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식을 접한 이유영은 아침 식탁에서 평온하게 식사를 이어가던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한 거야?”“뭐?”“진영숙 말이야.”이유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진영숙에게서 고소장을 받은 직후 갑자기 모든 소송이 철회되다니 뭔가 수상했다.여진우가 아니라면 아버지가 한 일이 분명했다.“응.”여진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방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진영숙이라면 잘된 일이야.”‘지금쯤 진영숙은 어떤 기분일까?’절망 그 이상일 것이다.그녀는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모든 희망을 월이에게 걸고 있었다.그런데 여진우는 그 마지막 출구마저 닫아버렸고 그 절망감은 과거 아이를 잃었을 때보다 더 깊고 처참할 것이다.“유영아.”“응?”“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 알겠지?”여진우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두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에 진영숙 문제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진영숙은 얼마든지 소란을 피울 수 있었지만 그 소란에 더는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이유영은 마음이 따뜻하게 물들어 갔다.“말할 게 하나 더 있어.”“뭔데?”“아버지, 퀘벡으로 간대.”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진우를 바라보았다.‘퀘벡으로 간다고?’그녀는 아버지가 요즘 많이 바쁘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하지만 여진우가 말했듯 아버지는 지금 로열 글로벌의 내사를 처리하고 있고 그 업무는 여진우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아빠가...”이유영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아버지는 평생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신 적이 없어.”여진우의 간단한 한마디가 부모님의 관계를 말해주었다.외부에서 아무리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해도 두 사람의 사이는 늘 돈독했다. 그 관계가 좋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어머니는 파리에
강이한이 살아 있기나 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던 진영숙은 모든 희망을 아이에게 걸고 있었다.아이만 곁에 있다면 조금은 숨 쉴 틈이 생길 것 같았다.하지만 이유영은 그 바람마저도 단칼에 잘랐다. 아이를 파리에서 데리고 나가 만나게조차 하지 않았다.그녀는 분노했고 아이를 되찾기 위해 미친 듯 날뛰었지만 결과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시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네.”그 짧은 대답에 진영숙은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이건 정말 너무하잖아.”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너무한 거 아니야?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한 것도 모자라 파리에서 아예 데리고 나갔어.’“해외에서 찾을 수 있을까?”진영숙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정씨 가문이 파리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해외에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시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무슨 뜻이야?”그 반응에 진영숙의 감정은 더욱 날카로워졌다.시윤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정씨 가문의 국제적 지위는 사모님도 잘 아시잖습니까.”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를 허락했던 이유도 청하시에 있을 때 정씨 가문의 영향력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진영숙은 이유영 뒤에 그렇게 강력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그러니까 손녀를 되찾을 방법이 없단 말이지?”이유영의 태도를 보며 진영숙은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엔 더 이상 아무런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가능성이 사라진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진영숙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예로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 부부 사이를 갈라놓는 가장 큰 원인이라 했다.그 말을 외면하고 싶었던 진영숙도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왜 그렇게 집착하시는 겁니까.”시윤이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집착이라고?’“난 아무것도 없잖아.”진영숙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
‘알고 지낸 사이?’종수의 말에 엔데스 신우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잠시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한편, 진영숙은 실제로 이유영을 고소했다.하지만 진영숙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이유영은 예전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특히 진영숙은 이 사건을 파리 언론에 터뜨리려 했지만 끝내 어떤 언론사도 보도하지 않았다.그 배후에는 분명 정씨 가문이 있었다. 보도하려면 먼저 정씨 가문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퍽!”진영숙이 컵을 집어 바닥에 내던지자 유리잔은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유리 조각 하나가 진영숙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씁!”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소파 위에 있던 쿠션까지 집어 던졌다.근처에 있던 시윤은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진영숙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감히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진영숙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사람은 절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모든 걸 알게 된 진영숙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양보했다고 생각한 만큼 더 미쳐 날뛰고 있었다.강이한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진영숙의 감정은 더욱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지금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도 이유영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 심지어 진영숙 자신에게까지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강씨 가문을 향한 이유영의 태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사모님, 진정하세요.”“시윤아,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 마음이 아프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진영숙의 목소리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어떻게 화가 나지 않겠는가?강이한이 이유영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에게 얼마나 반항했는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찢어졌다.“정씨 가문은 파리에서 대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큰 뉴스거리를 아무도 보도하지 않는 거야.”