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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3 Chapters

5511장

바로 그 시각. 서울, 서초화원.릴리는 책상 앞에 앉아, 이미 완성된 산수화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림 속 굽이치는 산맥은 우뚝 깎아지른 듯 이어지고, 호수에는 물결이 일렁여 그야말로 절경이었다.릴리는 가녀린 손가락을 뻗어 먹이 가장 진한 곳을 잠자리가 물가를 날아다니는 날갯짓처럼 살짝 찍어보았다. 손끝에 전혀 끈적이는 느낌이 없음을 확인하고, 하얀 손가락 끝을 다시 들여다보니 먹 묻은 흔적이 없었다. 그제야 그림이 완전히 마른 것을 확신했다.그런 뒤 릴리는 준비해 둔 두루마리를 꺼내 신중하게 이 그림을 올려놓았다. 그림을 말아 넣은 뒤, 릴리는 비단으로 된 끈으로 그림을 단단히 묶어 봉했다.그때, 문 밖에서 장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뵙기를 청합니다.”릴리가 높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이미 등이 약간 굽은 장시우가 비틀비틀 안으로 들어왔다가, 탁자 위 산수화가 이미 두루마리로 말려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 “아가씨, 대작이 마침내 완성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릴리가 담담히 말했다. “대작이라 할 것까진 없어요.” 그러곤 물었다. “나를 무슨 일로 찾았지?”장시우가 공손히 말했다. “아가씨, 내일부터 서울대학교 신입생 등록을 시작합니다. 등록은 내일과 모레 이틀간 진행되는데, 언제 모시고 가면 되겠습니까?”릴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가 언제 갈지는, 그 ‘클라우디아’라는 친구가 언제 가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리고 은시후 씨가 함께 갈지 여부에도 달려 있고.” 릴리는 그러곤 장시우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죠. 내일 아침 일찍 차를 타고 먼저 서울대학교 근처로 가서 대기해요. 클라우디아가 입학 등록을 시작하는 게 확인되는 즉시, 그때 학교로 들어갈 거야.”장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곧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이어 그는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내일 정말 그 시후라는 분을 뵙게 된다면, 제가 무엇을 조심해야 그분께 수상함을 들키지 않을까요?”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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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2장

장시우가 허리를 굽혀 물러나가자, 릴리는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긴 탁자 앞에 다가갔다. 그 탁자 위에는 그녀가 늘 지니고 다니던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는데, 거기엔 ‘선친 임준호 영위’ 일곱 글자가 쓰여 있었다. 릴리는 위패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그림을 조심스레 한 켠에 내려놓았다. 릴리는 두 손을 모아 위패를 바라보며 공손히 말했다. “아버지, 운이 좋다면 딸이 내일 제 생명의 은인 은시후 씨를 뵐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이번에 느닷없이 그의 앞에 나타나면, 분명히 극도의 경계심을 일으킬 거예요. 물론 제가 그분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부디 하늘에서 살펴 주시어, 제가 은시후 씨의 신뢰를 얻게 해 주세요...”여기까지 말한 릴리는 잠시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바닥의 그림을 어루만지며 낮게 말했다. “만약... 만약 은시후 씨가 끝내 저를 믿어 주지 않는다면... 만약 그가 저를 적으로 여긴다면... 저는 그때 모든 연유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말을 잇던 릴리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두 줄기의 눈물이 벌써 눈가를 벗어나 아름다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목이 메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늘 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 저에게 하신 당부를 잊지 않았어요. 자신의 신분과 지난 과거를 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요... 저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적이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딸의 뜻대로 할 수 없어, 이 모든 것을 은시후 씨에게 말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제발 하늘에서 노여워하지 마세요...”그 말을 마치고, 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위패 앞에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해질녘.이토 나나코는 수업을 마치고 혼자 차를 몰아 청년재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나나코의 고모는 이미 그녀의 분부대로 필요한 식재료를 모두 준비해 두고 있었다.시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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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3장

