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고마워요. 저도 함께 식사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장소월은 3층 창가에 서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철용 옆에 있는 임신한 여자를 어딘가에서 본 듯 낯이 익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서철용이 이렇게까지 꽁꽁 숨겼을 줄은 몰랐다. 어느새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니...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본 서철용의 그녀에 대한 감정은 분명 가짜가 아니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서철용은 전연우와 연합해 그녀에게서 엄마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해버린 사람이다. 이제 오해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간단히 사과 한마디 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한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은 전연우와 함께 독거노인으로 외롭게 살다 죽어야 하거늘.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전연우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몸이 많이 회복된 것 같네. 이제 며칠 동안 나한테 빚졌던 거 갚아야 하지 않겠어?”“내가 빚졌다고? 전연우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난 너한테 빚진 거 없어. 오히려 네가 나한테 빚졌지!”얌전히 있다가 또 불같이 화를 내는 장소월이었다.전연우는 이미 오랫동안 그녀의 몸에 손도 대지 못했다. 대다수 깊은 밤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계속 이렇게 나가다간 정말 중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그녀가 침실에서 나가는 것을 본 전연우가 쫓아가려던 순간,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문밖에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전화를 귀에 가져간 채 서재로 들어갔다.“말해.”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상대방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전... 전 대표님, 기사 내용은 이미 대표님 말씀대로 작성해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한 시간 뒤면 신문에서 기사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핸드폰 기성은한테 줘.”기성은이 전화를 받았다.“대표님.”“두 시간 뒤 기자회견 할 거라고 공표해.”“네.”전화를 끊은 뒤 전연우는 옷을 갈아입고 장소월의 화장대 밑 서랍에서 명품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찼다. 떠나기 전 그는 화실에서 바삐 작업을 하고
순식간에 모든 플래시가 전연우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히 회의장으로 걸어 들어가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았다. 송시아는 성세 그룹 부대표의 자격으로 전연우의 오른쪽에 앉았다.전연우의 등장은 회의장 전체를 흥분으로 들끓게 만들었다.기자들마다 오늘 아침 갓 인쇄된 신문지를 들고 있었다. 전연우가 앉자마자 기자들이 물었다.“대표님, 오늘 기사 내용 사실인가요? 정말 인하 그룹과의 혼사를 깨신 건가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제 인하 그룹은 협력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전연우가 의연히 대답했다.“저와 인시윤 씨의 이혼은 인하 그룹과의 협력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두 회사의 사업 영역이 확연히 다른 만큼 저희의 협력은 계속될 겁니다.”“그렇다면 대표님과 인시윤 씨 사이 감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사실인 건가요?”기성은이 기자의 말을 끊었다.“대표님의 사생활에 관한 일은 묻지 말아 주세요. 이번 기자회견에선 회사 운영에 관한 질문만 받겠습니다.”기자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인터넷엔 이런 루머도 떠돌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인시윤 씨와 이혼하시는 이유는 4년 동안 숨겨둔 정인 때문이라고요. 그분은 4년 전 프랑스에서 유학하다가 몇 개월 전에 돌아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얼마 전 그 여자분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여자분과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이혼 발표하시는 거 아닌가요?”송시아가 가소롭다는 듯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전연우가 장소월을 언제까지 보호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던 전생처럼 이번 생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장소월... 인생을 두 번이나 살았음에도 넌 발전이라는 게 없구나. 전연우를 제외하면 너한테 남는 게 대체 뭐야?’그 말에 밑에 앉아있던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카메라맨들은 서울의 지배자의 반응을 단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에게 카메라를 고정하고 있었다. 이런 기자회견은
전연우가 여기자 목에 걸려있는 기자증을 돌려보았다. 위엔 인턴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언제부터 엔조이 미디어에서 인턴 기자를 성세 그룹 기자회견장에 보냈죠?”하지만 상대방은 전연우가 전혀 무섭지 않은 듯 그의 손에서 기자증을 휙 잡아당겼다.“전 대표님, 인턴 기자는 참석할 자격 없나요? 아니면 제가 한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람들 앞에서 절 협박하는 건가요?”그때 기자회견 총괄 매니저가 다급히 일어나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신입 기자라 잘 몰라서 이러는 겁니다. 제가 얼른 내보내겠습니다.”경호원이 나서려 하자 전연우가 손을 들어서 막아 세웠다.“난 성세 그룹 모든 임원이 한 일에 착오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해요.”감히 허락도 없이 성세 그룹에 들어온 기자는 그녀가 처음일 것이다.“내가 말하면 보도할 거예요?”미모가 꽤 수려한 기자가 아래턱을 치켜들고 말했다.“못할 것 없죠. 기자란 원래 듣고 본 일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보도해 사람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는 사람이잖아요.”기성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고했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연우와 맞섰다.전연우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그 사람과 나 사이에 아기 있다는 거 맞아요. 사생활에 관한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이 그 사람의 생활에 영향 주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무대 위에 앉아있는 송시아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질투가 가득 일렁이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그가 인정하고 말았다!“두 집안의 혼인은 그저 각자의 이익만 위해서일 뿐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지 않았으니, 이혼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어요. 지금의 성세 그룹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으니...”전연우가 바쁜 일이 있는 듯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이혼 위자료로 저희 성세 그룹 100분 1의 주식을 인하 그룹에게 제공하겠습니다.”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100분의 1이라고?성세 그룹의 주
