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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1장

깊은 밤, 한 척의 화물선이 부산항을 떠나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박상철은 선미에 서서, 밤빛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부산항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박상철은 시후의 아버지 은서준의 최측근이었지만, 20년 전 은서준은 그에게 두 가지 임무를 맡겼다. 하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뒤에도 반드시 시후의 안전을 지키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을 안예선의 지시에 따르라는 것이었다.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박상철은 겉으로는 LCS 그룹에서 집사로 지내왔지만, 실제로는 모든 행동이 안예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지난 10여 년 동안은 은충환조차도 자신의 손자 시후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이는 은서준이 사고를 당하기 전, 박상철에게 시후의 소식을 언제 은충환에게 알릴지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흐름은 안예선이 뒤에서 조율하고 있었다.안예선이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뒤에야, 박상철은 은충환에게 시후의 생존 사실을 털어놓았다. 은충환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손자 역시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 보상으로 그는 엠그란드 그룹을 인수했고, 박상철에게 100억 원 한도의 블랙카드를 건네 시후에게 전달하게 했으며, 그 뒤로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갑작스럽게 한국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해 박상철은 아쉬움이 컸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시후에게 아무 말없이 떠나온 것이었다.한편, 그 시각 시후는 LCS 그룹 옛 별장의 객실에 홀로 누워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박상철의 갑작스러운 이탈은, 시후에게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했다.박상철은 은충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 은서준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만약 박상철이 아버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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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2장

말을 마친 뒤, 은충환은 시후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시후야, 그런데 저 릴리라는 아가씨는 왜 너를 ‘선비님’이라고 부르느냐?”시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릴리는 전통 문화를 굉장히 좋아해서요. 잠시 후에 스스로를 ‘소녀’라고 부르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은충환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나이 먹은 사람으로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도통 이해하기가 어렵구나.”그러고는 다시 목소리를 낮춰 시후에게 말했다.“그런데 그 릴리라는 아가씨는 정말로 대갓집 규수 같은 품위가 있더구나. 나이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너와도 꽤 잘 어울렸을 텐데.”“네, 나이가 조금 어리긴 하죠……”시후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할아버지가 릴리가 이미 300년도 넘게 살았다는 걸 아신다면, 기절하실지도 모르겠군.’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릴리는 사 온 아침 식사를 하나씩 꺼내 놓고 있었고, 시후는 들고 있던 앨범을 은충환 앞에 내밀며 물었다.“할아버지, 이 앨범 보신 적 있으세요?”“앨범?”은충환은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어디서 난 앨범이냐?”“부모님의 예전 서재에서 발견했어요.”“그럴 리가……”은충환은 중얼거렸다.“시후 네 부모의 서재는 내가 몇 번이나 정리했는데, 안에 있는 책들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앨범은 본 적이 없어!”시후는 다시 앨범을 가리키며 물었다.“정말 아무런 기억도 없으세요?”은충환은 앨범을 받아 들고 살펴본 뒤 고개를 저었다.“처음 본다. 그리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이건 예전에 너희 부모 서재에 있던 물건이 아니다.”시후의 마음속에 의문이 피어올랐다.부모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 은충환은 늘 옛 별장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게 했고, 집 안의 물건들 역시 훤히 알고 있을 터였다.그런 할아버지가 이 앨범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 이 앨범은 누군가가 나중에 가져다 둔 것이 분명했다.시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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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3장

시후는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이중열에게 보내고, 음성 메시지를 하나 덧붙였다.“삼촌, 번거로우시겠지만 이것 좀 봐주세요. 제 아버지 옆에 있는 이 사람,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이중열은 곧바로 음성 메시지로 답장을 보내왔다.“도련님, 사진 속 이 사람은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영어 이름은 피터, 피터 주였습니다. 한국식 이름은 주진운이죠. 아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인교포 출신 골동품 상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련님 아버님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습니다.”시후는 이중열이 그를 안다는 말을 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고 전화가 연결되자 곧장 물었다.“삼촌, 주진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이중열이 말했다.“주진운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해외에서 골동품 사업을 해왔습니다. 주요 무대는 유럽과 미국이었고,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 쪽에서 활동이 많았습니다. 업계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집안이었습니다.”그러고는 덧붙였다.“도련님이 보내주신 사진 속 가게가 바로 주진운 집안이 뉴욕에서 처음 연 골동품점입니다. 집안의 첫 매장이라 규모도 작고, 겉보기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죠.”시후가 다시 물었다.“삼촌께서 마지막으로 주진운을 보신 게 언제입니까?”이중열이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꽤 오래전입니다. 제가 한인타운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시절에 몇 번 들른 적은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뉴욕에 머물지 않았던 것 같고, 자연스럽게 연락도 끊겼습니다.”그러다 이중열이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도련님, 혹시 주진운을 직접 찾으실 생각이십니까?”시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뉴욕에 한 번 가볼 생각입니다. 우선 그 골동품점부터 확인해 보고, 가능하다면 주진운을 직접 만나고 싶어서요.”이중열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그렇다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뉴욕 지리에 익숙하기도 하고, 주진운과도 몇 차례 얼굴을 튼 적이 있으니까요.”시후가 물었다.“시간은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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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4장

