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선은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갖고 왔다.“그럼 내가 볼게.”...바닥 위 눈이 아직 녹고 있는 중이라 날씨는 너무나도 으스스했다. 나뭇잎 위에 앉아있던 이슬이 바람에 밀려 장소월의 코끝에 내려앉았다. 장소월은 너무 추워 부들부들 떨었다.장소월은 스카프 안에 목을 쏙 집어넣은 채 양호실에 도착했다. 체온을 재보니 37.8도였다.의사가 말했다.“미열이 있어. 다른 아픈 곳은 없어? 콧물도 나와?”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요.”“약을 줄 테니까 잠시 기다려. 며칠 먹어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으면 병원에 가보도록 해.”“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장소월은 약봉지를 교복 호주머니에 넣은 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돌연 그녀의 앞에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누군가가 나타났다.“안... 안녕.”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1미터80의 키에 두터운 살집을 가진 건장한 몸집의 남학생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며칠 감지 않았는지 잔뜩 떡져있었다. 장소월이 물었다.“무슨 일이야?”그가 장소월을 향해 빙그레 웃고는 쭈뼛거리며 말했다.“헤헤... 넌 너무 예뻐! 너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 수 있어?”“하하하하...”그때 옆쪽 농구장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모르는 학생 한 무리가 그곳에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장소월이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시험이 곧 다가오는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아?”“난 괜찮아. 우리 아버지가 석유 회사 회장이라 성적으로 대학에 붙지 못한다면 돈으라로도 넣어준다고 했거든. 내 여자친구가 되어줘. 돈은 네가 얼마를 원하든 다 줄 수 있어. 또한 앞으로 간식은 다 내가 사줄게, 예쁜 옷도 사주고...”“미안해. 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장소월이 그를 거절한 건 그의 외모나 어리숙한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그녀가 다른 일에 신경 쓸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학교엔 예쁜 여학생들이 많아. 난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남학생이
그는 수업 시간이 거의 다가올 때까지 장소월을 물고 늘어져서야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담임이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사무실에 가니 부담임이 서랍에서 무언가 찾고 있었다.“앉아!”장소월이 옆에 놓여있던 의자를 갖고 와 앉았다.부담임이 지원서를 한 장 꺼냈다.“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오지 않은 거야. 전화도 안 받고... 소월아.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부담임 채서연은 6반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강만옥이 학교를 떠난 뒤 이어 6반을 맡은 것이다. 예전에도 거의 모든 일들은 채서연이 도맡아 했었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의 권세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평등하게 대했다. 최소한 강만옥처럼 다른 마음을 품고 장소월에게 접근하지는 않았다.장소월이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선생님, 왜 절 부른 거예요?”채서연이 장소월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학생들은 거의 모두 지원서 작성을 마쳤어. 저번 내가 직접 너희 집에 가기도 했었는데 사람이 없더라고. 이렇게 학교에서 만날 기회도 흔치 않으니 지금 지원서를 써. 우리 반은 너를 제외하고 모두 다 완성했거든. 교감 선생님도 계속 날 재촉하고 있어.”“이번 중간시험을 마치고 학부모 회의를 열었는데 그때도 네 아버님은 오지 않으셨어.”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꽉 잡고 있었다.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장해진은 이렇듯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때로는 자신이 정말 그의 친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전연우에 대한 마음이 도리어 훨씬 더 크다. 하여 그녀는 심지어 장해진의 친자식은 자신이 아니라 전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선생님은 네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네 운명은 네 손에 달렸다는 걸 기억해야 해. 이렇게 집안 지시대로 움직이는 건 정말 애석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넌 예뻐서 선생님도 많이 좋
그렇다면 전연우도 더는 장해진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에게도 별다른 행동을 가하지 못할 것이다.그 순간 장소월은 무언가 깨달았다.예전 그녀는 서울시의 울타리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줄곧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에 갇혀 전연우에게만 의지한 채 살았다. 하여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너무나도 좁은 시야를 갖고 있었고 지식은 더더욱 부족했다.이건 어쩌면 그녀의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그렇게 장소월은 선생님과 함께 서울대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졸업 전, 반드시 장해진 몰래 해외 교환 학생으로 나가 3,5년 정도 지난 뒤 다시 돌아올 것이다.장해진이 그녀의 경제 래원을 끊는다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그녀는 이미 홀로서기 할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올 때쯤 장해진은 이미 자신의 딸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어쩌면... 장해진은 이미 죽고 장씨 집안은 전연우의 손에 넘겨졌을 수도 있다.이곳 상황이 어떻든 그녀는 아마 플로리다나 로마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고 있을 것이다.전생에서 채 선생님은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전생에서 일어난 일은 현생에서도 무조건 반복되지는 않는다.아마... 그녀의 운명은 이미 바뀌었을 것이다.백윤서도 장소월의 방해가 없으면 이렇게 평온히 살아가다가 전연우와 결혼해 아이를 낳을 것이다.그녀는 3년을 더 참아내야 한다...전생에서 십여 년의 고통도 참아냈는데 고작 3년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장소월이 교실로 돌아왔을 땐 수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마지막 줄은 본래 텅 비어있었는데 지금은... 강용 등 학생들이 에워싸고 있어 아주 시끄럽고 복잡해 보였다.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누군가 자신의 책상에 손을 댔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번 수업 때 썼던 곱게 정리했던 공책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던 것이다.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른 반으로 옮겨질 것이다.이건 그녀가 담
