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스 현우는 소은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의 눈동자 깊은 데서 어두운 감정이 스쳤지만 마주 보는 시선에는 오로지 부드럽고도 익숙한 애틋함만 가득했다.파리에 있을 때 엔데스 현우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눈빛조차 다 계산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모든 벽이 사라진 듯, 한치의 거리낌도 없었다.“어떻게 온 거예요?”소은지가 물었다.제설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진입이 불가능한 길이었다.“천천히 길을 뚫으면서 들어왔어요.”“그래요?”“네. 제설차가 사흘 뒤에 온다길래, 못 기다리겠어서요.”“...”엔데스 현우의 말투는 진심인 것처럼 지나치게 진지했다. ‘정말인가?’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 어둠이 한 겹 더 짙어졌다.“왜요?”“내일 새벽에 바로 돌아가요. 관련 부서에는 내가 연락 넣어 줄게요.”“...”‘이렇게 쫓겨나는 건가?’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담담한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이윽고 엔데스 현우가 입을 열었다.“엔데스 명우하고 엮이지 마요.”“하지만 엔데스 명우는 나한테 당신과 엮이지 말라고 했어요.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네요.”그 말로도 모자랐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이 이상하기만 할까?“...”엔데스 명우가 소은지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말했다는 말에 엔데스 현우의 눈에 위험한 기운이 어렸다.“뭐가 옳고 그른 건지 이미 알고 있잖아요. 엔데스 명우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거기서 도망쳐올 이유가 없었을 거고요.”“둘 다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요.”소은지가 단칼에 얘기했다.소은지의 세계에서 엔데스라는 성을 가진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엔데스 현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체념 섞인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소은지가 물었다.“말해요. 어떻게 한 거예요?”혼인 얘기였다.파리를 떠날 즈음, 두 사람은 서로 마주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소은지는 확인할 건 다 확인해 두고 떠났
그렇게 고고하고 차갑던 사람이 이제는 온몸에 가시를 세워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그 모습에 엔데스 현우는 말로 다 담기기 어려운 쓸쓸함을 느꼈다.엔데스 현우는 정말로 상처받았다.“바람이 차요.”엔데스 현우가 다가와 소은지의 손목을 끌어당기고 현관문을 다시 힘껏 닫았다....설정산.엔데스 명우에게도 오늘은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엔데스 현우가 소은지를 찾아 올라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심장이 이상하게 쿵쾅거렸다.만나게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소은지의 마음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은지는 어떻게든 엔데스 현우와 끝을 맺으려고 할 것이다.“후...”엔데스 명우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강혁이 그런 엔데스 명우의 곁을 지켰다.“도련님.”“도착했대?”“네.” 이미 엔데스 명우에게도 연락이 닿았다.엔데스 명우는 다시 한번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이런 밤이 못마땅했다. 강혁이 짜증을 내는 엔데스 명우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말을 삼켰다.“소은지 말이야, 거기서... 별일은 없겠지?”뭐가 별일일까.소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혼인 관계는 아직 유효했다. 소은지가 떠날 때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해도 엔데스 현우는 어떻게 해서라도 소은지를 본인 곁에 두려고 할 것이다.그들이 실제로 확인했을 때, 문서상으로 두 사람은 아직도 혼인 관계였다. 그 사실에 엔데스 명우는 놀라기도 했고 분노하기도 했다.“소은지 씨 성격을 보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엔데스 현우 성격을 보면?”“...”강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엔데스 가문 특유의 질기고 매서운 기질이 느껴졌다.그렇게 생각하면 엔데스 명우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강혁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명우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현관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도련님, 도련님!”밖은 제설 작업이 끊긴 지 오래였다. 산이 높아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그래도 엔데스 명우는 개의치 않았다. 강혁이 뒤따르며 내려
소은지는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엔데스 현우라니.소은지는 바로 엔데스 현우의 품에서 벗어나려 팔을 뻗어 버둥거렸다.“가만있어요. 잠깐만 안고 있게.”묵직한 저음에 오랜 시간 잊고 지낸 나른함이 스쳤다.그동안 엔데스 현우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무도 몰랐다.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찾아 헤맸고 엔데스 명우까지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불안이 더 짙어졌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일을 알기에 엔데스 현우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엔데스 명우는 한 번도 소은지를 아껴 준 적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한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커지는 건 당연했다.“...”소은지는 손을 뻗어 엔데스 현우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엔데스 현우가 더 세게 죄어 와 도망칠 틈이 사라졌다.“은지 씨.”“...”그 호칭이 소은지의 가슴을 휘저었다. 이런 말투로 소은지를 부르는 건 이유영뿐이었다.오직 소은지와 가까운 사이인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에게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놔요.”소은지의 입술 사이에서 차가운 말이 내뱉어졌다.그러나 엔데스 현우는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끌어안았다.“놓으라니까요.”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안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쾅.문이 등 뒤에서 닫히고 소은지의 입술 위로 엔데스 현우의 입술이 내려앉았다.입맞춤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소은지에게 키스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의 방식은 거칠기만 했다. 입술이 닿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거리감이 분명히 느껴지니까 말이다.그에 비해 엔데스 현우의 입맞춤은 부드러웠다.바로 그 다정함 때문에 끝내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짝.소은지는 한 손을 겨우 빼내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엔데스 현우의 뺨을 내리쳤다.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엔데스 현우의 팔이 드디어 느슨해졌다. 소은지를 풀어주고 눈을 마주한 찰나 시선에는 무거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희미한 고통
