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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새로운 주인

Author: 안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30 18:00:36

넓고 무거운 책상 너머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강 회장은 저 자리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앉고 보니 태성은 조금도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의 삶과 회사의 미래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온 듯했다.

화려한 권력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이었다.

태성은 다친 오른쪽 어깨를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둔하게 욱신거렸다.

폐공장에서 연수를 감싸 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장부가 불타던 모습.

이민우의 광기 어린 얼굴.

그리고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살아달라고 울던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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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성그룹의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한 뒤, 태성과 연수는 각자의 자리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태성은 그룹의 신뢰를 다시 세우기 위해 연일 회의를 이어갔고, 연수는 새롭게 출범할 사회공헌재단의 운영안을 준비했다. 같은 건물 안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좀처럼 긴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성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저녁 시간 비워둬.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일. 약속 장소는 화려한 호텔도,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태성이 연수를 데려간 곳은 두 사람의 인연이 처음 시작된 오래된 공원 근처의 작은 카페였다. 공원 한쪽에는 어린 시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벤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기였어요?” 연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시간이 처음 시작된 곳이니까.” 카페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창가의 작은 테이블 위에는 소박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에는 낯익은 포장지의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연수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아주 오래전, 혼자 파티장 구석에 있을때 서진 오빠에게 받았던 그 초콜릿이었다. 여기 공원에서 연수가 전해 주었던 그 초콜릿, 파티장에서 다시 만났을때 전해 주던 그 초콜릿,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태성은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잊은 적 없어.” “그렇게 오래전 일인데도요?” “나한테는 오래전 일이 아니었어.” 태성은 힘들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73화. 새로운 주인

    넓고 무거운 책상 너머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강 회장은 저 자리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앉고 보니 태성은 조금도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의 삶과 회사의 미래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온 듯했다. 화려한 권력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이었다. 태성은 다친 오른쪽 어깨를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둔하게 욱신거렸다. 폐공장에서 연수를 감싸 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장부가 불타던 모습. 이민우의 광기 어린 얼굴. 그리고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살아달라고 울던 연수. 태성은 책상 위에 놓인 재단 설립 계획서를 바라봤다. 잠시 후 회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연수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수정된 재단 운영안이 들려 있었다. “첫날부터 너무 심각한 얼굴인데요?” 태성이 그녀를 바라봤다. “회장실에 앉으면 원래 이런 얼굴이 되는 건가 봐.” 연수는 천천히 회장실 안을 둘러봤다. 벽에 걸려 있던 사진들이 모두 내려간 탓에 공간이 조금 휑해 보였다. “사진은 왜 다 내렸어요?” “권력을 물려받았다는 느낌이 싫어서.” 연수는 벽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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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뭐예요?” “새로 설립할 사회공헌재단 계획서.” 연수는 서류의 첫 장을 펼쳤다. 재단 설립 목적과 지원 대상, 운영 방식이 상세히 정리돼 있었다. 자금난에 처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지원. 부당한 계약이나 대기업의 횡포로 피해를 입은 기업을 위한 법률 지원. 기업 비리 제보자 보호와 긴급 생계 지원. 도산 위기에 몰린 기업의 회생 프로그램까지. 연수의 눈빛이 깊어졌다. “정우산업과 같은 일을 겪는 기업을 돕기 위한 거군요.” “그래.” 태성은 그녀를 바라봤다. “재단 이사장을 네가 맡아줬으면 해.” 연수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제가요?” “이 재단은 단순히 돈을 나눠주는 곳이면 안 돼.”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수 곁으로 다가왔다. “과거 우리 아버지들처럼 권력과 자금 앞에서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해.” 연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어줬으면 해.” 태성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네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잖아.” 연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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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회장은 말을 이었다. “이민우와 연관된 임원들이 줄줄이 수사를 받고 있다. 경영진은 흔들리고 있고, 주주들도 불안해하고 있다.” “…….” “네가 아니면 이 회사는 무너진다.” 태성은 잠시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는 평생 자신에게 태성그룹을 물려주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태성에게 감정보다 책임을 먼저 가르쳤고, 자신의 뒤를 잇는 것을 당연한 운명처럼 강요했다. 하지만 지금 강 회장의 말에는 명령보다 부탁이 담겨 있었다. 태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남긴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강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지금의 회장 자리에 그대로 앉는 것은 과거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그룹을 버리겠다는 것이냐?” 강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태성은 흔들림 없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니요.” “…….” “잘못된 방식으로 만들어진 회사를 처음부터 다시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병실 안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곧게 선 그의 모습이 병실의 희미한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70화. 용서 할 수 없는 사과

    그날 오후. 강 회장은 자택 정원에서 연수를 따로 만났다. 겨울을 앞둔 정원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잎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회색빛 하늘 아래 앙상한 가지들만 조용히 흔들렸다. 연수는 정원 중앙의 작은 연못 앞에 서 있었다. 짙은 갈색 코트를 입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하얗고 단정한 얼굴에는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눈빛 안에는 여전히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남아 있었다. 오늘 강 회장의 사과를 들었다. 세상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도 보았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사과로 이십 년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연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강 회장이 수행원의 도움을 거절한 채 홀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몇 걸음 앞에 멈춘 그는 한동안 연수를 바라보았다. 연수의 눈매와 입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오래전 하정우의 얼굴을 본 듯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많이 닮았구나.” 강 회장이 낮게 말했다. “네 아버지와.” 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 회장은 지팡이 위에 두 손을 포갠 채 시선을 내렸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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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정우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된 뒤에도 세상의 관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되자 언론은 연일 태성그룹의 과거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이창석이 조성한 불법 비자금과 정우산업의 몰락,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강 회장의 책임까지 하나씩 세상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태성그룹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다. 끝까지 책임을 회피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쌓아 올린 권력의 기반을 허물고 진실 앞에 설 것인지. 며칠 뒤, 태성그룹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 당일. 태성그룹 본사 대강당은 이른 시간부터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단상을 향해 설치됐고, 기자들은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강 회장의 등장을 기다렸다. 정면 대형 화면에는 태성그룹의 로고만이 떠 있었다. 평소라면 자부심과 권위를 상징했을 그 로고는 오늘따라 무겁고 차갑게 느껴졌다. 마침내 대강당 옆문이 열렸다. 강 회장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아니었다. 넥타이는 조금 느슨하게 매여 있었고, 병원 생활로 야윈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강 회장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한 걸음씩 단상으로 향했다. 대강당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수십 년간 대한민국 재계를 움직여온 인물이었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의 모습에는 거대한 그룹의 지배자가 지닌 위압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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