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발레리
‘이렇게 끝나는구나.’ 주변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느껴지는 것은 온몸을 꿰뚫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손을 적시는 따뜻한 피의 감촉, 그리고 내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뿐이었다. 형형색색의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가 서서히 또렷해졌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나를 감싸고 있는 손이 내 시녀 미나의 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나 발레리!” 미나가 울부짖었다. 직전까지 있었던 일이 천천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팩에 관한 평범한 회의가 진행되던 중, 한 하녀가 갑자기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알파 알리스터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암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앞을 막아선 뒤였고… 지금 나는 이 꼴이 되어 있었다. 나는 힘겹게 몸을 옆으로 돌려 그를 찾았다. 내 남편이자, 내 운명의 짝이며, 내가 평생 사랑한 단 한 사람인 트리스탄은 현장에서 내 여동생 앨린을 끌어안듯 붙잡아 그녀가 나에게 달려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는데도 그는 나를 한 번 바라보지도, 신경 써 주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도, 마음도, 관심도 오직 내 여동생만을 향해 있었다.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따뜻한 피가 배를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아이는... 사라졌다. 나는 이미 임신 5개월이었다. 그날 밤, 술에 취한 채 단 한 번 함께했던 일로 생긴 아이였지만, 배가 거의 나오지 않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무엇보다 잠복임신이었으니까. 적당한 때가 되면 그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들것에 실려 옮겨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팩의 의사가 나를 살피고 있는 차가운 방 안이었다. “죄송합니다, 알파. 상처가 너무 깊고 이미 출혈이 심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루나를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 말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듣고 나니 훨씬 더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확실했다. 나는 살아날 수 없었다. 그 뒤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팩의 의사는 방을 떠났고, 나도 트리스탄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그 역시 방을 나가 버렸다. 결국 내 곁에는 병상 옆에 앉은 앨린만이 남았다. 몇 초가 흘렀다. 거친 내 숨소리만이 귓가를 메웠다.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은 느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언니, 이렇게 된 김에 비밀 하나 알려 줄까?” 혼란이 흐릿한 의식을 뒤덮었다. 나는 힘겹게 눈을 뜨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사실 난 언니가 죽어 가는 게 너무 기뻐.” 그녀의 말이 끝나자 등골을 타고 싸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내가 이 팩과 이 가족에 들어온 순간부터 언니는 정말 눈엣가시였어. 언니가 받는 관심도, 언니가 누리던 특권도 전부 다 싫었지. 그래서 내가 하나씩 전부 빼앗아 버렸어.” 온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한때 나는 베타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님이 어린 여자아이였던 그녀를 데려왔다. 나는 그녀를 여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아껴 주려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세상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은 나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고, 팩 사람들마저도 그녀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고 항의하고 맞서 보려 했지만, 결국 누구와 비교해도 늘 내가 뒤처지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내 운명의 짝에게조차도. 그녀가 웃었다. 모두가 여신의 웃음이라 칭찬하던 그 소리는 내게 악마의 웃음처럼 들렸다. “이제 와서 언니가 뭘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전부 다 털어놓을게.” 그리고 그녀는 정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채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만 했다. 그녀가 꾸며 낸 모든 계략과 위선, 스스로를 피해자인 양 꾸미며 모든 책임을 내게 뒤집어씌운 일들, 순진한 척하면서 내 험담과 거짓 소문을 퍼뜨린 일들까지.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수년간 이어져 온 일이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예전에도 그녀를 미워하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그저 내가 운이 없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의도된 일이었다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분이었는지, 몇 시간이었는지조차. 그녀는 비웃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이제 가족이나 팩 걱정은 안 해도 돼. 어차피 다들 언니한테는 별 관심도 없었잖아. 머지않아 언니도, 언니의 희생도 모두 잊어버릴 거고, 내가 언니 자리를 대신하게 될 거야. 트리스탄도 마찬가지고.” 그녀는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킥킥 웃었다. “아까도 봤잖아. 언니가 이렇게 된 원인이 바로 그 사람이면서도, 그 사람 눈에는 나밖에 없어. 언니는 그의 운명의 짝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언니가 죽어 가는데도 곁을 지키지 않잖아. 걱정하지 마. 다음 루나인 내가 그 사람을 잘 돌봐 줄 테니까.” “누가 알아?” 그녀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언젠가 내가 그 사람의 아이를 낳게 되면, 기념 삼아 언니 이름을 붙여 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내가 참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내가 이겼다는 사실 말이야.”