나나코가 막 고개를 숙여 고모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급히 말했다. “분명 시후 군이 아래에 도착했을 거예요. 제가 마중 나갈게요!”이토 에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서 가렴.”청년재은 모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실물 카드를 소지하지 않으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었다. 시후가 방문했을 때도 지하 주차장 출입구에서 초인종을 눌러 위에서 열어 주어야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정 층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원래라면 나나코는 문만 열어주면 그만이었지만, 그래도 굳이 인터폰으로 시후에게 말했다. “시후 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바로 내려갈게요.”나나코의 전통적인 일본식 관념 속에서는, 마음속으로 연모하는 남자가 혼자 집으로 올라오게 하는 것은, 마치 남편이 “나 왔어”라고 현관에서 인사를 할 때 아내가 문 앞에서 무릎 꿇고 맞이하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것과 같았고, 그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무례한 행동이었다.그래서 그녀는 급히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직접 엘리베이터 홀 문을 열어 주며 웃으며 말했다. “시후 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시후가 웃으며 물었다. “뭘 이렇게 직접 내려오고 그래요?”나나코는 얼굴을 붉히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게 예의니까요. 시후 군, 아버지도 모두 기다리고 계세요. 올라가요!”시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나코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토 유키히코, 이토 에미, 그리고 다나카 코이치가 이미 엘리베이터 홀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시후를 보자 세 사람은 동시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은 선생님, 환영합니다!”시후는 약간 당황해하며 웃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거창하게 준비하신 겁니까...”그러자 토 유키히코는 몸을 숙인 채 큰 소리로 말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은 선생님. 어서 들어오세요!”시후는 난처한 듯 웃으며, 이토 유키히코를 따라 방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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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4장

이토 유키히코는 젊은 시절, 사실 철저하게 무술을 사랑하던 청년이었다. 그는 바로 70~80년대, 이소룡의 영향을 크게 받은 아시아 청년 세대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나코 역시 아버지의 그런 분위기에 젖어 어려서 부터 무술에 심취했다.그리고 이토 유키히코는 딸의 관심사에 아낌없이 투자하여, 일본 최고의 가라테 고수, 최고의 산다·격투기 고수들을 스승으로 붙여주었다. 그래서 나나코는 이러한 무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나나코가 15살이 되었을 때에는 일본의 유명한 스승들이 평생 배운 것을 모두 전수해 주었고, 이토 유키히코는 그 무렵 딸이 내공을 배울 기회를 찾기를 바랐다.그런데 일본에서 내무술과 관련된 것은 오직 두 가지, 닌자술과 검술 두 가지 뿐이었다. 닌자술은 비열해 나나코 같은 귀족 집안의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았고, 검술은 사람과 검이 하나 되는 초월적 경지를 추구했으나 일단 검이 없으면 실전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게다가 나나코는 칼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무술 정체기에 빠지게 되었다.그 후, 이토 유키히코는 직접 나서 일본 제일의 고수라 불리는 야마모토 가즈키를 스승으로 모셔왔다. 그 덕분에 나나코의 무술 실력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지만 야마모토 가즈키 역시 외무술의 고수일 뿐이었기에, 이토 유키히코는 딸이 한국 무술을 배우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토 유키히코가 접촉할 수 있었던 한국 무술가들은 대부분 진주 하씨와 같은 무술 가문들이었는데, 그런 집안에 있어서는 불완전한 무술 심법 조차도 그 집안의 백 년 흥망의 근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외부인에게 이런 무술 심법을 전하려 하지 않았고, 몇 번 벽에 부딪히자 이토 유키히코는 결국 이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설마 딸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진짜 무술가가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 앞에서, 나나코는 사실대로 말했다. “아빠, 제가 이렇게 빨리 무술가로 변화할 수 있었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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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5장

