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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1장

이화룡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김상곤은 앞장서서 걸어가며 들뜬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말했다.“이화룡 씨 오셨어! 얼른 인사드려!”시후는 이화룡이 찾아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나와 윤우선은 이화룡이 갑자기 집까지 찾아온 이유를 몰라 적잖이 놀랐다.윤우선은 요즘 이화룡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기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이고, 대표님 오셨네요. 어서 앉으세요.”이화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사모님, 안녕하십니까.”그러고는 시후와 유나를 향해 예를 갖춰 말했다.“은 선생님, 안녕하세요. 사모님도 안녕하십니까.”유나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시후는 모르는 척 물었다.“대표님께서 직접 찾아오셨는데 무슨 일이십니까?”이화룡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은 선생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큰 도움을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꼭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김상곤은 그 말을 듣고 이화룡이 시후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다시 서화협회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시후가 이화룡에게 부탁한 덕분이었고, 앞으로도 이화룡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터였다. 그래서 서둘러 시후에게 말했다.“은 서방, 이화룡 씨가 평소 우리 집 많이 도와주셨잖아. 이번에는 절대 거절하면 안 돼.”시후가 말했다.“그래도 어떤 일인지는 먼저 들어봐야죠. 제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지도 알아야 하고요.”이화룡이 곧바로 설명했다.“사실 친한 형님 한 분이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탄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투자금만 수천억 원이 들어간 큰 사업인데, 막 생산을 시작하자마자 계속 사고가 터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갱도에 물이 차고, 내일은 갱도가 무너지고, 가스 누출 사고까지 여러 번 있었는데 다행히 큰 사고로 번지기 전에 발견해서 막았습니다.”그러고는 시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형님 말씀으로는 광산 풍수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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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2장

유나는 시후가 일을 하러 장기간 집을 비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쓰였다. 특히 이번에는 강원도 깊은 산골까지 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이번에는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요? 우리 지금 돈도 부족하지 않은데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할 필요는 없잖아요.”시후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화룡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만큼은 꼭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형님은 예전에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인이십니다. 이제야 겨우 보답할 기회가 생겼는데, 저와의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번 일만 해결해 주시면 앞으로 저를 필요로 할 때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천벌을 받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겁니다!”그러자 김상곤의 눈이 번쩍 빛났다.그는 예전부터 배 회장이 자신을 서화협회에서 내쫓은 이유가, 이화룡과 자신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의 이화룡은 자신에게 얼마나 극진했는가? 배 회장은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했던 최고급 룸을 이화룡이 직접 자신에게 내주었고, 식사값까지 전부 계산해 줬다. 그 일 한 번으로 배 회장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그런데 왜 다시 태도가 달라졌을까? 자신이 이화룡에게 더 이상 영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이번에 자신이 다시 서화협회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시후 덕분이었다. 시후가 부탁했고, 이화룡이 직접 나서 준 덕분에 배 회장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그래서 김상곤은 시후가 계속해서 이화룡에게 큰 은혜를 베풀수록, 자신 역시 서화협회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고 더 잘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김상곤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유나야, 남자들 일은 너무 나서지 않는 게 좋다. 이화룡 씨가 우리 집을 얼마나 많이 도와주셨니.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한 번도 마다한 적이 없잖아. 이제 이화룡 씨가 도움을 청하는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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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3장

하지만 김상곤에게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이화룡의 소매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황급히 찻잔 하나를 꺼냈다. 차는 이미 조금 식어 있었지만 이화룡에게 한 잔 따라 건넨 뒤, 곧바로 자신의 찻잔도 들었다. 그러자 한 손이 비게 되었고, 그는 잽싸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잠금을 풀고 카메라를 실행했다.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전면 카메라 셀카 모드가 켜졌다. 김상곤은 찻잔을 들고 이화룡에게 말했다.“이화룡 씨, 우리 건배 한번 하시죠. 기념으로 사진도 한 장 찍고요!”이화룡은 김상곤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후의 장인이었기에 웃으며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이화룡은 잔을 맞부딪친 뒤, 한 손으로 김상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찰칵.김상곤은 두 사람이 웃으며 건배하는 순간을 정확히 담아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잔을 맞대고 있었고, 누가 봐도 오랜 절친이 즐겁게 술자리를 함께하는 모습처럼 보였다.김상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집어넣으며 말했다.“이화룡 씨, 앞으로도 시간 나시면 자주 놀러 오세요. 집에 좋은 차도 있고 술도 아주 많습니다.”“좋습니다. 앞으로 자주 오겠습니다.”이화룡은 흔쾌히 대답한 뒤 찻잔을 내려놓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너무 오래 폐를 끼쳤네요.”김상곤은 얼른 말했다.“이화룡 씨,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김상곤은 이화룡을 대문 밖까지 배웅했다. 이화룡이 떠난 뒤 그는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 카카오톡을 열었다. 방금 찍은 이화룡과의 사진을 선택한 뒤 짧은 메시지를 적었다.그리고 곧바로 게시 버튼을 눌렀다.그 시각 배 회장은 집에서 아내에게 또다시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김상곤 문제를 잘못 처리한 이후 그의 승진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고, 그 일에 대해 잘못된 조언을 했던 아내를 지금까지도 원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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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4장

