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이시욱은 당황한 얼굴로 상사를 바라보았다.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조형욱은 한지음에게 굉장히 친절하게 굴었고 이번 사건이 완전히 한지음과 무관하다는 증거도 없었다.강서희가 혼자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강이한이 왜 강서희에게만 벌을 내리고 한지음은 내버려 두었는지, 아무도 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한지음을 홍문동에서 내보내는 것 이외에 강이한은 그녀에게 어떤 추궁도 하지 않았다.증거가 부족해서일까?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강이한의 신변에 오래 있은 이시욱마저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대표님, 어디 가십니까?”이시욱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강이한은 어느새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이시욱의 부름에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며칠 전에 비해 많이 야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시욱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이한은 눈을 질끈 감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의 사람들과 박연준의 사람들을 방해하지 마.”지현우의 필적 감정은 그가 이시욱을 시켜 결과를 조작한 것이었고 박연준의 직원들도 적지 않게 그들의 방해를 받고 있었다.하지만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인원이 철수하게 될 것이다.이시욱은 충격 어린 얼굴로 상사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대표님….”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지현우와 박연준의 사람들이 진실을 밝혀낸다면 세강은 속절없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강이한은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실형을 살게 될 수도 있었다.하지만 가늘게 떨고 있는 상사의 어깨를 보자 이시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그가 이유영을 오해했기 때문에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망가뜨렸고 그녀를 구치소에 보내고 말았다.10년을 함께한 정 때문에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그녀 역시 그들의 10년 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다.이유영은 생전에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를 찾고 있었고 강이한은 계속해서 그 증거들을 모두 파멸시켰
강이한이 오히려 먼저 입을 열었다.“이정.”“네, 도련님.”“무덤을 옮길 준비를 하지.”“네?”이정은 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유영의 무덤을 강이한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강이한은 무덤 앞에 놓여있는 이유영의 사진을 만졌고 비바람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흠뻑 젖어있었다.“유영이를 그녀의 고향인 청하에 묻어줘야지.”강이한은 청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영이 멀고 먼 파리의 땅에 묻혀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정은 강이한의 평온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에서 그가 얼마나 자기의 아내인 이유영과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느껴져서 덩달아 감동했다.‘유영 씨를 청하로 데려가려고 파리로 온 거였네.’그녀는 강이한의 결정이 많은 반대와 방해를 받을 건지 알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간결하게 답했다.“네, 준비하겠습니다.”강이한은 단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 별다른 의도는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필요도, 동의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강이한은 평소 모든 일에 이성적인 사람이었다.하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내의 죽음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지금은 애써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이유영의 죽음 이후, 강이한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사명을 가지고 모든 뒷일을 처리했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정국진은 강이한이 무덤을 옮기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지하려고 달려왔다.그의 말투는 유난히 차가웠다.“유영이한테 왜 그러는 거야? 편안하게 보내주면 안 돼?”강이한은 이유영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정국진을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는 이유영에게만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번 생에서는 박연준, 정유라 등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가만두지 않았으니까 말이다.강이한은 정국진의 날카로운 말투에도 담담하게 답했다.“유영이는 외로운 걸 두려워해요.”“틀렸어,
강이한은 손을 미친 듯이 떨면서 이유영의 심장박동을 느끼려고 유골함을 꽉 안아봤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차갑기만 했다.“유영아...”작은 유골함을 꼭 껴안은 강이한의 심장은 질식할 정도로 아팠다.강이한은 불이 나기 전에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면 비극을 막을 수도 있고 이렇게 허망하게 이유영을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 같아 자꾸만 하늘이 원망스러워졌다.‘왜 이제야 기억이 떠오르게 한 거죠? 왜 저한테 또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죠?’이제는 너무 늦었고 비참한 결과를 바꿀 수도 없었다.강이한은 유골함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집으로 가자.”...와인 농장.정국진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의사가 이유영에게 약을 바꿔주고 있었다.그녀의 팔과 목에는 한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흉터들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얼굴에는 약간의 상처만 있었다.이유영은 이틀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다.그녀는 의사가 소염제를 묻힌 솜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내자, 아프고 쓰라린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헉!”