“나 다른 반에 갈 거야.”장소월이 덤덤히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수기 쪽으로 가 물을 받았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교실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그중 누군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정말이야? 부정행위로 1반에 간다고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1반은 공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3일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올 거야.”“내 생각도 그래. 1반에 가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다니. 진짜 가소롭다니까!”“차라리 죽기보다 못해!”그 말을 들은 서민정은 씩씩거리며 장소월을 위해 반박했다.“소월이가 부정행위한 걸 너희들이 봤어? 너희들 조금 전 분명 소월이의 수학 시험지를 봤잖아! 모든 문제의 답은 정확했어! 너희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죄 없는 다른 사람을 헐뜯는 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매한가지야!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게 그렇게 배가 아파?”그녀의 수학 시험지?장소월의 시선이 강용의 앞자리에 앉은 백윤서에게로 향했다.백윤서는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후 다른 반으로 갈 테니 그들과 부딪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말이다.서문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장소월은 자신의 물건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장소월!”백윤서가 일어서며 그녀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짝꿍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상관하지 마. 곧 수업 시작해.”허철이 책상에 발을 걸고 몸을 뒤로 기대고는 방서연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방서연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허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진짜 1반으로 가는 거야?”방서연이 어깨를 슥 올렸다가 내렸다.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시끄러워!”잠에서 깨어난 강용이 소리를 지르자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의 시선이 깨끗이 정리된 장소월의 책상에 향했다.강용은 뒷발로 의자를 뻥 찬 뒤 주먹으로 문을 힘껏 내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용아, 너 어디에 가는 거야? 곧 수업 시작해!”
장소월은 네모 모양으로 박힌 대리석을 밟으며 걸어갔다.이제 눈은 모두 녹았지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니 또다시 기침이 새어 나왔다.그녀는 도서관에 들어가 항상 앉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지금은 오직 서울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만이 해외 교환생 자격을 얻게 된다. 이건 그녀의 유일한 기회이다.혹여 장해진이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사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딸이 혼약을 맺는 도구를 넘어서 장씨 집안을 일으켜 세울 인재일 가능성도 있다.커다란 창문 넘어 또다시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책 읽기에 열중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청순했다...시험지 몇 장을 푸니 배가 고파왔다. 핸드폰을 보니 마침 식사 시간이었다.그때 돌연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소월아, 나 널 위해 생일 선물을 준비했어. 네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어.」장소월은 전연우의 충고 때문에 강영수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나누었던 대화기록을 모두 삭제하기까지 했다.그녀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아마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알아봤어야 했다.강영수,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적어도 장소월은 그를 구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생명이 끝나지 않게 목숨을 구해준 건 그녀의 이번 생에서 가장 행운스러운 일이다.강영수는 그녀에게 크나큰 따뜻함을 주었다. 그녀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그녀와 이야기를 나눠주었고, 매번 그녀가 괴로워할 때면 나타나 위로해줬으며, 그녀와 함께 전시회에 가기도 했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비밀까지...전연우는 마음이 좁고 어두우며 극히 지독하다. 예전 장해진과 함께 지하 세계 일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끊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강영수는 이제 겨우 다리를 치료했다. 아무리 대단한 서울 명문 집안인 강씨 가문 자제라고 해도 전연우는 아무도 모르게 강영수의 다리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수업은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장소월은 이제 감기가 거의 나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코가 조금 막히는 것 외 한결 나아졌다.다행인 건 장해진은 그녀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여섯 시 무렵, 장소월은 학교 문을 나섰다. 그때 백윤서와 기성은을 만났다.기성은과 백윤서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녀를 발견할 때까지 기성은은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로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성은이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장소월 또한 그에게로 걸어가 말했다. “비서님, 무슨 일 있으세요?”기성은은 전연우의 충실한 부하직원이다. 전생에서 바로 그가 이혼합의서를 그녀에게 전해줬었다.“정 집사님이 안 계셔서 제가 대신 윤서 아가씨를 모시러 왔어요. 왔던 김에 소월 아가씨도 함께 모시려고요. 제 기억으론 두 분은 같은 반이었던 것 같은데 왜 소월 아가씨는 더 늦게 나온 거예요?”