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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1장

시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네. 수고했어요.”…오시연의 비행기가 멜버른에 착륙했을 때, 시후와 릴리가 탄 비행기는 이미 김포공항을 이륙해 사천공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비행기가 이륙해 서쪽으로 향하는 동안, 릴리에게서는 조금 전까지의 활발함과 귀여운 장난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시후의 어깨에 잠시 기대더니 곧 초점을 잃은 눈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시후는 릴리의 변화가 느껴졌고, 그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지금 그녀보다 부모님을 그리워하지는 못할 것이다. 300년 넘게 떠나 있던 곳에 이제서야 다시 발을 디디려는 순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한 시간 남짓 후, 비행기는 사천 공항에 착륙했다.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릴리의 다리는 자신도 모르게 후들거렸다. 시후의 팔을 붙잡는 릴리의 힘은 분명히 강해졌고, 시후는 릴리의 체중 상당 부분이 자신에게 실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긴장과 감정 탓에 힘이 빠진 듯했다.시후는 자연스럽게 릴리를 부축하며 공항을 빠져나왔다.공항 밖에서, 시후는 안세진이 준비해 준 위장 신분으로 SUV 한 대를 렌트했고, 차에 달린 블랙박스를 바로 뜯어냈다. 그리고 릴리와 함께 하동군 악양면으로 향했다.공항을 벗어난 뒤 시후가 물었다. “릴리, 진주에는 와본 적 있어?”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저를 하동군의 외조부모님 댁으로 보내셨거든요. 그때 외할머니 손잡고 여기 한 번 온 적이 있어요. 딱 한 번요.”그녀는 창밖을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선비님, 300년 전의 남쪽 지방은 길이 험했어요. 산 넘고 산 넘어 다녀야 했고, 길도 좁았죠. 진주까지 오는 건 큰 여행이었어요.”시후는 곧장 물었다. “근데 왜 말투가 또 바뀌었어? 우리 약속했잖아.”릴리는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 오니까, 300년 전 그때로 돌아온 것 같아서요. 외조부모님 댁에서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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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2장

오삼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릴리는 이를 악물었다.외삼촌 네 명과 그 후손들이 모두 몰살당한 사실을 떠올리자 릴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고 곧이어 왈칵 쏟아졌다.시후는 릴리 외가 친척들이 이런 운명을 맞이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믿기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 시절엔... 정말 목숨이 풀잎처럼 가벼웠던 때지... 수백 년, 수천 년 이어온 집안들이 단번에 사라진 경우가 한둘이 아닐 거야...”릴리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 모든 건 역적 오삼규 때문이에요!” 그런 뒤 릴리는 평소와 다르게 날카롭고 강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우리 임씨 집안은 대대로 의롭게 살았어요. 대대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아버지는 글 읽는 걸 내려놓고 군에 들어가 투쟁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어요. 그런데 오삼규라는 자는 청군을 들여오고, 왕조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임금을 자기 손으로 죽인 자예요! 그러니 제 기준에서 그 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나 다름없죠.”시후는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매국노는... 사실 이완용이 더 많이 욕을 먹는 편이긴 해.”릴리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오삼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 돋는 사람이에요. 악랄함은 이완용보다 더 할 거예요.” 그리고 릴리는 뒤이어 말했다. “오삼규는 청군이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며칠만 함께 싸워봐도 얼마나 잔혹한지 알 수 있는데, 그걸 수십 년 지켜본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청군을 들여와 백성들을 도륙하도록 내버려뒀어요... 그러니 그 인간의 심성이 얼마나 사악한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죠!”시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라를 팔고, 또 다시 반란을 한 인간이지. 역사에서 그런 인간은 손에 꼽을 거야.”릴리는 큰 숨을 쉬고 힘없이 말했다. “300년이 넘었는데도... 오삼규에 대한 마음은 아직 풀리지 않아요.”시후는 조용히 위로했다. “오삼규는 벌써 죽은 지 오래고, 집안도 전부 처형 당했잖아. 그걸로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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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3장

