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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새장에서 도망친 새
황금 새장에서 도망친 새
Author: 유월냥이

제1화

Author: 유월냥이
서이나가 바이올린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모든 업무를 제쳐두고 함께 해외 유학길에 올랐고, 수천억 규모의 주식 손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명품을 트럭째 실어 나르고, 무려 999일 연속 라이브 방송으로 청혼을 감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그녀와의 결혼을 쟁취하기 위해 가문이 내린 가혹한 체벌을 사흘간 견뎌냈고, 견고했던 정략의 틀을 무너뜨린 끝에 세상에서 가장 몽환적인 웨딩마치를 올리며 그녀를 신데렐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토록 지극정성이던 사내가 이제 겨우 알게 된 지 반년도 안 된 내연녀 때문에 변해버렸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에 그는 서이나를 얇은 슬립 한 장만 걸친 채 무릎 꿇리고 있었다.

내연녀가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것이 모두 서이나의 짓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효연이한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하지혁은 맞은편에 나른하게 앉아 잔을 굴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매서운 바람보다 차가웠지만 목소리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다정해서, 마치 지금 눈 풍경이 아름답냐고 다정하게 묻는 듯했다.

온몸이 얼어붙어 감각조차 희미해진 서이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턱이 덜덜 떨려 제대로 된 발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혁아, 난 심효연을 만난 적도 없어.”

하지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이나야, 거짓말은 나빠.”

그가 손짓을 하자 경호원이 허리를 굽혀 휴대폰을 바쳤다. 화면 속에는 영상 통화가 연결되어 있었다.

영상 너머로 인공호흡기를 떼인 남동생 서진우가 산소 부족으로 안색이 끔찍한 보라색으로 질린 채 온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지혁아, 진우는 내 유일한 혈육이야. 제발 이러지 마.”

서이나는 순식간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기어가 하지혁의 다리를 붙잡았다.

“내 말 믿어줘, 난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여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난 진짜 모른단 말이야.”

하지혁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가만히 문질러 닦아주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효연이도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고. 착하지, 이제 50초 남았어. 산소가 차단된 상태에서 네 동생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딱 2분뿐이야.”

그는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듯 몸을 곧추 세우고는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에 서이나의 전신이 세차게 떨려왔고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하지혁이 심효연을 아낀다는 말을 흘리긴 했었지만 서이나는 그 말을 애써 부정해 왔다. 한때 자신을 세상 전부인 양 사랑했던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서이나는 자신이 끔찍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혁에게 자신은 영원히 대체 불가능한 존재일 거라고 굳게 믿어왔으니 말이다.

사실 서이나와 심효연의 만남은 단 한 번뿐이었다. 화려한 자선 경매회장의 에스코트 도우미였던 심효연은 그날 대기실로 향하던 서이나의 앞을 대담하게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턱을 꼿꼿이 치켜든 채, 남편 단속이나 똑바로 하라며 서늘하게 쏘아붙였다.

“사모님, 전 그쪽 남편에게 일절 관심 없으니 제발 작작 좀 하라고 전해주세요. 스토커처럼 굴어서 제 삶이 아주 피곤하니까요.”

그때야 서이나는 하지혁이 최근 입버릇처럼 흥미로워하던 발톱을 세운 길고양이의 정체가 바로 심효연이었음을 깨달았다.

심효연은 선천적인 왼쪽 눈의 약시를 앓고 있었으나, 타고난 미술적 재능을 가진 천재 화가였다. 그녀는 장애를 딛고 예술을 향해 나아가는 ‘천재 소녀 화가’라는 수식어로 SNS를 뜨겁게 달구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느 인플루언서들처럼 라이브 방송으로 협찬 물건을 팔거나 화려한 삶을 전시하는 대신, 평범한 학생들처럼 묵묵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회장의 서빙 일을 도맡아 했다.

그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잃지 않는 그 싱그러운 매력은 권태로운 재벌가 도련님 하지혁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심효연이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하지혁의 소유욕은 광기에 가깝게 치솟았다. 그는 온 사교계가 들썩일 정도로 요란하고 저돌적인 구애를 펼쳤고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이나는 그날 당장 하지혁을 추궁했지만 그는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른하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깃털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속삭였을 뿐이다.

“그냥 게임이야, 자기야. 내 친구들도 다 한 번씩 해본 거잖아. 난 그저 그 애가 얼마면 넘어오는지 궁금했을 뿐이라고. 걱정 마. 그냥 재미로 만나는 거니까. 내가 진짜로 사랑하는 건 영원히 너 하나뿐인 거 알잖아.”

서이나는 다시 물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면?”

