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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1장

소민지의 마지막 발언은 노지성의 등골을 단숨에 식히며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게 만들었다.소민지가 하는 말이 허풍일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성그룹이란 회사는 소민지 같은 거대 재벌에게 굳이 반드시 인수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에 만약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 회사를 붙잡고 예순, 예순다섯, 일흔… 그때까지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게다가 솔직히 말해 그는 70세가 되었을 때 회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70살이 되었을 때 지성그룹이 어떤 상태일지. 그동안 한국 차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기업 가치가 올라갈지, 떨어질지. 아니면 몇 년 버티지도 못하고 사라질 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당장 회사를 팔 수 있다면, 그는 최소 7백억 원을 손에 쥔다. 지분 양도세 20% 정도를 내더라도 실수령액은 560억 원 이상.그 금액이면 자신도, 아들도, 손주도 평생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이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노지성의 마음속에 있던 갈등이 단번에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물고 결단을 내렸다.“회장님께서 이렇게까지 명확히 말씀해 주시니 저도 더는 흥정하지 않겠습니다. 7백억 원, 그 조건으로 인수하시죠!”소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좋습니다. 그럼 바로 계약금을 송금하겠습니다. 계약금이 확인되면 제가 보낸 전문가들이 지리산 차밭 현장을 즉시 방문할 겁니다. 현장 총괄에게 즉시 작업 중단, 그리고 전면 협조 지시를 내려 주세요.”“물론입니다!”노지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계약금만 도착하면 바로 회장님 지시에 따라 전원 철수 및 준비시키겠습니다!”그에게 있어 계약금이 들어오는 순간, 지성그룹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소민지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은 부담이 아니라 당연히 따라야 할 절차였다.소민지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말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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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2장

현장 책임자는 퇴근하려고 막 차에 올라탄 순간 노지성의 전화를 받은 뒤, 즉시 방향을 돌려 지성 차밭 정문으로 달려갔다.그 시각, 시후 역시 소민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전화가 연결되자 소민지는 예의를 갖춰 말했다.“은 선생님, 지성그룹에서 조금 전 계약금을 수령했습니다. 이제 인수는 확정입니다. 최종 거래 금액은 7백억 원으로 합의됐습니다. 제가 이미 현장 책임자에게 은 선생님의 차량 번호까지 전달해 두었으니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도착하시면 전적으로 선생님 지시에 따를 겁니다.”시후는 그녀의 일 처리 속도에 깜짝 놀랐다. 시후는 소민지처럼 이렇게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시후는 말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번 금액은 내가 진 빚이니 당장 송금은 못 하더라도 이 일이 마무리되면 방법을 찾도록 하죠.”소민지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은 선생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성그룹 인수는… 제가 드리는 작은 정성일 뿐입니다. 선생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영광입니다.”시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은혜는 내가 반드시 갚겠습니다.”그 한마디에 소민지의 가슴은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시후의 이런 말은 7백억이 아니라 7천억을 들여서라도 듣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시후는 더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지금 지리산 쪽으로 가야 하니 이만 끊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그는 차를 돌려 지성그룹 차 밭이 있는 옛 이랑산이자 현재 지성산 방향으로 향했다.시후가 말했다.“다 처리했어. 이제 바로 지성산으로 올라가면 되는 거야.”릴리는 눈가가 붉어진 채 말했다.“선비님… 정말 감사합니다…”시후는 고개를 저었다.“이 정도로는 고맙단 말도 필요 없어. 너는 내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잖아.”그리고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네가 차를 좋아하니까 이 회사는 그냥 네게 넘길 생각이야. 혹시라도 네가 직접 경영하기 부담스럽다면 내가 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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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3장