릴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생각했어요. 도망만 다니지 말고, 그냥 반지를 오시연에게 넘겨서 저를 쫓아오는 걸 끝내게 만들까... 그렇다면 오시연이 나를 쫓지 못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면 그래도 평범하게... 조용히 살 수 있을까 싶어서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오시연은 제 아버지를 죽게 만든 범인과 다를 게 없어요. 제가 그런 인간에게 타협한다면, 오삼규가 청군을 들여왔던 거랑 뭐가 다르겠어요? 그냥... 적을 내 부모로 인정하는 거잖아요.”릴리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생각을 고치고 나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남자고 다짐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오시연에게 굴복하지 말자고요. 제가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먼저 쓰러질 테니까요. 저는... 마지막에 웃고 싶었어요.”시후는 자신 있게 말했다. “릴리, 걱정 마. 분명히 오시연보다 오래 살 거야.”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비님... 선비님은 분명 저보다 더 오래 사실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제 유골을 부모님 곁에 묻어주세요. 그러면 제 삶은... 정말 만족스러웠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시후는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백회단의 제조법만 찾으면 너도 천 년까지 살게 해줄 거야.”그러자 릴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400년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천 년이라니... 저는 상상하기도 싫어요. 선비님이 정말 그 약을 만들 수 있어도... 저는 더는 먹지 않을래요...”그 말에 시후는 조심스레 릴리를 훔쳐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지친 사람만이 가진 깊은 그늘이 서려 있었다.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릴리의 표정에 시후는 안타까움을 느꼈다.시후는 릴리가 지난 300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래 살면 경험이 많다고 쉽게 말하지만, 릴리가 겪은 일들은 그 어떤 사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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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4장

300년 만에 다시 악양면에 도착했을 때, 릴리는 눈앞의 풍경이 믿기지 않았다. 섬진강은 여전히 섬진강이었지만 수백 년의 개발로 물가의 모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활기찬 거리 위에 서 있는 릴리는 기억과 현실을 도저히 연결할 수 없었다. 다행히 산들의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반쯤 깎인 산도 있었지만 지형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릴리는 산들을 바라보다 위치를 파악했고, 릴리 아버지의 의관묘는 산을 넘어서 거북 등껍질처럼 생긴 산 뒤쪽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둘은 차를 마을에 세워두고 릴리가 준비한 커플 운동화와 커플 장비를 착용했다. 그리고 천천히 산길을 향해 걸었다.시후는 출발과 동시에 수련법을 시행하여 자신의 영기 흔적을 완전히 감췄다. 그러니 효과가 확실히 나타나는 것 같았다.다행히도 악양면 주변 산들은 높지 않아 등산 난이도는 낮았다. 길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섬진강의 탁 트인 전망이 어우러져 젊은 여행객들과 등산객이 몰려오고 있었다.시호와 릴리는 산길로 향하던 중 등산복을 입은 수많은 아웃도어에 애호가들을 마주쳤다. 산기슭에 다다르자 길은 좁아졌고 등산객의 수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릴리는 왼쪽, 오른쪽을 계속 살피며 점점 숨이 가빠질 만큼 흥분해 있었다.산길에 도착하자 릴리는 시후에게 속삭였다. “여기예요... 300년 전에 제가 올라갔던 길... 그때도 사람들이 밟고 다니던 작은 길뿐이었는데 아직 이 길이 남아 있다니...”시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산길은 누가 먼저 잘 닦아 놓으면 산이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아.”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길은 남았지만... 느낌은 너무 달라요. 예전엔 조상 묘 보러 오는 사람들만 다녔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도 많고 길도 전부 정비돼 있고... 예전보다 사람도 훨씬 많아졌네요. 예전에는 이곳에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근처 산에는 마을 사람들의 묘가 있어서 이 길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사실상 친척들에게 경의를 표하러 오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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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5장

시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릴리, 난 그렇게 무모하지 않아. 최소한 판단은 하고 움직여.”릴리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둘은 지리산 자락 첫 번째 능선을 지나 두 번째로 큰 거북등 모양의 정상 방향으로 올라갔다. 등산객이 많은 코스라 사람도 꾸준히 있었다.릴리는 조용히 설명했다. “여기가 거북등 산이에요. 예전에 저희 외가 조상들이 이 일대를 전체 선산으로 삼았어요. 풍수로 보면 이 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형국이라서... 마을에서는 아주 귀한 자리라고 불렸죠. 그래서 외할아버지의 조상들이 이산의 조상의 묘소를 정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줬다고 들었어요.”시후는 놀란 듯 물었다. “산 전체가 너희 외가의 선산이었어?”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래는 집안 후손들에게 복을 주고 재운도 터야 하는 자리였어요. 하지만 나라와 시대가 무너지면 땅의 기운도 같이 쇠하기에... 지금은... 예전 같은 힘은 없을 거예요.”릴리는 말을 마치고 시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끌어 계단길을 벗어나 조금 평평한 공터로 향했다.그곳엔 사람들이 머물다 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못자국, 패인 텐트 자리, 정리된 자리까지 전부 최근에 사람이 머물렀다는 표시가 있었다.시후는 이곳이 요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라는 걸 금세 알아챘다.그때 릴리의 시선이 멀리 있는 오래된 토종 소나무 한 그루에 머물렀다. “선비님, 저 소나무 보이시죠? 저게 원래 저희 외가 묘역의 중심 나무였어요. 아버지 의관묘도... 저 소나무 북서쪽 능선에 있었죠.”시후는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묘지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비석은 없어졌어?”릴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원래 있었어요. 제가 직접 맡겨 만든 비석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 유품을 함께 묻어두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외가의 모든 묘비가 수십 년 전에 전부 파괴됐다고 들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도 파헤쳐졌고요. 누가 그랬겠어요? 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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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6장

