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질 만도 한데, 정국진의 호화로운 씀씀이는 여전히 이유영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정국진의 차량이 출발한 뒤 이어진 긴 차량 행렬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머리를 저었다. 그때, 마치 뒤처진 것처럼 보이는 삐까번쩍한 마세라티 한 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유영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좀 평범한 차량으로 바꿔주면 안 돼요?”전과 비교해 더욱 화려해진 차량 앞에 선 이유영은 감탄했다. 강이한의 아내로 있을 때도 그녀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정국진과의 시간을 보내며 그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따라가는 것은 이유영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제가 지금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빠듯할 것 같네요. 내일 처리해 드려도 될까요?”“아….”“오늘 하루만, 네?”“그럼, 딱 하루만이에요!”이유영은 통화를 마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약간 아픈 듯한 느낌에,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이마를 짚었다. 돌아간 그녀는 신속하게 출근 준비를 마쳤지만,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강이한과 마주칠 일은 없겠지?’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강이한이 진영숙의 병문안 때문에 회사에 늦게 도착한 것이다. 결국 옆 건물, 같은 지하 주차장을 공유하고 있던 둘은 마주치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는 이유영의 모습을 발견한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동시에, 이유영도 강이한을 눈에 담았다. 피하고 싶었던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마치 운명의 장난 같았다."또 보네."이유영은 최대한 평온한 척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이혼한 강이한보다 더 화려한 차를 몰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이러니했다. “또 차를 바꿨나 보네?”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말을 건네며 속에서 치솟는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아니, 일이 있어서 잠깐 타고 온 거야." 이유영이 대답했다.'잠깐이라고? 그럼 이런
이유영은 최근에 강이한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를 빼앗은 대가로 치열한 업계 경쟁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청하시의 상류사회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그녀의 회사는 동교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주요 계약에서 손을 떼야 했다. 이유영의 사무실 전화는 그 소식을 전하는 파트너들의 연락으로 오전 내내 멈추지 않았다. “네, 괜찮아요. 이해합니다.”그녀는 모든 전화에 침착하게 대응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되게 하면 되니까!그녀는 통화를 마친 뒤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어시스턴트 한 명이 사무실 문을 노크하며 조심스레 점심시간을 알렸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정국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금 바로 크리스탈 가든으로 와!”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은 최근 10년 동안 부유층 여성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보석 브랜드였다. 한때 이유영의 시어머니였던 진영숙이 매년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구매할 정도였으니까.“설마 삼촌, 전에 말했던 로열 글로벌 그룹 지사가 크리스탈 가든이었어요?”“그래, 그러니까 얼른 와!”“알겠어요.”궁금한 건 많았지만, 이유영은 굳이 전화로 더 질문하지 않았다. 정국진의 목소리만으로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통화를 마친 이유영은 사설 탐정한테 받은 자료를 포함해 책상 위 모든 서류들을 깔끔히 정리한 뒤, 조민정에게 연락했다.“사설 탐정 잔금처리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조민정과 통화를 마친 후, 이유영은 직접 차를 몰고 빠르게 크리스탈 가든으로 향했다.이유영이 업무에 몰두하는 동안, 강이한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비서 조형욱이 신속하게 지시를 이행함으로써, 이유영의 사업 파트너 대부분이 그녀를 외면하게 되었다.강이한은 조형욱에게 고의로 눈에 띄게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유영이 이 모든 상황의 배후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그 사람이 기증해 주겠다고 합니다." 조형욱의 말에 강이한의 얼굴에 서서히 안도의 빛이 스쳐 갔다. 그 소식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한지음의 눈과 다리 문제가 그와 이유영의 이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만큼, 해결책을 하루라도 빨리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빨리 청하시로 데려와." 강이한의 말했다.유영이 집을 나간 후 변해버린 그녀와의 관계, 그리고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성격까지,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알겠습니다." 조형욱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바로 기증자와의 연결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한지음의 주치의인 배준석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증자만 있다면 한지음이 회복되는 것은 거의 확실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조율하기 위해 조형욱이 자리를 비우자, 강이한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때 강서희한테서 연락이 왔다.“여보세요.”“오빠, 엄마 깨어났어!”한편, 진영숙의 병실에는 강서희뿐만 아니라 유경원도 함께 있었다.강서희는 병실 한쪽에 앉아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유경원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던 탓에, 이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이때 진영숙이 옆에 앉아 있던 유경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역시 딸이랑 며느리가 최고야. 아들내미 있어봤자 쓸모없어.”진영숙이 애정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유경원이 참 마음에 들었다.“어머니.”유경원도 질세라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봤다.“그런데 너의 아빠는 회의 가셨니?”“네, 어머니.”유경원이 예의 바르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 자라서인지 작은 행동 하나에도 기품이 넘쳤다. 진영숙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되짚으며 속으로 계획을 세웠다.“이제 너의 둘 사이,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니? 부모님한께 좀 뵙자고 전해
