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은 강이한이 갑자기 생각을 바꿀까 봐 초조했다.오래 지속되었던 싸움이고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세강의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그녀에게 족쇄와도 같았다. 여론의 질타와 비난이 그녀를 숨막히게 했다.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고민 끝났고 이대로 처리해 주세요.”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어쩌면 이혼이 서로에게 해방일 수도 있었다.지금 이 상태로 계속 지속하다가는 서로의 추한 모습만 계속 보게 될 것 같았다.법원에서 나올 때, 두 사람의 손에는 이혼 서류가 한 장씩 들려 있었다. 손잡고 혼인신고하러 왔을 때랑은 확연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을 알았을까? 그때는 서로에 대한 무한한 확신만 있었고 언젠가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유영이 자신의 포르쉐로 향해 가자 강이한은 갑자기 갑갑함을 느꼈다.하지만 이제는 남남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하면서도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다.그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며 말했다.“가자.”유영이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딜 간다는 거야?”“병원.”강이한이 말했다.유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잊지 마, 이혼하기로 한 조건은 망막을 기증하는 거야.”강이한이 차갑게 말했다.그녀가 그의 사랑을 거부한다면 처참하게 망가뜨릴 생각이었다.지금부터 더 이상 그녀에게 그 어떤 애정도 주지 않을 것이다. 남은 건 배신감과 복수심뿐.유영이 웃었다.예쁘장한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잠이 덜 깬 것 같네.”말을 마친 유영이 뒤돌아섰다.강이한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지금 날 가지고 논 거야?’그랬다. 이혼을 위해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뿐, 진짜로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지금의 유영은 그가 하자는 대로 다 하던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강이한과 이혼한 유영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 파티도 약속했다. 소은지는 소식을 듣고 연차를 낸다며 서둘렀다.그들은 유영의 집
그녀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유영을 바라봤다.그런 조건에 동의한 유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유영은 창백하게 질린 친구를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나도 놀랐어. 그런 유치한 조건까지 내걸 줄은.”지난 생에 한번 경험한 일이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그래서 주겠다고 했어?”소은지가 물었다.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제안을 거부했더라면 이혼 서류에 도장도 찍지 못했을 것이다.소은지는 이런 조건에 동의한 친구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사람이 시력을 잃으면 그때부터 암흑 속에 사는 건데 그걸 동의했다니!생각만 해도 속이 갑갑하고 울렁거렸다.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겠다고 했지.”“너 미쳤어?”“내가 정말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어줬을 리 없잖아. 안 주면 그만이야.”“그러니까….”소은지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유영은 조건에 동의했지만 그건 단지 이혼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이혼 서류에 도장까지 찍었으니 그 말도 안 되는 약속은 번복하면 그만이다.그녀에게서 망막을 빼앗기 위해 이혼 서류에 사인했을 강이한을 보니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처음부터 유영이 망막을 기증하기 위해서 이혼까지 거부했던 게 아닐까?세상에 이 사람보다 더 매정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이미 매정하다는 말로 그를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그러니까 그냥 무시하면 된다는 거지? 그쪽에서 가만히 있을까?”“이혼까지 했는데 뭘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무시하면 돼.”“정말 이대로 포기할 것 같아?”“산 사람의 망막을 뜯어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건 위법 행위야.”유영이 웃으며 말했다.변호사인 소은지가 더 잘 아는 상식이었지만 친구의 일이다 보니 이성이 날아가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다.유영이 약속을 번복했다고 해서 강이한이 유영에게 소송을 걸 방법은 없다는 얘기였다.“너무 놀라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어.”만약 유영이 이혼을 위해 정말 그 제안에 동의했다면
오후에 유영은 사무실로 나갔다.조민정이 정리한 자료를 가지고 그녀의 사무실로 왔다. 대충 검토하고 사인을 마치자 조민정은 서류봉투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게 뭐예요?”유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난번에 요구하셨던 병원 쪽 자료입니다.”“벌써 조사를 끝마쳤어요?”유영이 놀라며 말했다.“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죠. 10억을 주고 진실을 밝혀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어요.”10억이나 나갔다는 말에 유영은 살짝 가슴이 아팠다.강이한과 결혼하고 이제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절대 작은 숫자는 아니었다.서류에 적힌 진실을 마주한 순간, 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네요.”예쁜 얼굴에 냉기가 스치고 지나갔다.거기에는 한지음과 병원 내부 관계자가 돈을 주고받은 입금 기록과 영상이 들어 있었다.한지음이 멀쩡하게 병원을 돌아다니는 영상이었다.유영은 이 영상을 본 강이한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기대가 됐다.한지음의 시력을 되찾아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10년을 함께한 조강지처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려 했던 남자였다.그렇게 정성 들여 보살핀 여자의 추악한 이면을 마주했을 때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조민정이 물었다.“일단은 그냥 가지고만 있죠. 아직은 거기 신경 쓸 시간이 없어요.”최근 그녀는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넘쳐나는 의뢰를 처리하기도 바빴다.병원 쪽에서도 수상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진영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한지음의 손을 잡았다.“네가 고생이 많아.”“아줌마….”한지음이 울먹이며 말끝을 흐렸다.“네 오빠가 목숨을 바쳐 도와준 덕분에 우리 이한이가 살 수 있었어. 그때는 지석이가 고아인 줄 알고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이렇게 여동생이 멀쩡히 살아 있을 줄이야.”오빠 얘기가 나오자 한지음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드리웠다.“다 지난 일인걸요.”“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이한 씨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줌마가 속상해하실 거라면서요.”한
