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281 - Chapter 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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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1화

설날 연휴 마지막 날, 재석과 정은은 L시를 떠나 되돌아왔다.소진헌과 이미숙은 몇 번이나 붙잡으며 며칠만 더 있다 가라고 성화였지만, 두 사람 다 일이 있어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재석은 이번 물리학 학회에서 자신의 연구 주제와 성과가 메인 테마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게다가 개인 발표 시간만 무려 ‘반나절’이 배정됐다.그 ‘반나절’은 회의 중간의 한가한 시간이 아니라, 개막식 직후 메인 세션 시간이었다.이전까지 이런 대우를 받은 사람은 오직 학술원 회원뿐이었다.“우리 조 교수님, 진짜 대단하니까요!”정은은 옆에서 재석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이 남자는 이렇게 젊고, 이렇게 뛰어나다니, 이렇게... 믿기지 않는다.게다가 이 남자는 정은의 남자친구였다. 이 사실은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반면, 재석은 언제나처럼 덤덤했다.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어떤 사람은 남 칭찬만 하고, 자기 대단한 건 얘기 안 하더라? 스미스 교수한테 연락 왔어. 네 주제에 관심 많다고, 데이터랑 기술 지원해주겠대.”“진짜예요?!”“응.”정은의 새 연구 주제는 특정 바이러스의 세계적 변종, 각 대륙 · 국가 · 도시별 주요 감염 유형 비율, 도시별 감염 경향의 차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었다.특히 해외 데이터까지 다뤄야 해서 자료 수집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그때 재석이 추천해준 게 RD국의 스미스 교수였다.스미스 교수는 RD국의 국보급 바이러스 분야 전문가로, 최신의 데이터들을 쥐고 있는 인물이다.처음에 재석이 이야기했을 땐 정은은 믿을 수 없었다. 솔직히 약간... 허무맹랑하다고까지 생각했다.스미스 교수가 정은 같은 낯선 연구자에게 자료를 내줄 이유는 없었다. 친분도 없고, 같은 연구실도 아니고, 이해관계도 없었다.하지만 재석의 말은 한마디뿐이었다.“한번 시도나 해봐, 혹시 알아?”그 말에 정은은 반신반의하며, 재석이 준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지금까지 낸 아이디어, 부딪힌 벽, 그리고 간절히 도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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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2화

그 말에 정은의 입에서 웃음이 삐죽 새어나왔다.“듣자하니, 설날에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일은요...”민지가 입을 삐죽였다.“그저 동네 사람들이 떠보고, 저쪽 친척들이 캐물어보고... 진짜 귀찮아 죽겠어요.”민지와 서준이 하씨 집안의 가주, 하해산의 특별 허락으로 사당에 들어가 제사를 지낸 뒤로, 어디서 흘러나갔는지 모르게 그 소문이 온 가문에 퍼졌다. 평소 인사도 안 하던 친척들이 와서 묻기 시작했다.“네 남자친구 집은 뭐 하는 집안이야?”“얼마나 큰 자리야? 가주님보다 더 높아? 그럼 뭐, 국가 고위 공무원쯤 되겠네?”“남자친구네 형제자매 없어? 우리 집 애들이랑도 좀 연결해줘. 좋은 건 식구끼리 나눠야지.”“너네 둘은 어떻게 알게 됐어? 누가 먼저 들이댔는데? 민지, 나 너 예전에 좀 통통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자친구는...”“민지, 너 진짜 복 터졌다. 너네 아빠가 T국에서 무슨 부적이라도 받아왔니?”“...” 그런 소리들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친척들은 감히 서준에게 직접 묻지는 못하고, 죄다 민지한테만 돌려서 물었다.결국 민지는 친척들의 질문공세에 질려버려서 서준을 데리고 몰래 빠져나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남은 뒤처리는 하정남과 임수인의 몫이었다.임수인이 말했다.“당신이랑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 하씨 집안에 친척이 이렇게 많다는 건 나도 처음 알았네요.”하정남이 픽 웃었다.“나도 처음 알았어.”거의 왕래도 없던 친척들이 명절이라고 일부러 선물까지 챙겨서 민지네 집에 찾아왔다.“집안에서 분명히 입단속하라고 했을 텐데,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안 거야?”하정남이 어깨를 으쓱였다.“입 무거운 사람이 어딨어. 귀 밝은 사람도 많고. 뭐, 어차피 남들 입까지 막을 순 없으니까 우린 모른 척, 아닌 척만 하면 돼. 소문이야 떠들라고 있는 거지.”임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서준이 우리한테 이렇게 많이 신경 써줬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서준이 뒤에 있는 임씨 집안 덕이 더 크죠. 