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011 - Chapter 1020

1030 Chapters

제1011화

점심을 먹고 난 뒤, 재석과 정은은 캠퍼스의 은행나무 길을 천천히 걸었다.그렇게 걷다 보니, 점심을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가던 진욱과 마주쳤다.“정은아!”“전 교수님!”“학교에서 보기 힘든 얼굴인데? 오늘은 실험실 안 갔어?”정은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요.”“밥은 먹었어?” 진욱이 묻자, 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었어요.”“재석이랑 같이?” “네.”“뭐 먹었는데?”“학식이요.”그때 재석이 못 참고 끼어들었다. “아니, 무슨 심문이야?”진욱이 코웃음을 쳤다. “남자 친구라는 사람이 말이지, 정은이가 반나절이나 수업 듣느라 고생했는데 학식 하나 사 먹이는 거냐? 좀 제대로 된 거 사줘야지.”‘아 또 시작이다.’재석이 입을 다물자, 정은이 재빨리 분위기를 바꿨다. “교수님, 전해 들었는데, 이번 과제로 수상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하하, 오늘 오전에 발표 났는데 어떻게 알았어?”“교수님 학술 소식은 항상 주시하고 있거든요.”‘아부 좀 했으니까 분위기 좀 풀리겠지...?’진욱은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였다. “역시 정은이야.” 그리고 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조 교수는 내가 뭔 과제 냈는지도 모르잖아!”재석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실험실은 구성원의 자율적인 연구 활동을 존중해.”사실 진욱은 홀로 과제를 진행했고, 개인의 이름으로 상을 받은 것이었다.그러니 실험실이 막지 않은 것만 해도 꽤 자유롭고 유연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정은이 수업 있지? 시간도 얼추 됐네. 재석아, 우리 실험실 같이 가자.”재석이 고개를 저었다. “난 안 가. 정은이 강의실까지 데려다줄 거야.”진욱은 살짝 어이없어했다.“재석 씨, 나 괜찮아요, 전 교수님이랑 같이 가요.”결국 정은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재석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진욱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가기 직전, 재석이 뒤돌아 정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업 끝나면 데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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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2화

정은은 재석이 고개만 들면 바로 보일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재석은 괜히 마음이 놓였다. ‘우리 여자 친구... 거기 있어 줘서 다행이야.’설거지를 마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안방으로 들어갔다.안방엔 고성능 빔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에 두 사람이 국제 학술 세미나 실황을 함께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땐 정은이 괜히 오해받을까 싶어 러그 위에 조심스레 앉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이젠 ‘명분 있는 연인’으로, 침대의 등받이에 나란히 기대어 영화를 틀었다.밤이 깊어져 가고, 창밖엔 환한 달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영화는 끝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은 11시 가까이.정은은 얇은 담요를 살짝 젖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가볼게요...”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재석은 여자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남자의 손끝, 거칠고도 따뜻한 지문이 정은의 맥박 위를 은근하게 스치고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아.’ 말도 안 되게 민감한 감각에 서로의 온몸이 찌릿했다.“재석 씨...” 재석은 손을 결코 강하게 잡고 있지 않았다. 정은이 조금만 힘주면 뿌리칠 수도 있을 만큼, 조심스럽고 여유 있는 제스처.하지만 그녀는 놓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들어 조용히 재석을 바라봤다.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재석은 입이 바싹 마르며, 목젖이 절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내 여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정은아.” 남자의 낮고 부드러운 속삭임이 두 사람 사이로 숨어들었다.은은한 조명, 포근한 침대, 감성적인 영화의 엔딩 크레딧. 그리고 서서히 서로에게 기대어 가는 두 사람의 온기.재석의 입술이 정은의 입술을 살며시 훑고, 이어 목덜미로 향했다. 가볍게 빨아들이고, 향을 맡고, 은밀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는 정은 위로 몸을 눕히되, 마지막 자제력으로 팔을 짚고 공간을 남겼다.“정은아, 괜찮을까?”재석의 눈동자엔 감정이 가득했다. 깊고, 어둡고,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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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3화

