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은 계속 손을 흔들며 한지음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의 실루엣조차 보지 못했다. 한지음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순식간에 병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유 선생!”강이한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안 그래도 얼어붙어 있던 병실 분위기가 더 싸늘해졌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주치의가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다가왔다.“한지음 씨, 지금 뭐가 보이시나요?”“저, 저 어떡해요….”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수술을 받았는데 어째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이 안 가는 것일까? 한지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이한 오빠! 이한 오빠!”한지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이때 강이한이 그녀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나 여기 있어.”따뜻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한지음은 지금 그것만으로 조금 안정이 되었다.“오빠, 나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요!”한지음이 절박함과 고통으로 얼룩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안 보일까?“유 선생.”강이한의 시선이 의사에게로 향했다. 그의 살벌한 눈빛을 본 의사는 겁먹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게….”의사는 두려움에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하세요!”강이한이 물었다. 분명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전달받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아악!”한지음이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몇 번이고 눈을 감고 떴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문제없을 거라고 했는데! 어째서!“배 선생님이 수술하지 않았나요? 왜 유 선생님이?”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지금 현실이 그녀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붕대는 풀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암흑 속에서 살고 있었다.한편, 모든 관심이 한지음에게 쏠려 있
“저 이제 다시는 앞을 볼 수 없게 된 건가요?”한지음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영숙의 시선이 강이한에게로 갔다. 강이한은 재촉하듯 강력한 눈빛으로 주치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 주치의는 큰 돌덩어리를 어깨에 올린 듯, 강한 부담감을 느꼈다. 주치의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병실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지음아.”주치의의 답을 들은 진영숙은 한지음을 위로하려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부정하고 싶은 현실이겠지만, 한지음은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말씀 좀 해주세요! 저 이제 정말 가망이 없나요?”의사가 말이 아닌 고갯짓으로 답한 탓에 답을 듣지 못한 한지음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시 물었다.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인생이 되어버리다니, 그럴 수는 없어!“예…”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주치의가 답했다.절망이 고통스럽게 한지음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누가 이런 결과를 예상이나 했겠는가? 모두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다시는 볼 수 없다니!”그녀는 울고 싶었지만, 고장이 나버린 눈은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병실엔 침울한 기운이 가득 돌았다. “얘야,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진영숙이 달래듯 한지음의 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미래에 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한지음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이, 이유영은 더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오전 내내 회의에 치여 결국 정국진이 떠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물론 이유영도 정국진이 이런 것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국진은 이유영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쓰는 것보단 커리어에 집중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우우웅,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 화면에 박연준의 이름이 떴다. 이유영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만날 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전에 정국진이 한 말 때문에 이유영은
이유영은 지금 청하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성 커리어우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정국진의 영향까지, 그 누구도 함부로 그녀에 대해 쉬쉬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그녀가 박연준과 함께 식사를 해도 허튼 소문이 퍼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차 안, 박연준은 정면을 보며 운전을 하고 있었고 이유영은 어색하니 손을 꼼지락대고 있었다.“회장님은 가셨어요?”이때 박연준이 물었다.“네, 가셨어요. 원래 이렇게 오래 있을 일정이 아니었는데, 괜히 저 때문에 더 머무신 거죠.”그녀는 얼마전까지 매섭게 자신을 공격해오던 강씨 집안을 떠올렸다. 비록 그 일은 잘 마무리됐지만, 정국진은 혹시라도 그가 없는 사이에 또 진영숙이 이유영을 괴롭힐까봐 걱정했었다. 진영숙의 성격대로라면 이대로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멀쩡히 잘 사는 걸 두고 볼 리 없을 테니까.“하긴 걱정하실 만하죠.”“제가 왜요?”“딱 봐도 뭔가 연약해 보이잖아요.”“….”이유영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이미지에 가장 큰 몫을 하는 건 역시나 그녀의 신장일 것이다. 작은 키는 사람을 하여금 약자로 보이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강씨 집안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만만하게 봤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작은 체구였다. 입을 꾹 닫아버린 이유영의 모습을 본 박연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이 작은 체구로 어떻게 강씨 집안이랑 맞선 걸까? 무섭지도 않나?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서재욱이 보이지 않았다.“서 대표님 오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이유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기로 했는데, 약속이 잡혔다고 갑자기 못 온다고 연락왔네요.”박연준이 한쪽으로 핸드폰을 살펴보더니 말했다.“그렇군요.”이유영은 이때부터 갑작스레 어색해졌다. 전에 둘이 만났을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강이한을 자극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유영은 다른 생각 따위 할 여유가 없어 자
