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이 병실을 나가자 강서희는 피곤한 기색의 진영숙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엄마도 피곤하면 돌아가지 그래?”진영숙은 아직 자고 있는 한지음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아니야. 여기 있을래. 마취가 깨는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울 거야.”“내가 잘 돌볼 수 있어. 엄마 피곤할까 봐 그래.”“지음이 깨는 것만 보고!”진영숙의 단호한 태도에 강서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이렇게나 한지음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맹장수술을 할 때 간병인만 보내고 병실에 한번 찾아온 적 없던 모습이 떠올랐다.진영숙은 항상 강서희를 친딸처럼 아낀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한지음을 대하는 걸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며칠 사이 강이한은 유영을 찾지 않았다.그는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고 유영도 마찬가지였다.신제품 출시 시즌이 다가오기에 유영은 공모전을 내고 당첨자의 작품을 신제품으로 출시하기로 했다.유영도 보석 디자인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크리스탈 가든의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다. 유행 요소도 고민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살리는 게 관건이었다.그 중에서도 한정판 제품 디자인이 가장 골머리가 아팠다.유영은 인수인계 작업만 해도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정국진은 그녀에게 회사를 맡긴 뒤로 운영에 손도 대지 않았다.대표로 부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전임 대표는 일부 디자이너의 뇌물을 받고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묻어버린 사실이 들통나면서 해임되었다고 했다.“대표님, 이거 좀 보세요.”디자인 팀장이 선별한 원고를 유영에게 건넸다.전임 대표에게 뇌물을 바친 디자이너의 작품도 있었는데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유영이 물었다.“이거 어떻게 된 거죠?”“회장님께서는 다시는 이 디자이너의 작품을 채용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그런데 그 사람 작품이 왜 내 앞에 나타난 거냐고요.”유영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디자인팀 팀장 장정윤은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세강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세강이 또 왜요?”“지금 우리 고객들을 상대로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강이한이 주도한 걸까요?”“아니요. 진영숙 여사랑 그 집 둘째 어르신입니다.”조민정이 서늘한 어투로 답했다.그녀는 심기만 뒤틀리면 권력으로 갑질하는 인간들을 가장 혐오했다.진영숙은 세강 오너 일가의 권력을 행사하여 유영을 청하시에서 몰아내려는 수작이었다.하지만 절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그럼 회장님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고객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다져야죠.”유영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권력놀음? 그건 유영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알겠습니다.”조민정은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유영이 이렇게 하라고 한 이상 그녀도 더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눈을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떠오른 건 강이한과 함께했던 추억들이었다.두 사람이 여기까지 올 줄을 그때는 누가 알았을까?진영숙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공격해 올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려서 눈을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이었다.유영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진 여사님이 어쩐 일이신가요?”“이유영, 네가 빼앗아간 프로젝트를 원상복귀 해놓으면 나도 더 이상 널 공격하지 않을게.”“제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제가 무슨 능력으로 이미 체결한 계약을 원상복귀시켜요?”“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널 이 도시에서 몰아내는 수밖에 없어!”수화기 너머로 진영수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냉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제가 그 사업들을 다 세강에 돌려줄 수는 없지만 청하시에 남아 있을 능력은 충분하네요.”과거에는 매사에 진영숙의 눈치를 보고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했다면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그래?”“그럼요. 두고 보면 알겠죠.”“하, 건방진 것!”“지금의 저는 건방져도 괜찮은 위치에 있거든요.”유영은 한마디도
과거에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이유영 덕분에 어쩌다가 의견 일치를 보았다.왕숙이 다가와서 공손히 물었다.“사모님, 식사 준비 끝났는데 바로 식사하러 가실까요?”“그래.”진영숙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둘째 어르신에게 말했다.“시간 괜찮으시면 식사하고 가세요.”“됐어!”“에이, 그러지 말고 식사라도 하고 가요, 아주버님.”노부인이 위층에서 내려오며 강현석을 만류했다.조금 전 계단 입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적절한 시기에 내려온 것이었다.한때는 적이었지만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시 뭉치는 일은 재벌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노부인은 진영숙을 지나치며 잘했다는 눈빛을 보냈다.노인은 며느리 진영숙의 처사가 항상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모이는 것도 오랜만인데 식사하고 가요.”“그래요.”평소였다면 노부인이 외척에게 이렇게 신경 써줄 이유는 없었다. 이런 일은 진영숙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었다.테이블에 마주앉은 노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느리를 잘못 들여서 요즘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네요.”“이제 며느리는 아니죠.”강현석이 말했다.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그렇죠. 이한이는 아직 어리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요.”진영숙이 바라는 바였다.사실 유영이 세강에 시집온 뒤로 그녀는 어떻게 하면 며느리를 내쫓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진영숙은 아들이 조금 더 신분에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 재혼하기를 바랐다.