그 말을 뱉으며 진영숙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파리에는 정씨 가문에 맞설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드디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이유영과 박연준이 끝나자마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거절하시면 안 될 텐데요?”“저는 거절할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이유영의 말이 끝나자 엔데스 신우는 가볍게 웃었다.분명 부드러운 울음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유영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이만 끊을게요.”짜증이 치밀어 오른 이유영은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주저 없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박연준과 이혼하기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이유영의 마음은 결코 평온할 수 없었다.아무리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박연준과 강이한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 시각, 전화기 너머의 엔데스 신우는 더블루 리버스에 있었다. 그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발표한 뒤로 주변은 연일 복잡했다.하지만 그는 날카로운 직감으로 숱한 사람들을 밀어냈다.지금까지 곁을 지켜온 종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중요한 시점일수록 신분을 감추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을 텐데, 왜 하필 이때 건강 회복을 발표한 걸까?’특히 송씨 가문의 반응은 추악했다.셋째 도련님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발표가 나오자마자 넷째 도련님과 혼인했던 여자를 앞세워 접근해 왔다.탐색이라는 명분은 허울일 뿐이었다.오랜 병환으로 셋째 도련님에게 든든한 지지 세력이 없다고 판단한 송씨 가문은 외동딸을 앞세워 이 사태를 이용하려 들었다.종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에게 딸이 한 명이라 다행이지 여러 명이었다면 더 끔찍한 일을 벌였을지도 모른다.건장이 회복되었다는 발표 이후, 엔데스 신우의 상황이 명백히 달라졌음을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도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 씨가 거절했습니다.”종수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신우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그 씁쓸함은 더 깊어졌다.엔데스 신우는 수년간 병을 핑계로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그 곁을 지켜온 이들은 그 시간 동안 인간관계의 온기와 냉혹함을 뼈저리게
그렇다.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집도 가족도 모두 잃었고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었다.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시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최대한 빨리 도련님을 찾겠습니다.”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지금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강이한이 있었기에 그가 어디 있는지 찾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시윤이 강이한을 언급하자 진영숙의 마음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돌아오면 뭐가 달라지는데?”돌아온다고 해도 고통스러움은 여전할 것이다.그녀는 강이한과 이유영의 결말이 이토록 참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결국 이유영에 대한 증오심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이유영이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진영숙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음란한 여자 같으니라고!”자기 아들은 이유영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희생했는데 정작 이유영은 다른 남자들과 잘만 어울려 다녔다.“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진영숙은 답답한 마음에 숨이 막혔다.강이한의 행동이 결국 아무 가치도 없는 희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진영숙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럴 가치가 있든 없든, 그건 도련님의 선택입니다.”시윤이 봤을 때도 이유영을 탓할 일은 아닌 것이다.이 모든 것 또한 이유영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시윤아!”진영숙은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시윤을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 그 여자가 날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지 몰라서 그래? 내 아들은 걔 때문에 모든 걸 다 잃었어.”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마녀가 틀림없어.”진영숙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에게 이유영은 마녀와 같은 존재였다.강이한은 이유영 때문에 모든 걸 잃었고 진영숙은 아이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이 생각을 하자 진영숙은 괴롭다 못해 분노로 차올랐다.이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이미 의미 없었다.“빨리 아이를 찾아야겠어.”강이한 뿐만 아니라 아이도 빨리 찾아야 했다. 강씨 집안에 속한 모든 걸 더 이상 이
이유영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진영숙 옆에 서 있던 시윤이 공손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작은 사모님.”시윤이 어쩌다가 진영숙 같은 사람 곁에 오래 머물게 된 건지 이유영은 내심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시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영숙의 곁에 있었다.“시윤 씨, 기억력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한번 다시 말씀드리는데요. 그 사람과 전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요.”이유영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이미 끝난 일임을 단호하게 전했다.늘 온화한 모습의 시윤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이렇게 지혜로운 인물이 왜 진영숙 곁에 머물게 된 것인지 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도련님께 작은 사모님은 언제나 소중한 아내셨습니다. 그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아내?’아내라는 말에 이유영은 쓴웃음을 터뜨렸다.‘아내라고?’“잊으셨나 본데 전 아내였던 적이 없었어요.”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강씨 집안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리고 강이한은 마지막 순간에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시윤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휴...”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자리를 뜨려 일어났다.그러나 겨우 두 걸음을 옮겼을 때, 시윤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사모님 생각도 하셔야죠. 사모님도 불쌍한 여자입니다.”‘불쌍하다고?’그 말에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래, 불쌍하지.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해.’“저한테 그 여자는 불쌍하기보다 증오스러운 존재에 불과해요.”그 단호한 한마디에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시윤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증오스러운 존재라...’이유영은 더는 시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자리를 떠났다.차 안에 혼자 남게 된 이유영은 씁쓸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불쌍하다고? 흥.”지금 모두가 그녀더러 진영숙을 용서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 한다.진영숙만 눈앞