남자는 다정하게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그의 다정함이 어린 눈망울 속에 공포로 질려 핼쑥해진 서이나의 얼굴이 기이할 만큼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착하지, 내 말만 잘 들으면 넌 평생 하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지킬 수 있어.”

서이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녀에게 거절할 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하지혁이 심효연에게 금세 싫증을 내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으나, 결국 들려온 것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심효연은 그의 돈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은 채 그의 대시를 받아들였지만, 딱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바로 평범한 연인들처럼 연애하자는 것이었다.

하지혁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의 그림 라이브 방송을 함께해 주고 미술관 데이트를 즐겼으며 놀이공원에 가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군것질을 즐겼다.

심지어 각종 공식 석상에도 그녀를 대동하면서 늘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으며, 평범한 남자들처럼 SNS에 커플 사진을 올리며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서이나는 그걸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울고불고 매달려도 보고 차라리 이혼해 달라며 애원해 보기도 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착하지, 난 말 잘 듣는 아이가 좋아. 이제 그만 떼써.”

서이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억지로 그의 말을 믿으려 애썼다. 그가 곧 심효연에게 싫증을 내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그 간절한 희망을 동아줄 삼아 버텨냈다.

하지만 돌연 상황이 뒤집혔다. 심효연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하지혁을 차단해 버렸고 그 직전에 서이나를 만났다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서이나는 이것이 심효연의 명백한 도발임을 알고 있었지만 변명할 길이 없었고 설령 설명한다 해도 하지혁이 믿어줄 리 만무했다.

“자기야, 아직도 입을 안 열 거야? 진우한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10, 9, 8...”

하지혁이 허리를 숙여 다가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스쳤지만, 서이나는 뼛속까지 시려 오는 한기를 느꼈다.

“말할게, 말할게.”

정신을 차린 서이나는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통증에 목구멍이 꽉 막혀왔지만, 생애 처음으로 하지혁을 향해 거짓을 고했다.

“내가 그 애한테 널 떠나라고 했어. 다신 들러붙지 말라고...”

감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넘쳤고 하지혁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지며 허망하게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지혁은 만신창이가 된 서이나를 보며 싸늘한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자기야, 다신 제멋대로 굴지 마. 네 동생을 위해서라도 얌전히 굴어야지.”

서이나는 이미 넋이 나간 상태였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가슴 속 어딘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번져 나갔고 이내 위태롭게 흔들리던 몸은 해일처럼 몰려온 어지러움에 속절없이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찰나, 다리 사이로 뜨겁고 묵직한 액체가 비릿하게 쏟아져 내렸다...

바로 그때 하지혁의 부하가 급히 뛰어 들어와 심효연의 행방을 보고했다. 그녀가 현재 장애 아동 미술 치료 봉사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부하는 서이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다만 사모님께서 대표님과 심효연 씨가 다시 만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전해달랍니다.”

그 말에 하지혁의 얼굴에 단숨에 희색이 돌았다. 보고의 후반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즉시 심효연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리고는 그녀를 ‘얼굴도 마음씨도 아름다운 천사’로 칭송하는 여론을 단숨에 조작해냈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이나는 이미 하지혁의 시야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였다.

“지혁아, 배가 너무 아파...”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서이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가늘게 손을 뻗었지만, 하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차 안에서 그는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서이나를 곧장 선방에 가두고 반성하게 하라고 서늘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눈밭에 쓰러진 채 다리 사이로 붉은 선혈을 흥건히 쏟아내고 있는 서이나를 발견한 집사는 사색이 되어 다급히 외쳤다.

“도련님, 사모님이 유산하신 것 같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어요...”

하지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임신을 했다고? 갈수록 내 말을 안 듣는군. 애당초 생겨서는 안 될 애였어.”

집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지만 하지혁의 명령을 거역할 배짱 따위는 없었다. 그는 결국 피투성이가 된 서이나를 들어 차가운 선방으로 옮겨 가두었다.

서이나는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다. 자궁이 박리되는 듯한 통증이 세포 하나하나를 난도질했고 뱃속에서 스러져 가는 아이의 가냘픈 생명력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문가로 필사적으로 기어가 문짝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쇠한 목소리로 절규했다.

“내보내 줘! 병원에 좀 보내 달라고! 내 아기 좀 살려 줘...”

“지혁아, 제발 우리 아기 좀 살려줘!”

“아무도 없어?”

한참이 지난 뒤에야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사모님, 이 아이는 대표님의 계획에 없던 생명이었습니다. 대표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사모님을 병원에 모셔다드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제발 고집 피우지 마시고 이곳 선방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십시오.”

그 순간, 서이나는 온몸의 기운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허망함을 느꼈다. 떠날 때 보여준 하지혁의 그 가차 없고 잔인한 눈빛이 떠오르자, 그녀는 억눌린 절망감을 이기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저 아이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와 자신을 반반씩 닮은 그들만의 아이를.