나나코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무술의 어려움은, 자신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영혼을 몸에서 안전하게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있는 거예요. 이걸 해내야 비로소 내면적 성찰이 가능해지죠. 그래서 제가 그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제 영혼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걸 가상해서 재빨리 안전한 죽음에 가까운 순간의 감각을 찾을 수 있었어요. 원래는 그냥 시험 삼아 해본 건데, 뜻밖에도 성공했고요...”시후는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방법을 생각하다니, 나나코는 과연 무술 방면의 천재가 분명해.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이토 유키히코는 충격과 동경이 뒤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꿈에도 몰랐구나, 무술이 이렇게 신묘한 세계일 줄이야... 젊음이란 참 좋은 것이야... 내가 아직 젊었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시도해 봤을 텐데!”나나코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행동할 마음만 있다면 언제라도 늦지 않아요!”“아니, 아니.” 이토 유키히코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무술은 너무나 고되고, 길도 끝없이 멀다. 나는 이미 쉰 살, 다시 머리에 줄을 매고 벽에 송곳을 찌르는 심정으로 새로운 것을 배울 수는 없다. 인생이란 고작 수십 년, 많아야 3만 일 정도뿐이니.” 이렇게 말한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사람은 특정한 시기에 맞는 일을 해야 해. 스무 살 즈음에는 자아를 추구하고, 서른 마흔에는 사업을 추구하고, 쉰 예순에는 즐거움을 추구해야지. 은 선생님께서 내 두 다리를 다시 걷게 해주신 뒤로, 내 남은 생은 즐거움만을 위해 쓰고 싶단다.”시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토 전 회장님, 무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는, 수명을 예전과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 뒤 시후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평범한 무술인이라도 100세는 무난히 삽니다. 재능이 충분해 대경계에 들어설 수 있다면, 100살은 훌쩍 넘기지요. 더 높은 경지에 이르면, 200년도 거뜬할 겁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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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6장

이 순간, 시후 역시 마음속으로 감회가 깊었다. 그가 보기엔, 이토 유키히코는 정말 딸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였고, 이미 충분히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시후는 나나코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보니, 나나코의 재능이라면 무술에서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그의 직감으로는 대경계의 경지조차도 나나코의 종착점이 아닐 것 같았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나코의 여생은 100년, 200년을 넘어설 수도 있었다. 그녀가 경지를 돌파한다면, 언젠가 자신처럼 영기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영기를 다루게 되면, 맹장명처럼 500년 이상 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이토록 긴 길이라면, 어떻게 나나코 혼자 걷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시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이토 유키히코의 술잔을 받아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약속하지요. 이 길이 아무리 길어도, 나나코와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이토 유키히코는 여전히 몸을 굽힌 채, 눈물을 주체 못 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시후가 사위가 되든 말든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딸이 정말로 시후와 함께 긴 세월을 걸을 수 있다면, 부부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무슨 대수겠는가?그래서 그는 눈물을 몰래 훔치고 일어나, 시후를 향해 감사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은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이토 유키히코에게 있어 지금의 부탁은, 마치 혼인날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신랑에게 맡기는 순간과 같았다. 앞으로 딸이 어떤 길을 가든, 그는 시후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적어도 나나코가 혼자 외롭게 이 여정을 혼자 떠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만약 시후가 동의만 해준다면, 100년, 20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다른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심지어 이토 그룹의 모든 재산을 넘긴다 해도 상관없었다. 재산이란 애초에 태어날 때 가져오지도, 죽을 때 가져가지도 못하는 것이니.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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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7장