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반격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생명은 조금씩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고, 나는 점점 가늘어지는 실 한 가닥에 겨우 매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슬픔과 체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내가 쏟아부은 사랑과 노력, 희생은 모두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나를 사랑하지 않은 남자를 위해. 언제나 나를 밀어내고 경멸했던 남자를 위해. 나를 배신하고 내 몰락을 계획한 여동생을 위해. 오래전부터 나를 돌보지 않았던 가족을 위해. 내 노력을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늘 나를 얕잡아봤던 팩을 위해. 나와 내 아이는 죽어 가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조차 위로받지 못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내 곁에 없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은 오직 앨린과 그녀의 차갑고 악의적인 진실뿐이었다.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 감각마저도 곧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 가, 발레리.” 앨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집어삼키며 숨쉬기조차 점점 힘겨워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떨리는 숨을 한 번 내쉬었고…. …. 끝없는 어둠 속을 영원처럼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날카로운 소리가 고요한 평화를 산산이 깨뜨렸다. 무시하려 했지만 무언가가 몸을 간질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부신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여기가… 천국인 걸까? “루나, 일어나세요.” 고개를 돌리자 미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졸리세요, 루나? 안타깝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요. 정신이 멀쩡하실 때라면 여신님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걸요.”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 침실이었다. 그리고 이 방도 분명 내 방이었다. “어떻게….” 나는 충격에 말끝을 흐렸다. “괜찮으세요, 루나?”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미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충격을 감추며 애써 평정을 되찾았다. “괘, 괜찮아.”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조금만…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물론이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녀가 방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인 걸까? 나는 스스로를 꼬집었다. 살을 꼬집는 통증이 느껴지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현실 같았다. 분명 나는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이곳에 있는 거지? 본능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4월 30일. 말이 되지 않았다. 이 날짜는 몇 달 전이었다. 내가 그 일을 겪기 훨씬 전…. 순간 숨을 들이켰다.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다시 한번 내 팔을 꼬집었다. 이건 결코 가능할 리 없는 일이었다. 전설이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기적. ‘나… 회귀한 거야!’ 지금은 거의 세 달 전이었다. 우리 각인식 기념일을 일주일 앞둔 시점. 나는 이미 루나가 된 지 1년이 되어 있었고, 이번만큼은 무슨 일을 하든 비난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또 실패했었다. 그날 파티를 뒤덮었던 소문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리고, 모욕을 당하고,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것까지 포함해 온갖 험담의 대상이 되었던 그날이. ‘잠깐….’ 나는 숨을 삼키며 배를 움켜쥐었다. 내가 정말 이 시간으로 돌아온 거라면… 내 아이도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잠복임신이었기에 배는 여전히 평평했지만, 나는 분명 아이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문이 쾅 하고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운명의 짝이자 남편인 트리스탄이었다.발레리 팩 홀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린의 모습은 공허한 눈빛뿐이었다. 경비들이 그녀를 끌고 나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무관심한 얼굴로, 주변의 모든 것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어쩌면 어떤 것들은… 어떤 사람들은 끝내 변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생각을 떨쳐냈다. 사용인들에게 홀을 정리해 달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려 떠나려던 순간— “발레리.”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눈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마치 순식간에 십 년은 늙어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졌고, 표정에는 피로와 상심이 짙게 어려 있었다. 기시감이 밀려왔다. 예전에도 바로 이 홀에서 부모님과 마주치기 전에 도망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만큼은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내게 다가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묵직해졌다. 피로와… 차마 읽어낼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번에는 또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그들이 다음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판결을 내려줘서 고맙구나.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 아이에게 그렇게 관대한 판결을 내려 준 건… 정말 너다운 자비였어.”
