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비가 그친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낮게 내려앉은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번지고 있었지만, 젖은 도로 위에는 아직 차가운 빗물이 고여 있었다. 태성이 운전하는 차는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원주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연수는 무릎 위에 놓인 낡은 서류 봉투를 몇 번이고 내려다봤다. 봉투 안에는 진경이 이민우의 집무실에서 몰래 촬영한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박성규 상무의 자금 운용 기록. 정우 산업의 기술 이전 승인서. 하정우가 강 회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던 기록.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에 적혀 있던 한 줄. 박성규 사망 전, 가족에게 개인 물품 전달. 음성 기록 보관 가능성 있음. 그 짧은[박성규: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들려온 목소리에 거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박성규의 아내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카세트플레이어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남편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본 듯했다. 잠시 후 다른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창석: 무엇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거지?] 연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민우의 아버지, 이창석 회장이었다. [박성규: 정우 산업의 기술을 그렇게 넘기면 강 회장님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이창석: 강 회장은 늙었어.] 잠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창석: 사람을 믿는 버릇도 여전하고.] [박성규: 그래도 이건 강 회장님이 승인한 일이 아닙니다.] [이창석: 승인한 것처럼 만들면 되지.] 연수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태성은 탁자 아래에서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이창석: 정우 산업의 기술을 별도 법인으로 넘겨.] [이창석: 개발권까지 우리가 가져오면 강 회장은 나중에 보고만 받으면 돼.] [박성규: 하정우 사장이 계속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연수의 숨이 멎는 듯했다. [이창석: 막아.] 낮고 태연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짧은 명령 하나가 하정우의 마지막 희망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박성규: 그 사람이 직접 강 회장님을
태성과 연수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오래되고 좁았다. 가구는 낡았지만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벽 한쪽에는 젊은 시절 박성규와 아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박성규는 지금까지 서류에서 보았던 딱딱한 얼굴과 달리 밝게 웃고 있었다. 여자는 두 사람을 낮은 탁자 앞에 앉혔다. 그리고 한동안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태성이 탁자 아래에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연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잠시 후 박성규의 아내가 오래된 철제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는 녹이 슬어 있었고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여자는 목에 걸고 있던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낡은 수첩과 사진 몇 장,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들어 있었다. 테이프의 라벨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6년 4월 17일. 정우 산업이 부도 처리되기 약 한 달 전이었다. 연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게…….” “남편이 감옥에 가기 전에 맡긴 거예요.” 박성규의 아내가 말했다. “언젠가 자신이 죽고 난 뒤 누군가 이걸 찾으러 올 거라고 했어요.” 그녀의 시선이 태성에게 향했다. “강 회장이 아니라 그 아들이 올 거라고 했죠.”
비가 그친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낮게 내려앉은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번지고 있었지만, 젖은 도로 위에는 아직 차가운 빗물이 고여 있었다. 태성이 운전하는 차는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원주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연수는 무릎 위에 놓인 낡은 서류 봉투를 몇 번이고 내려다봤다. 봉투 안에는 진경이 이민우의 집무실에서 몰래 촬영한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박성규 상무의 자금 운용 기록. 정우 산업의 기술 이전 승인서. 하정우가 강 회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던 기록.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에 적혀 있던 한 줄. 박성규 사망 전, 가족에게 개인 물품 전달. 음성 기록 보관 가능성 있음. 그 짧은 문장이 태성과 연수를 이곳까지 오게 했다. “많이 긴장돼?” 운전대를 잡은 태성이 조용히 물었다. 연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무서우면 차에 있어도 돼.” “아니요.” 연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 아버지에 관한 일이잖아요.” 그녀는 서류 봉투 위에 손을 올렸다. “아빠가 마지막까지 밝히고 싶어 했던 진실이라면, 저도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태성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대신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 일은 연수의 과거인 동시에 자신의 가족이 외면했던 과거이기도 했다.
태성은 그녀가 떠난 자리를 한동안 바라봤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연수가 받은 상처도, 회사가 입은 손해도, 진경이 저지른 잘못도 한순간의 참회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태성은 그녀가 내민 진심까지 거짓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진경은 자신을 스스로 심판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용서받기 위한 계산이 아니라, 더는 자신의 잘못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마지막 용기였다. 태성은 테이블 위에 남겨진 서류를 다시 펼쳤다. 진경이 가져온 자료는 명백했다. 정우 산업을 무너뜨린 자금의 흐름. 박성규가 기술 자료를 빼돌린 과정. 이민우의 아버지가 개입한 정황. 그리고 강 회장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하정우의 면담 요청서까지. 이 자료라면 이민우가 만들어놓은 거짓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 태성은 문서를 날짜순으로 다시 정리했다. 그러던 중 마지막 장에 끼워진 작은 메모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정식 보고서가 아니었다. 누군가 급히 적어놓은 듯한 짧은 기록이었다. 박성규 사망 전, 가족에게 개인 물품 전달. 그 아래에는 현재 거주지로 추정되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강원도 원주 외곽의 오래된 주택이었다. 태성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멈췄다. 음성 기록 보관 가능성 있음. 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음성 기록…….” 박성규가 생전에 남긴 녹음 파일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안에는 정우 산업의 파산과 이민우 아버지의 거래를 증명할 목소리가 담겨 있을지도 몰랐다. 태성은 곧바로 진혁에게
태성은 진경이 건넨 자백서를 한 장씩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 안에는 진경이 저지른 일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하연수에 관한 거짓 소문을 퍼뜨린 일. 프로젝트 내부 정보를 이민우에게 넘긴 일. 회사 자료 일부를 외부로 유출한 일. 그리고 이민우가 태성기획을 무너뜨릴 조작 문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까지. 진경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줄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분명히 적어놓았다. 태성은 자백서를 내려놓았다. “업계에서 다시 일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진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회사에 손해가 발생한 사실이 확인되면 배상 책임도 생길 거야.” “그것도 감당할게.” “경찰 조사가 시작될 수도 있어.” “피하지 않을 거야.” 진경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내가 한 일이니까.” 그 짧은 말에 태성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한때 진경은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이유부터 설명하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잘못된 결과가 생겨도 다른 사람의 책임부터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민우가 네 자백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수도 있어.”
진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연수 씨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도, 네가 그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도 모두 나야.” “네 곁에 서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회사 안에 거짓말을 퍼뜨렸고, 연수 씨가 맡은 프로젝트도 흔들었어.” “이민우에게 내부 정보를 넘긴 것도 사실이야.”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연수 씨만 회사에서 사라지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네가 그 사람에게 실망하면 언젠가는 나를 다시 바라볼 거라고 믿었어.” 진경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어리석었지.” 태성은 말없이 그녀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어젯밤 이민우가 내 앞에 태성기획을 무너뜨릴 조작 문서를 내놓았어.” 진경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회사의 비자금과 불법 로비를 조작해서 언론에 흘릴 계획이었어.” “나한테 내부 자료를 넘기고 증거를 완성하라고 했지.” 태성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태성기획까지 무너뜨리려 했다고?” “응.” 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야 알았어.” “내가 손을 잡은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인지.” “그 사람은 연수 씨만 밀어내려는 게 아니었어. 너와 네 회사, 네 가족,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모든 걸 파괴하고 싶어 했어.” 진경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런데 더 끔찍한 건,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갈 수 있었던 데에는 내 책임도 있다는 거야.” “내가 가진 질투와 분노를 이용하게 내버려뒀으니까.” 태성은 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