하지만 그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엄마가 될 자격조차 잔인하게 박탈당했다.

심지어 이제 그는 내연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내의 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임신한 그녀를 가둬두었다.

서이나는 찢어지는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 울부짖고 싶었으나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저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살인적인 고통만이 전신을 사로잡을 뿐이었다.

통증이 해일처럼 쉴 새 없이 밀려들면서 의식이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시야를 덮치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가냘픈 신음을 뱉었다.

“하지혁, 아이도 잃었으니 이제 너도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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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이나는 제이의 등 뒤에서 걸어 나와 하지혁과 똑바로 마주 섰다.하지혁의 가슴이 돌연 무자비하게 쑤셔왔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공포와 더불어 짙은 혐오감만이 서려 있을 뿐, 단 한 자락의 애정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의 뇌리에 한없이 끔찍하고 두려운 가정이 떠올랐다. 평생 자신의 소유라 믿었던 꼬맹이가 이제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잔인한 현실이었다.아닐 것이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그저 단단히 화가 났을 뿐이리라.하지혁은 평생 단 한 번도 굽힌 적 없던 오만함을 꺾고 한풀 꺾인 어조로 애원하듯 말했다.“얘기 좀 하자.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서이나는 가만히 제이를 바라보았다. 눈빛만으로 그녀의 의중을 간파한 제이는 제윤의 손을 잡고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로 문밖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서이나는 고마움을 가득 담아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그녀가 딴 남자와 가깝게 지내는 모습에 하지혁은 음산하게 안색을 굳혔다.마침내 방 안에는 서이나와 하지혁,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하 대표, 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서이나의 태도는 얇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시려 왔다.하지혁은 가슴속을 짓누르는 무거운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날 그렇게 남 대하듯 부르지 마. 지난 일은 내가 정말 백번 천번 잘못했어. 심효연이 너한테 저지른 만행들도 전부 알아냈고 지금은 널 대신해 그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게 해줬단 말이야.”하지혁은 심효연의 온 가족이 어떻게 파멸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서이나를 조롱하며 비웃던 사교계 인간들이 얼마나 가혹한 대가를 치렀는지 하나하나 낱낱이 읊조렸다.“자기야, 네가 항상 아기를 원했잖아.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 당장 아이부터 가지자. 원하는 만큼 몇 명이든 다 낳아줄게.”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하지혁의 안색이 흥분으로 가늘게 젖어 들었다.“네가 나랑 돌아가겠다고만 약속해 주면, 네가 뭘 하든 이제 절대 막지 않을게. 앞으로 내 인생에 여자는 오직 너 하나

  • 황금 새장에서 도망친 새   제17화

    신도라의 한적한 소도시.서이나가 이곳에 정착한 지도 벌써 석 달이 흘렀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이곳의 고요한 삶에 스며들었고 인근 주민들과도 서서히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첫날 살갑게 박수를 쳐 주었던 제이 또한 우리나라 사람으로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케이스였다. 그에게는 혼혈 여동생인 제윤이 있었다.이제 막 열 살이 된 제윤은 뽀얗고 깨끗한 피부에 웃을 때마다 양 볼에 깊게 패는 보조개가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아이는 바이올린을 무척 좋아해서, 서이나가 연주할 때마다 황홀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감상하곤 했다.서이나는 제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제이는 매일 레슨 시간을 핑계 삼아 은근슬쩍 그들의 곁을 지켰다.서이나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은 갈수록 묘하게 깊어졌으며 가끔은 연주하는 그녀를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서이나가 시선을 느끼고 쳐다볼 때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핑계를 대고 황급히 자리를 비우곤 했다.제이는 하지혁과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온몸에 건강한 생기가 넘쳐흘렀고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가슴 가득 안도감이 밀려왔다. 제이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겉치레로 그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었고 그가 느닷없이 자신을 외면할까 봐 불안에 떨 이유도 없었으며 더더욱 전처럼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가혹하게 억누를 일도 없었다.여느 날처럼 제윤의 바이올린 지도를 마친 날, 제이가 커피 두 잔을 타들고 다가와 서이나에게 한 잔을 건넸다.“서나 씨, 혹시 바이올린 연습실이나 공방을 열어볼 생각 없어요? 마을 중심가에 상가 임대가 하나 났는데, 서나 씨한테 아주 딱일 것 같아서요.”서이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해외로 챙겨온 돈은 예전에 하지혁의 곁에서 투자 기법을 배워 개인적으로 벌어들인 재산이었다. 하지혁이 이혼 보상금 명목으로 주었던 200억은 단 한 푼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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