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한지음이 당신 밀어내려고 꼼수 부린 거 다 알았어. 하지만 여기서 끝내자. 이런 일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없어.”강이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은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저게 지금 사과를 하는 태도인 걸까?너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그 사건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끝내라 마라야? 그리고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충분해.”참 말을 쉽게 한다 싶었다.아이의 목숨과 그녀의 목숨, 이 모든 걸 다 합치면 저들을 찢어 죽여도 모자란데 가해자 주제에 여기서 끝내자니?그는 아직도 주도권을 잡고 싶은 걸까?그녀는 길게 심호흡한 뒤, 분노를 삭히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이한은 그런 유영을 바라보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사실 난….”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리며 대화가 중단되었다.조형욱의 전화였다.강이한이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그는 유영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대표님, 한지음 씨, 눈 주변 상처 감염이 너무 심한데 당사자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있습니다!”“그 여자 상태가 어떤지 조 비서가 몰라?”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며 포효했다.한지음의 상태에 대해 그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조형욱이 잠깐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강이한이 전화를 끊으려던 때, 조형욱이 다시 말했다.“대표님, 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그래서?”강이한의 시선이 유영을 향하고 있었다. 유영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스파크가 튀었다.또 한지음!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게 뭐가 있을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한지음은 유령처럼 그들 사이에 끼어 있을 것이다.유영은 원한이 사무쳤다. 지난 생에서 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마지막 죽는 순간에야 깨달았을까?강이한은 유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한결 누그러진
유영의 입가에 비웃음이 진해졌다. 그 모습은 강이한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쾅!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얼마나 세게 쳤는지 테이블이 흔들거렸다.“그래, 내가 시켰어.”“당신에게 먼저 보여주고 기자에게 흘린 거야. 알잖아?”“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걸까?그녀는 단지 반격을 했을 뿐이었다.개한테 물렸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라는 소리로 들렸다.유영은 길게 심호흡하고 가슴에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당장 여기서 나가.”“이유영, 한지음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남자는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고는 뒤돌아서 나가버렸다.유영은 분노에 온몸이 떨려왔다.그녀는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마음대로 해!”저렇게 말하면 누가 두려워할 줄 알고?쾅!사무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여기 찾아와서 그녀와 관계를 회복하자고 했던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유영은 부들부들 떨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강이한이 나가자마자 조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어떻게 된 거예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사를 바라보며 조민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조민정은 강이한이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민정도 조용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한참이 지난 뒤, 드디어 분노를 진정시킨 유영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한지음이 스스로 자해를 한 것 같아요. 진짜 실명된 거 같다고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조민정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게 무슨 말씀인지….”한지음의 실명이 진짜였다니?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유영이 조민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요?”유영을 날려버리기 위해 한지음은 스스로 자기 눈을 자해했다.
강이한은 쉽게 한지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그만큼 그에게 한지음이라는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설 탐정 한 명 알아봐 줘요.”“사설 탐정은 왜…”“외삼촌은 너무 멀리 있어요. 한지음이 왜 날 그토록 미워하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야겠어요.”한지음의 의도는 강이한을 차지하려는 것뿐이 아니었다.만약 단순히 남자를 차지하려고 했다면 강서희처럼 둘이 이혼한 뒤에는 완전히 손 털고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음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랄하게 유영을 괴롭혔다.스스로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독해져야 했을 이유가 유영은 궁금했다.외삼촌은 먼 파리에 있어서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알겠습니다.”조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정국진도 최근에는 한지음의 배후를 파는 것보다는 유영에게 회사를 물려줄 승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정국진에게는 승계 작업이 가장 우선이었다.한지음은 유영이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했기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전면에 나섰다면 어쩌면 벌써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그건 조민정도 알고 있었다.병원.강이한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조형욱과 의료진이 한지음의 두 눈을 가렸던 흰 천을 벗겨내고 있었다.상처를 확인한 강이한은 흠칫하며 표정이 굳었다.조형욱은 옆에서 한지음을 계속 설득하고 있었다.“한지음 씨,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거예요? 계속 이대로 내버려두면 평생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아요. 인간의 추악함을 너무 봐서 구역질이 나니까요.”한지음은 의료진과 조형욱의 만류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조형욱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강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갔다.“대… 대표님?”한 간호사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강이한의 싸늘한 표정에 모두가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한지음은 강이한이 왔다는 소리에 속으로