시후가 진지하게 말한 탓인지, 릴리는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선비님, 그런 걸로는 오시연을 죽일 수 없어요. 그리고 스승님의 수련장소가 어디인지는 현재 오시연만 알고 있습니다. 선비님,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시고 오시연의 목숨을 여기서 끝내지는 마세요.”시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야. 그런 무기를 들고 들어와도 여기서는 못 쓰지.” 릴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선비님, 여기 근처엔 CCTV도 없는데... 저... 잠깐 다녀와도 될까요? 외가 조상님들께 인사 좀 드리고 싶어서요.”시후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다녀와. 여기서 기다릴게.”릴리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소나무가 섞인 숲길 안으로 들어갔다. 5분쯤 지나 눈가가 조금 붉어진 릴리가 돌아왔다.그때 등산객 몇 명이 장비를 메고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 좋다! 평지도 넓고 뷰도 좋네. 오늘 여기서 잘까?”“좋지!” 젊은 여성이 말했다. “먼저 텐트 치고 자리 맡아두고 능선 좀 둘러보자! 저녁에 돌아와서 저녁도 먹고!”다른 여자 등산객이 말했다. “야, 호진이랑 다른 애들에게 연락해서 여기 위치 알려주고, 멤버들 다 데려오라고 하자.”“좋아!” 젊은 여성이 미소 지으며 외쳤다. “오늘 밤은 진짜 재밌겠다! 일단 텐트 치기 좋은 곳을 빨리 찾자. 그럼 난 장작 가지러 갈게!”릴리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시후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자기야, 나도... 여기서 캠핑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장비 사서... 우리도 같이 어울리면 안 될까?”그러더니 릴리는 시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등산객들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도 합류해도 될까요? 캠핑은 처음이라서요!”그러자 여자 등산객이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대신 텐트 없으면 사오셔야 해요! 같이 캠핑하시면 재밌을 거예요!”릴리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방 다녀올게요!”그러나 시후가 급히 릴리의 손목을 잡았다. “여보야, 여긴 산 중턱이고 바람도 꽤 세서 강풍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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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7장

게다가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시후는 릴리를 지킬 수 없을 지도 모른다.시후가 계속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릴리가 먼저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요 자기, 여기는 이런 잔잔한 날씨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하루만 자고 내려올 겁니다. 정말 괜찮아요. 아무리 강풍이 불어도 우리에겐 안 올 거예요.”시후는 릴리가 아직 이 아이디어에 매달려 있자 일부러 말했다. “여보야 그럼 이렇게 하자. 먼저 산으로 내려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좋아요!” 릴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시후 팔에 팔짱을 꼈다. “서둘러야 해요. 자리 금방 차거든요!”둘은 천천히 하산했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조용한 구간에서 시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릴리. 아까 말한 거, 진심이야?”그러자 릴리는 살짝 시후를 보며 말했다. “선비님, 저한테 여보라고 불러달라고 말씀드렸죠. 그 부분 계속 잊으시네요.”시후는 잠시 멈칫하다가 마지못해 자연스러운 톤으로 말했다. “그래... 여보야. 정말 저기서 잘 생각이야?”릴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럼요. 오시연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면 저희가 움직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어요. 오시연은 우리가 수십 미터 앞에서 캠핑하고 있을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 할 겁니다.”시후는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내가 기운을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어떻게 해? 그럼 바로 잡혀가.”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선비님, 글로리아에게 배운 그 심법은 아무나 간파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선비님도 처음엔 글로리아가 숨어 있던 걸 전혀 못 느끼셨잖아요.”시후는 확신이 없는 듯 말했다. “수련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영기를 몸 안에 가두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거지. 그래도... 모르는 거잖아.”“아니요.” 릴리는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오시연이 저보다 강한 건 맞아요. 하지만 자기랑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실력은 아니라고요. 그리고 글로리아가 이걸로 자기를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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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8장