발레리 남은 이틀은 마치 시냇물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정신없이 잠들어 버릴 정도로 지쳐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날 눈을 뜨자마자 나는 트리스탄이 돌아올 준비를 하나씩 해 나갔다. 소피아와 다른 하녀들이 내 곁을 도왔고, 다른 사용인들 역시 내 지시를 기다리며 움직였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 왔다. 더 이상 루나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것저것 정리하는 동안만큼은 마치 다시 루나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야 내가 그것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달았다. 이상할 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책임의 무게는 예전보다 가벼워졌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할 일을 마칠 때마다 나는 저택과 병원을 오가며 가능한 한 오래 트리스탄의 곁을 지켰다. 이야기를 나누든, 농담을 주고받든, 아무 말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든 상관없었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 이틀 동안 우리는 아린도, 부모님도, 다가올 재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쩌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나는 거대한 팩 홀을 바라보았다. 나를 다시 이 팩으로 불러들였던 연회가 열렸던 장소. 하지만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는 전혀 달랐다. '이제 시작이야.'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문득 이 순간쯤 이미 퇴원했을 트리스탄이 떠올랐다. 전날 밤 그는 재판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때 그의 눈빛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히 전해졌다. 이건 내 선택이었다. 내가 내려야 할
발레리 '뭐?' 너무도 뜻밖의 말에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상상은 했지만, 이건 가장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트리스탄, 그럴 순 없어….” “정당하고 합법적인 판결이야.”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를 살해하려 한 죄의 대가는 사형이다.” “난 더 이상 루나가 아니야.”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반박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 루나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알파까지 공격했어.” 가슴 한쪽이 조여 왔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평생의 대부분을 그녀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제는 모든 인연을 끊었고, 더 이상 그녀를 평범한 팩원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해도, 트리스탄은 원래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앨린을… 죽인다고?' “트리스탄….” “발레리.”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잿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내가 알지 못하는 기억의 그림자가 그 눈동자 속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모습은 내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난 이제 모든 걸 알아.” 그가 낮게 내뱉었다. “그 아이 마음속 악의는 너무 깊어. 그런 사람을 이 팩에 그대로 둘 수는 없어. 그렇다고 추방해서 밖으로 내보내 또 다른 위험을 만들게 둘 수도 없고.” 어느새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부드럽게 감
발레리 방 한구석에 앉아 나는 제라드 박사가 트리스탄의 상태를 살피며 차분히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벅찬 감정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그를 위해 팩의 주치의를 불러오고 말았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몇 분씩 그의 얼굴선을 따라 눈길을 머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일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증거였으니까.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 내 곁에 있다는 증거. 그리고 조금 전의 모든 일이 현실이었다는 증거. 그는 나를 사랑했다. 그 사실이 천천히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몇 주 동안 이어졌던 그 애매한 경계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창백하게 쓰러져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 마음은 그를 기다리는 내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병실에서 홀로 그의 유일한 보호자로 남아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오직 한 가지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죽으면 안 된다. 내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내 감정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안다고 믿으면서도 아무것도 몰랐던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진정한 그를 알게 된 지금의 트리스탄을 사랑했다. 그의 결점과 실수까지도 모두 품은 채. 나는 그의 결점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
트리스탄 눈부신 빛이 눈을 파고들자 희미하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둔한 통증이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밝기에 익숙해지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병원이었다. 앨린의 협박, 발레리, 그리고 총성이 뒤섞인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의식을 잃은 뒤에 있었던 일들까지도... 몸을 일으키려다 묵직한 감각에 멈칫했다. 침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머리카락만큼은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었다. 발레리.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침대의 빈 공간 위에 두 팔을 포개 베개 삼아 얼굴을 기댄 채였다. 푸른 침대 위로 백금빛 금발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고, 이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볼을 따라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트리스탄! 안 돼! 정신 차려!” 그 절박한 외침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목이 꽉 메어 왔다. 이제는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녀가 죽은 뒤 이어졌던 전생의 기억들까지도.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는 더욱 커졌다. 그때도 그랬다. 너무 늦어서야 모든 것을 깨닫고, 비참함과 죄책감, 후회와 이루지 못한 사랑에 갇힌 채 생을 마감했다. 진실은 고통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결국 모든 길의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품었던 소원이었다. 그 소원 때문에 내가 이 시간으로 돌아온 걸까? 모든 것을 바로잡으라고? 애초에 내가 그런 기회를
트리스탄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앨린은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녀를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가끔 마주쳐도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를 이용하려 했던, 술에 취한 내 몸을 탐하려 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수시로 연기를 하며 피해자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이제는 그것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끝없는 피해의식.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산산이 깨져 있었고,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 맴돌았다. 왜? 나는 그녀를 외면했다. 그저 거리를 두었다.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짓눌려 그녀의 행동에 일일이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순진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써 넘기려 했다. 분명 그날의 일은 한 번의 실수일 뿐이고, 언젠가는 잊힐 거라고. 적어도 어느 날 밤, 한밤중에 눈을 떠 알몸의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불길한 기분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실루엣을 확인한 순간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앨린이 무엇을 하려는지. 몸을 움직이려던 나는 그녀가 적막 속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시작하자 멈춰 섰다. 이것만이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제야 모든 것이 완벽해질 거라고. 발레리에게 이것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고. 그리고 발레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두를, 심지어 나까지도 발레리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내 피가 차갑게 식어 갔다. 나는 충격과 믿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