갑자기 남편에게 호되게 한소리를 들은 아내는 억울한 마음이 컸지만, 맞받아치지는 않았다. 대신 얼른 배 회장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게시글을 확인했다. 사진을 본 순간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후회했다.“내가 너무 순진했네. 남자랑 여자만 가끔 냉전도 하고 싸웠다가 화해하는 줄 알았지. 오늘 싸우고 내일 풀리고 그런 게 남자들끼리도 똑같을 줄은 몰랐어요. 그때 이화룡 대표가 당신한테 김상곤 씨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때, 그냥 화가 나서 홧김에 한 말이었던 모양이야. 난 둘이 완전히 틀어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인처럼 싸워도 금세 화해하는 사이였던 거네. 저 사람들이 다시 손을 잡는 순간 우리가 곤란해질 거라는 걸 미처 생각 못 했어요...”아내가 먼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배 회장의 화도 한결 누그러졌다.사람이란 원래 그렇다. 마음속에 아무리 불만과 억울함이 쌓여 있어도 상대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면 화가 절반 이상은 풀린다. 정작 더 화가 나는 건, 잘못을 뻔히 저질러 놓고도 끝까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지'라고만 하면 작은 불씨도 순식간에 화산처럼 폭발하고 만다.마음이 한결 풀린 배 회장은 아내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우리가 그때 그 가정에 너무 휘둘렸던 거야. 이화룡 대표가 화가 났으니 이제 김상곤 씨는 굳이 챙길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화룡 대표가 화가 난 것도 잠깐이었을 뿐이야. 그때 설령 이화룡 대표가 김상곤 씨에게 마음이 상했더라도 내가 끝까지 김상곤 씨를 지켜줬다면, 지금쯤 상곤 씨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나를 훨씬 좋게 봤을 거야.”아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늘 그렇잖아요. 잘될 때 거드는 사람은 많아도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은 드문 법이죠.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곤 씨를 계속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해. 진심은 결국 통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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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5장

김상곤의 숨겨진 의도를 시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김상곤은 단순히 서화협회에 복귀한 것만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예전의 상임부회장 자리를 되찾고, 더 나아가 회장 자리까지 노릴 게 분명했다.하지만 시후는 그가 그렇게 쉽게 뜻을 이루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이화룡이 배 회장의 승진길만 막고 있는 이상, 김상곤이 회장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예전의 추문까지 있었으니 상임부회장 자리로 복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위에는 이미 여러 부회장 후보들이 있었고, 그런 전력이 있는 김상곤이 그들을 하나씩 제치고 올라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시후가 원하는 건 딱 하나였다. 김상곤이 서화협회에서 승진할 길을 가시밭길로 만들어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협회에서 얌전히 지내게 하는 것이었다.이틀 뒤 아침. 이화룡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말했다.“안녕하십니까, 제가 은 선생님을 공항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는 길에 따로 이야기해야 할 일도 좀 있어서요.”원래는 유나도 시후를 공항까지 배웅하려 했지만, 이화룡이 이동 중에 꼭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그녀는 시후를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여보, 가면 꼭 몸조심해요. 건강도 잘 챙기고요.”시후는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산속에 있으면 휴대전화가 안 터지는 곳이 많을 텐데. 연락이 잠깐 안 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그냥 메시지만 남겨 둬요. 신호가 잡히는 대로 바로 답장할게.”유나는 그것이 시후의 작은 계략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 일부터 잘 보고 와요.”시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녀올게요.”그렇게 가족들은 시후를 집 앞까지 배웅했고, 시후는 이화룡의 차에 올랐다.청년재를 떠난 차량은 공항으로 향하지 않고 먼저 서초화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릴리를 태운 뒤에야 다시 출발했다.릴리는 시후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후가 물었다.“소영아, 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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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6장