그날 밤, 분위기는 무르익었지만... 타이밍이 문제였다. 재석이 낮게 속삭인 ‘정은아, 괜찮을까’는, 끝내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졌다.정은은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약간 저린 손가락을 움직여보다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재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먼저 갈게요.”몇 초의 정적 후, 재석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 정은이 남자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당신... 일단 바지부터 입어요. 에어컨 켜놔서 감기 걸리겠어요.”말끝에 농담조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 눈빛은 다소 복잡했다. 정은은 그대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현관문을 닫자마자, 정은은 양 볼을 손으로 퍽퍽 두드렸다. ‘아 진짜... 얼굴에 열나 죽겠네.’그 순간, 뭔가 생각난 듯 동작을 멈췄고, 곧장 욕실로 달려갔다.가장 먼저 한 건... 손을 씻는 일이었다.비누 거품을 꼭꼭 눌러 짜며, 정은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우리 남자 친구... 그런 거 안 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내 착각이었어.’‘남자란, 결국 다 똑같아. 다... 늑대야.’한편, 재석은 결국 바지를 입고 정은을 문 앞까지 배웅한 후, 혼자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아직도 온몸에 남은 잔열이 그를 휘감고 있었다. ‘하... 미치겠네.’머릿속에선 폭죽이라도 터진 듯 찬란하지만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었다.어디 하나 제정신인 데가 없었던 것.‘그 순간... 너무 좋았어. 말도 안 되게.’그때, 재석의 시선이 문득 거실 테이블 위에 닿았다.아침 출근 전에 무심히 뜯어봤던... 세영이 준 선물 상자.‘촛대라더니...’정은이 낮에 던졌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불을 붙이면 뭔가 깜짝 놀랄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재석은 뭔가에 홀린 듯 일어나 모서리에 있던 라이터를 집었다. 동그란 초에 불을 붙이고, 그걸 촛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은은한 주황빛 불빛이 퍼져나가며 벽면엔 흐릿한 그림자가 춤을 추듯 일렁였다.재석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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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4화

“너... 그때, 나한테 촛대 한번 켜보라 했잖아. 그래서 해봤는데...”그 말을 들은 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굳이 나가지 않고, 문 앞에서 몸을 돌려 물었다. “그래서요...?”“진짜 뭔가 있던 거군요?” 정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역시 뭔가 있었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촛대 하나에 반응이 왜 이러겠어.’“초가 녹더니... 안에서 글자가 나왔어.”정은의 눈이 반짝였다. “뭐라고 쓰여 있었는데요? ‘사랑해’, ‘좋아해’ 같은 거요?”고백이란, 결국 다 거기서 거기. 짧고 강렬해야 기억에 남는 법이었다.재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정은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올리며 재석을 훑어봤다.‘대체 대학 때 얼마나 잘나갔으면... 그런 선물까지 받았을까.’“정은아, 그렇게 보지 마.” 재석이 난처한 듯 말했지만, 정은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왜요? 내 남자 친구가 대학 때 얼마나 인기 많았는지, 확인도 못 해요?”그때 정은이 본 졸업사진 속의 대학생 재석. 맑은 눈, 단정한 이마, 어딘가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진짜... 그땐 완전 연애소설 주인공 비주얼이었더라.’“그러니까... 여자들이 좋아할 만했겠죠.”정은이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재석의 얼굴엔 미묘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화 안 났어?” 재석의 물음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화나긴, 뭘요...?”“그날 밤, 오 교수님이 그러시더라. 네가 세영이 얘기 꺼냈다고...”“그래서요...?”“나랑 세영 사이에 떠돌던 얘기들, 교수님이 다 말씀하셨다며?”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서,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화난 것 같아요?”재석은 그 물음에 잠시 말이 막혔다. “아니야? 그럼, 왜... 세영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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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5화

