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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1화

이도현은 자리를 비우느라고 조용히 노영식 집에서 나왔다.그는 회화나무 아래에 서서 고개를 들어 나무 잎사귀를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머릿속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혹여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냉정해졌는지 묻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만약 예전이었다면 이도현은 조강이 아무리 싫어도 조강의 아내와 아이가 고통에 겨워 무릎 꿇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이도현은 어떻게든 의사의 도리를 다하려 했을 것이다. 조강과 원한이 있다고 해서 아이를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반드시 조강의 아내와 아이를 구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이도현은 냉정하게 두 생명을 외면하고 자기 앞에서 죽어가는 걸 그저 지켜봤다.사실 이도현도 자기 선택을 의심하며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곤 했다.‘이렇게 하는 게 정말 맞는 걸까? 만약 내가 업보를 몰랐다면 두 사람을 망설임 없이 구했을까...’업보를 알게 된 후 이도현은 점점 주저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업보가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 마음이 무뎌진 건지 알 수 없었다.이도현은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늘 높이 자란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왜 그러고 있어요? 생각이 복잡해요?”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도현은 정신을 차렸다. 뒤돌아보니 노문호가 언제부터인지 그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이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지금의 이도현은 몇 리 밖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금 넋 놓고 있다가 노문호가 코앞까지 다가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만약 이 상황에서 적이 기습했다면 이도현은 벌써 등에 칼을 맞고 죽었을지도 몰랐다.그만큼 지금 그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절대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노 선생, 언제 오셨어요?”“한참 됐어요. 도현 씨가 생각에 잠겨 있는 걸 보고 방해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못 찾는 것 같아서 결국 말을 걸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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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2화

노문호는 마치 이도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물론 노문호 본인은 절대 환자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곧 그의 의덕이자 의사로서 책임이며 그가 일반인으로 살아오면서 얻은 신념이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도현에게 똑같이 요구할 수는 없었다. 이도현은 그와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이도현은 노문호가 평생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눈높이에 서 있다. 그렇기에 이도현이 볼 때 노문호의 생각이 그릇된 것일 수도 있다.한 가지 일이라도 보는 사람의 입장과 경지가 다르므로 답도 달라지고 옳고 그름의 기준 역시 달라지기 마련이다.“노 선생이 볼 때 제가 그 모자를 구하지 않은 것이 그릇된 행동인가요?”이도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니요. 사실 저는 평범한 의사라 어쩌면 그 모자를 구했을지도 몰라요. 대대로 의술을 물려받으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이 있거든요. 의사는 부모의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해야 하고, 의사의 눈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없고 오직 아픈 자와 안 아픈 자만 있다고 배웠거든요. 아픈 자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더라도 살려야 해요. 이게 우리 의사의 책임이에요. 설령 눈앞의 환자가 손에 피를 잔뜩 묻힌 살인마라 해도 살릴 수밖에 없어요.”“하지만 도현 씨는 다르잖아요. 도현 씨는 일반인이 아니기에 우리와 같은 관점으로 문제를 보면 안 되죠. 게다가 세상이 좋아지면서 많은 의사도 의덕을 지키지 않더군요. 어쩜 돈만 밝히는지... 돈을 내야 치료해주고 돈을 내지 못하면 환자가 바로 눈앞에서 죽어도 상관하지 않아요. 저조차도 가족을 부양하려고 한의원을 꾸렸잖아요. 그러니 그런 것들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요. 제가 방금 말했듯이 도현 씨가 생각하기에 옳은 선택이라면 죄책감 느끼지 말고 그냥 행동하세요.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어요. 생각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발목만 잡혀요.”“이 세상에 죽어 마땅한 자도 있어요. 특히 스스로 죄를 자초한 자, 용서 안 해도 괜찮아요. 그러니 인생에서 잠시 스쳐 가는 이런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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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3화