나나코가 급히 말했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이토 유키히코가 나나코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나나코, 부모의 정은 네가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만약 부모와 자식 중 하나만 살 수 있다면, 대부분의 부모는 주저 없이 자신을 희생할 거야. 네가 언젠가 어머니가 되면, 내 마음을 알게 될 거다.”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자, 시후가 나서며 말했다. “전 회장님, 굳이 이렇게 슬프게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나나코의 미래는 길고, 당신의 미래도 짧지 않을 겁니다.” 그러곤 술잔을 들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작은 약속을 하나 하는 건 어떨까요?”이토 유키히코가 호기심에 물었다. “은 선생님, 어떤 약속입니까?”시후는 답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물었다. “제가 교토에 있는 전 회장님의 집이 마음에 들어서요. 역사도 꽤 오래된 것 같던데요?”이토 유키히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300년의 역사를 가진 집입니다.”시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100일 잔치를 그 집에서 하는 걸로 하시죠. 그날 제가 꼭 참석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은 그 집의 소유권 증서를 준비해, 그 자리에서 저에게 주십시오.”이토 유키히코는 무심코 말했다. “은 선생님, 그 집을 원하신다면 지금 드릴 수도 있습니다. 왜 굳이 제 100세 생일까지 기다리시려는 겁니까. 더구나 제가 정말 100 세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데...” 말을 하다,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 그는 시후를 똑바로 바라봤다. 시후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이토 유키히코는 그제야 깨닫고,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 “은 선생님, 감사합니다...!”나나코도 시후의 뜻을 깨닫고, 곧장 아버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시후 군, 감사합니다...!”시후는 두 사람을 부축하지 않고, 나나코를 바라보며 엄숙히 말했다. “나나코, 오늘부터는 오직 무술에만 전념하십시오. 내가 약속하건대, 50년 뒤에도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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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8장

이토 그루브이 이 소박한 식사는, 그들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나나코는 이 순간부터 무술의 정상에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이토 유키히코는 곧바로 적합한 전문 경영인을 찾아, 그룹의 경영을 맡기고 자신은 뒤에서 감독하기로 마음먹었다. 전문 경영인이 그룹을 망하게 하지 않도록만 관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나코는 더 이상 가문의 사업 때문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부녀는 미래를 희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나코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앞으로 자신이 시후와 인연을 맺느냐 마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술을 수련해 긴 세월 동안 언제나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 날.유림정원의 안산은 아침 8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어제와 오늘, 그는 무려 20년 만에 가장 깊고 편안한 잠을 잤다.그의 옆에 누워 있던 오혜인은 어제 박혜정을 찾아간 후, 서울 곳곳을 돌며 단서를 찾느라 몸이 조금 지쳐 아직도 자고 있었다. 안산은 혼자 창가의 책상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한 시간쯤 지나, 오혜인이 깨어났다. 하룻밤을 지낸 뒤 그녀 역시 어제 아침과 똑같이 몸이 가뿐했고, 숨결마저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는 남편이 책상 앞에서 뭔가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 물었다. “여보, 뭘 쓰고 계세요?”안산이 돌아서서 말했다. “어제 일을 내가 기억나는 대로 적고 있어.”부인은 곧장 긴장해 물었다. “어때요, 뭐가 기억나세요?”안산이 진지하게 말했다. “거의 다 기억나는 것 같아.”“다 기억나요?” 부인은 놀라 물었다. “어제 하루 일을 전부 기억하신다고요? 아침에 있었던 일도요?”안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아침 일어나자마자, 당신이 내게 잠을 잘 잤냐고 물었지. 내가 수십 년 만에 이렇게 깊게 잔 건 처음이라고 했어. 또 전날 비행기 타느라 좀 피곤했던 것 같다고도 했지. 그때 당신이 놀라서, 내가 뭘 기억하냐고 물었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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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9장