이유영은 크리스탈 가든이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은 겉모습부터 예술적인 분위기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크리스탈 가든은 보석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곳이 로얄 글로벌 그룹 소유였다니, 그제야 이유영은 정국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로비로 들어가자, 굉장히 정중한 분위기를 내뿜는 한 여직원이 그녀를 맞이했다."이유영 님, 맞으시죠?""네, 맞아요.""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이유영은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이곳은 강이한의 회사와 비교해 봤을 때 굉장히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로비 직원조차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굉장히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전용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여직원이 말했다."이유영 님, 위에 기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알겠어요."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이때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밖엔 정장을 입은 또 다른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이유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회의실 문 앞까지 와 있었다.'왜 날 회의실로 안내했지? 난 삼촌 보러 온 건데.'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버렸다."들어가시면 됩니다."직원이 회의실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유영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심에 앉아 있던 정국진을 바라봤다.그러나 정국진은 엄숙한 표정을 유지할 뿐 답할 기색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평소 일할 때의 모습이었다.“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이유영 대표이사입니다.”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커다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이유영은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대표이사라니!“축하드려요, 대표님!”옆에 있던 직원이 조용히 이 상황을 상기시켰다. 이유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국진을 바라봤다. 정말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어떻게 말 한마디도 없이! 아
강이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별일 없으면, 저 이만 회사로 돌아가 볼게요.”“거기 서!”진영숙이 노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강이한을 불러 세웠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니, 그녀는 누구보다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비뚤어진 태도를 보일 땐 항상 이유영과 연관되어 있었다.‘역시 아직 이유영을 잊지 못한 거야!’“경원이한테 날짜 잡으라고 말했어. 이제 슬슬 너희 둘 관계도 정리해야 하지 않겠니?”“….”“경원의 아빠가 이 청하시에서 얼마나 입김이 센지 너도 잘 알잖아! 다시 내년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내려면 든든한 뒷백이 필요할 거야!”말을 이어갈수록 진영숙의 목소리는 격양되었다.하지만 강이한은 전혀 미동이 없어 보였다.“하! 여전하시네요, 어머니. 그딴 뒷백 필요 없어요!”강이한은 그 말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뒤에서 진영숙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그래, 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 비겁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확실한 건 없어! 나랑 너의 할머니가 강씨 가문을 어떻게 지켜왔는데!”“….”강이한은 진영숙과 그의 할머니가 어떤 방식으로 강씨 가문을 지켜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강이한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했다. 진영숙도 그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경원이가 얼마나 널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널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는 것보단, 그래도 너만 바라보는 사람이 낫지 않겠니?”사랑하지 않는 여자, 이 말 한마디에 강이한은 큰 충격에 빠졌다.‘이유영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진영숙은 더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강이한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아까보다 몇 배 더 어두워진 얼굴로 병실 밖을 나가버렸다.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온 강이한은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탔다.그는 거의 주머니를 뒤지며 담배를 꺼냈다.이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지금 통화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강이한이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안 믿어지지? 나도 처음엔 헛소문인 줄 알았어. 형도, 크리스탈 가든 알지?”강이한도 당연히 크리스탈 가든을 알고 있었다.청하시 상류사회에서 이 브랜드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매년 새 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모두 예약이 찰 정도로 유명했다. 게다가 크리스탈 가든 모든 디자이너가 세계적으로 유명했는데, 만만치 않은 뒷배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또한 강이한도 직접 이유영에게 이 브랜드 목걸이를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뭔가 잘못 보도된 거 아니야?”“어허, 사람을 뭐로 보고, 사진까지 나왔다니까! 지금 보내줄게!”