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냉혹하고 치밀한 법적 장치가, 지금 이 조선의 어전 한가운데서 핏빛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붓…….”
이헌이 헐떡이며 흑위대장에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붓을…… 대라.”
흑위대장이 황급히 품에서 호신용 단검을 꺼내어, 이헌의 손끝에 묻은 피를 먹물 삼아 찢어진 소매 자락 위에 글자를 겹쳐 쓰도록 받쳐주었다.
이헌의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핏물로 젖은 비단 위를 처절하게 긁어 나갔다.[본 섭정의 의식이 끊어지는 즉시, 조선의 병권과 모든 국정의 통제권은 흑위대장에게 임시 위임한다.]
단 한 줄의 문장.
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헌이 평소 섭정의 수결을 할 때 쓰던 고유의 인장 모양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장이 붉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h
“외교 협상의 판을 짜야 한다라…….”이헌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을 잃은 사람처럼 서연이 뱉어낸 그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제안을 작게 읊조렸다.그의 시선이 파르르 흔들리는 낡은 호롱불 아래서, 수일 밤낮을 자지 못해 파랗게 질린 서연의 창백한 얼굴을 향해 깊숙이, 그리고 강렬하게 꽂혔다.“적장의 숨통을 쥐고 흔들 거대한 협상의 판. 그 말씀은, 저 얼어붙은 강 너머의 야만적인 오랑캐 수장 놈과 마주 앉아 살육 대신 평화를 논하자는 뜻이오?”이헌의 갈라진 목소리에 짙은 의구심과 호기심, 그리고 당혹감이 동시에 배어 나왔다.당시 조선 사대부들과 무관들의 머릿속에서 ‘외교’란, 오직 명나라 같은 압도적인 대국을 상대로 조공을 바치는 수치스러운 굴욕이거나. 아니면 북방의 오랑캐와는 오직 핏빛 창칼로써 결판을 내야 한다는 맹목적인 무력의 자존심이 전부였다.적과 동등하게, 그것도 생존을 걸고 마주 앉아 대화로 협상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는 파격, 아니 완벽한 이단(異端) 그 자체였다.“예. 하지만 단순히 나약하게 평화를 구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오만한 짐승들을 완벽하게 우리 발밑에 꿇어앉히고, 얼어 죽어가는 우리 조선군의 목숨을 완벽하게 살려내자는 것입니다.”서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고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서연은 양측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잃기 두려워하는지부터 냉정하게 따졌다. 명분보다 생존과 이해관계가 먼저였고, 군사적 손익을 하나씩 맞춰 보자 상대가 물러설 수밖에 없는 조건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어째서 그런 발상을 하였소. 놈들은 우리 평안도의 무고한 백성을 도륙하고 짓밟은 짐승 새끼들이오. 애초에 말귀가 통할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소.&r
하지만 지도 위를 맴도는 두 사람의 시선과 눈빛은, 승리자의 기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절망적이고 칠흑처럼 무거웠다.“전하. 한양으로부터의 군량미 보급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라 하옵니다.”서연이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처참한 현실의 입을 열었다.“다치신 무영 대장이 어제 은밀히 척후를 보내 확인해 본 결과, 평양성에 임시로 머물던 보급 수레들은 아예 한양으로 발길을 돌려 철수해버렸다고 하옵니다. 왕과 훈구파 놈들이 우리를 이 사지에서, 수만 명의 군대와 함께 완벽하게 굶겨 죽이기로 잔혹하게 작정한 것이 분명합니다.”서연의 분노 섞인 말에, 이헌의 두 주먹이 뼈가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어지며 부들부들 떨렸다.“내 형 이도가……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 지켜온 그 왕이. 결국 제 알량한 권력에 미쳐 백성과 자국의 군대를 사지로 내몰고 버리는, 완벽한 괴물이 되었구나.나의 쓰레기 같은 업보요, 내 오만함이 빚어낸 끔찍한 참사이오.”이헌이 쓰디쓴 피눈물 섞인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뜨거운 이마를 짚었다.“상황은 최악 중의 최악이오. 적을 추격할 최소한의 여력은 고사하고, 당장 내일 아침 우리 불쌍한 병사들 입에 풀칠할 미음 한 그릇조차 완벽하게 바닥이 났소.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오.”이헌의 절망적인 시선이, 지도 위의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향했다.“그렇다고 우리가 여기서 이대로 군대를 이끌고 등을 돌려 한양으로 철수할 수도 없소.”“예. 그건 절대 아니 됩니다.”서연이 단호하고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우리가 도성으로 철수하며 국경을 비우는 순간, 강 너머에서