그때는 한지음도 강이한에게 완전히 마음을 주지는 않은 상태였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그래서 갑자기 태도가 바뀐 진영숙을 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조차 난감했다.“아줌마….”진영숙이 말했다.“걱정 마. 내가 다 해결해 줄게.”그녀는 한지음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한지음은 괜찮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아니야, 약해지면 안돼! 이유영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려면 아줌마 도움이 필요해!’한지음은 이혼으로 부족했다. 비록 강이한과 이혼했지만 유영은 여전히 활개치며 살아가고 있었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강이한이 아니라 유영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결말이었다.“감사해요, 아줌마.”한참 고민을 마친 뒤, 한지음이 말했다.진영숙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불쌍한 아이에게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이 세상에 가족 하나 없이 혼자 살아가는 불쌍한 아이였다. 유일한 혈육인 오빠는 강이한을 구해주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솔직히 너를 양녀로 입양하고 싶지만 최근에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에 대해 말이 많잖아. 지금은 시기가 아닌 것 같아.”한지음이 안타깝지만 세강의 이미지도 고려해야 했다.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 한지음을 양녀로 들이면 세강은 또 온갖 여론을 몰고 다닐 것이다.“이해해요.”한지음이 말했다.“이한 씨도 그걸 걱정해서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요.”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들이 진영숙을 소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강이한은 유영과 싸우느라 바쁘고 한지음도 모든 신경을 유영에게 쏟았다.하지만 진영숙은 그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더 애잔한 눈빛으로 한지음을 바라보았다.한지음의 병실을 나온 진영숙은 주치의를 만났다. 하지만 주치의는 오늘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라졌다고 했다.진영숙은 묻고 물어서 한지음이 처한 상황을 듣게 되었다. 망막 이식이 시급하다는 내용이었다.병원에서 나온 진영숙은 곧장 강이
진영숙이 탄식하며 말했다.“지음이한테 망막을 이식해 주는 조건으로 원하는 대로 다 줘. 지음이한테 시간이 얼마 없다고 들었어.”비록 강이한도 그런 결정을 내렸었지만 엄마의 입에서 그 말을 듣자 저절로 숨이 막혔다.유영이 멀쩡한 망막을 떼서 한지음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아팠다.“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강이한이 단호하게 말했다.전에는 그 역시 이런 식으로 유영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사실 그녀가 시력을 잃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손을 뻗으면 끝없는 어둠이 펼쳐진 그런 세상에 산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서투르게 손을 뻗으며 주변을 더듬거리며 힘겹게 걷는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익숙하지만 안쓰러운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손발이 흠칫 떨렸다.‘아… 아니야! 최근에 피곤해서 환각이 보였나 봐!’비록 유영에게 많이 실망하고 배신감도 느꼈지만 그런 모습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자존심 강한 그녀가 밥 먹는 것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런 고통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안 돼! 그렇게 되면 이유영은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할 거야!’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릿하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진영숙은 아들의 이상한 표정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너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땀 좀 봐!”집안의 온도는 적절했고 땀을 흘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강이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 생각, 포기하세요.”“이한아!”“제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한지음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렇다고 유영을 시각장애인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진영숙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금도 걔 편을 드는 거야?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걔가 최근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잊었어?”이혼도 하지 않고 해외로 가서 늙은 남자랑 바람이 난 며느리였다.그것만 생각하면 진영숙은