우리가 그 덕 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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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3화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어느새 정은과 재석이 학교로 돌아온 지도 일주일.하지만 서로 얼굴 볼 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정은은 스미스 교수와의 소통이 처음엔 좀처럼 매끄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시차 문제 때문에 정은은 한밤중에만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연락할 수 있었다.게다가 스미스 교수는 워낙 바빠서, 통화는 늘 30분 내외로 끝났다.그래서 정은은 미리 질문들을 정리해두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일종의 ‘미팅 노트’를 작성했다.두 사람의 구어체 대화를 보다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해 기록했다.모든 걸 마치고 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눈을 감을 땐 이미 새벽.조금만 더 늦어지면 심야 근무였다.다음 날 늦잠이라도 자면 좋겠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전날의 대화는 단순한 말로 끝나지 않았다.정은은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받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새로운 데이터 지표를 정리해 메일로 교수에게 보내야 했다.보통 그 자료를 기반으로 저녁 통화에서 교수는 또 다른 새로운 데이터를 건넸고, 이 과정이 매일 반복됐다....재석은 정은보다도 더 바빴다. 회의에 회의, 일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그 와중에 M시로 날아가 학회 예비 발표를 하고, 물리학 학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현지 대학 몇 군데에서 강연도 해야 했다.대학 고위 인사들이 얽혀 있다 보니 각종 식사 자리 초대도 끊이지 않았다.게다가 그의 본업, 프로젝트와 실험들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재석이 바빠지면 자연히 전진욱도 피곤해졌다.진욱은 한순간 딸과 끝말잇기 놀이를 하며 여배우인 전처의 저택 거실을 뛰어다니다가, 다음 순간엔 직장에 복귀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비행 중에도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진행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받자마자 진욱은 재석에게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그래서! 2주 휴가 준다며? 내가 며칠 쉴 줄 알았어? 조재석, 너 한 번 계산해봐. 양심 안 찔려?”“겨우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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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4화

결혼식 당일.정은과 재석이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장민은 부모님과 함께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세 사람의 외국인 얼굴.그리고 가슴 앞에는 전통 장식들이 하나씩 걸려 있었고, 너무 웃어서 그런지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지만, 세 사람 모두 꿋꿋하게 입꼬리를 올리려 애쓰고 있었다.그 모습이 좀 웃기면서도, 솔직히 귀여웠다.“어, 재석아! 정은아!”두 사람을 보자마자 장민의 얼굴이 환해졌다.“왔구나!”재석이 위아래로 훑어봤다.“이 차림은... 구세영 교수가 시킨 거야?”“아니, 내가 준비한 거야! 어때, 괜찮지?”재석 입가가 씰룩였다. “우리 부모님도 전통 장식 걸었는데 엄청 좋아하시더라!”정은이 물었다.“장 교수님, 이런 거 어떻게 생각해냈어요?”“세영이 그러는데, 우리나라에서 결혼은 인생에서 제일 큰 경사래! 무슨 무슨 학회에서 이름 오르는 거랑, 고향 사람 만나는 거랑 같은 수준으로 기쁜 일이라고!”“솔직히 난 왜 고향 사람 만나는 게 결혼과 같은 레벨인진 잘 모르겠지만, 뭐 그건 중요하지 않고, 하하하...”“세영이가 그러는데, 기쁜 날엔 최대한 신나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더라고.”“근데 내 언어는 이제야 좀 늘었지, 세영이네 고향 사투리는 하나도 못 알아듣잖아, 근데 이건 그냥 전통 장식 몇 개 더 걸어버리면 되니 편하잖아!”장민 표정에는 ‘나 천재지?’라고 적혀 있었다.“봐봐, 국어와 영어 둘 다 쓰여 있어. 편하지?”정은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장 교수님! 용기는 만점이고, 성의도 만점입니다.”“헤헤! 역시 넌 알아보네! 아까 세영의 고향 친척들이 나 쳐다보는 눈빛이 좀 이상해서, 또 내가 뭔가 실수했나 싶었거든.”정은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교수님, ‘실수’ 같은 단어도 써요, 이제?”“헤헤, 세영이가 가르쳐줬어.”장민이 직접 정은과 재석을 안으로 안내했다.“세영이가 그러더라, 제일 친한 친구랑 제일 가까운 가족은 꼭 내가 직접 안내하라고.”“재석, 정은, 너희 여기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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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5화