한편, 유영은 간만에 장을 봐서 소은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풍성한 요리를 하고 맥주도 땄다.한숨에 맥주 반 병을 먼저 비워버린 유영을 보고 소은지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야, 취할 정도로 마시지 마! 나만 힘들다고.”유영은 주사가 심한 편이었다.소은지는 고기 한점을 집어 유영의 입에 넣어주었다.유영은 고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미소를 지었다.소은지도 닭다리를 집어 맛보았다. 둘은 살이 잘 찌는 체질이 아니었기에 매번 만날 때마다 배 터지게 먹었다.“너 오늘 무슨 일 있었지?”소은지가 반찬을 먹으며 유영에게 말했다.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로서 유영이 뭔가 고민이 있을 때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유영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술잔을 들었다.소은지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술잔을 비운 유영이 말했다.“한지음 걔 진짜 실명했어.”만두를 먹고 있던 소은지가 화들짝 놀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청하시 언론들이 한지음을 피해자 코스프레한다고 맹비난을 퍼붓고 있는 상황이라 더 충격이었다.“그게 무슨 소리야?”사고가 민첩한 소은지마저도 유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 버젓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영상이 올라갔는데 진짜 실명이라니!그럼 한지음이 의사를 매수하고 사람들이 없을 때 멀쩡히 돌아다닌 영상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강이한은 지금 병원에 있을 거야. 아마 상황이 많이 심각한 것 같아.”“처음에는 실명 그거 거짓이라고 다 밝혀졌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소은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유영은 이미 강이한과 이혼도 했으니 한지음은 조용히 지내야 하는 게 맞았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유영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그녀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알코올이 들어가야 이 기분이 좀 내려갈 것 같았다.“대체 내가 얼마나 미웠으면 자해를 해가면서까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을까?”예전에 한지음이 의사를 매수하고 장님 행세를 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진짜 장님이 되어
그 여자들은 처음부터 목적이 강이한이었기에 유영이 강이한과 이혼하면서 더 이상 유영을 공격하지 않았다.“한지음은 언제 청하시에 온 거지?”“6개월 전이야.”6개월 전!그렇다면 그 여자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청하시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강이한과 각종 스캔들을 만들어 내고 유영을 흔들려고 작정했던 것이다.“걔 오빠가 강이한의 목숨을 구해줬었대. 그래서 오빠의 죽음 때문에 강이한을 미워하는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아.”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한지음에게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는 듯했다.소은지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걔와 강이한 사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네.”“맞아.”복잡한 정도가 아니었다.한지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강이한은 무조건 한지음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10년을 함께한 아내의 말도 믿지 않았다.오늘 밤이 지나면 또 어떤 국면이 펼쳐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언제부터 이 도시가 이렇게 숨 막히는 곳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럼 차라리 해외로 출국해. 너 더 이상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소은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여자는 유영을 망가뜨리기 위해 스스로 장님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이대로 가다가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었다.유영이 파리에 있는 외삼촌의 옆으로 돌아가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유영은 소은지를 빤히 보며 대꾸했다.“그게 그렇게 쉬워?”“하긴. 이제 너도 어엿한 스튜디오 대표인데 해외로 간다고 해도 의뢰는 마무리하고 가야겠네.”“맞아.”가능하다면 유영도 지금 당장 파리로 떠나고 싶었다.국내에 있자니 공기마저 숨 막히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신용이었다.그녀의 사업은 이제 시작이었으니 시작한 일은 마무리하고 가야 했다.소은지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 말했다.“너 이러는 거 보
이런 상황에서 성질 급한 소은지를 내보내서 그와 독대하게 할 수는 없었다.소은지와 강이한은 예전에 큰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한지음이 나타난 뒤로 무슨 일만 생기면 소은지를 찾아와서 괴롭혔다.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었다.“넌 일단 방으로 들어가.”유영은 단호한 표정으로 친구에게 말했다. 소은지가 나서주는 건 고맙지만 더 이상 그녀와 강이한의 마찰을 두고볼 수 없었다.소리를 들어보니 어디 사람이라도 칠 것 같은 기세였다.그가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럼 너는?”소은지는 화도 나고 친구가 걱정스러웠다.“내가 해결할 수 있어.”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그녀도 쌓인 화가 많았다. 그는 여기까지 찾아와서 화를 낼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는 방으로 들어갔다.쾅쾅!유영이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바깥에서는 요란하게 문을 걷어차고 있었다.문을 열고 나왔던 이웃들도 그의 기세에 밀려 다시 집으로 도망가 버렸다.유영이 문을 열었다.