비행기가 한국에 도착하자 안세진은 즉시 전문 인력을 투입해 기체를 전면 점검했다. 안전상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 도청 장치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오늘 노르웨이행 비행 허가를 신청했다. 승무원 역시 모두 엠그란드 그룹 측 인원으로 교체해 보안을 한층 더 강화했다.손주도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 둔 덕분에 시후와 릴리는 출입국 심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계류장에 대기 중인 비행기로 향했다.A350은 쌍발 여객기 가운데 가장 큰 기종답게 객실 공간이 매우 넓었다. 특히 이 기체는 내부를 개조하면서 객실의 3분의 2를 승객 전용 프라이빗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여러 개의 침실은 물론 회의실과 응접실까지 갖춰져 있어 두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차고도 넘칠 정도였다.두 사람은 탑승 후 기체 중앙에 있는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이동한 뒤 노르웨이를 향해 이륙했다.다시 노르웨이로 갈 수 있게 된 릴리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보안 등급이 매우 높은 밀폐된 객실 안에는 시후와 그녀 단둘뿐이었다. 시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릴리 노르웨이에 가는 걸 정말 기대하는 것 같네?”“네.”릴리는 설렘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선비님, 사실 노르웨이는 제가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좋아했던 곳이에요. 오시연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2050년까지 그곳에서 지낼 계획도 세웠을 정도거든요.”시후가 궁금한 듯 물었다.“노르웨이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릴리가 답했다.“노르웨이는 땅은 아주 넓은데 사람은 적어요. 면적은 한국의 몇 배나 되는데 인구는 절반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수도만 벗어나면 사람을 거의 마주칠 일이 없어서 숨어 지내기에 정말 좋아요. 자연도 잘 보존돼 있고, 무분별하게 개발된 흔적도 거의 없고요.”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가장 좋은 건 기후예요. 유럽 북쪽에 있지만 대서양 난류의 영향을 받아 생각보다 훨씬 온화하거든요. 겨울에도 가장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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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7장

시후와 릴리가 노르웨이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였다.노르웨이는 이미 겨울에 접어들었지만 기온은 그리 낮지 않았다. 한국보다 오히려 더 따뜻했고, 체감온도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포근했다. 다만 노르웨이는 위도가 매우 높아 북반구에 겨울이 찾아오면 낮 시간이 크게 짧아진다. 아직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늘은 이미 황혼빛으로 물들었고, 태양은 수평선에 걸쳐 있었다. 겨울의 노르웨이를 처음 찾은 시후는 현지 시간으로 바뀐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감탄했다.“참 신기한 곳이네. 겨우 3시인데 벌써 해가 지다니.”릴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슬로는 노르웨이에서도 남쪽이라 겨울에도 5시간 정도는 해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북부 지역은 이제 곧 극야가 시작돼요. 한두 달 동안은 해를 전혀 볼 수 없죠.”시후는 감탄하며 말했다.“오래 있으면 우울해질 것 같은데.”“그렇지 않아요.”릴리는 그 풍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한 듯 말했다.“선비님은 모르시겠지만 극야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북극권 근처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마을마다 오로라를 쉽게 볼 수 있고, 사람도 거의 없어요. 어떤 마을은 썰매개가 사람보다 더 많을 정도예요. 저처럼 늘 쫓기며 살아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그 한두 달의 극야가 가장 마음 편한 시간이었어요.”그 말을 들은 시후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는 동시에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숨어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어둠이 오히려 더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릴리는 웃으며 말했다.“지금이 오로라를 보기 가장 좋은 계절이에요. 선비님, 중요한 일만 끝나면 저와 함께 노르웨이 북부도 한번 가 보실래요?”“좋아.”시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릴리는 더없이 기뻤다. 그녀의 마음은 벌써 눈 덮인 설원과 침엽수림, 그리고 오로라가 어우러진 신비로운 북극의 풍경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노르웨이 왕실 차량이 이미 활주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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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8장