배준석이 확신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이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이유영이 대표가 되었다고 하니 강이한은 믿기 힘들었다. 이유영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해봤자 최근 청하시에 진행된 두 프로젝트뿐이었다. 겨우 그것만으로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 자리에 오른다고? 박연준과 서재욱이 아무리 힘을 써준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이한은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통화를 종료하고 카톡으로 들어갔다. 채팅창을 열어보니 이유영이 한 회의장에서 사람들한테 축하받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크리스탈 가든, 새 대표 임명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보였다.그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번뜩였다.‘하, 참 대단하군!’그런데 이때 또다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서원한테서 온 전화였다.“여보세요.”“나야, 알아냈어.”전화 너머 나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빨리 말해.”강이한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크리스탈 가든 대표 자리가 강이한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영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처음 이유영이 집을 나갈 때만 해도 그는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영이 해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독립도 어려울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잠시 그와 떨어져 있는 사이 이유영은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올라가 버렸다. 그녀는
오늘 회의는 이유영의 순발력으로 무사히 마무리되었지만, 이유영은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정국진을 노려보았다.“삼촌!”정말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말 한마디도 없이 자신을 이 상황에 던져놓은 정국진이 원망스러웠다. 살짝 언질이라도 줬더라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사람들 앞에 서서 얼마나 식은땀이 났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미안해, 나도 방법이 없었어.”“아니, 여기 원래 대표는 어디 가고요?”크리스탈 가든 같이 큰 브랜드에 대표가 없었을 리는 없었다. 정국진이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거리며 입을 열었다.“혼자 뒷주머니만 열심히 채우길래, 해고했어.”“….”크리스탈 가든같이 큰 브랜드의 대표를 해고했다는 말을 저토록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정국진밖에 없을 것이다. ‘“전 못해요!”이유영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거의 사고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나온 거였다. 이토록 큰 지점을 무슨 수로 그녀가 맡겠는가? 하지만 정국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지현우를 보내줄게.”지현우는 조민정과 맞먹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비서였다. 이유영은 조민정이 얼마나 대단한 업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겪어본 사람이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는 그 능력,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조민정과 맞먹을 정도로 능력자라니 믿음은 갖지만, 이유영은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저 요즘 정말 바빠요.”이유영이 투덜거리듯 말했다.비록 강이한의 방해로 많은 프로젝트가 어그러졌지만, 이번 동교 프로젝트 등 성공 사례들이 있어 새로운 기업들이 그녀에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사정이었고, 정국진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코웃음치며 말했다.“겨우 그거 가지고 되겠니? 조민정 연봉도 안 나오겠다!”“네?”“조민정이 회사 경력이 짧아서 그렇지, 얼마나 뛰어난지 너도 알 거 아니야?”
이유영은 속으로 놀랐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지? 태양이 서쪽에서 떴나? 정국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강이한이 낯설었다. 어쩌면 이 남자, 좀 변한 걸까? 이유영은 생각했다.“여긴 무슨 일이야?”이유영이 침착하게 강이한에게 물었다.다행히 리셉션 직원들 모두 교육을 잘 받았는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대놓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가끔 힐끔거리기는 했던지라, 살짝 불편함을 느낀 이유영이 강이한을 향해 고갯짓했다. 웬일인지 강이한은 순순히 그녀의 의사에 따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시작은 이유영이었지만,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강이한이 앞장서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이유영, 하지만 방향을 바꾸긴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었다.“무슨 일인데? 나도 차 가져왔으니까 일단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이유영!”이름 단 한마디였으나, 그 속에 담긴 폭풍우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강이한의 눈은 어느새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차 타!”그 말과 함께 강이한은 거칠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유영은 잠시 주변을 살핀 뒤 함께 차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아!”이유영의 비명이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너 미쳤어? 멈춰! 멈추라고!”그녀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이한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그는 마치 레이싱 선수처럼 아주 난폭하게 이리저리 차들을 피하며 화풀이하듯 운전했다. “아악!”전방에 큰 트럭과 부딪히기 일보직전, 강이한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감쌌다. 이유영은 긴장과 두려움에 심장이 벌렁벌렁 숨쉬기 힘들 정도로 빨리 뛰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안전벨트만 아니었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친놈처럼 왜 이러지? 설마 나 죽이려고? 내가 뭐 어쩄다고!’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