유영은 일에 치여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업무만 끝난다면 모든 것을 양승호 변호사에게 넘기고 파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수는 없는 법.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우우웅-이때,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저장되지 않는 번호였지만, 유영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난번에 한지음이 그녀에게 걸었던 번호였다.유영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난 이미 강이한과 이혼했어.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한지음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 그녀가 먼저 선수 쳤다.사실 이혼한 것만으로 이 상황이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건 유영도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전화 넘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설마 겨우 이혼으로 모든 것이 끝날 거라 생각했어? 내가 원하는 게 강이한, 그 뿐인 줄 알았어?”“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난 너의 눈, 팔, 다리… 모든 걸 원해!”강이한은 시작에 불과했다.목소리만으로 유영은 한지음의 강한 증오와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혹시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유영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미움을 받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만났다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너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전화 너머 한지음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내듯 악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뱉었다.유영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한지음이 자신을 왜 이토록 증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회귀 전에 강이한에게 접근했던 이유도 자신을 향한 이 악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러나 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이번엔 절대로 호락호락 당해줄 마음이 없었다.“그래? 어디 해봐! 내가 그냥 당해 줄 것 같아?”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유영이 말했다.“하, 그래! 어디 한번 사랑하던 남자한테 눈을 뺏기는 기분이 뭔지 느껴봐!”라는 말과 함께 한지음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유영은 충격에 한동안 자리에 미동도 할 수 없었다.우우웅-그러다가 다시 울리는 벨 소리
유영은 이 중대한 사실을 이제야, 그것도 강이한이나 그의 가족이 아닌 삼촌한테 듣게 됐다는 사실에 놀랐다.“강이한이 10살 때 일어난 일이야. 그때 거의 죽을뻔했다고 들었어.”정국진이 말했다.이 말을 들은 유영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그래서 나한테 말하지 않았구나….’끔찍한 일이었을 테니, 강이한은 어쩌면 이 사건을 입에 담기조차 싫었으리라 그녀는 추측했다."그때, 한지음의 오빠가 강이한을 구해줬어. 강이한은 살아남았지만, 한지석은 죽었지."“….”그녀는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한지석이 죽었다고…? 그래서…!’“유영아, 조심해. 강이한은 물론 그 주변 인물 모두를. 아니면 차라리 지금 파리로 돌아올래?”정국진의 추측대로라면 강씨 집안사람들은 아직 한지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강이한이 유영과의 갈등으로 집안사람들한테 말할 시기를 놓친 것이다. 한지석은 강이한은 물론 그의 가족들에게도 큰 은인이었다. 그러니 한지석의 동생인 한지음이 나타난다면 강씨네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떠받을게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지음이 유영을 적대시한다? 그러면 당연히 온 가족이 그녀의 편을 들 것이고 유영은 궁지에 몰릴 것이다.정국진은 이부분이 매우 걱정스러웠다.깊이 숨을 들이킨 유영이 입을 열었다."그런데 이 일이 한지음이 저를 미워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그녀는 한지음으로부터 적나라한 증오를 느꼈다.“그건 나도 아직 뭐라 단정 짓진 못하겠어. 일단 빨리 파리로 돌아오기나 해!”정국진이 단호하게 말했다.강이한과 이혼한 지금, 유영이 청하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하지만 유영은 머뭇거렸다.“저 아직 이쪽에서 맡은 일을 끝마치지 못했어요. 파리로 돌아가려면 우선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요.”“이런….”유영이 지금 맡고 있는 건 아주 큰 프로젝트였다.이번 프로젝트는 그녀의 커리어에 큰 획을 그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사업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유영이 파리로 돌아오려면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으리
"루이스를 네게 보낼게." 정국진이 말했다.‘루이스? 삼촌의 개인 경호원?’"그러실 필요 없는데…." 유영이 말했다. 청하시의 치안은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루이스가 필요할 것 같아요."전화를 끊은 후, 유영은 정국진이 말한 한지음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둘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사이였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이혼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혼하지 않았다면 한지음한테 얼마나 더 많은 증오를 받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분명 더 큰 문제들이 생겼으리라.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유영이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만날 수 있어?""지금?" 전화 넘어 강이한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응, 지금!" 유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이 시점에 만나자고 요청할 줄 몰랐다. 최근 이유영은 마치 그를 피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나 지금 사무실에 있어.""알았어, 곧 갈게!" 이유영이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조민정이 준 물건들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다 잠시 정국진이 좀 전에 말한 한지음과 강이한의 관계를 떠올렸다. 그녀는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절대로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사랑과 은혜, 강이한이 선택한 것은 항상 한지석의 은혜였다.한편 외출했다가 돌아온 강서희는 강이한과 이유영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이제는 대놓고 이유영을 싫어하는 티를 내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앞으로 한지음에게 좀 더 잘해줘." 진영숙이 강서희에게 말했다.강서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엄마?"진영숙은 살짝 못마땅한 듯 강서희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한지음에게 좀 더 잘해주라고 했어."그제야 강서희는 말의 뜻을 자각했다. "왜?" 그녀는 왜 진영숙이 이런 말을 했는지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