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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or: 유월냥이
서이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하루가 흐른 뒤였다. 등 뒤의 상처는 말끔히 처치되어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혁은 그녀의 침대 곁에 앉아 건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뿌연 담배 연기 너머로 그의 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효연이가 화났어. 네가 가서 달래.”

서이나는 텅 빈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 대표 생각은 어떤데?”

‘하 대표’라는 딱딱한 호칭에 하지혁의 안색이 단번에 굳었다. 그는 담배를 비벼 끄더니, 재가 묻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자기야, 남편한테 투정 부리는 거 아니야.”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일렁였다.

서이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문득 하태수가 남겼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지혁은 말 잘 듣는 개만 예뻐해. 네가 녀석 곁에 남겠다면, 평생 고분고분한 개로 살 각오를 해야 할 거다!’

당시엔 그저 둘을 갈라놓으려 겁을 주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뜻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하지혁의 사랑은 철저히 편집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그는 절대적인 지배자였고, 자신은 그에게 종속된 인형에 불과했다.

그녀는 눈동자에 서린 공포를 감추기 위해 시선을 내리깔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연주곡 하나 준비해 둬. 효연이가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싶어 하니까.”

하지혁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수 등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만 맴돌았다.

밤이 되자 서이나는 긴소매의 화려한 샴페인 골드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

은하 그룹 산하 최대 규모의 호텔에서 열린 연회에는 경성 사교계의 명사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다른 여성들이 심플하고 산뜻한 드레스에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한 것과 달리, 잔뜩 힘을 준 서이나의 차림새는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즉시 좌중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비웃음과 경멸, 값싼 동정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무슨 구경거리가 났다고 저러고 온 거야? 거지는 어쩔 수 없나 봐. 격 떨어지게 좋은 건 죄다 온몸에 휘감고 나왔네.”

“하 대표님한테 버림받고 나니,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려고 기를 쓰는 거지. 우스꽝스러운 광대 꼴이잖아.”

“심효연 씨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따라가네. 진짜 미운 오리 새끼야.”

온갖 비아냥거리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귓가로 쏟아지자 서이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왔다.

문득 하지혁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던 예전 일이 떠올랐다. 누군가 그녀가 거지 출신이라며 비웃자, 하지혁은 즉시 사람을 시켜 그자의 입을 꿰매버렸었다. 그러고는 누구든 서이나를 한마디라도 입에 올렸다간 해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겠다고 선포했다.

워낙 눈치 빠른 인간들이 모인 바닥이라, 이제 하지혁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니 눈치 볼 것도 없이 조롱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웅성거리던 소음은 하지혁과 심효연이 등장하고 나서야 멎었다.

서이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심효연은 밝은색 끈 원피스를 입고 포니테일 머리를 높게 묶은 채,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서이나는 그제야 하지혁이 왜 심효연에게 흔들렸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심효연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릴 적 그림자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하씨 가문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 역시 저렇게 거침없고 자유로웠다. 매사 밝게 빛나는 태양처럼, 거지라는 신분 때문에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거침없고 솔직한 모습이 싫다며, 결혼 후에 얌전하고 고분고분해지라고 강요한 건 다름 아닌 하지혁이었다.

서이나의 눈빛이 쓸쓸하게 내려앉았고 가슴속에 말로 다 못할 서글픔과 회한이 차올랐다. 사람들이 저마다 심효연에게 아첨을 떨며 알랑방귀를 뀌는 모습을 보며, 서이나는 조용히 돌아섰다.

“하 대표님, 저한테 보여줄 무대를 준비했다면서요?”

심효연의 오만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리자 서이나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연회장의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인 채 하지혁의 안색을 살폈다. 그 누구도 하지혁에게 감히 그런 당돌한 태도로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가장 총애를 받던 서이나조차 그의 앞에서는 늘 숨을 죽이고 비위를 맞추며 고분고분 굴 뿐이었다.

하지만 하지혁은 심효연의 버릇없는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띤 채 그녀의 오만함과 무례를 기꺼이 받아주고 있었다.

“그래.”

하지혁은 심효연을 다독여 자리에 앉히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대기하던 직원이 잽싸게 바이올린을 들고 서이나에게 다가왔다.

서이나는 몸을 돌려 구경꾼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악기를 건네받았다. 꽉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사람들 틈새로 하지혁을 멀거니 바라보는 그녀의 심장이 한 줌 더 바스러졌다.

한때 그녀는 바이올린을 지독히 사랑했고 오케스트라 입단을 꿈꿨었다. 하지만 하지혁은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서이나의 연주를 들을 수 없다며, 그녀의 모든 것은 오직 제 소유여야 한다고 못 박았었다.

서이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절대적이었던 약속은 고작 심효연의 애교 한마디에 너무나 맥없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서이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깊은숨을 들이쉬며 바이올린을 턱에 견주었다. 이내 ‘g 단조 아다지오’의 애수 어린 선율이 연회장 허공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굽이치는 음표 하나하나가 가슴이 미어터지는 절규이자, 갈기갈기 찢긴 영혼의 울음 같았다.

그 슬픈 선율은 하지혁과 서이나의 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완벽한 장송곡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녀는 하지혁을 향한 사랑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하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눈앞의 서이나에게서 흘러나오는 짙은 슬픔이 그를 왠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만 해요.”

심효연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서이나의 연주를 중단시켰다.

“너무 슬퍼서 분위기가 처지잖아요. 하 대표님과는 본인이 원해서 이혼해 놓고 왜 여기서 억지로 불쌍한 척, 피해자인 척 쇼를 하는 거죠?”

심효연은 짐짓 가식 없는 솔직한 성격인 척 위장하며 서이나를 비꼬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노골적인 도발을 마주하고도 서이나는 대꾸 한마디 없이 그저 조용히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솜뭉치를 때린 듯 무반응인 서이나의 태도에 약이 오른 심효연은 이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하지혁을 바라보았다.

“하 대표님, 설마 나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 여자 데려온 거예요?”

심효연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와중에도 하지혁에게 대놓고 투정을 부렸다.

순간 사방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하지혁이 폭발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제 앞에서 감히 선을 넘는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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