노문호의 말을 듣고 이도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도 자기 관념이 있지만 오랫동안 몸에 밴 사고방식 때문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수십 년간 지켜온 신념과 가치관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었다.철저한 유물론자로 살아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신선이 존재하고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가 만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게다가 세상 만물이 원자나 분자로 구성된 게 아니라 신선이 창조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그 충격과 혼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다행히 이도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설미에게 신장을 떼어주고 황야에 버려져 죽다 살아난 후 이도현은 오만가지 일을 겪었다. 그러면서 이도현의 심경에도 점점 변화가 생겼다.이제는 새로운 사물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리 생소한 사물이라도 금방 마음을 정리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알겠어요, 노 선생. 제 처지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마음이 홀가분해졌어요.”이도현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웃으며 말했다.“고마워할 것 없어요. 도현 씨도 머릿속으로는 이해되는데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뿐이잖아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엔 혼자 터득했을 거예요.”노문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겠죠. 하지만 노 선생이 말씀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이곳에 한참 서 있었을 거예요. 지금은 그럴 필요 없어졌지만요.”이도현도 웃으며 답했다.“참, 노 선생. 영식이 형도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저는 오늘 내로 떠날 생각이에요. 이번에 떠나면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건강 잘 챙기세요. 제가 드린 담약도 꼭 제시간에 드세요. 몸에 좋은 거니까 최소 몇 년은 더 살 거예요.”이도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이렇게 갑자기 가는 거예요? 며칠만 더 머물다 가지... 여기서 집밥을 며칠만 더 먹고 가요. 우리가 도현 씨의 도움을 엄청 많이 받았는데 갚아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돈도 도현 씨가 우리보다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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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4화

“원래 심마를 억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놀랍게도 금방 안정되었어요. 제 심경에도 큰 도움이 됐고요. 특히 노 선생께서 주신 깨달음이 정말 컸어요. 더 이상 말로 풀어 설명하진 않겠지만 노 선생이 저에게 주신 도움은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시간 되면 저도 남아서 집밥을 더 먹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네요. 사실 이번에 작별인사를 드리려고 왔어요. 형수님이 무슨 일로 저를 찾았는지 확인도 할 겸. 이제 영식이 형도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이만 가볼게요.”이도현이 감회에 젖은 듯 말했다.“알겠어요.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을게요. 볼일 보러 가세요.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꼭 놀러 오세요. 우리 집에 언제나 도현 씨 자리가 있으니까 언제든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할게요. 한의원에도 도현 씨 자리를 남겨 놓을게요. 제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다시 봤으면 좋겠어요.”노문호도 감정이 복받쳐 말했다.“네, 노 선생. 시간이 된다면 꼭 다시 찾아뵐게요.”이도현이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러면 언제 떠날 생각인가요?”노문호도 성격이 시원한 사람이었다.“지금요.”“이렇게 급히 떠난다고요? 점심이라도 먹고 가면 안 돼요?”노문호는 이도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날 줄 몰랐다.“아니에요. 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이도현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들어가서 현진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고 가요.”노문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제가 말하지 않아도 도현 씨도 느꼈을 거예요. 현진이 도현 씨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요. 제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현진과 작별인사라도 나누세요. 현진은 도현 씨를 가족처럼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리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사소한 오해는 풀고 넘어가세요. 이 세상에 영웅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노문호가 말을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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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5화

노문호가 방금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도현은 정말로 주현진 등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노문호가 그 말을 한 이상 이도현은 작별 인사하러 가기 어려웠다.이도현은 오해가 깊어질까 봐 걱정됐다. 아직 풀리지 않은 오해도 있는데 작별 인사할 때 주현진이 감정이 격해져 실수라도 할까 봐 겁났다. 그리고 노영식이 그 장면을 목격한다면 오해가 커져 더욱 난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이도현은 주현진을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딴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이도현은 주현진의 몸에서 남들이 갖지 못하는 강인함을 느꼈다. 게다가 심성이 착하고 삶에 대해 불만이 없으며 꾸준한 노력으로 가족의 삶을 조금씩 나아지게 만들었다.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는 많은 남성조차 갖기 어려운 품격이었다.이 사이에 몇 가지 오해가 겹쳐져 이도현과 주현진의 관계가 어색해진 것이다. 심지어 거기에 몇 가지 일이 우연히 겹쳤다.주현진이 준비해준 우유 향이 나는 꽃 이불, 그녀가 이도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그의 이불 속에서 잠든 일, 실수로 두 사람이 잠깐 안은 일, 그리고 최근 그녀의 레이스 속옷을 얻게 된 일이 있었다.그때 주현진이 얼마나 부끄러워했는가? 하지만 바로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그 속옷을 이도현에게 건네주었다.이도현은 주현진의 의도를 알 수 없지만 감히 묻지도 못했다.그 속옷은 지금도 이도현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다. 선물인지, 실수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됐어요. 인사해봤자 다들 슬퍼할 뿐이에요. 차라리 조용히 떠나는 게 나아요. 이별의 눈물보다는,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게 나은 것 같아요.”이도현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도현은 왠지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노문호에게 나쁜 짓을 들키기라도 한 듯 마음이 어수선했다.‘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마음이 이렇게 찝찝하지? 형수님이 입었던 속옷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 하긴... 오해 살만한 물건이긴 해. 그것도 해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오해...’이도현이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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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6화