“언제부터 내 일에 그렇게 간섭했어?”전연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송시아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튀어 올랐다. 하얗게 덧칠한 파운데이션 위 새빨갛게 바른 립스틱... 그녀가 질투가 가득 일렁이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기성은이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도착했습니다.”전연우가 시선을 옮겨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간이면 그녀와 함께 저녁밥을 먹어야 한다.전연우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이어지는 기자회견은 인하 그룹 대표가 직접 나와 할 겁니다. 제 기자회견은 여기까지입니다.”그중 남자 기자 한 명이 물었다.“전 대표님, 아직 기자회견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시려는 건가요?”전연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미래의 제 와이프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돌아가 함께 있어 줘야 해요.”전연우는 다른 기자들의 질문을 무시해버린 채 곧바로 회의장을 나섰다.전연우가 모습을 드러내서부터 지금까지 고작 십여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거의 모든 질문 시간을 아까 그 신입 기자가 낭비해 버렸다.기자들은 가슴에 울분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다들 자리에 앉아 투덜거렸다.“왜 하필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는. 인터뷰할 수 있는 이런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도 모자라 심기를 건드리기까지 했어요.”“대체 어떤 학교 졸업생이길래 저렇게 상황파악을 못 하는 걸까요. 우리 기자들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려도 유분수지.”“그러니까요! 다음 인터뷰엔 절대 들어오지 못할 거예요.”“정말 짜증 나 미치겠어요. 엔조이 미디어는 대체 왜 저런 쓰레기 같은 사람을 받은 거예요?”전연우가 나가고 몇 분 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인정아가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나타났다. 그녀의 머리는 어느새 수많은 백발이 자라나 있었다. 그녀가 남색 정장을 입고 여장부의 포스를 뽐내며 들어오고 있었다.송시아는 곧바로 전연우를 따라나섰다.문을 닫지 않은 회의실 안에서 인정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전연우 씨와 우리 시윤이의 이혼은 이미 사전에
송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아이라인이 번져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흉측하게 망가졌다.“... 한 시간 뒤 돈이 통장에 들어갈 거야.”“네. 부대표님.”송시아는 상대방의 손에서 USB를 받은 뒤 회사를 나섰다.회사 문 앞, 소민아가 떠나가는 전연우의 차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대표님, 천천히 가세요. 몸조심...”기성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싱겁기는!”소민아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헤헤 웃었다.“비서님이 가르쳐 주신 거잖아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직접 체험하라고요.”“저도 대표님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예요. 어느 날 저에게도 승진할 기회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헤헤...”하지만 이어지는 기성은의 말이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었다.“왜요. 내 자리라도 꿰차고 싶어요?”“기 비서님, 전 그런 뜻이 아닙니다.”기성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근무 시간에 업무와 상관없는 말 하면 6만 원 깎을 거예요.”“뭐라고요?”소민아는 그 어이없는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기성은이 멀찌감치 걸어간 뒤였다.“기 비서님, 잠시만요...”“선생님...”“사수님...”“남신님...”“제가 잘못했어요. 월급 깎으시면 안 돼요...”기성은의 그 말은 부유하지 않은 집안이 소민아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성세 그룹의 기자회견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성세 그룹 대표이사 전연우와 인하 그룹 아가씨 인시윤의 이혼 사실은 빠르게 서울시 모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이번 일엔 성세 그룹의 관여가 동반했다. 기자가 보도한 내용 모두 성세 그룹의 검사를 받고 진행되었기에 성세 그룹의 주식엔 조금의 영향도 가지 않았다.두 사람의 이혼 사실이 더 큰 화제가 되기 전에, 성세 그룹에선 연이어 유명 배우 소아린이 거물 스폰서와 즐기다가 하반신이 찢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터뜨렸다.신문에 소아린의 진단서까지 실려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전연우는 강씨 저택을 손에 넣고도 흔쾌히 내놓았다. 현재 전연우에게 별로 아깝지도 않은 것이었다.지금의 그는 돈, 지위, 명예 모든 것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전연우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강씨 저택... 그는 필요 없다. 심지어 그녀에게 남원 별장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도 있다.그녀가 눈앞에 있어야만 마음속에 안정이 깃든다. 그래야만 마음속 텅 비었던 곳이 꽉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화실 안, 촬영사가 별이의 첫돌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얼마 전에 찍으려던 사진을 미루다 미루다 오늘에야 찍게 된 것이다.별이는 꽃 속에 파묻혀 선녀 원피스를 입고 날개를 단 채 선녀봉을 들고 촬영사 뒤에 서 있는 장소월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앉아있었다.