그리고 3년을 싸운 끝에 드디어 유영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최근 유영이 밖에서 온갖 일들을 벌이지 않았으면 당장 왕래를 끊고 아들 약혼식이나 준비했을 것이다.진영숙은 유영을 곧 청하시에서 몰아낼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이 나이에 어린애한테 화풀이해서 뭐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유영 걔는 정말 거슬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이한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는지!”유영이 했던 일을 생각하면 노부인은 치가 떨렸다.노부인도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로라 스튜디오와 계약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던 회사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습니다.”“뭐라?”진영숙은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태도를 바꾸다니! 왜?“지금 거기 관계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제 전화를 피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아요.”진영숙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면서 전화를 피하다니!이번에 그녀는 강이한 쪽 사람을 쓰지 않고 자신과 강현석의 인맥을 빌려 유영과 계약한 회사들에 압력을 가했다.진영숙은 이제 와서 유영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강성건설과 서원그룹을 도와 대형 프로젝트 입찰에 성공하면서 유영의 오로라 스튜디오는 한순간에 명성을 떨쳤다.그래서 유영과의 협력을 위하는 회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이쪽에서 계속 압력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로라 스튜디오는 지금쯤 대박이 났을 것이다.계약을 중지하기로 했던 회사들이 하나 같이 등을 돌렸다는 소식에 진영숙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내가 유영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걸까?진영숙의 두 눈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수화기 너머로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 씨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영 씨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에요.”“부모도 없는 고아를 누가 도와?”유영의 신분을 떠올리자 진영숙은 짜증부터 치밀었다.3년을 세강의 며느리로 살았는데 자신보다 유영의 배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다.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기는 했다.“또 남자한테 가서 웃음 팔며 사정이라도 했나 보지? 그거 말고 걔를 도와줄 사람이 또 누가 있어?”다만 그 남자들이 하나 같이 유영을 도와주는 상황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로열 글로벌의 정 회장과 이유영 씨 관계가 단순한 애인 관계 같지는 않아서요!”진영숙의 대리인이 말했다.가정이 있는 재벌 회장님이 애인을 밖에 따로 두는 경우는 많았다.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진영숙이 유영과 고객사 사이의 유대관계를 끊으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아무도 오로라 스튜디오와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다.최근에 유영은 크리스탈 가든의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오로라 스튜디오는 완전히 조민정에게 맡겼다.운영을 맡은 조민정은 디자인팀에 인력을 세 명이나 더 추가했다.유영이 맡았던 강성건설 의뢰는 초안이 나온 뒤로 세부적인 수정은 디자인팀에 넘어갔다.나중에 전반적인 디자인도면이 완성되면 유영이 한번 확인하고 제출하기로 했다.스튜디오는 불과 몇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하면서 그녀의 능력치도 외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물론 유영이 이미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가 되었다는 걸 모르는 진영숙은 어떻게 하면 오로라 스튜디오를 청하시에서 몰아낼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그 시각, 강이한은 사무실에 앉아 조형욱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큰 사모님 쪽에서 요즘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지셨습니다.”“어머니가?”“둘째 어르신과 손을 잡고 유영 씨를 청하시에서 몰아낼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아요.”조형욱은 더 이상 유영을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그녀에 관한 일을 이야기할 때 어조도 사무적인 어조로 바뀌었다.강이한은 창가에 서서 오가는 차량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이유영을 청하에서 몰아낸다고?”“아마 유영 씨 때문에 회사가 큰 프로젝트를 두 개나 놓치면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엄마의 성격에 대해 강이한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유영이 얌전한 세강의 며느리로 있을 때도 진영숙은 유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며 이혼한 뒤로 유영에 대한 진영숙의 불만과 증오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조형욱은 강이한이 이제 이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을 줄 알고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그런데 뒤돌아선 강이한은 갑자기 차키를 챙기더니 밖으로 향했다.조형욱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시려고요?”“따라올 필요 없어.”돌아오는 건 싸늘한