양변이 질변을 일으킨다. 또한, 질변이 발생하면 완전히 다른 사물로 된다.이도현이 이 두 집안을 돕는데 이미 양변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으로 아무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 앞으로 최소 삼 세대는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다.이것이 평범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좋은 삶의 한계이다.이도현은 이제 이 세상에 업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계속 도우면 그들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고 그러다가 뜻밖의 불행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도현은 이미 노영식의 몸에서 그 효과를 봤다.이도현과 노문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이도현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노 선생, 여기까지만 배웅해 주세요. 아무리 멀리까지 배웅해도 결국엔 헤어져야 해요. 이제 마을 입구에서 작별합시다.”“그래요. 여기까지 배웅할게요. 그것만 기억해 주세요. 여기는 도현 씨 집이에요. 한의원이 하루라도 열려 있으면 이곳에 도현 씨 머물 자리가 있어요. 언제든 찾아와 주세요.”노문호는 이도현의 어깨를 툭 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알겠어요, 노 선생. 혹시 나중에 제 몸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노 선생께 찾아올게요.”이도현이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잘 가요. 이왕 떠날 거 서두르세요. 일찍 안착할 곳도 찾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그쪽에 도착하면 안부라도 전해주세요. 어서 가요...”노문호가 감회에 젖어 말했다.“노 선생, 잘 있어요.”이도현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금세 노문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아... 갔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구나. 도현 씨는 내 막역지우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떠나보내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노문호는 이도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뒤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다.“아버지, 어디 다녀오셨어요? 큰어머니와 형수님이 밥 다 차려 놓으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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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7화

“한마디 작별인사도 없이 그냥 가는 거예요? 사람이 어쩜 이렇게 매정할 수 있어요?”한의원 앞에서 주현진이 눈물을 머금고 분노 어린 표정으로 이도현을 노려보며 물었다.이도현은 눈앞에 나타난 주현진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이도현은 마지막으로 한의원을 둘러보고 싶어서 온 건데 여기서 주현진을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주현진이 이토록 집요하게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도대체 어떻게 이도현이 한의원에 나타날 거라 확신한 걸까?사실 이도현조차도 한의원에 들를 생각이 없었다. 다만 떠나기 전 자신에게 뜻깊은 추억을 남긴 이곳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둘러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주현진은 이도현의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왜 대답을 안 해요?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애 아빠, 이제는 저랑 말하기도 싫어요? 왜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요? 도현 씨 눈에 저는 친구도 아니에요?”주현진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형수님은 저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예요. 다만... 이별이 어려워 조용히 떠나려고 한 거예요. 형수님, 오해하지 마세요.”이도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별이 어려워 조용히 떠나면... 제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생각해 봤어요? 저도 우리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그런데 이렇게 떠나면 앞으로 평생 못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도현 씨는 저에게 아이를 선물해준 은인이에요. 저와 제 가족이 도현 씨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데요. 도현 씨의 친구가 되기에 우리가 한없이 부족한 거 알아요. 하지만...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보내긴 싫어요. 영영 못 볼 수도 있는데 어쩜 이렇게 매정할 수 있어요?”주현진이 끝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녀조차 왜 우는지 잘 몰랐다. 그저 마음이 아프고 억울했다.“형수님, 이러지 마세요... 제가 이럴까 봐 작별인사도 안 드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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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8화

“인생이 다 이런 거 아닙니까? 보내고 싶지 않아도 저는 결국 떠나야 합니다. 형수님은 형수님대로, 저는 저대로 살아가야 해요. 이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투성이잖아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기에 희로애락이 생겨난 거 아닙니까?”“자, 형수님. 울지 마세요. 저 진짜 가봐야 해요. 이곳에 오기 전에도 방금 시비 걸러 온 적을 물리쳤거든요. 그리고 제 아이도 태어났어요. 하지만 형수님이 위험에 처했을까 봐 곧장 달려오느라 아직 안아보지 못했어요. 이제 여기 일도 다 해결되었으니 이만 가볼게요. 적들이 제가 없는 틈을 타 가족에게 해를 끼칠까 봐 걱정이에요. 그리고 저 이번에 돌아가면 다른 세상으로 떠날 거예요. 그러니 서둘러야 해요.”“형수님, 저 이만 가볼게요. 저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지켜야 하는 가장이에요. 이해해 주세요. 저 이미 이곳에 오래 머물렀어요. 형수님도 울지 마세요.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찾아뵐게요.”이도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주현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흐느낄 뿐이었다.잠시 후 주현진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이도현을 향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애 아빠, 제가 좀만 배웅할게요.”“형수님...”이도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현진을 바라보았다.“자, 서둘러야 한다면서요? 왜 거기 서 있어요? 어서 가요.”“알겠어요, 형수님...”이도현이 더는 사양하지 않고 주현진과 함께 마을 밖으로 걸어갔다.잠시 후 이도현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형수님, 괜찮아요?”“그럼요. 저 괜찮아요. 도현 씨 말이 맞아요. 저는 저대로, 도현 씨는 도현 씨 대로 살아야죠. 제가 도현 씨 앞길을 막을 수는 없잖아요. 그냥... 나중에 시간 되면 꼭 우리를 보러 와주세요. 죽기 전에 도현 씨 얼굴을 한 번 더 보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주현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형수님. 시간 나면 꼭 찾아올게요.”이도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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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9화