시후는 전화를 걸어 유가휘에게 오늘 밤 9시에 개인 전용기를 준비해 이중열을 서울로 보내 달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차량 행렬을 준비해 이중열의 자택에서 공항까지 직접 이동시키라고 요청했다.유가휘는 속으로는 못마땅했지만, 감히 반박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억지 미소를 지으며 모두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통화를 마친 뒤, 시후는 릴리와 함께 은충환에게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떠났다.돌아가는 길, 릴리가 시후에게 물었다.“선비님, 오늘 밤 바로 뉴욕으로 가신다면 서울에는 몇 시간 정도밖에 머무르지 못하실 텐데, 일정이 조금 촉박하지 않으신가요?”시후는 고개를 저었다.“서울에 가서 처리할 일은 많지 않아. 주된 목적은 외가 식구들을 한 번 만나 요 며칠 있었던 일을 대략 전하고, 혹시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떠올릴 수 있는지 확인하는 거니까. 그리고 장인어른, 장모님께 인사만 드리면 바로 출발해도 되거든.”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말씀을 듣고 보니, 선비님의 아내분도 마침 미국에 계시지요.”“응.”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카운트 에버윈이 오기 전에, 페이셔스 그룹의 배유현 회장에게 부탁해 미국에서 도움을 받도록 했으니까. 지금은 뉴욕에 있지.”잠시 말을 멈춘 뒤, 시후는 덧붙였다.“다만 이번에 뉴욕에 가는 건, 아직은 아내에게 알릴 생각이 없어.”릴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알리지 않으시려는 건가요? 부부가 재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시후가 담담하게 답했다.“이번 미국행의 목적은 피터 주의 행적을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부모님이 『구현경서』를 손에 넣게 된 경로를 다시 정리해 보는 데 있어. 폴른 오더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불분명해. 이런 상황에서의 미국행은 다소 민감하고 위험할 수 있으니까, 불필요한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아.”릴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상황을 보면 뉴욕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이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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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5장

시후는 손주도가 서울에서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서서 가교 역할을 해 준다면, 릴리가 말한 일은 반드시 성사될 터였다.게다가 릴리의 방법은 현실성도 매우 높았다. 공식적으로 국가가 보증에 나서고 Samson 그룹에 충분한 비중을 둔다면, 한국 내에서 Samson 그룹의 안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오시연에게 열 배의 배짱이 있다 해도, 공개적으로 한 국가와 맞서는 일은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설령 400년을 살았다 해도, 정말로 삶이 지겨워진 게 아니라면 말이다.하지만 시후가 지금까지 파악한 상황으로 보아, 사람은 오래 살수록 목숨을 더 아끼고, 오래 살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오시연은 400년을 살아온 만큼, 분명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을 터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지리산에서 그토록 초조하게 도망쳐 나올 리가 없었다.릴리는 시후가 이 제안에 이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손주도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손주도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승낙했고, 동시에 즉시 한국 쪽과의 소통에 착수했다.외자 유치는 한국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시후는 Samson 그룹의 한국 재투자가 모든 면에서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었다.손주도 역시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상부에 보고하고, 이 사안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손주도는 흥미로운 소식을 하나 받아 들었고, 곧바로 그 내용을 릴리에게 전했다.릴리는 흥분한 목소리로 시후에게 말했다.“선비님, 손 씨 쪽에서 이미 정리가 됐어요. Samson 그룹이 국내 투자 의사가 확실하기만 하면, 정부에서 최고 수준의 외국인 투자자 대우를 해 주고, 직접 보증에도 나서겠대요. 언론 자원도 총동원해서 대대적으로 장기간 밀착 보도해 주고, Samson 그룹 사람들과 투자 사업의 안전 역시 전면적으로 보장해 준다고 해요. 만약 Samson 그룹이 원한다면, 손 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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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6장

