 미옥아!”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멀리서 노 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거 봐, 저렇게 애타게 부르잖아.” “입 닫으랬지? 누가 들을까 겁난다.”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노 씨는 미옥의 앞에 서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주인님께서 널 찾으신다! 일각을 넘기지 말고 오라 하셨으니 어서 뛰어!”“예? 무슨 일로요?”옆에 있던 동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일어섰다. 하지만 노 씨는 대답할 여유도 없다는 듯 미옥의 팔을 낚아챘다.“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그의 손길에 휩쓸린 미옥이 그만 반석에 걸려 냇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음물 같은 냉기가 치맛자락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으아, 차가워! 옷이라도 갈아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