재석과 현빈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그 표정은 황당해서 웃긴다는 쪽에 가까웠다.도겸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그래도 강서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소정은? 너 왔네?!”정은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안녕.”“너...”“서정아, 앉아.”도겸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을 잘랐다.서정은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삐죽이더니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그런데도 시선은 자꾸 맞은편의 재석과 정은 쪽으로 갔다.‘이것 봐, 내가 전부터 수상쩍다 싶더니.’특히 재석이 정은에게 하나하나 살뜰히 챙겨주는 모습은 서정의 눈에 거의 ‘공공연한 애정행각’으로 보였다.서정은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그때 떠돌던 얘기가 헛소문은 아니었네...”대학원 면접 때, 재석이 면접관이고 정은이 지원자였는데, 지금 둘이 연인이면, 설마 그때부터 뭔가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머릿속을 스쳤다.“강서정 씨, 뭐라고 하셨어요?”재석의 차가운 눈빛이 서정을 향했다.“좀 더 크게 말해보시죠? 다 같이 듣게.”서정은 순간 목이 콱 막히며 침을 꿀꺽 삼켰다. 결국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아니에요, 아무것도...”“그래요, 알았어요.”도겸은 자리에 앉은 뒤로 시선이 정은 얼굴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몇 달 만에 본 정은은 더 예뻐져 있었다.혈색 좋은 얼굴, 고요한 눈빛, 은은한 미소.한눈에 봐도 요즘 잘 지내고, 잘 보살핌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예전, 둘이 사귀던 시절에도 정은 얼굴에 저런 빛이 돌았던 건... 처음 사귀기 시작한 1,2년뿐이었다.그 후로는...“오빠, 옆에서 뭐라고 이야기하잖아!”서정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도겸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어, 뭐?”현빈이 다시 물었다.“신랑이랑 아는 사이야?”“아니, 신부랑 알아.”그 뒤로 둘은 말이 없었다.벌써 3년.한때 그렇게 친했던 친구 사이였지만, 한 번 ‘금 간 관계’는 아직까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깨진 거울은, 아무리 다시 붙여도 원상복구는 안 된다.그래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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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6화

세영이 꽃을 들고 정은이 앉아있는 쪽 테이블로 걸어왔다. 아직 누구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이, 세영은 곧장 재석 앞으로 다가가 부케를 내밀었다.살짝 웃으며 말했다.“행복하세요, 조 교수랑 정은이...”재석은 잠깐 멈칫하다가, 손을 들어 꽃을 받았다.“고마워요.”세영은 그대로 돌아서 무대 위로 걸어갔다.그 순간, 세영이 품고 있던 오래된 짝사랑은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그리고 이제는 자기만의 더 좋은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테이블 아래로 재석은 손에 든 꽃을 정은 쪽으로 내밀었다.“신부의 축복이래. 받아.”“응.”정은이 손을 뻗어 꽃을 받았다.그때, 양옆에서 두 줄기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싸늘한 눈빛의 도겸은 표정이 어두워졌다.현빈의 굳게 다문 입술은 칼날처럼 얇았다.서정은, 재석의 눈빛에 담긴 다정함과 정은 입가에 번진 미소가 눈이 부셔 자신도 모르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예식 중간에 정은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자리를 비웠다.돌아오는 길에 서정을 마주쳤다.서정은 고개도 안 돌리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그런데.“소정은, 잠깐만.”정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못 들은 척하면 지나갈 수 있겠지.’서정이 성큼 따라와서 길을 막았다.“너 뭐야? 내가 부르는 거 못 들었어?”“들었어.”“그럼 왜 대답 안 해?”“하기 싫어서.”서정이 말문이 막혔다.“그래도 한때 친구였잖아. 내가 네 앞에서 시누이처럼 군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차가울 건 없지 않아?”정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서정을 바라봤다.“이미 우리 사이 틀어진 거 알면, 내 태도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거 아니야? 내가 너라면, 굳이 나처럼 말 섞기 싫어하는 사람 붙잡진 않았을 텐데. 강서정 씨, 이런 거 좀... 안 쪽팔려?”“너...!”“미안, 나 먼저 갈게.”“소정은, 너 예전이랑 완전 딴사람 됐다? 이렇게 당당해진 거, 조씨 가문이랑 엮여서 그런 거지?”“예전엔 다들 생각했잖아. 너 우리 오빠랑 헤어지면 이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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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7화