시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뚜렷한 수확은 없었어요. 중간에 누군가에게 되돌아가라는 말을 들었거든요.”안산은 놀라서 물었다.“되돌아가라고? 누가 너를 돌려보냈다는 거냐?”시후가 답했다.“외할아버지, 이야기가 좀 깁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말씀드릴게요.”안산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그래, 그래. 들어가서 이야기하자.”시후는 외가 식구들과 함께 별장 안으로 들어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이번에 지리산에 들어갔던 전 과정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박상철의 존재와 상황 역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시후가 청조암의 가짜 비구니에게 되돌아오라는 말을 들었다는 대목에 이르자, 모두가 크게 놀랐다.시후의 능력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데, 누군가가 그의 움직임을 미리 간파하고 지리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려웠다!더구나 은서준의 옛 부하직원으로, 거의 20여 년 가까이 시후를 묵묵히 지켜왔던 박상철이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었다는 점은 더욱 충격이었다.이야기를 다 들은 뒤, 큰외삼촌 안충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시후야, 박상철 집사가 정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네.”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전화는 계속 꺼져 있고, 행방불명됐어요.”“세상에……”안충주는 등골이 서늘해진 표정으로 말했다.“박상철 집사는 정말 깊숙이 숨어 있었구나. 왜 누구를 위해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후 너와 우리에게 악의가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라!”안산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박상철, 나도 예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아는 한, 은 서방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하던 인물이었는데… 어째서 다른 주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시후도 고개를 저었다.“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박 집사님과 함께한 시간도 꽤 길었는데, 그동안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어요. 지금 와서는 실마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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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7장

오후가 되자 안산은 큰아들 안충주, 둘째 아들 안태풍과 함께 손주도와 동행해 비밀리에 서울로 향했다.시후는 곧장 청년재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도 수련을 맡고 있는 홍선생 홍장청에게 전화를 걸어, 안세진과 이화룡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하라고 전했다.사실 시후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혹시 안세진마저도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닐지, 그런 불안이 스쳤기 때문이다.박상철처럼, LCS 그룹 전체를 총괄하던 집사조차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었다면, LCS 그룹을 대표하던 안세진 역시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치된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다행히도 안세진은 여전히 샹젤리 온천에 있었다.안세진을 직접 본 순간, 시후는 비로소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솔직히 말해, 박상철에게 또 다른 주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후에게 적지 않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한편으로는, 박상철이 아버지 은서준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였다는 점에서, 설령 자신이 그 충성을 강요할 입장은 아니더라도 마음 한 켠이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다른 한편으로는, 박상철이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자신을 지켜 왔고, 서울에서 재회한 이후에도 조건 없는 지지를 보내왔기에, 시후는 그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신뢰해 왔다.그런데 이제 와서야, 그가 진정으로 따르던 대상이 LCS 그룹도, 자신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지금 시후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혹시 또 다른 박상철이 자신의 곁에 숨어 있지는 않는지, 그 정체 모를 인물이 여전히 주변에 눈과 귀를 심어 두고 있지는 않는지 하는 점이었다.안세진과 이화룡은 시후가 LCS 그룹의 도련님으로서의 신분을 되찾았을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고, 그만큼 깊이 신뢰해 온 인물들이었다. 만약 이들마저 문제가 있다면, 시후가 받을 충격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였다.십여 분 뒤, 무도 수련에 몰두하고 있던 안세진과 이화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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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8장

시후는 이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그리고는 안세진을 향해 말했다.“부장님, 박상철 집사는 당분간 LCS 그룹을 떠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LCS 그룹의 총괄 자리는 공석으로 둘 수 없으니, 제가 부장님께 그 자리를 임시로 맡기고 싶습니다. 훗날 박상철이 돌아오면 자리는 다시 돌려주고, 부장님은 부집사로 남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계속 부장님이 맡게 될 겁니다.”안세진은 깜짝 놀라 급히 말했다.“도련님…… 제 일은 지금까지도 서울 한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맡은 일도 겨우 정리한 수준인데, 제가 어떻게 박상철의 자리를 대신합니까.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시후가 되물었다.“박상철 집사도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그건 아닙니다만……”안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박상철은 10년, 20년에 걸쳐 묵묵히 그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입니다. 제 능력은 그에 한참 못 미치고, 경력 또한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어렵습니다.”시후는 손을 내저었다.“저는 LCS 그룹의 책임자입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적합하다고 판단한 사람이 앉는 겁니다. 자격은 제가 부여합니다. 중요한 건, 부장님 본인이 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입니다.”“그건…”안세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에게 박상철의 자리는 평생 도달할 수 있을지 조차 장담할 수 없는, 경력의 정점과도 같은 자리였다.사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그 높이에 이를 수 있으리라 감히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다만 시후의 신임을 얻고 중용된 이후부터는, 묵묵히 곁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 보았을 뿐이었다.그마저도 최소 50이 넘어서, 충분한 경험과 경륜을 쌓은 뒤에야 가능하리라 여겼다.그런데 지금, 시후는 그 기회를 단번에 내밀고 있었다.안세진이 두려운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역량이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뿐이었다.그러나 시후의 눈빛이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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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9장