정은이 처음으로 ‘재석 씨’가 아닌 호칭을 썼다.“자기야.”단 한 마디.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은 크고도 깊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은의 말.“내 마음마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정말 기뻐요.” 정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린 이제 연인이잖아요. 일상을 함께 나누고, 자주 마주하는 사이니까... 서로한테 솔직해야 해요.”“달래거나 감추거나, 그런 거 없이... 그래야 오래, 편하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재석은 단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정은은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난 연애가 처음인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맑았다. “오히려 6년을 만난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더 잘 알아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작은 틈이 생기면 그게 나중에 얼마나 큰 벽이 되는지요.” “정은아...” 재석이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나는 절대 그런 벽을 만들지 않을 거야. 나는...”정은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린, 지금만 보는 게 좋겠어요. 지금 이 순간을 아끼고 즐기면서, 그렇게 가보는 거... 괜찮죠?”그녀는 정말로 과거의 소문에 휘둘리지 않았다. 세영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흔들림 없었다. 질투도, 추궁도 없었다.‘정말로, 하나도 신경 안 쓰는구나. 그게... 오히려 더 벅차.’재석은 아직도 불완전한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 정은은 여유롭게 발을 빼는 법을 알았지만, 재석의 마음은 계속해서 더해지고 있었다.‘나는 지금 이 감정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은데... 정은은 오히려 내려놓고 있구나.’정은은 그 눈빛의 무게를 읽었다. 하지만 말 대신 작게 웃으며, 조용히 까치발을 들었다.그리고 재석의 입술에 가볍게... 아주 짧게 입을 맞췄다.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재석의 눈썹 사이에 가득 맺혀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괜찮아요. 나는 자기를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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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6화

“좋아요.” 정은이 가볍게 대답했다.그렇게 해서 정은이 재석을 데려간 곳은... 시내 한복판, SKP 백화점이었다.넓디넓은 매장. 곳곳에 늘어선 럭셔리 브랜드 매장들과 유리창 너머로 번쩍이는 인테리어에 재석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여기 오고 싶었어?”“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재석은 조용히 지갑을 꺼내 한 장의 카드를 정은 손에 쥐어주었다.“갖고 싶은 거 다 골라.”정은은 별말 없이 쿨하게 받았다. “좋죠. 근데... 한도가 부족하면 어쩌죠?”“그럴 일 없어.”그건 VVVIP 카드였다. 웬만한 수억짜리 물건을 사지 않는 한, 정은이 신경 써야 할 일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정은은 제일 먼저 의류 매장으로 들어갔다. 여름용 티셔츠 두 장에 짧은 스커트 하나. 그리고 그녀가 고른 건, 하와이안 무늬가 들어간 반바지. “이건... 내 남자 친구한테 딱 맞네요.”직장에서는 도저히 못 입을 테지만, 휴가철엔 딱 어울릴 옷이었다.“어라? 나도 껴?”재석이 웃자, 정은이 당당하게 말했다.“당연하죠. 내 남자의 카드로 긁는데, 나도 보답은 해야죠.”“보답이라... 이런 상황을 ‘빌린 꽃으로 부처님 앞에 올린다’라고 하는 거 아니야?” 정은은 천천히 그를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지금 그 외모가 부처님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딱 봐도 유혹하는 쪽이지. 어느 절에 저런 부처가 있겠어...’남자의 눈매엔 웃음이 깃들었고, 입꼬리엔 장난기가 실려 있었다. 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정은의 귀 옆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내가 부처라면... 색계에 빠진 타락한 부처일걸?”그러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짝 그녀의 귓불을 물었다.‘헉...’정은은 속으로 경악했다. ‘이 사람, 도대체 어디까지 갈 건데...?’그러는 사이, 재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방 하나를 가리켰다.“저거, 베이지로 포장해 주세요.”쇼핑이 끝날 무렵, 정은의 손에는 여러 개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진짜 ‘득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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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7화