진영숙은 표정이 변하더니 눈에는 짙은 음흉함이 어렸다. 그녀는 비웃으며 말했다.“빚졌다고?”그 말을 진영숙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강씨 집안은 애초에 이유영을 환영한 적 없었고 그녀가 먼저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 강씨 집안도 강이한도 그 누구도 이유영에게 빚진 것은 없었다.모든 일은 이유영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으니 따라서 감당도 그녀의 몫이었다.진영숙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임소미는 이미 아이를 데리고 퀘벡으로 떠났고 정씨 가문은 두 사람의 모든 행적을 지워버렸다. 퀘벡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지금 진영숙은 아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퀘벡에 가더라도 만날 수 없었다.이전까지는 이유영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정씨 가문은 최소한의 여지를 남겨두었다.강이한을 봐서 비록 진영숙에게 예의를 갖추진 않았지만 아이 문제에 관해서는 극단적이지 않았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진영숙이 스스로 그 모든 것들을 거부했던 것이다.이유영은 변호사를 통해 진영숙 측에 분명한 뜻을 전달했다. 그녀는 더 이상 진영숙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박연준에 대해서도 이미 정리가 끝났다.강이한과 헤어졌을 때와는 달랐다. 박연준과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유대도 없었다.‘잊으면 그만이야.’이유영은 단호했다. 신지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서주에 중요한 일이 있었던 박연준은 이유영과의 일을 끝마치고 미련 없이 서주로 돌아갔다.요즘 작업실은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이유영은 낮이면 늘 작업실에 있어야 했다.진영숙이 집에서 그녀를 찾지 못하면 작업실로 찾아왔다.하지만 이유영은 그녀를 거의 만나주지 않았다.과거 강씨 집안에 있을 땐 나름의 예우를 갖췄던 이유영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진영숙에게서 귀부인의 기품보다는 터무니없는 고집만 부렸다.그리고 이번엔 그 차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었다.“날 피한다고 해서 평생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유영, 난 평생 네 악몽이 되어 널 찾아갈 거야.”진실을 알게 된 뒤로 사흘 동안이나 이유영을 만나지
시윤이 저녁에 찾아갔을 때, 배준석은 자리에 없었다.진영숙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그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진영숙은 묵직한 시선으로 배준석을 바라보았다.“말해 줘. 지금 이유영의 눈, 이한이 거야?”진실을 빨리 알고 싶었던 진영숙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배준석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이야?”진영숙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정말 그렇단 말인가?’“어머님.”“쾅!”배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영숙은 주먹을 불끈 쥐고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배준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그를 찾은 건 다만 마지막 확인을 위해서였을 뿐이다.“아닙니다!”진영숙의 반응을 보며 배준석이 대답했다.진실을 알게 된 진영숙이 파리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뻔했다.“유영이를 위해 말하지마.”“사실입니다.”“사실? 흥!”과거에도 사실이라고 말하고 거짓으로 끝난 적이 있었다.이게 사실일 리가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한이가 왜 서주를 떠났는데?”그 말에 배준석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의 온몸이 긴장감에 순간 굳어버렸다.그렇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각막을 이식하지 않았다면 굳이 서주를 떠날 일이 없었다.특히 박연준이 이유영 곁에 머물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관계까지 있었던 상황에서 만약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강이한은 떠날 이유가 없었다.자기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진영숙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청하시에서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도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래서 그녀는 그 결말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난 한 가지만 알고 싶어. 이한이 정말 살아서 떠난 건지.”긴 침묵 끝에 진영숙은 마침내 가슴 깊이 가라앉은 응어리를 누르듯 입을 열었다.그녀의 목소리엔 형언할 수 없는 무게와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배준석은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어머님, 그
원래부터 엔데스 가문의 다섯째와 여섯째 도련님은 정씨 가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유영을 노리고 있었다. 이제는 셋째 도련님까지 가세했다.즉, 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이 사건에 깊이 얽혀 있는 셈이었다.하지만 이혼하게 된다면 모든 상황이 뒤바뀔 것이다. 아니, 상황의 본질 자체가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었다.바로 그 점이 강이한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정씨 가문은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신시욱이 조용히 말했다.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는 의미였다.강이한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상황 계속 지켜봐.”“네.”신시욱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 때마다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파리는 단순한 곳이 아니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위기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그런데도 강이한은 모든 걸 알고 싶어 했다.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도 알아야만 했다.각막을 이유영에게 건넨 순간부터 강이한의 속죄는 시작되었다.남은 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며 과거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을 갚아나가겠노라 다짐했었다.마치 스스로 감옥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간 죄인처럼 살아가고자 했다.하지만 이유영과 정씨 가문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감출 수 없었다.결국 그는 물러서서 타협하기로 했다.오직 이유영의 인생에 다시 평화가 깃들기만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그러나 자신이 사라졌음에도 이유영의 인생은 여전히 평온하지 않았다.그 사실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가혹했다.“한 가지 더 있습니다.”신시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뭐지?”“사모님께서... 파리에 계십니다. 이미 두 번이나 이유영 씨를 만나셨습니다.”사실 신시욱은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강이한의 상태를 지켜보며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더는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