외교 특권 신분증이 있으면 그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마침 시후는 릴리와 함께 노르웨이를 여기저기 둘러볼 생각이었다. 릴리에게는 이 나라가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었으니, 오랜만에 곳곳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왕실 차량은 공항을 빠져나와 곧장 오슬로 중심부에 있는 왕궁으로 향했다.그 시각 왕궁에서는 헬레나가 두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녀 못지않게 시후를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인 엘리사 일리아드 전 여왕이었다.헬레나가 왕궁 접견실을 계속 서성거리며 기뻐했다가 부끄러워했다가 하는 모습을 보던 전 여왕은 다가와 말했다.“헬레나, 조금 있으면 은시후 씨를 만나게 될 텐데 너무 티 내지는 말거라. 여왕다운 품위는 지켜야지.”“예에...?”헬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정말... 그렇게 티가 나나요?”전 여왕은 웃으며 놀렸다.“네 얼굴에 '내 님이 오셔서 너무 좋아요'라고 써둔 것 같구나.”“아니에요...”헬레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할머니... 저도 나름 절제하고 있어요...”전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평소에는 참 의젓하고 왕실 사람다운 품위도 있는데, 은시후 씨 앞에만 서면 사랑에 빠진 어린 아가씨가 되어 버리는구나.”그러더니 문득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지난번에 내가 은시후 씨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질 방법을 알려 줬잖니. 그때 내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쯤 배가 조금 불러왔을지도 모르는데.”“할머니...”예전에 할머니가 시후의 아이를 먼저 가져 왕실의 후계를 남기라고 끈질기게 권했던 일이 떠오르자 헬레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로 마음이 흔들려 그대로 할 뻔하기도 했다.하지만 아무리 한 나라의 여왕이 되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진심 어린 관계를 바라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부끄러움도 모두 내려놓은 채 먼저 시후의 아이를 갖는다는 건 아무래도 결심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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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9장

헬레나는 금세 얼굴이 환해지더니 급히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빠른 걸음으로 정전 밖으로 향하며 근위대장에게 말했다.“모두 물러나라고 하세요. 제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요.”“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왕 폐하.”그 무렵 시후가 탄 차량은 왕궁 안으로 들어와 광장에 멈춰 섰다.차가 막 멈추자 헬레나와 선왕이 함께 마중을 나왔다.시후와 릴리가 차에서 내리자 헬레나가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은시후 씨, 다시 노르웨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그러고는 릴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이분이 릴리 씨시군요?”릴리는 방긋 웃으며 가볍게 몸을 숙였다.“소녀 릴리라고 합니다. 여왕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헬레나는 릴리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시후에게서 노르웨이를 무척 좋아하는 여동생 같은 사람이 함께 온다는 이야기만 들었기에, 노르웨이를 구경시켜 주려고 데려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 보니 17, 18 살쯤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였다.하지만 그 소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웃음 하나 몸짓 하나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귀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왕실에서 자란 헬레나는 릴리에게서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기품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헬레나는 한국어도 제법 했지만 ‘소녀’라는 표현의 의미는 알지 못했다. 그저 한국식 겸양 표현쯤으로 여기고 먼저 손을 내밀며 웃었다.“릴리는 노르웨이 사람이 아닌 데다 은시후 씨와 함께 오신 분이니 저에게 그렇게 예의를 차리실 필요 없어요. 절도 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냥 헬레나라고 불러 주세요. 아무래도 릴리 씨가 저보다 어린 것 같은데, 괜찮다면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요.”릴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시후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헬레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그럼 그렇게 할게요. 헬레나 언니.”헬레나는 릴리의 환한 미소와 깊게 패인 보조개를 보는 순간, 같은 여자임에도 넋을 잃을 만큼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이 어린 소녀가 단번에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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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0장

수잔 화이트는 헬레나가 현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장인 하워드 로스차일드의 방문 요청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세계 최고의 가문을 이끄는 인물인 데다, 천문학적인 자산을 거느린 사람이 직접 찾아오겠다고 하는데, 노르웨이 왕실은 물론 다른 어느 왕실이라도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수잔 화이트는 하워드 로스차일드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헬레나에게 알렸지만, 헬레나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수잔 화이트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여왕 폐하, 상대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현 수장이십니다. 그것도 직접 찾아와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 이렇게 거절하는 건 조금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헬레나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세요.”수잔 화이트는 상식적으로도, 또 왕실 집사로서의 직업적 감각으로도 이런 요청을 거절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헬레나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전왕 엘리사 일리아드를 바라봤다.하지만 엘리사 일리아드는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워드 로스차일드가 스스로 몸을 낮춰 스물 몇 살의 노르웨이 여왕을 찾아오는 이유는 헬레나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이유는 헬레나의 뒤에 있는 시후, 그리고 시후가 가진 신비한 거풍환 때문이었다.그렇기에 헬레나가 하워드 로스차일드에게 조금 강하게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강자의 대리인이 된 이상, 다른 사람 앞에서도 충분히 강한 태도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잃는 것은 자신의 체면이 아니라, 뒤에 있는 강자의 체면이다.엘리사 일리아드는 수잔 화이트에게 눈짓을 보내 먼저 물러나라는 뜻을 전했다.수잔 화이트는 늘 신중한 엘리사 일리아드마저 같은 반응을 보이자 의도가 있는 일임을 깨닫고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헬레나는 시후를 보며 웃었다.“은시후 씨, 제 생각엔 하워드 로스차일드는 거풍환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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