이때 박연준이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저도 알고 있어요. 이유영 씨, 지금 연애할 여유 없으시죠? 얼마 전에 강씨 집안이랑 그런 일도 있었고.”“….”그 말을 들은 이유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잘라내고 싶어도, 강이한과 그녀는 1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맞아요. 전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아요.”이유영은 섣불리 연애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큰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그 두려움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얻지 못했다.이유영의 얼굴을 본 박연준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그녀가 느끼고 있을 감정이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침묵하던 이유영이 말을 꺼냈다.“대표님도 뜨거운 사랑 해본 적 있어요?”“네?”“아, 아니에요!”이유영은 감성에 젖어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민망했다. 그녀는 서둘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와인 잔을 들었다.보통 사람처럼, 이유영은 회귀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회귀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국진, 박연준, 서재욱 등, 전엔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난 후로 그녀의 삶은 걷잡을 수 없게 변했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발생하고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이유영 씨.”과거를 떠올리며 시시각각 변하는 이유영의 상태를 눈치챈 박연준이 걱정스레 이름을 불렀다. 이유영은 애써 괜찮은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박연준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어요?”박연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맞닿았다. 그는 위로하듯 달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겪은 일은 그 누가 들어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녀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아무 일 없었어요. 다 잊어버렸는걸요.”“잊어
“그러게요, 삼촌을 찾아서 참 다행이었겠네요.”만약 그때 정국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강이한과 이혼은커녕 어떤 보복을 당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저도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이 말은 진심이었다. 무서울 것이 없는 이유영이었지만, 정국진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없었을 테니까.잠시 후,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이유영의 회사로 향했다. “6시에 다시 데리러 올게요.”박연준이 차에서 내리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박연준의 차가 떠나자, 이유영은 회사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강이한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의 눈빛에서 싸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언제부터 있었지?’그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누구라도 단번에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매력적이었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많은 여성이 그를 힐끔거렸다.“여긴 어쩐 일이야?”이유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박연준과는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어?”정국진과 그녀의 사이를 오해했던 사건 뒤로 강이한은 섣불리 추측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유영이 외간 남자와 만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유영이 박연준의 차에서 내리는 걸 본 순간, 그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강이한과 달리 이유영은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무심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봤다.“어제 삼촌이랑 얘기 좀 나눴거든.”“무슨 얘기?”이유영이 정국진을 언급하며 대답을 미루자 강이한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박 대표님 가정사는 좀 복잡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남자니까 잘해보라고 하시더라고. 박 대표님이라면 절대로 날 실망하게 할 일이 없을 거라면서.”“그게 무슨 뜻이야?”강이한이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그의 태도에 이유영이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웃음을 본 강이한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모른 척하기는. 너처럼 밖에서 딴 여자랑 놀아날 일은 없을 거란 뜻이잖아!”그 말을 들은 강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너 때문에 지음은 완전히 빛을 잃어버렸어.”이유영이 강이한을 지나치려던 순간 그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이유영은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지금 한지음이 맹인이 됐다는 거야?”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이유영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 미소를 본 강이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남이 평생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지?“너…!”강이한은 분노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수술하면 되지 않아?”“이유영!”