오혜인은 감격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정말 잘됐다! 너무 잘됐어! 당신의 병세가 악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호전됐어요. 당신이 어제 일을 기억하는 게 나보다도 훨씬 분명하잖아요. 그럼 예전 기억도 분명 조금씩 돌아올 거예요. 설령 다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우리가 차근차근 되짚어주면 되니까요. 당신 기억력이 이렇게 좋아졌으니, 우리가 도와주면 분명히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서둘러 말했다. “가요! 어서 내려가서 이 좋은 소식을 충주한테 알려줘야지!”한편, 1층 식당에서는 안충주가 식사를 하며 제이크 한에게 말했다. “제이크, 어제 찍은 영상을 정상 시간 순서대로 편집해 놨어. 자네가 보기엔 아버지가 오늘 얼마나 기억하실 수 있을 것 같나?”제이크 한이 웃으며 말했다. “최소한 구체적인 부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 같아.” 제이크 한은 시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고, 이번에도 시후가 이 별장에서 뭔가 손을 썼으리라 생각했다....한편, 시후는 약속대로 차를 몰아 이씨 아주머니 댁에 도착했다. 클라우디아의 서울대학교 입학 등록에 동행하기 위해서였다. 클라우디아는 이미 증명서류들과 입학통지서를 준비해 두었다. 대학 생활을 앞두고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클라우디아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소년 시절부터 꿈꿔온 것이 바로 캠퍼스 생활이었으니 말이다.같은 시간, 서초화원의 릴리 또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하는 것은 대학 생활이 아니었다. 바로 시후와 다시 만나는 그 순간이었다.이 순간을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준비했고, 머릿속으로 수없이 리허설을 해보았다. 그녀 역시 증명서류와 입학통지서를 챙겨, 아침 일찍 한숙현에게 운전을 맡기고는 서울대역 근처에 있는 에그 옐로우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그곳은 학교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였는데, 릴리의 계획은 클라우디아가 등록을 마치고 나서 자신이 입학 등록을 하러 가는 것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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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0장

오늘 학교에 온 학생들이 무척 많았지만, 클라우디아의 등장은 곧바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클라우디아는 아름다운 외모와 좋은 체형에다, 이국적인 혼혈의 매력까지 지니고 있어, 어디를 가든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신입생과 재학생들 모두에게, 그녀의 존재 자체는 레전드급이었다.많은 남학생들은 그녀가 곧 서울대학교의 새로운 캠퍼스 여신 후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클라우디아 본인은 정작 자신이 이토록 주목을 받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곁눈질하는 남학생들에게 별다른 관심도, 특별한 부담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동갑내기 또래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가족을 잃은 아픔, 복수를 위해 모진 세월을 버텨낸 지난날, 그리고 결국 원수를 직접 응징했던 경험. 이런 모든 것들이 18~19세 또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그녀 눈에는, 여자의 외모에 마음을 빼앗겨 눈빛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남학생들은 모두 미성숙한 인간들일 뿐이었다.클라우디아는 유학생 신분이어서, 등록 절차도 전용 창구에서 따로 진행되었다. 10여 분 만에 클라우디아는 모든 과정을 마쳤다. 그러자 담당 직원이 학생증 발급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학생, 기숙사는 유학생 기숙사동 여자 301호입니다. 이 방은 2인실이고, 침구류는 이미 비치되어 있으니 바로 가서 정리하면 됩니다.”클라우디아는 감사 인사를 하고 시후 일행과 함께 유학생 기숙사로 향했다.그 시각, 릴리도 마침 시간을 맞춰 한숙현과 함께 학교에 도착했다.오늘 그녀는 전통 복장 차림이 아니라, 오버사이즈 미국식 티셔츠에 슬림 조거 팬츠, 최신형 조던 스니커즈를 착용했다. 긴 머리칼은 포니테일로 묶어, 청춘의 생기 발랄함이 물씬 풍겼다.서울대 남학생들은 클라우디아의 등장을 보고 들떠 있었는데, 곧이어 릴리까지 등장하자 설렘이 폭발했다.릴리의 얼굴은 동양적 미의 기준을 완벽하게 담아낸 듯해, 많은 이들에게 절대적인 여신상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두 명의 여신이 동시에 나타나자, 남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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