다시 태어난 이후 더욱 강인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그녀를 한 번 보고는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미안하지만 조금 아플 거예요, 우리 잘 참아봐요.”“음.”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그리고 다음 순간, 의사는 지혈 솜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입술이 터져서 피나요.”이유영은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줬고 그를 훑어보았다.“감사합니다.”지혈 솜을 받아 입에 물었지만 통증을 완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소도윤은 파리 최고의 화상 전문의였고 그에게 치료받으면 성형수술로 회복할 확률이 높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그는 장사에는 관심이 없어 금융학을 배우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바램에도 의학을 선택했고 지금 파리에는 20여 개의 병원을 소유하고 있었다.하지만 평소 성격이 괴팍하고 방문진료도 하지 않던 그가 와인 농장까지 와서 이유영을 치료해주는 건 외삼촌의 정국진이 얼마나 애
이유영은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다.“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은 감당해야죠.”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무거운 화제로 인해 소도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배 속의 아이를 좋아하고 사랑하더라도 강이한의 피가 섞였기에 결국 지울 수밖에 없었다.그냥 지금 자기 배 속에 있는 한 달, 일주일, 단 하루라도 아이가 고생을 적게 하도록 보호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소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세상에는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자기를 힘든 방향으로 내모는 선택은 하지 말기를 바랄게요.”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해결 방식이 있다는 소도윤의 말만 맴돌았다.‘아이를 지우는 것 빼고 또 무슨 방식이 있는 걸까?’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고 소도윤도 묵묵히 그녀를 치료해 줬다.이유영도 생각에 잠겨 통증을 느끼지 못했고 더 이상 끙끙거리지도 않았다.... 치료가 끝나자, 소도윤은 이유영에게 몇 마디 당부한 후 몸을 돌려 방을 나섰고 옆에 있던 간호사도 서둘러 물건을 정리하고 따라나섰다.이유영은 문밖에서 정국진과 소도윤이 한참 얘기를 나누다 소도윤이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는 것을 보고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방에 들어온 정국진은 잠이 든 이유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사고 이후 와인 농장에 온 이유영은 몸이 더 허약해져서인지 계속 잠만 잤고 며칠 사이에 몸이 많이 말랐어도 기품은 꺾이지 않았다.“외숙모가 너 먹으라고 담백한 수프를 끓였어, 의사도 네가 영양에만 더 신경 쓰면 빨리 회복할 거라고 했어.”이유영은 잠결에 정국진의 말을 듣고 마음이 울컥했다.“외삼촌.”그녀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느라고 정국진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이유영은 강이한때문에 구치소에 끌려갔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던 정국진이 왜 이번 사고에서 그녀를 구해주고 청하까지 가서 그녀를 데리고 왔는지 알지 못했다.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예리하게 물었다.“그때 사고로 죽
이유영은 이번 화재로 인해 불을 두려워하게 되었다.하지만 그녀가 더욱 두려워진 건 아무리 운명을 바꾸려고 몸부림을 쳐도 바꿀 수 없는 슬픈 현실이었다.“이번 일로 너한테 정말 실망했어!”정국진은 화가 났는지 말이 끝나고 나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실망이라는 두 글자가 이유영의 명치를 세게 내리쳤다.그녀는 한동안 충격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얼마 뒤, 외숙모인 임소미가 수프를 들고 들어왔지만, 이유영은 입이 붙어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임소미가 이유영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회복이 빠르지.”“외숙모.”임소미는 지금 정씨 가문의 별장이 아닌 와인 농장에서 살고 있다.‘유미의 약혼자가 나 때문에 사고를 당했는데도 원망은커녕 날 보살펴 주다니!’이유영은 임소미의 생각을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임소미는 수프 한 숟가락을 떠서 이유영에게 건네주었다.“마셔봐.”“외숙모?”이유영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차마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그리고 임소미의 피곤한 모습과 슬픈 눈빛에서 정유미의 일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 상황에서 왜 아직도 외삼촌과 외숙모는...?’“유영아, 일이 가끔은 네 생각과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어,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치료에만 집중해.”“외숙모, 유미는...”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를 냈다.“더 이상 얘기하지 마!”이유영은 갑작스러운 임소미의 반응에 놀랐지만, 그녀는 금방 평정심을 찾았다.“...”이유영은 함께 지낸 3개월 동안 줄곧 온화하던 임소미가 자기 때문에 화났다고 생각했다.그도 그럴 것이 강이한이 이유영에 대한 복수만 아니었더라면 정유미의 약혼자인 심하준이 죽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은 미안한 마음에 임소미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게 변했고 임소미는 대답 대신 이유영에게 또다시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건넸다.이유영은 주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고 나서