“도망친다! 오랑캐 새끼들이 꼬리를 말고 강을 건너 도망친다!”태백산맥의 험준한 협곡에서, 서연의 압도적인 화공과 눈사태 지략에 처참한 참패를 당한 여진족 대군.그들은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짐승처럼 쫓기듯, 피투성이가 된 발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미친 듯이 북쪽으로 도망쳤다.그들은 기어코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의 두꺼운 얼음판을 덜덜 떨며 밟고 넘어, 자신들의 본토인 국경 밖으로 완벽하고 치욕스럽게 패퇴하고 말았다.조선 땅을 불태우고 피로 물들이려 했던, 수만 명의 야만적인 침략을 완벽하게 짓밟아 분쇄한 조선 토벌군의 기적 같은 대승(大勝)이었다.“전하! 적장 야루가 압록강을 넘었사옵니다! 놈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사옵니다!”토벌군 본영의 막사 안.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몇몇 장수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핏대를 세우며 흥분된 목소리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전하! 지금 당장 기병대를 풀어 얼음 강을 건너 놈들을 추격한다면, 적의 본진까지 들이쳐 완벽하게 싹을 말라버릴 수 있사옵니다! 이번 기회에 여진족의 씨를 말려야 하옵니다!”장수들의 눈빛에는 전공을 세우려는 탐욕과 흥분이 가득했다.하지만.치료를 받고 지휘 탁자의 상석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이헌의 표정은. 승리한 도원수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없이 무겁고 서늘하게, 칠흑처럼 가라앉아 있었다.“추격은 절대 불가하다.”이헌의 단호하고 차가운, 숨 막히는 한마디가 장수들의 들뜬 분위기에 얼음물처럼 매섭게 끼얹어졌다.“전하! 어찌하여 다 잡은 호랑이를 눈앞에서 놓아주려 하시옵니까! 지금 치지 않으면 놈들은 이 치욕을 갚기 위해, 반드시 봄에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쳐들어올 것이옵니다!”장
서연의 피 토하듯 다급한 부름이, 피 냄새와 약초 냄새가 진동하는 적막한 막사 안을 갈랐다.그리고.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온 서연의 움직임이,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어 멈춰 섰다.“……아.”서연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광경에,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헉, 하는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며칠 동안 수십 개의 화살 상처와 펄펄 끓는 살인적인 고열에 시달리며, 단 1초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사내.사신이 이미 목을 반쯤 졸라매고 있던 그 사내가.“하아…… 하아…….”두꺼운 피투성이 붕대로 온몸의 상처를 칭칭 감은 채.혼자 힘으로 덜덜 떨리는 두 팔을 짚고, 침상 위에 힘겹고 위태롭게 몸을 일으켜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이헌…… 너…….”서연의 커다란 파란 눈동자에서, 그동안 독하게 억누르고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왈칵, 하고 둑이 무너지듯 쏟아져 내렸다.기척을 느낀 이헌이,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막사 입구에 선 서연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며칠을 앓은 탓에 뼈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온몸의 꿰맨 상처가 터졌는지, 하얀 붕대 위로 다시금 시뻘건 핏물이 징그럽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하지만.