“강도겸, 거기 서.”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입구 근처. 스타일리시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굽 있는 구두로 도겸을 따라잡았다. 도겸은 발걸음을 멈추며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표정엔 이미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추해리, 나 이미 말 다 했어. 서로 민망하게 하지 말자.” 해리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매달리기라도 한 줄 알아? 싫으면 처음부터 선 자리에 나오지 말았어야지.”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겸을 위아래로 훑었고, 입꼬리는 점점 더 올라갔다. “여기까지 와 놓고 밥 한 끼도 안 먹고, 상대방한테 불쾌하게 얼굴이나 굳히고... 강도겸, 너 진짜 예의 없다.” 도겸 역시 지지 않았다. 입술 끝이 냉소적으로 말려올라갔다. “내 상황 모를 리가 없잖아, 너... 다 알고도 나온 거잖아. 내가 예의 없는 거라면, 넌 상황을 무시한 거겠지.” “너...!” 해리는 분이 풀리지 않아, 굽으로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전여친이랑 헤어진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감성팔이야? 정말 웃기지도 않네.” ‘예전엔 이 정도 감정도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없으니까 더 짜증나네.’“그건 너랑 상관없어.” 도겸의 말투는 변함없이 차가웠다.해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톤을 낮췄다. “알았어. 우리 둘 다 부모님 눈치 보느라 나온 거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대충 사진 몇 장 찍고 끝내자.”“앞에 레스토랑 보이지? 저기 앉아서 음식 몇 개 시키자. 인스타에 올릴 정도로만 찍으면 우리 엄마도 넘어갈 거야.” 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사진 한 장으로 엄마 잔소리를 안 들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진짜 피곤하다. 그냥 조용히 끝났으면.’해리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둘은 나란히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런데, 해리가 자연스럽게 도겸의 팔을 잡으려 하자 도겸은 몸을 살짝 돌려 피해냈다. “뭐 하는 거야?” 해리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팔을 낚아챘고,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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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8화

재석과 정은은 나란히 낚시용품점 안으로 들어섰다. 재석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낚싯대 사려고?”정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냥... 한 번 보려고요.”하지만 그 ‘그냥 본다’는 말은 늘 그렇듯, 결제로 이어졌다.“고객님, 진짜 안목 있으시네요! 이 낚싯대는 기능도 좋고 디자인도 감각적이라 선물용으로도, 본인용으로도 다 최고예요.”“그럼요, 계산할게요.” 정은은 이미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네고 있었다.“아... 네?” 직원도 당황했고, 재석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진짜 사는 거야?”정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왜요? 안 돼요?”“아니, 되지. 너만 좋으면 다 돼.”‘캠핑에 야외 낚시? 달 보면서 별도 보고... 나쁘지 않은데?’...재석과 정은은 오후 내내 쇼핑을 이어가다 보니, 집에 가서 밥을 해 먹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근처에서 저녁을 해결했다.식사 후엔 식당 맞은편에 있는 야시장도 슬슬 걸어 다녔다. 별 계획 없이 나왔는데, 돌아갈 때는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쇼핑백이 한가득.정은이 현관문을 열자, 재석은 아무렇지 않게 뒤따라 들어와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이젠 굳이 말 안 해도 자연스럽게 들어오는구나...’재석은 가장 먼저 주방으로 가서 물 두 잔을 따라왔다. 하나는 정은에게 건네고, 다른 하나는 꿀꺽 마신 뒤, 바로 과일 씻고, 자르고, 세팅까지.정은은 쇼핑백을 한쪽에 밀어놓고 소파에 바로 기대앉았다.“와... 진짜 오랜만에 이렇게 돌아다녔어요.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당겨요... 정말 죽겠어요.”그 말에 재석이 몸을 바로 세우더니 자기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이리 와.”“네? 왜요?”“다리 올려. 내가 주물러줄게.”‘이게 진짜 되네?’정은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슬리퍼를 벗어 툭 차낸 뒤, 재석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몸은 소파에 푹 기대어, 아예 누울 준비 완료.‘자세부터가 ‘이건 즐기러 왔습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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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9화