“그러면 일단 둘이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알아볼게요.”진영숙이 말했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럴 필요 없어요!”강이한이 싸늘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출현에 깜짝 놀랐다. 그는 매번 이상할 정도로 이유영을 언급할 때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혼 후에도 강씨 집안 사람들이 이유영의 얘기를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듯 보였다.“이한아, 난 그저!”진영숙이 강이한을 향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강이한은 현관 옆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 차 키를 던져 넣은 다음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그는 소파에 앉아 짜증스레 다리를 꼰 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나간 뒤, 자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진영숙과 노부인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지금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둘은 말없이 강이한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담배가 거의 절반 타들어 갈 때쯤,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정국진, 이유영의 외삼촌이에요.”“….”노부인과 진영숙의 얼굴이 동시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진영숙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그게 무슨 말이야?”“들으신 대로예요.”강이한이 진영숙과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말 그대로 정국진은 이유영의 외삼촌, 즉 이유영 어머니의 동생이란 뜻이에요!”그제야 진영숙과 노부인은 말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외삼촌이라고? 친척? 이럴 수가!’“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진영숙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강이한과 이유영은 연애를 7년, 결혼 생활을 3년 했다. 진영숙은 둘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뒷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이유영은 친척 하나 없는 것은 물론, 가진 재산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토록 둘의 관계를 반대했지만
충격적인 소식을 남긴 채, 강이한은 자리를 떠났다.한참 후, 그제야 진영숙과 노부인은 정신을 차렸다.“지금 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라고 했니?”“그러니까, 이게 무슨 일이에요.”“그러니까 그 로열 글로벌 그룹의 정국진?”“그렇다니까요.”진영숙이 머리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이유영이, 이유영이….”노부인과 진영숙 모두 할말을 잃었다.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없던 가족이 튀어나온 건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이유영의 유일한 가족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정국진이라니! 게다가 둘은 관계가 아주 끈끈해 보였다. 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몰랐다.이때 강서희가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곧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진영숙에게 다가갔다.“엄마, 무슨 일이야?”“서희야.”“어?”“….”진영숙은 어떻게 이 사실을 자기 입으로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천애 고아라고 생각했던 이유영이 알고 보니 이 상류사회의 최상위급 존재였다니!“무슨 일이야?”진영숙이 버벅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강서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진영숙은 결국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진영숙 자신도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실을 어떻게 강서희에게 말하겠는가? 누구보다도 이유영에게 적대감을 가졌던 그녀였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지만, 이유영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예전처럼 대할 수도 또 없었다. 진영숙은 아직 어떤 태도로 이 상황을 맞이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할머니, 엄마 왜 이래?”진영숙이 알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강서희는 타깃을 바꿔 노부인에게 물었다.하지만 노부인 역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그냥 묻지 마.”노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부인 역시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의 태도를 본 강서희는 분명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이때 진영숙이 생각난 듯 강서희에게 물었다.“지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서희는 깜짝 놀랐다.강서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왕숙을 바라봤다가, 이내 함께한 세월을 떠올리며 표정을 갈무리했다.“아줌마, 앞으로 뒤에서 갑자기 말 걸지 마. 알겠어?”표정은 감췄지만, 목소리까진 숨기진 못한 강서희였다. 하지만 왕숙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도 방금 돌아오셨어요.”“오빠가 또 무슨 말 했어?”강이한이 왔다는 얘기를 들은 강서희는 진영숙과 노부인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짐작했다.‘설마 또 이유영 때문에?’강이한이 이혼했음에도 여전히 이유영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강서희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언가를 하려면 우선 이유영부터 청하시에서 내쫓아야겠다고 강서희는 생각했다. 그래야만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유영과 정국진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나누셨어요.”왕숙은 이유영 편이었으나, 진영숙의 적대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녀를 이름으로 호칭했다. 굳이 여기서 다른 호칭으로 불렀다가 강씨 집안에서의 삶이 피곤해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왕숙이 이유영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 모습에 강서희는 매우 만족했다.“그래서 무슨 관계래?”이유영과 정국진의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강서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둘은 그저 불륜관계,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강서희는 안 그래도 싫어하던 이유영이 늙은이의 외도 대상이 되었다니, 아주 꼬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왕숙은 강이한 등이 거실에서 나눈 얘기를 모두 들은 상태였다. 이유영이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을 줄은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녀는 들은 대로 모든 사실을 강서희에게 전해주었다.얘기를 듣던 강서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뭐라고?”강서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떠진 눈동자로 왕숙을 바라봤다. 왕숙은 그녀의 표정에 더욱 신나, 기름에 물을 붓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저도 전혀 몰랐다니까요. 어떻게 그동안 말 한마디도 없으셨지?”“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