그의 퀭하게 파인 핏발 선 두 눈동자만큼은, 서연을 발견하자마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찬란하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서연아.”이헌의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적들이 도망친다! 오랑캐 놈들이 꼬리를 말고 압록강으로 도망친다!”“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그 수만 명의 괴물 놈들을 다 쓸어버렸다!”태백산맥의 험준한 협곡을 가득 메웠던 지옥의 비명과 살육의 파공음이 서서히 잦아들 무렵.시뻘건 피와 시체로 뒤덮인 시커먼 눈밭 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조선 토벌군 병사들의 함성이 벼락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승리다! 대승이다!”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치는 여진족의 비참한 뒷모습을 보며,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가던 병사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짐승처럼 엉엉 울부짖었다.불과 몇 시진 전만 해도 뼈를 깎는 공포 속에서 반란을 꾀하고 도망치려 했던 그들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동자에는 완벽한 승리의 환희와,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들을 건져 올린 한 존재를 향한 맹목적인 경외심만이 시퍼르게 불타오르고 있었다.“대장! 놈들이 완전히 산맥 밖으로 패퇴하였사옵니다! 수만의 적들 중 절반 이상이 눈사태와 화공에 타죽어 고깃덩어리가 되었사옵니다!”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흑위대 부장 하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어깨에 창이 꽂히고 눈알이 뽑혔던 애꾸눈의 야차, 무영.그는 시퍼런 대검을 지팡이 삼아 눈밭에 꽂고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도, 기어코 남은 왼쪽 눈으로 도망치는 적들의 꽁무니를 끝까지 예리하게 노려보았다.“추격은 하지 않는다. 놈들의 기세는 완벽하게 꺾였다. 당장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어라!”“예! 대장!”무영이 명령을 내린 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깎아지른 듯한 새카만 절벽 능선 위.
보병들은 당장 숨통을 끊으러 돌격하라!”그때, 피 묻은 붕대를 어깨와 눈에 칭칭 감은 애꾸눈의 야차, 무영이. 자신의 키만 한 시퍼런 대검을 치켜들며 협곡이 떠나가라 사자후를 터뜨렸다.와아아아아-! 죽여라!무영의 신호와 함께, 협곡 양옆의 험준한 사각지대 바위틈과 눈더미 속에 며칠 밤낮을 숨죽여 매복해 있던 조선군 정예 보병 수만 명이. 흡사 피 냄새를 맡고 미쳐 날뛰는 굶주린 늑대 떼처럼, 눈밭을 맹렬히 박차고 일제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조선의 보병들은 평원에서는 기병에게 밀릴지 몰라도, 이런 험준한 태백산맥 산악 지형에서는 뼈가 굵은 진정한 귀신들이었다.그들은 기동력을 완벽하게 상실하고 좁은 곳에서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는 여진족 기병들의 말 다리를 무자비하게 긴 낫으로 썰어버리고. 땅으로 쿵 하고 굴러떨어진 적병들의 목통과 심장에 시퍼런 창을 사정없이 쑤셔 넣었다.“죽여라! 내 부모형제를 짓밟고 죽인 더러운 오랑캐 놈들이다!”“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도원수의 피 값을 이놈들의 목통으로 갚아라! 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라!”수적인 열세? 무기의 열세? 그것은 탁 트인 평원에서나 통하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다.완벽한 지형지물의 악랄한 이용과, 적의 숨통을 가장 끔찍하게 끊어버리는 서연의 천재적이고 잔혹한 기습 전술 앞에서는. 수만 명을 자랑하던 여진족 대군은 그저 피를 뿜으며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전세는 불과 반 시진 만에.정말로 너무도 허무하고, 기괴할 정도로 완벽하게 핏빛으로 뒤집히고 말았다.“이……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다……! 어찌 저 굶주리고 헐벗은 조선의 오합지졸 병졸 놈들이&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