정은의 숨이 잠시 멎었다. 그리고 손끝에도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녀는 아직 꺼지지 않은 핸드폰 화면을 무심코 누르고 말았다. 띠링띠링-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딸? 또 전화한 거야? 무슨 일 있어?]소진헌의 목소리. 거실 한복판, 갑작스레 울린 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특히 재석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조용히 경직되었다.[거기 왜 이렇게 어두워? 카메라가 안 켜졌나?]정은은 재빨리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손바닥으로 전면 카메라를 가린 상태였다. ‘휴... 진짜 아찔했네.’정은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아빠, 실수로 누른 거예요. 이만 끊을게요.”[야야야, 잠깐만!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 말이야... 그거 꽃 폈어? 카메라 좀 켜 봐, 내가 확인 좀 하게.]“지금요?”[왜? 혹시... 지금 보여주기 어려운 상황이야?]소진헌의 물음에 정은은 살짝 당황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그럼 빨리 보여줘. 그거 벌써 몇 달 됐잖아? 지금쯤이면 꽃 피었을 텐데?]정은은 황급히 말했다. “피긴 피었어요. 꽃도 여러 송이인 데다가 아주 예뻐요.” [진짜? 우와, 나는 그거 인터넷으로 사서 어떤 색인지도 몰랐는데! 얼른 좀 보여줘. 직접 봐야 믿지.]“네에...”[딸? 왜 또 카메라 안 켜? 왜 이리 끊기지? 정은아, 들려? 들리냐고?]정은의 머리가 완전히 가동됐다. ‘지금 카메라 켰다간, 내 뒷배경에 우리 남자 친구가 그대로 나오겠지...’“아, 지금 밖이 어두워서 밝기가 좀 안 좋아요. 영상으로는 잘 안 보일 것 같아서요. 사진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그게 더 잘 보일 거예요.”[그래? 오케이, 그럼 사진으로 보내줘.]통화가 마침내 끝났고, 정은은 이번엔 잊지 않고 핸드폰 화면을 확실하게 껐다.그런 다음 슬쩍 돌아서며 활짝 웃었다.“왜 멈췄어요? 계속하자면서...?”재석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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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0화

“잠깐만요.” 이미숙이 소진헌의 손을 붙잡으며 제지했다. “당장 전화하지 말고, 조금만 생각해 봐요.”“왜? 지금 이 밤중에 정은이 집에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다는 게 말이 돼?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데...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소진헌은 잔뜩 흥분한 채 벌떡 일어나려 했다.“여보, 침착해요. 방금 통화할 때 정은이가 이상한 말투를 쓰거나, 도움 요청하려는 눈빛 같은 거... 있었어요?” 소진헌은 잠시 멈칫했다. “그런 건 없었던 것 같긴 해.”“봐요. 정은이 얼마나 똑똑한 아인데, 진짜 위험한 상황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한테 신호 보냈을 거예요.”‘하긴... 정은이라면 그랬겠지.’ 소진헌은 조금 진정됐지만, 여전히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근데, 이 밤중에 집에 누가 있을 수 있냐고... 그것도 저렇게... 가까이... 거의 겹쳐 서 있을 정도로.”“남자...?”그 가능성에 도달한 순간, 소진헌의 눈이 확 커졌다.“헉... 설마... 남자?!”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려던 찰나, 이미숙이 다시 남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잠깐만요!” “그렇게 급하게 전화해서, 정은이한테 뭐라고 할 건데요? ‘집에 남자 있냐’고 물어볼 거예요?”“그, 그게...” 소진헌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뭐라고 말하지...?’이미숙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정은이 집에 있을 정도면, 적어도 사이가 가까운 사람이겠죠. 정은이는 J시에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있다고 해도 실험실 친구들 몇 명 정도잖아요. 그중에...”소진헌이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수민이! 맞다, 수민이를 깜빡했네!”“맞아요, 우선 수민이를 슬쩍 떠보는 거 어때요? 정은이 집에 있는지, 같이 있는 건지...”소진헌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마누라! 정공법 말고 우회 전술이라니, 완전 전략가네.”그러고는 당장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당황한 소진헌이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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