시후는 릴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연약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릴리가 이렇게까지 대담한 면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릴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과 시후가 오시연을 상대로 정면으로 싸운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글로리아의 말처럼 오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니환궁을 열었고 실력 격차는 사실상 극복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이번만큼은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이 잘못되면 치명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후는 매우 진지하게 물었다. “여보야… 우리가 오시연 앞에서 살아남을 여지는 없어. 이건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정말 할 생각이야?”릴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300년 동안 저는 도망만 다녔습니다. 오시연이 있는 곳, 혹은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은 평생 가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어요. 딱 한 번만이라도... 제가 주도권을 가져보고 싶네요!”시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300년 만에 사춘기 온 거 아니지?”그러자 릴리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익스트림 스포츠 애호가들이 맨손으로 고층 빌딩을 오르는 이유를 알겠어요.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알아도, 성공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 때문에 그러는 거죠.” 릴리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천루를 보면 경외심과 감탄, 그리고 찬사를 보내며 올려다보죠. 하지만 스포츠 애호가들은 마천루를 보면 '내가 외적인 힘이나 보호 없이 맨손으로 정복했다'고 생각하죠. 그 성취감이 오랫동안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거예요!"시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좋겠어. 이 결정이 틀렸다면 고칠 기회조차 없을지도 몰라.”릴리는 고개를 숙였다가 입을 오므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시후를 또렷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오시연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건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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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9장

릴리는 평생 오시연에게 정면으로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신 엄청난 용기로 오시연의 오만을 무너뜨릴 수는 있었다.그러니 오시연의 바로 눈앞, 불과 몇 십 미터 거리에서 캠핑을 하면서도 그녀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릴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한 방일지도 모른다.시후도 릴리의 말에 영향을 받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굳이 사람을 불러서 몰래 장비 설치할 필요 없겠네. 여기서 같이 여보와 기다리면 되니까. 오시연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나도 직접 보고 싶어!”릴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자기... 정말 저와 함께 하는 거예요?”시후는 확신 있게 대답했다. “그래.”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 이건 진짜... 벼랑 끝에서 줄타기하는 거예요. 한 번만 실수해도... 목숨이 남아 있지 않을 거고요.”시후는 가볍게 웃었다. “넌 안 무섭다며. 그럼 나도 뭐가 무섭겠어.”릴리의 눈빛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진심 어린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표정이었다. “자기는... 나와 다르잖아요. 난 지금 이 세상에 아무런 연고도 없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죠. 오히려... 편해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남겠다는 거예요. 자기를 이렇게 위험하게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시후는 손을 내저었다. “여보도 내 말 안 듣잖아. 그런데 왜 여보는 내 판단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릴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저와 오시연의 일입니다.”시후는 차분한 말투로 받아쳤다. “아니. 나랑도 관련 있어. 우리 부모님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어도, 오시연은 그 배후였어. 내 최대의 원수지.”릴리는 재빠르게 답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여기서 오시연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앞으로 자기는 나중에 기회를 따로 잡아 오시연을 처리하는 걸로 해요.”그러나 시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렇게 하자. 지금부터 오시연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우리 둘이 같이 하는 거야.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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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0장

“맞아요.” 릴리는 다리 한가운데에서 오래된 돌판 한 조각을 가리켰다.“여기 보이죠? 이 깨진 자국이 난 이유가 있어요. 옛날에 마을에 석공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새 집 준공한다고 큰 석상을 싣고 오다가 마차 말이 이 돌다리에서 놀라서 미끄러졌거든요. 석상이 여기로 굴러 떨어져서 이렇게 금이 난 거예요.”릴리는 그때 모습을 묘사하듯 생생하게 얘기했다. “그날 저는 외할아버지 따라 여기로 온 길이었어요. 그래서 이 장면을 아주 또렷이 봤죠.”시후는 릴리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때 마침 한복을 입은 7살쯤 된 여자아이가 엄마와 아빠와 함께 돌다리를 건너며 손에 과자를 들고 다리를 건너 뛰어왔다. 소녀의 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휴대전화로 끊임없이 사진을 찍으며 뒤따랐고, 소녀의 아버지는 크고 작은 가방을 앞 뒤로 메고는 음료수 두 잔을 들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따라왔다.릴리는 아이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저 아이보다 제가 더 어렸어요... 그땐 외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주신 겉옷을 입었는데, 지금 애들이 입는 한복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예뻤죠. 요즘 사람들이 입는 한복은 뭔가 진정한 정신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요.”시후는 문득 릴리가 한복을 입고 있던 모습을 떠올랐다. “릴리, 우리 만났을 때 한복을 입고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거 어디서 산 거야?”릴리는 수줍게 웃었다. “선비님, 그건...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외할머니께 자수 배우면서 익힌 솜씨예요. 지금은 많이 잊었지만... 그래도 60~70% 정도는 아직 할 수 있어요.”몇 시간 동안 시후는 릴리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고 그녀의 기억을 따라 조용한 길을 걸어 다녔다. 구경이 한참 지나서야 둘은 장비를 사기 위해 작은 캠핑 용품점으로 들어갔다.둘은 커플로 위장해야 하므로 커다란 텐트 하나, 침낭 두 개, 수면 매트와 랜턴 등 필수 장비를 샀다.시후는 그 외에도 접이식 의자 2개 테이블 하나, 그리고 세면도구 및 생필품들을 샀다. 그리고 시후는 캠핑족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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