시후는 차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릴리가 이른바 ‘어머니 나무’라 불리는 그 차나무에 대해 품고 있는 특별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시후가 보기에 그 나무는 릴리에게 하나의 정신적 버팀목이었고, 그것도 300년이라는 시간을 관통해 이어진 버팀목이었다. 그렇기에 시후는 언젠가 다시 그때 마셨던 차의 맛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 릴리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그래서 시후는 릴리에게 말했다.“지성그룹을 인수하는 것이 마무리되면, 이곳은 네 육종 기지로 써도 돼. 네 경험을 살려서 더 나은 차 품종을 키울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보자.”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육종이라는 건 정말 번거로운 일이에요. 요즘 말하는 스마트 육종은 잘 모르겠고, 전통적인 인공 육종으로는… 아무리 빨라도 10년은 지나야 성과가 나올 거예요.”시후는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 릴리 네가 성공하면 그건 세상에 있는 모든 차 애호가들의 복이지. 설령 못 하더라도 상관없어. 넌 이미 그 차의 맛을 직접 봤으니까. 그 기억은 평생 네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야.”“네…”릴리는 살짝 미소 지었다.“선비님 말이 맞아요.”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후는 차를 몰아 지성산 기슭에 위치한 지성그룹의 생산 기지로 돌아왔다.이미 공장은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정문 앞에는 안경을 쓴 점잖은 인상의 중년 남성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의 옆에는 조금 전 시후와 대화를 나눴던 경비원이 함께 있었다.경비원은 중년 남성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김 공장장님, 여기서 누구를 기다리시는 겁니까? 설마 회장님이 현장 시찰 나오시는 겁니까?”김 공장장으로 불린 그 중년 남성의 이름은 김진천으로, 이 가공 공장의 책임자였다.경비원의 질문을 들은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닙니다. 귀한 손님 두 분을 기다리는 중이지요.”김진천은 노지성의 핵심 측근이었다.지성그룹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녹차 생산,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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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4장

바로 그때 경비가 먼저 도로 한가운데로 나가 시후의 차를 막아섰다.“아니, 이 젊은이가 또 왔네? 내가 아까 말했잖아. 먼저 그룹 담당자들과 미팅부터 잡아야 한다니까?”김진천은 깜짝 놀랐다. 경비가 먼저 VIP에게 말을 걸었을 뿐 아니라, 말투를 보니 두 사람이 이미 한 번 다녀간 적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그러자 그는 급히 경비를 옆으로 끌어당긴 뒤, 시후에게 공손히 물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엘에이치 그룹에서 오신 전문가분이십니까?”시후는 옆에 선 릴리를 가리키며 웃었다.“전 아닙니다. 진짜 전문가는 이분이에요.”경비는 더 혼란스러워졌다.“아니, 두 사람이 언제부터 전문가가 된 거지?”김진천은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이 분들은 VIP입니다. 우리 공장 사업을 점검하러 오신 분들인데, 왜 끼어들어요? 어서 문 열어드려요!”경비는 속으로 의아해했지만, 공장장의 지시인 만큼 서둘러 정문을 열었다.김진천은 다시 시후를 향해 말했다.“두 분, 저는 이 공장의 책임자 김진천입니다. 이곳의 업무는 전부 제가 총괄하고 있습니다. 오늘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실지 말씀만 주시면, 성의껏 협조하겠습니다.”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그럼 우선 자리를 마련해주시면 앉아서 이야기를 좀 나누도록 하시죠.”김진천이 말했다.“물론입니다. 제 사무실로 모시겠습니다.”시후는 다시 물었다.“공장장님, 차량은 가져오셨죠?”김진천은 급히 답했다.“예, 가져왔습니다.”“좋습니다. 그럼 앞에서 안내해 주세요.”“알겠습니다!”김진천은 검은색 아우디에 올라타 앞장섰고, 시후와 릴리는 그를 따라 공장 사무동으로 이동했다.사무실에 도착하자, 김진천은 차를 준비하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신 걸 보니, 특별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신 것 같습니다?”시후는 담담히 말했다.“이곳의 찻잎 재배 기지가 지성산을 중심으로 조성됐다고 들었습니다.”“맞습니다.”김진천은 힘주어 설명했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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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5장

김진천의 눈에 시후와 릴리는 그야말로 구세주와도 같았다. 그러니 두 사람이 산에 오르겠다면, 당연히 전폭적으로 협조해야 했다.그래서 김진천은 두 사람에게 답했다.“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조명 장비랑 인원을 좀 준비해서 같이 올라가겠습니다!”그러나 시후는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직은 비공개 조사 단계라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요. 오늘은 전부 퇴근시키고, 산에 있는 인원과 경비도 전부 철수시키세요. 그리고 지성산의 모든 CCTV도 꺼 주세요. 저희 둘만 올라가겠습니다.”평소 같았으면 김진천은 이런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지성산의 모주는 지성그룹의 핵심 자산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접목이나 번식을 위해 가지 하나만 유출해도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내일 계약이 체결되면, 모주를 포함한 모든 자산은 엘에이치 그룹의 소유가 될 테니 김진천이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그래서 김진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산을 지키던 경비원들은 모두 철수했고, 모든 감시 카메라도 전원이 꺼졌다.모든 준비가 끝난 뒤, 김진천은 조심스럽게 말했다.“밤에 산에 오르면 길이 불편할 수 있는데, 늦은 시간에 안내자 없이 오르시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안내할까요?”시후는 릴리를 바라봤다. 릴리가 내키지 않는 듯하자 시후는 이렇게 말했다.“괜찮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올라가겠습니다. 공장장님은 아래에서 다른 사람이 산에 오르지 못하게만 해 주세요.”김진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그럼 두 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산에 올라가십시오. 저는 나머지를 처리하겠습니다!”김진천은 강력한 불빛이 나오는 손전등 두 개를 건네고, 두 사람을 등산로 입구까지 안내한 뒤 발길을 돌렸다.시후와 릴리는 산을 오르며, 산에 정말로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지성산은 오랫동안 지성그룹의 관리를 받아와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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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6장