“왜? 설마 내 각막을 원해?”이유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지음이 진짜로 맹인이 되었다니, 인과응보 아닌가? 묘한 희열이 속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올랐다. 반면, 점점 환해지는 이유영의 얼굴을 본 강이한은 분노에 휩싸였다.“네가 감히 비웃어?”강이한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나 이유영은 전혀 흔들림이 없이 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왜? 비웃으면 안 돼? 인과응보지! 참, 꼴 좋다.”지난 생에 눈이 멀었던 사람은 이유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멀게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한지음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을 해치는 일 따위 서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저번 생엔 이유영은 죽을 때까지 어둠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만 했었다.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치고 올라왔다. 이유영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이 지속될수록 강이한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하지만 이유영은 오히려 그것이 촉진제가 되었는지, 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어젖혔다. “이유영!”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이한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이유영을 죽여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악독할 수 있는가?강이한은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목적도 잊은 채, 분노했다.“걱정 마, 좋은 약 많이 보내줄게. 그쪽이 빨리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이유영은 한지음이
“방금 강이한이 자기 입으로 그랬어. 한지음, 수술 실패한 것 같아!”이유영은 아주 통쾌했다.“실패했다고?”“응!”“벌받았네!”소은지는 이미 이유영한테서 그동안 한지음이 저질러온 악행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한지음은 이유영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스스로 눈에 상처를 입힐 정도로 아주 악독한 여자였다. 그랬는데 진짜로 눈이 멀어버렸다니, 인과응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그지! 죗값을 받은 거지!”이유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강이한을 너무 믿었던 거지.”“맞아. 웃겨 정말!”한때 이유영이 그랬던 것처럼, 한지음은 강이한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딱 그 꼴이었다.“믿으려면 의사를 믿어야지. 바보같이 강이한을 믿어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이유영이 말했다.“그래, 이제 만족해?”소은지가 물었다.“응, 아주 좋아! 정말 오랜만에 홀가분하다!"이유영은 한지음을 동정하기는커녕 아주 기뻐했다. 한지음이 처음부터 좋게 나왔다면 둘은 좋은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엄연히 둘은 아빠가 같은 자매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망친 건 결국 한지음이었다. 이제 그녀는 이유영이 느꼈을 지옥을 똑같이 경험해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더니 죗값을 치르는 날이 오는구나!”소은지가 말했다. 그녀는 과거에 이유영이 한지음 때문에 당했던 수모를 떠올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알겠어, 너도 바쁘고 나도 바쁘니까 남은 얘기는 내일 하자!”한지음이 그렇게 됐다는 것은 매우 통쾌한 일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업무가 더 중요했다.“잠깐!”이유영이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갑자기 소은지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무슨 일인데?”“그래도 너무 방심하진 마.”“왜?”“저번에도 너한테 온갖 누명을 씌웠는데, 이번에 수술 실패까지 했으니 또 어떤 계략을 꾸밀지 누가 알아? 일이 이렇게 순순히 풀릴 것 같지 않아.”소은지는 한지음
조민정은 이유영도 인정하는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라고 평가받는 지현우라니,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거라 이유영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얼른 들어오라고 하세요.”이유영이 말했다.“네!”잠시 밖으로 나갔던 직원이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유영은 단번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눈치챘다. 지현우는 정국진이 데리고 있던 가장 능력이 출충한 비서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거대한 지사를 맡게 된 이유영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인재이기도 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비서실장으로 발령받은 지현우라고 합니다. 여긴 제 서류예요.”지현우가 들고 있던 봉투에서 이력서와 발령 서류를 꺼내 이유영에게 조심히 건네주었다. 남들 보기엔 당연한 절차일지 몰라도, 이유영은 그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련함을 느꼈다. 긴 시간 자신의 분야에서 완벽히 적응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특유의 분위기였다. “네, 어서 오세요.”이유영이 서류를 받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간단히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솔직히 큰 회사를 경영해 본 이력이 없는 이유영으로서, 자신보다 더 노련한 경험자를 부하직원으로 둔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내면 안 되었기에, 그녀는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서류를 모두 살펴본 이유영은 지현우와 함께 회사 운영과 청하시 내부 현황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 슬슬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이었다.“아, 맞다!”“왜 그러세요, 대표님? 뭔가 더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한 가지 더 있어요.”“말씀해 주세요.”이유영의 머릿속에 소은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한편 병원에서, 강서희와 한지음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상황이 종료되고 진영숙은 다른 치료 방법을 찾아, 강이한은 다른 일로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때문에 병실엔 강서희와 한지음,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그러게 왜 쓸데없이 싸움을 걸었어.”강서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