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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유월냥이
하지만 잠시 후 하지혁은 그저 낮게 실소를 터뜨리며 심효연의 뺨을 어루만졌다.

“화내지 마. 첫 번째 춤은 너와 출 테니까.”

심효연은 짐짓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언짢은 티를 냈지만, 결국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이며 함께 무대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이나는 고개를 들어 무대 한가운데서 우아하게 춤을 추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가슴속은 지독하리만큼 잔잔했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챙겨 몸을 돌려 나갔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해 몇몇 여자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고, 서이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사모님, 아, 이제 아니지. 하 대표한테 버림받았으니까. 이 나쁜 년아, 내 손 기억나?”

한 여자가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실수로 너랑 살짝 부딪쳤다는 이유만으로 내 손목은 잘려나갔어.”

다른 여자가 마스크를 거칠게 벗어 던지며 서이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내 얼굴을 좀 봐! 네 얼굴이 별로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내 얼굴에 황산을 들이부었잖아!”

“우리 집은 또 어떻고! 네가 거지 출신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렸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아빠 회사를 단숨에 파산시켜 버렸잖아!”

...

서이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잔혹한 악행들이 전부 하지혁의 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뒤틀린 집착으로 자신을 감싸 안았던 남자의 비호가 막을 내렸으니 그가 저지른 업보와 이 사람들의 피 맺힌 보복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서이나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자 한 여자가 사정없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채더니 뺨을 호되게 갈겼다.

“너도 나처럼 사람이 아닌 귀신 몰골로 만들어 줄게. 그래야 다시는 하 대표 곁에서 얼씬거리지 못할 테니까. 심효연 씨가 그랬어. 널 지옥으로 떨어뜨려 주는 사람에겐 하 대표 앞에서 잘 말해 주겠다고 말이야.”

“심효연이?”

예상치 못한 이름에 서이나가 충격을 받아 멍해진 찰나, 여자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바닥으로 짓눌렀다.

누군가 서이나의 턱을 꽉 움켜쥐고 번갈아 가며 뺨을 후려치기 시작하더니 미리 준비해 둔 날카로운 바늘을 꺼내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히 고정하더니, 손톱 밑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아아악!”

서이나의 비명이 터져 나오자마자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열 손가락의 고통은 뼛속까지 시렸고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여자들이 잠시 자리를 바꾸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서이나는 곁에 서 있던 사람을 힘껏 밀쳐내고 일어나 앞으로 달아났다.

비틀거리며 달리던 서이나는 눈앞에 서 있던 샴페인 타워를 들이받고 말았다.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소음은 장내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녀는 깨진 유리 조각 더미 위로 처참하게 쓰러졌다. 유리 조각 파편 위로 처참하게 고꾸라진 그녀의 드레스는 이내 와인과 선혈로 얼룩져 갔다.

“서이나 씨, 지금 자해쇼라도 하는 건가요?”

소동이 일어난 방향으로 다가온 심효연이 비웃음을 날렸다.

“심효연, 네가 사람들을 사주해서 날 해치려고 한 거잖아.”

서이나는 신음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그쪽을 해쳐요?”

심효연이 조소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하지혁의 팔짱을 꼈다.

“난 탄탄한 커리어도 있고 날 사랑해 주는 남자도 있는데 대체 그쪽한테 탐낼 만한 게 뭐가 있다고 해치겠어요?”

서이나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한때 그녀의 세상은 온통 하지혁이 채워준 것들이었다. 그가 떠나버린 지금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다.

서이나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붉어진 눈시울로 읊조렸다.

“네 말이 맞아... 난 정말 아무것도 없어.”

다음 순간 흥분한 여자 중 하나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녀를 다시 한번 날카로운 유리 파편 위로 짓눌렀다.

그 모습에 하지혁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을 뿐 끝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유리 조각이 살을 파고들자 서이나는 신음을 집어삼키며 전신을 떨었다.

“저년 동정할 필요 없어요! 저 여자가 우리를 돈으로 매수해서 심효연 씨를 해치려 했거든요. 우리가 거절하니까 저렇게 자작극을 벌여서 심효연 씨를 모함하려는 거라고요!”

조금 전까지 그녀를 짓밟고 괴롭혔던 여자들이 일제히 나서서 거짓 증언을 하며 서이나가 고의로 심효연을 모함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난 그런 적 없어.”

서이나가 해명하려 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그녀는 순식간에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독한 년, 심보가 아주 쓰레기잖아.”

누군가 그녀를 향해 술잔을 내던졌다.

“하 대표님도 진작 내팽개친 거지 같은 년이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긴.”

“당장 네가 살던 거지 굴로 꺼져! 저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을 감히 너 같은 표독스러운 이혼녀가 찢어놓으려 하다니.”

뒤이어 폭포수 같은 욕설과 함께 술잔들이 빗발쳤다. 이제 하지혁이 더 이상 서이나를 감싸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과거 하지혁의 권세에 눌려 억지로 비위를 맞춰야 했던 원한이 이제야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이나의 시선이 비웃음과 증오로 가득 찬 무리들을 지나 결국 하지혁에게 닿았다.

남자의 눈빛은 고요하다 못해 시리도록 차가웠다. 눈물 한 방울만큼의 안타까움도 없이, 오히려 또 한 번 파티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든 그녀를 탓하는 듯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순간 그녀가 입은 육체적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고 심장은 무수한 칼날에 찔린 듯 난도질당했다.

하지혁의 싸늘한 침묵은 서이나의 심장을 완전히 얼려버렸다. 입으로는 심효연과의 관계가 그저 가벼운 게임일 뿐이라 했으면서, 정작 실제로는 심효연이 자신을 짓밟고 해치도록 몇 번이고 방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에서 모두가 그녀를 짓밟고 있었으나, 서이나의 눈길은 오직 하지혁 한 사람만을 쫓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두 눈에서 빛나던 마지막 불씨가 서서히 꺼져 가더니, 마침내 끝을 알 수 없는 공허와 마비된 체념으로 가득 찼다.

서이나는 문득 모든 것이 지독하리만치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해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하지혁과 심효연의 그 알량한 사랑을 돋보이게 해 줄 디딤돌 따위는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일어섰다. 하지혁이 붙잡지 않는 것을 확인한 서이나는 문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 깊숙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박혀 들어갔지만, 그녀는 단 한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곳을... 그리고 하지혁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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