“그리고 예전의 차나무들은 지금처럼 좋은 품질을 갖추지 못했어요. 요즘 찻잎은 한 장 한 장이 도톰하고 윤기가 뛰어나며, 색깔도 뛰어나죠. 무엇보다 병충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 상품으로 쓸 수 있는 수확할 수 있는 비율도 매우 높아졌어요. 애초에 자라는 양 자체가 많은 데다 손상되는 잎은 적으니, 전체 생산량은 옛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진 거죠.”“최근 몇 년 동안의 차나무 육종 방향은 전부 수확량, 외형, 내병성 위주예요. 비료와 살충제를 첨가하니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자연스럽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죠.”릴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화제를 바꿨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재배한 찻잎은 맛이 점점 떨어져요. 그래서 만약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최근과는 반대 방향으로 품종을 키워보고 싶어요. 옛날 그 맛을 되찾기 위해서요. 물론, 그 전에 다만 먼저 좋은 종나무를 찾아야 해요. 제가 말하는 좋은 종나무라는 건, 요즘처럼 과학적으로 개량된 품종이 아니라, 옛날 차나무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이어받은 나무를 뜻하는 거고요.”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천왕봉에도 가려는 거잖아. 그 어머니 나무가 있던 곳이면, 비슷한 종나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릴리는 기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예전에 그곳 차농들에게 접붙임 방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거든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면, 꼭 몇 그루 가져와서 여기서 재배해보고 싶어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산 정상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거대한 차나무가 더욱 가까워질수록 릴리의 기대감은 더욱 커져갔다.3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차나무를 알아보았다.그녀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고 시후가 물었다."이 나무가 맞는 거지?"“여기예요…”릴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이 나무예요. 상처까지도 기억나요.”릴리는 말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수백 년이라는 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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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7장

릴리에게는 늘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시후가 어느 날 밤, 반지에 이끌려 서초화원의 별채로 옮겨진 그 순간부터, 왜 계속해서 자신에게 예상 밖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말이다.시후는 자신이 가진 모든 약의 일부를 릴리에게 나눠 주었고, 장시우를 비롯한 이들에게 더 긴 수명을 약속했다. 게다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자신과 함께 멀리 이곳까지 동행해 주었다.릴리는 그저 지성산에 들러 부모에게 인사만 드릴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후는 아예 지성산을 소유한 지성그룹을 통째로 인수해 버렸고, 앞으로 자신이 부모를 기릴 때마다 불편함이 없도록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겠다고까지 했다.릴리 역시 셀 수 없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시후의 행동은 릴리의 눈에 금전적 가치를 초월하는 것 같았다. 시후가 자신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릴리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시후는 분명 릴리를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후의 목숨을 릴리가 구해 준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겪어 온 그녀의 험난한 삶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 감정은 자연스레 연민이 되었고, 연민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다.300년을 살아온 릴리에게 부모를 기리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마지막으로 잠든 땅에 직접 와서 흙을 만지고, 몇 마디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오랜 세월 쌓인 고단함과 그리움이 비로소 머무를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릴리는 땅에 무릎을 꿇고 약 30분 동안 조용히 부모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발밑의 흙을 내려다보며 잔잔하게 미소 짓고는 돌아서서 시후에게 말했다.“선비님, 이제 가요!”시후가 말했다.“날이 이미 어두워졌어. 부모님 곁에 조금 더 있고 싶다면, 오늘 여기서 하루 묵을까? 차에 텐트가 있는데. 내가 차에서 텐트 가져올게.”릴리는 고개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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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8장