“신고는 안 했어요?”“했죠. 그런데 나와서는 또 악행을 저지르고, 신고한 사람까지 복수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번 반복되니 다들 멀찍이 피하는 수밖에 없었어요.”실제로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이수연이 말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소은지가 이수연을 돕고 심지어 몸으로 막아선 날. 마을 사람 누구도 소은지가 그런 행동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소은지의 집이 부서진 뒤에도, 소은지가 보여준 대응은 모두의 예상을 다시 한번 벗어났다.이번에야말로 이수연의 남편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셈이었다.“피한 건 잘한 선택이에요.”“아가씨.”“네?”“수연 씨를 도와주신 김에... 우리도 좀 도와주세요.”“제가요?”“이런 이웃과 한마을에서 지내는 건 너무 무서워요. 그런 사람은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맞아요.”마을 사람들 모두 그 남자가 영영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길 바랐다.하지만 그건 소은지가 단독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지금 당장은 남자의 기세를 꺾어 놓을 수 있어도, 소은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횡포가 계속될 터였다.“하지만 그건 제가 주요하게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서 전문성이 부족합니다.”“우린 아가씨를 믿어요.”이 신뢰는 달콤하면서도 무거웠다.이혼 사건을 주로 다뤄 온 입장에서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 하는 일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그 사람은 그동안 저지른 짓이 너무 많아요. 셀 수도 없을 만큼.”“...”“우린 수연 씨를 감히 도와주지 못했어요. 만약 이곳이 산골 마을이 아니라 시내였다면 수연 씨가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 남자의 손에서 끝내 못 벗어났을지도 몰라요.”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잔인한 말이었지만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이웃에게까지 손을 대며 공포를 심어 왔다면 이수연이 법적으로 자유를 얻는다 한들 정말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이웃들도 무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아주머니는 더 많은 일을 들려주었다.소은지는 들을수록 숨이 막혔다. 세상에 어떻
이수연의 세상에는 친구라는 존재가 한 번도 없었다. 친구가 어떤 사이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바랐지만, 끝내 맺지 못했다.그래서 방금 소은지의 입에서 친구라는 두 글자가 나온 순간, 심장이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친구요?”“네, 친구요.”친구라면 도움을 주고받는 게 당연했다.소은지처럼 높은 자리에서 선 사람이, 자신과 친구가 되어 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좋아요, 친구.”이수연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이자 가장 특별한 친구다.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은지는 이수연이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다.하지만 이수연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이수연은 곧 괜찮아질 테니 돌아가겠다며 뜻을 굳혔다.소은지는 이수연의 뜻을 굽히지 못했기에 직접 데려다주기로 했다. 걸어서 가겠다는 이수연을 막아서서,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밀어붙이자 이수연은 결국 수긍했다.집으로 돌아오니, 현관 앞에 통통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소은지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자, 아주머니가 성큼 다가왔다.“저기요.”소은지는 잠깐 멈춰 섰다.평소 서로 인사를 나눌 일은 거의 없었지만, 옆집 건너 사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소은지는 낯을 가리는 편이라 여러 사람과 가까이 섞이는 건 여전히 서툴렀다. 그래도 예의를 갖춰 물었다.아주머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방금 구운 빵이에요. 우유도 조금 담았어요.”“아... 괜찮습니다.”이웃이 느닷없이 먹거리를 건네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아주머니는 바구니를 꼭 쥐여 주었다.“그냥 받으세요.”“저한테 왜 이런 걸 주시나요?”억지로라도 받게 한다면 이유가 있어야 했다.아주머니가 활짝 웃었다.“좋은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용감한 사람이에요.”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소은지는 모르고 있었다.소은지가 이수연의 소송을 맡았다는 소식이 벌써 마을 전체의 화제가 된걸.이수연의 남편을 향해 발길질을 날린 일도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왔다는걸.“들어오세요
하지만 이수연의 말대로, 남자가 수시로 들이닥쳐 진상짓을 했기에 아무도 이수연을 도와주지 못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다들 괜한 화를 부를까 두려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무감각해졌다.지난번에도 그 사람이 소은지의 집까지 부쉈으니 모두가 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보건소를 나온 뒤 소은지가 이수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 일은 금방 끝낼게요.”“네.”끝내야 했다. 모든 게 마무리되어야만, 이수연과 그 사람 사이의 악연도 함께 끝날 터였다.이수연은 그날을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소은지는 이수연을 집으로 데려왔다.“당분간 여기에서 지내세요. 제가 윗분들한테 사정을 설명할 테니까요.”이수연을 그곳으로 다시 돌려보낼 생각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수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소은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아직 식사 못 하셨죠? 제가 고기를 좀 구워 드릴게요.”이렇게 다친 몸으로, 또다시 남을 챙길 생각을 하다니. 소은지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아니에요. 오늘 저녁은 제가 할게요.”“그럼 전 먼저 돌아갈게요.”“...”소은지는 난감했다. 이수연을 데려온 건 거기에 두기 불안해서였는데, 이수연은 스스로의 고집이 있었다.“그 사람은 방금 연행됐습니다. 적어도 사흘은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사흘. 고작 사흘이다.그 뒤에 다시 풀려나면 또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이수연 씨.”“소은지 씨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도와주셨어요. 제게 첫걸음을 떼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이수연에게도 본인만의 생각이 있었다.이수연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이수연은 그런 소은지에게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소은지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소은지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고작 스물세 살인 이수연이 이렇게 철이 들었을 줄이야. 대견해서, 또 마음이 아파서, 말문이 막혔다.잡아 두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이수연의 뜻도 강경했다.“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