샹젤리 스파 호텔을 떠난 시후는 곧바로 청년재로 돌아갔다. 간단히 짐을 챙기는 한편, 장인 김상곤과 장모 윤우선에게 오늘 밤 다른 지역으로 급히 떠나 풍수를 봐줘야 하여 출장을 간다고 알리기 위해서였다.두 사람은 시후가 늘 여기저기 바쁘게 다닌다는 걸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었기에, 이 소식을 듣고도 별다른 놀라움은 없었다.다만 시후의 예상과 달리, 윤우선이 먼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은 서방, 하루 종일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만 하고 쉬지도 않으면 몸 상하는 거 아니니?”뜻밖의 관심에 시후도 조금은 놀라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밖으로 많이 다니긴 해도 실제로는 하나도 안 힘들어요.”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김상곤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우리 사위는 이제 풍수 대가야.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닌다지만, 부르는 사람들은 다 큰 회장님들이나 유명 인사들이라니까. 그런 사람들이 풍수 대가를 자기 친아버지보다도 더 공손하게 모시는데, 사위 먹고 자는 걸 허투루 하겠어? 절대 고생 안 시켜. 옛날 같았으면 멀리 가도 몇 명이나 들어주는 가마 태워서 모셔 갔을 거야!”윤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후를 바라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역시 우리 사위가 최고네. 돈 많은 사람들이 다 우리 사위한테 돈 쓰겠다고 줄 서는 거잖아!”그러더니 윤우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말투를 부드럽게 바꿨다.“은 서방, 내가 자네랑 상의할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시후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챙겨 주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머니, 무슨 일이신데요?”윤우선은 머뭇거리며 말했다.“그게 말이야…… 요즘 내가 좀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서. 자네가 또 멀리 나간다니까 혹시 돈이 필요할 때 자네랑 유나한테 연락해야 할까 봐 걱정돼서 말이야. 그러니까, 가기 전에 용돈을 조금 더 남겨주면 안 될까 해서.”김상곤은 윤우선을 흘겨보며 비아냥댔다.“윤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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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0장

김상곤은 시후가 윤우선에게 500만 원을 준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질투도 났던 것이다.물론 그는 서화 협회에서 일정한 수입을 올리고 있긴 했지만, 그 돈으로는 늘 빠듯했다.부회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협회 안팎으로 사람을 상대할 일이 잦았고, 접대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매일같이 컬리넌을 몰고 다니니 유지비 역시 일반 차량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 달 기름값만 해도 수백만 원에 육박하니, 매달 살림은 늘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김상곤은 윤우선처럼 얼굴이 두꺼운 편은 아니었다.자신이 서화 협회 부회장 자리에 오른 것도, 컬리넌을 탈 수 있게 된 것도, 청년재의 집에 살고 있는 것도 모두 시후 덕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마 시후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그런데 윤우선은 한마디로 500만 원을 받아냈다. 그 모습을 보니 김상곤의 속이 편할 리 없었다.그래서 김상곤은 슬그머니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한 번쯤은 형편이 어렵다고 넌지시 말해 보면, 시후가 뭔가 보태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윤우선을 몰아붙여 놓고, 곧바로 시후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체면이 도무지 서지 않았다.그 사이 시후는 망설이지 않고 모바일 뱅킹으로 윤우선에게 500만 원을 송금했다.예전에는 윤우선에게 불만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의 시후는 단순했다. 괜히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적당히 예의를 지키며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500만 원 정도라면 아까울 것도 없었다.잠시 후 윤우선의 휴대전화로 입금 알림이 울렸다.500만 원이 찍힌 화면을 보는 순간, 그녀는 손발을 흔들며 들뜬 표정으로 시후에게 말했다.“아이구, 은 서방! 돈 잘 받았어. 정말 고맙다, 우리 사위!”시후는 담담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어머니, 약속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없는 동안엔 장인 어른과 절대 다투시면 안 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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