옆에서 시후가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김진천 공장장님. 이곳은 공장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저희는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김진천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두 분, 이미 밤도 깊었는데 이렇게 서둘러 떠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식당에 술과 음식을 준비해 두었으니, 간단히 식사라도 하시고 숙소는 제가 알아서 마련해드리겠습니다!”“괜찮습니다.”시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려해 주신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희는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더 머물 수가 없습니다.”김진천은 두 사람의 뜻이 확고하다는 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더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시후는 김진천과 악수한 뒤 릴리와 함께 차에 올랐고, 어둠 속에서 차를 몰아 지성그룹 공장을 떠나 천왕봉을 향해 출발했다.릴리가 예전에 지냈던 곳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천왕봉에서 말하는 호수는 사실상 하나뿐이었고, 이름은 청학호수였다. 지도만 봐도 쉽게 검색할 수 있을 정도였고, 현재는 천왕봉의 관광지 중 하나로 분류돼 있었다.다만 천왕봉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산림공원이나 자연보호 구역이었기 때문에, 청학호수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었다. 인지도가 낮다 보니 개발 속도도 느렸고, 호수 주변에 자리 잡은 몇몇 오래된 마을들 역시 아직 이전되지 않아 관광 개발은 더욱 더딘 상태였다.시후와 릴리는 한 시간가량을 달려 청학호수가 있는 산기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산을 따라 이어진 도로가 하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차로 올라가면 호수 북쪽 기슭의 몇몇 마을까지 바로 닿을 수 있었다.이 길은 그 마을들이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도로이기도 했다.천왕봉은 평균 해발이 약 1500미터에 달했다. 두 사람이 차를 몰아 산길을 오르자 고도는 금세 2000미터 안팎으로 올라갔다. 원래도 자연에 가까운 지역인데다 고도가 높다 보니, 머리 위로 펼쳐진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그 풍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릴리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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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9장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일단 차를 세워 두고, 걸어서 내려가자.”“좋아요!”릴리는 벌써부터 들뜬 기색이었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살았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했고 또 가장 그리워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시후는 릴리가 알려 준 대로 마을 입구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캠핑 장비를 챙겨 들고 릴리와 함께 길가에서 비탈을 내려와 호수 가장자리로 향했다.릴리는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 호숫가를 걸었고, 마침내 예전에 어머니 나무가 자라던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그녀는 물가에서 약간 높은 곳에 있는, 휑하게 드러난 황토 지대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예요. 저 자리가 바로 예전에 어머니 나무가 자라던 곳이에요.”시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빛 아래 주변은 온통 푸른 풀과 나무로 뒤덮여 있었지만, 약 100미터쯤 되는 이 땅은 마치 민둥산처럼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이상하네. 왜 저기만 아무것도 안 자라지?”릴리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선비님, 같이 가서 한번 볼까요?”“그래.”시후는 망설임 없이 답하며 릴리와 함께 그 아무것도 없는 땅 위로 올라섰다.그 자리에 서자 시후는 더욱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릴리, 여긴 해발이 높아서 기온이 적당한데, 사계절 내내 비교적 온화하고, 일조량도 충분하니 식물이 자라기에 조건이 꽤나 좋아.”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그런 곳이라면 어느 땅이든 야생화나 야생초들이 자라야 하는데, 예전에 어머니 나무가 자랐던 이곳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릴리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저도 너무 이상해요. 예전에는 이곳이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호수 주변의 땅은 사계절 내내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르고 울창했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곳은 전부 무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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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0장

시후는 릴리의 얼굴에 스친 놀란 표정이 평소와 달리 묻어나는 긴장된 것을 보고 곧장 물었다.“릴리, 이게 뭐라는 거야?!”릴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 하늘에 빠르게 퍼져 가는 먹구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이… 이 먹구름은 겉으로 보면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그 안에 흐름이 있어요. 하늘의 기운이…… 마치 진괘의 상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진괘의 상?”시후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저 구름이 정말 하늘의 징조라는 거야?”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진괘의 상은 본래 매우 복잡해요. 옛사람들이 말하길, 우레가 오면 사람들은 놀라 떨지만, 이내 웃으며 말하게 되고, 우레가 백 리를 뒤흔들어도 제사에 쓰는 숟가락과 술잔은 잃지 않는다고 했죠. 이 상이 나타났다는 건, 주된 흐름과 맞서는 흐름이 모두 진괘의 상으로 겹쳐 있다는 뜻이에요. 갑작스러운 일이 터지되, 반드시 천지를 뒤흔들 만큼 큰일이라는 의미예요!”시후는 더욱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누가 이런 징조를 만들어 낸 거야? 하늘의 구름을 가지고 이런 상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다만 이 진괘의 상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게 사람이 일부러 만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사람이 아니라면……”시후가 되물었다.“그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거라는 거야?”릴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직 그 깊은 뜻까지는 읽어내지 못했어요……”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하늘의 먹구름은 계속해서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두꺼운 구름층은 마치 하늘 한가운데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열린 것처럼, 중심에서 끝없이 솟구쳐올라 주변을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호수 일대를 가득 메워 버렸다.릴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상이 너무 빨리 변해요…… 이건…… 이건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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