이유영은 자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임소미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녀는 문득 정유라한테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동공이 커지면서 얼굴색도 더욱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강이한은 유골함을 갖고 청하로 돌아왔다.이정은 그가 청하로 돌아온 후, 유골함을 적절한 장소에 묻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홍문동으로 가지고 왔다.사람이 사는 집안에 유골함을 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었다.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진영숙은 식탁 오른쪽에 유골함을 놓고 밥을 먹고 있는 강이한을 보고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미친 거야?”진영숙은 이유영이 살아있을 때도 자기 아들을 힘들게 하다가 죽어서까지도 괴롭힌다는 생각에 식탁에 놓여있는 유골함을 엎지르려고 했다.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면서 차갑고도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유영이가 살아있을 때도 손찌검을 하시더니 그녀의 유골함에까지 손을 대려고요?”진영숙은 강이한의 차가운 시선에 순간 멍해졌다.이유영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던 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서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진영숙은 강이한의 강렬하고 차가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었다.“이한아, 그 애는 이미 죽었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안 그래?”그녀는 아직도 이유영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 송장처럼 지내는 강이한이 안타까웠다.강이한은 진영숙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면서 말했다.“유영이가 저한테 시집오고부터 그동안 쭉 괴롭히셨잖아요, 죽었으면 놔줄 때도 됐잖아요, 왜 계속 이러시는 거예요?”“...”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은 창백해졌다.강이한의 직설적인 말은 그 어떤 비난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다.“이한아, 엄마는 다...”“그만해요!”강이한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은지 진영숙의 말을 끊어버렸다.진영숙은 아들이 유골함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화는 사그라들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기만 했다.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아들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겠는가.“유영이가 너
진영숙은 강서희가 구치소에 끌려간 데다가 강이한까지 여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니까 머리가 아팠다.밖에서는 지금 강씨 집안이 뒤죽박죽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게다가 강서희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까지 돌면서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이한아, 서희를 계속 구치소에 계속 두는 건 집안 이미지에 좋지 않아.”진영숙은 강서희에 관한 증거가 모두 강이한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그가 강서희를 놓아주기를 바랐다.그러나 강이한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조용히 앞에 있는 와인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진영숙은 강이한의 태연한 행동에 급해졌다.“서희가 네 친동생은 아니더라도 함께 자랐잖아, 근데 어떻게 여자 때문에...”“유영이는 남이 아니에요!”강이한은 이런 상황에서도 강서희를 감싸고 도는 진영숙에게 실망했고 이유영이 자기가 곁에 없을 때 당했을 수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났다.“이한아,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야.”“그럼 뭔 데요? 유영이를 어떻게 생각한 건데요?”진영숙은 강이한의 계속되는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강서희의 일 때문에 사정하려고 온 그녀였지만 그의 강경한 태도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진영숙은 홍문동에 유골함을 계속 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말을 꺼냈다.“아무리 그래도 유골함은 땅에 묻어야지 여기에 두는 건 안 돼!”“묻을 거예요.”강이한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진영숙은 이유영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자기의 삶까지 포기할 것 같아 문득 불안해졌다.“이한아...”강이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홍문동에 들어온 후부터 강이한은 줄곧 지금의 식탁 위치에서 밥을 먹었었고 이유영도 그의 옆에 앉아 우아하게 밥을 먹었었다.그는 이유영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가 좋아하던 갈비를 골라서 그녀 자리의 접시에 덜어줬다.진영숙은 강이한의 행동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무거운 마음으
구치소에 갇혀있는 며칠 동안 강서희는 계속 강이한만 찾았다.“오빠를 만나게 해주세요.”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했다.“지금 모든 증거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이러셔도 소용이 없습니다.”“오빠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강서희는 모든 증거가 입증이 되었다는 경찰의 말을 듣는 순간 며칠간의 고생이 수포가 된 것 같았다.몇 년 동안 그녀가 아무런 나쁜 짓을 해도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았다.게다가 이유영이 살아있던 동안 강서희가 그녀를 아무리 괴롭혀도 다들 모른척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들이 자기를 심문하기 시작하고 엄마와 오빠까지 보러 오지 않자, 강서희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그런 적 없어요, 전 아니에요!”총명한 강서희는 강씨 집안 사람들이 구해주기 전까지 모든 질문에 부인만 한다면 쉽게 나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서희 씨, 저희가 묻는 건...”“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강서희는 계속되는 추궁에 소리쳤다.그녀는 강씨 집안 사람들이 지금은 화가 나서 모른척한다고 해도 화가 가라앉으면 자기를 구치소에서 빼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녀의 모든 일에 같이 참여한 한지음이 수사를 제대로 받지도 않고 빠져나가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었다....기다림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강서희는 자기가 며칠 동안 구치소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도 몰랐다.전에 이유영이 구치소에 들어왔을 때 확실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지만, 강서희가 들어온 지 보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강씨 집안 사람들이 날 도와줄까? 아직 나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을까?’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더욱 자신감을 잃어갔고 점점 절망감만 쌓여갔다. 드디어!보름 후, 누군가가 강서희를 만나러 구치소로 왔다.그녀는 강이한이 자기를 용서하러 온 줄 알고 기대감에 접견실로 향했지만, 마주한 사람은 강이한도 진여욱도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