이도현은 주현진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주현진이 그에게 입맞춤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현진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이도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형수님이 왜... 설마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이도현은 더 이상 생각해 내려가지 못했다. 계속 생각하다간 밤잠을 설칠 것 같았다.이도현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온갖 잡념을 털어내고 주머니에서 주현진의 레이스 속옷을 꺼냈다.몇 번이나 손을 들어 던지려 했지만, 막상 던지려니 망설여졌다. 결국 이도현은 그 속옷을 하나의 공간 반지 안에 넣었다. 그리고 그 공간 반지를 또 다른 공간 반지 안에 넣었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 끝에 이도현은 공간 반지를 음양탑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위험한 물건인 만큼 잘 숨겨야 했다. 만약 누군가가 이걸 발견한다면 이도현은 진짜 끝장날 수 있었다.특히 선배들에게 들킨다면 그 결과를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죽지 않더라도 며칠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선배들은 이도현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허락할지 몰라도 유부녀를 꼬드기는 짓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게 이도현의 본의가 아니더라도 말이다.이 모든 일을 끝낸 후 이도현은 다시 한번 마을을 뒤돌아보았다.다음 순간 이도현은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마침 근처를 지나던 두 젊은이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기절할 뻔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며 비명을 질렀다.“귀신이다...”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벌벌 떨었다. 결국 두 사람은 충격이 너무 커서 며칠 동안 병을 앓았다.이 사건을 계기로 마을에 귀신이 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몇 달간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여 저녁에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이도현은 자신이 떠나면서 마을에 이런 괴담을 남겼을 줄을 전혀 몰랐다.물론 이도현이 떠나므로 인해 주현진뿐만 아니라 노영식과 노강인 두 집안이 모든 깊은 슬픔에 잠겼다.그중에서도 가장 슬픈 건 조강 일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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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0화

조강이네 가족은 스스로 업보를 받아 모두 죽고 말았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이 모든 일이 누군가의 탓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누구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는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도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전혀 잘못이 없었다. 하지만 조강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도현은 죽을죄를 지었다.물론 옳고 그름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이도현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집엔 아무 일도 없었다.몇몇 선배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집에는 셋째 선배, 등자월, 둘째 선배, 아홉째 선배, 여덟째 선배, 열째 선배 그리고 이도현의 아들이 있었다.“어머. 이 잘생긴 남성분은 누구야? 집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어쩌다가 우리 집에 왔지?”둘째 선배 윤선아가 이도현을 보자마자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둘째 선배, 저예요. 저 모르시겠어요?”이도현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둘째 선배 등 선배들 앞에만 서면 이도현은 언제나 수줍고 주눅이 들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어도 선배들 앞에선 겁먹기 마련이었다.“어이구, 내가 네 둘째 선배인 건 아네. 난 또 네가 어느 유부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집에 안 돌아오는 줄 알았어. 아내도 아이도 싹 다 버린 줄 알았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너 같은 남자는 처음 봐. 아들이 막 태어났는데 밖에 나가서 다른 여자나 만나고 집에 돌아오지를 않는다니... 아이고... 아이가 불쌍하고 애 엄마가 불쌍해라... 산후조리도 안 끝났는데 남편이 도망갔지, 애는 젖 먹겠다고 울기만 하지... 돈이 없어서 우유도 못 사고 죽만 먹이고 있잖아. 정말 가여워서 못 봐주겠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아이가 있다니. 이게 다 그 못난 아빠 때문이야. 시골 유부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집에 안 돌아오는 거잖아. 정말 나쁜 아빠라니까...”윤선아가 이도현을 한참 비꼬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정곡을 찔러 이도현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이도현은 삽시에 무책임한 남자가 되었다.“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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