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의 상태가 점점 안정되어 가던 무렵, 시후와 릴리는 차를 몰아 불사골에 도착했다.이곳은 예로부터 차(茶)로 이름을 알린 도시로, 지금으로부터 천 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품고 있었다.조선 시대에는 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차가 전국으로 실려 가던 옛 길목이자 교역지였고, 현재 역시 한국에서 손꼽히는 전통 차 산지 가운데 하나다.릴리는 조선을 떠났던 그 해, 부모님의 유골 단지를 가지고 마지막으로 이곳 불사골 자락에 조용히 묻었다.삼백 년 넘게 이 땅에 돌아오지 않았기에 릴리는 이 곳의 옛 모습을 거의 기억해낼 수 없었다.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당시 부모님의 유골만을 들고 이 지역에 와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풍수 좋은 작은 산자락을 골라 두 개의 유골단지를 급히 묻었다고 했다. 관을 마련할 여력도 없었고, 묘를 세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묘비조차 세우지 못한 채 떠났던 것이다.따라서 지금 와서 300년도 더 전에 묻었던 두 개의 유골단지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다행히 릴리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그 유골단지를 묻은 곳은 당시 이랑산(二郎山)이라 불리던 전통 차 산지였고, 그 산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차나무 한 그루 아래였다는 것이다.문제는 현대 지도 어디에서도 이랑산이라는 지명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시후는 차를 몰아 불사골 시내로 들어가 릴리와 함께 지역의 학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여러 기록을 대조한 끝에 알게 된 사실은 이랬다. 불사골 외곽에는 과거 ‘이랑산’이라 불리던 산이 분명 존재했지만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일제강점기 때 한 차례 개명, 해방 이후 지역 정비 과정에서 또 개명, 70년대 개발 계획 때 다시 개명, 마지막으로 20여 년 전, 지역의 한 대기업이 산 전체를 인수하면서 지성산(志成山)으로 이름이 최종 변경되었다.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산과 주변 넓은 구역은 조선 후기부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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