전연우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기성은은 이제 웬만한 일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처리한다. 또한 누군가를 싫어하더라도 절대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장소월은 정 집사에게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전연우가 떠나라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기성은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대체 무슨 목적일까?아무튼 그녀는 절대 기성은의 차에 앉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오빠는 비서님에게 백윤서를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 제가 아니라요.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아요. 죄송하지만 전 혼자 버스를 타고 갈게요.”기성은이 살짝 이마를 찌푸리더니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소월 아가씨, 최근 서울은 뒤숭숭해 혼자 다니면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변고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요. 차에 오르십시오.”그 말투는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단호했다.백윤서는 장소월보다 몇 배는 더 착하다. 장소월의 까칠하고 막무가내인 성격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할 줄을 모른다. 하여 그녀를 대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만약 전연우의 분부가 아니었다면 그 역시
오부연은 살짝 뒤에서 장소월을 따라갔다.“소월 아가씨는 장씨 가문의 큰따님으로서 더 강경한 태도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아가씨를 이용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가 쉽게 손해를 봅니다.”오 집사는 역시 예리했다. 그를 속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소월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 집사님 말씀이 맞습니다.”“도련님도 저도 소월 아가씨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자신을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 순간 장소월은 가슴이 조여 왔다.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설마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걸까?백윤서는 사이드미러로 장소월이 고급 카이엔에 타는 것을 보았다. 그 차의 번호는 네 자리 모두 1로 되어 있었다. 이런 차는 서울에서 아무나 운전할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기성은이 운전석에 타자 백윤서가 물었다.“소월이는 우리랑 같이 안 가요?”기성은은 안전벨트를 매고 대답했다.“소월 아가씨는 다른 일이 있어서 가셨어요. 윤서 아가씨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럼 부탁드려요, 기사님.”“당연한 일인걸요.”장소월이 백윤서만큼 철이 들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전연우도 걱정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차는 20분 정도 달렸고, 시간은 벌써 거의 6시 30분이 되어갔다. 이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졌다. 장소월은 조용한 거리를 바라보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 집사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거의 도착합니다. 곧 알게 될 거예요.”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한 곳에 멈췄다.운전기사가 차 앞쪽을 돌아서 조수석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오부연이 말했다.“소월 아가씨, 이쪽으로 쭉 걸어가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그들은 야시장과 광장 거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서울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고 맛있는 간식거리도 많은 곳이다.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차에서 내렸고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는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제야 장소월은 야외 광장 레스토랑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보았다. 그 사람은 조명 아래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부드러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멀리서도 그의 손등의 문신과 옷깃 아래에 숨겨진 문신을 볼 수 있었고, 눈매는 온화하고 훤칠한 몸매에 꼿꼿이 서 있었으며, 풍채가 아름다운 데다 동작 하나하나에 타고난 고귀함이 배어 있었다.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질은 사람들 속에 서 있어도 시선이 그에게 가장 먼저 쏠리게 한다.이때 웨이터가 와서 말했다.“강 선생님이 기다리시는 손님 맞으시죠? 이미 자리를 예약해 두었으니, 저를 따라오세요.”장소월은 손에 화려한 색의 장미 다발을 들고 걸어갔다. 작은 룸처럼 유리로 덮여 있는 작은 공간을 보았고, 유리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눈이 내리는 날이면 밖의 설경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잠시만 기다리세요. 강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소월아.”맑은 실루엣이 그녀의 뒤에서 나왔고, 등을 지고 있던 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달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보았고, 그 순간 맑은 바람이 불었으며 그는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웨이터는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장소월의 마음은 왠지 저절로 긴장되었고, 이 순간 그녀는 강영수가 매우 잘생겨 보였다. 장소월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 그는 두 다리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사실, 그녀는 이미 짐작했었다... 병원에서 그가 치료받는 동안 장소월은 그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장소월은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전에는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런 걸까?오늘 아파서 그런 걸까?“어... 나... 고마워...”장소월은 한참을 참다가 마침내 그 단어를 내뱉었다.남자는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리고 총애하는 눈빛으로 말했다.“감기 걸리겠다. 안으로 들어가자.”이 남자가 바로 자신이 구한 강영수라는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