남자가 싸늘한 얼굴을 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시선이 마주친 찰나, 남자는 유영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이게 무슨 짓이야?”“이유영!”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강이한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에 상반되게 유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마치 이번 일은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강이한은 그녀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지음을 몰아세우는지 믿기지 않고 그만큼 분노가 치밀었다.갑자기 손목에서 통증이 전해지고 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질질 끌고 밖으로 향했다.유영은 바닥에 무릎이 꿇린 상태로 질질 끌려갔다. 살결이 바닥과 마찰하면서 쓰라린 고통이 찾아왔지만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유영의 두 눈에도 진한 분노가 서렸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야 유영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으스러지게 그녀의 팔목을 꽉 잡고 있었다.“강이한, 이거 놔!”분노한 유영이 소리쳤다.신경 써서 드라이한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강이한에 대한 사랑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유영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아무리 깊게 사랑한 사이더라도 한번 마음이 돌아서면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법이다.두 사람이 병원에 나타나자 무수히 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대는 남자를 보고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유영은 핸드폰을 꺼내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오늘밤 기자들 동향 잘 살피고 있어요. 그 어떤 소문도 흘러나가서는 안 돼요.”“누가 또 이상한 기사를 올리면 내일 당장 그 회사를 사냥할 거예요. 입을 잘못 놀리는 인간들은 모두 청하시에서 내쫓으세요.”유영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차가웠다.강이한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 눈빛은 차가웠다.저런 대담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만큼 힘이 생긴 걸까?작은 체구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차가운 포스가 풍기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왕좌에 오른 여왕처럼 위풍당당했다. 키는 그가 더 컸지만 왠지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알겠습니다.”수화기 너머로 조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실 퇴근하기 전에 모든 준비는 이미 끝났다.한지음이 자해까지 해가며 유영을 가해자로 몰아가려 했기에 기자들의 여론공세가 곧 시작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그리고 유영은 이런 치졸한 수법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참 여러모로 대단해.”마치 강이한이 아랫사람을 굴릴 때 자주 쓰던 말투와 매우 흡사했다. 과거의 온순하고 이해심 많던 세강의 안주인은 지독하게 차갑고 거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유영이 냉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당신들 세강은 요즘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더라?”세강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동교 사업을 그녀가 모두 앗아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때부터 세강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둬놓고 키우던 새장 속 새가 이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내가 왜?”유영이 싸늘하게 물었다.이 여자는 그녀가 무릎을 꿇을 가치가 없는 여자였다.그녀는 가슴에 사무치는 실망감을 안고 남자를 바라봤다.예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한지음도 여자의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하지만 속으로는 유영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꿇고 있었다.넌 뭐가 그렇게 잘났지?너도 기댈 곳 하나 없는 고아잖아!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지?유영과 강이한은 팽팽하게 대치했다.병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저기압이 되었다.“이한 오빠.”한지음이 강이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런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더욱 동정심을 유발하게 만들었다.유영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강이한은 여자가 옷깃을 단단히 잡고 있는데도 뿌리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유영과 결혼한 뒤로 강이한은 다른 여자들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그런 의미에서 한지음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유영은 입가에 진한 비웃음을 머금었다.“꿇으라고 했어!”강이한은 피식거리고 있는 유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다시 소리쳤다.“그만해요.”한지음은 더 힘을 주어 강이한을 잡아당겼다.하지만 강이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부러 강이한의 몸을 더듬으며 유영을 도발하고 있었다.‘저건 고의야!’한지음은 유영이 강이한 앞에서 이성을 잃고 추악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랐다.하지만 유영은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유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 모든 동작들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그 표정이 강이한의 분노를 자극했다.“너 감방 가고 싶어?”남자가 끝내 숨겨둔 패를 드러냈다.그의 손에는 나서원이 가져다 준 증거가 있었다.예전에는 그녀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롭고 긴장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지금은 당장 유영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유영이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한지음에게 사과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유영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그는 눈앞에 있는 전처가 얼마나 자존심 강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