장소월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노란색 오리 장난감을 들고 아이의 웃음을 유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가닥의 시선이 그녀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전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고 말했다.“걘 알 필요 없어.”간단히 한 마디 말한 뒤 전연우는 전화를 끊었다....옆에 있던 은경애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말했다.“아이고, 크면 분명 여자아이들한테 인기 폭발일 거예요. 저 잘생긴 것 좀 봐요.”촬영사 보조도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맞아요. 사모님처럼 예쁘게 잘 자랄 것 같아요.”장소월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닮았어도 그저 우연일 뿐이다.마지막 사진만 남겨놓고 촬영이 거의 끝나가던 때 촬영사가 말했다.“사모님, 아이와 함께 찍지 않으실래요?”보조가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사모님, 도련님을 무릎에 앉히고 찍으면 분명 잘 나올 거예요.”장소월이 동의하기도 전에 은경애는 이미 의자를 가져왔다.장소월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별이를 안고 의자에 앉았다.촬영사가 사진을 찍으려던 그때, 전연우가 성큼 걸어 들어왔다. 심지어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 던지고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채 말이다.“대표님.”전연우는 고개를
“지금 뭐 하는 거야?”장소월이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범한 남자를 쳐다보았다.촬영사가 그 자연스러운 장면을 포착해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 찍은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다.장소월의 눈에 깃든 불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엔 그저 남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보였다.촬영이 끝난 뒤, 장소월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전연우는 아이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를 안아 화실에서 나갔다.화실 안 사람들은 모두 몰래 웃으며 부러워했다.장소월은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별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전연우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앞으로 사람 많은 곳에서 그러지 마. 나 불편해.”도우미가 몸보신 한약을 데워오자 전연우가 받아들었다.“이제는 성세 그룹 안주인이라는 자리에 천천히 익숙해져야 해.”장소월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신문에 실린 내용이 다 사실이란 말이야? 또 인씨 집안을 협박해 거래했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은 인시윤과 이혼할 목적으로?”“이번엔 또 어떤 추악한 방법으로 인하 그룹 사모님이 동의하게 만든 거야? 목숨으로 협박했어? 아니면 인하 그룹으로?”장소월이 벌컥 화를 내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전연우가 그녀 입가에 가져간 한약이 담긴 숟가락을 무시해버린 채 말이다.전연우가 대답했다.“강씨 저택 집문서 줬어.”장소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연우가 그녀를 위해 줄곧 눈독을 들였던 강씨 저택 집문서까지 양보했다고?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네가 어떤 목적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상관없어. 전연우... 똑똑히 말해줄게. 저번 생에서 난 너와 결혼했다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어. 이번 생... 아니 또 다른 삶이 주어진다고 해도 절대 다시는 너와 결혼하지 않아.”“전생에서 강한 그룹, 인하 그룹 모두 네 손에 무너져버렸어. 강용은... 너 때문에 자살까지 했고.”“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넌 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르는 그 추악한 짓 끊지 못해
도우미는 모두 숨을 죽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말이다.그래서 대표님은 사모님을 소중하게 아껴주는 반면 사모님은 한 번도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아이를 안고 문밖에 나서기 바쁘게 은경애의 귀에 그릇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품 안 아이가 깜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아이가 또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릴까 봐 얼른 멀리 몸을 피했다. 분위기가 얼어붙자 도우미들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이제 거실엔 잔뜩 경직되어 있는 두 사람만 남았다.그녀의 손목을 잡은 전연우의 손이 경련했다. 그녀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괴로움을 보니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들 사이엔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전연우는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부단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예전 그녀에게 범했던 잘못을 생각하면서 말이다.또 어쩌면 장소월의 눈물이 전연우를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일 지도 모른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 전연우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전연우가 장소월을 끌어당겨 품 안에 안았다. 장소월은 고통스럽게 반항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려 했다.“이거 놔! 전연우... 이거 놔!”전연우는 그 어떤 일이든 굳이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장소월과 다툼의 도화선이 늘 강영수가 되니 이제 어쩔 수가 없었다.“강영수 비행기 추락 사건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정말 사고였어. 이미 사람을 시켜 자세히 조사하라고 했으니 곧 너한테 진실을 알려줄게.”“진실? 그건 충분히 조작 가능한 거잖아. 지금 넌 모든 것을 손에 넣었어. 네가 하지 못하는 일이 뭐가 있겠어?”장소월이 그의 품에 꼭 안긴 채 차갑게 한 글자 한 글자 쏘아붙였다.“전연우... 네가 제일 잘하는 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 죽이는 거 아니었어?”“이번엔 또 누구한테 뒤집어씌우고 그런 말을 늘어놓는 거야?”“날 사랑한다고? 나랑 결혼하겠다고? 너 인시윤과 결혼한 지 반년도 안 지났어. 인시윤은 수년 동안 너한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