세영과 장민이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떠난 사이, 서비대학교는 개강을 맞았다.첫날 학과 개강총회에만 얼굴 비춘 뒤, 정은, 민지, 서준 셋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말 그대로 실험실에 틀어박혔다.무한 실험실은 드디어 스미스 교수의 ‘PAK 실험실’과 정식 계약을 맺고, 전략적 협력 체제로 들어갔다. 앞으로 바이러스 전파 지역별 차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상호 공유할 예정이었다.이런 국제 연구 컨소시엄은 학계 전체로 봐도 드문 사례였다.이 소식이 송영한의 귀에 들어간 것은 개강이 한 달쯤 지난 뒤였다.“소정은이라는 애가...!”송영한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진짜 해냈네! 저걸 성사시켰다고?!”감탄하는 말투에는 놀라움과 어이없음, 그리고 어딘가 얄미운 기색까지 섞여 있었다.그리고 부총장 한중기를 돌아보며 덧붙였다.“몇 년 전 기억 안 나? 우리 둘이 직접 나서서 보증까지 섰는데도, PAK 실험실 협업 못 따냈잖아.”“스미스 교수 그분, 괴팍하고 고집 세고, 깐깐하고 의심 많고, 별별 잣대 다 들이대던 사람인데... 소정은은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송영한은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괜히 들뜬 기색을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본인이 해낸 줄 알 정도였다.그 모습을 보고 한중기는 피식 웃었다.“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알 리가 있나요?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세요.”“아니, 됐다.”송영한은 고개를 저었다.작년 국제학술대회 때문에 학교 측과 정은의 사이가 어느 정도 풀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사적인 얘기까지 꺼낼 사이는 아니었다.한중기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대충 짐작은 갑니다. 예전엔 우리가 제안한 주제가 스미스 교수 연구 방향이랑 잘 안 맞아서 거절당했던 거고, 이번엔 소정은이 내민 주제가 꽤 흥미로웠던 거겠죠.”“주제?”“네.”한중기가 문득 감탄하듯 말했다.“무한 실험실, 또 뭔가 하나 터뜨리겠네요.”송영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처음에 그렇게 틀어지지만 않았어도...’‘무한 실험실을 학교 이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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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8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좌석에 앉는 순간, 재석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륙 전,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꽃다발 하나 준비 부탁드립니다...]무한 실험실.정은은 뻐근한 목을 주물러가며 노트북 컴퓨터를 덮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정은 언니, 이제 가요?”“응. 데이터 정리 다 해서 패킹해놨어. 집 가서 스미스 교수님이랑 온라인 미팅하면 돼. 오늘은 교수님이 좀 늦으신대.”“에휴, 언니 진짜 고생 많다. 매일 밤새잖아요...”“어쩔 수 없지. 우리가 도움받는 입장이니까, 최대한 상대방 시간에 맞춰야지.”민지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언니, 우리 셋이 돌아가면서 할까요? 언니만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정은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매일 데이터랑 진행 상황에 맞춰야 하는데, 중간에 사람 바뀌면 어제까지 뭐했는지 다시 파악하느라 시간 다 날아가.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말을 멈췄다가, 정은이 눈을 찡긋했다.“네 영어로 버틸 자신 있어?”민지이 할 말을 잃었다.‘언니, 사람 아픈 데 찌르네.’정은은 어깨를 으쓱였다.“그러니까 내가 할게. 너랑 서준이는 데이터랑 진행 상황만 신경 쓰면 돼. 나머지는 신경쓰지 마.”“네! 언니, 진짜 든든해요!”민지가 와락 안기더니 정은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그걸 본 서준이 헛기침을 했다.“그만해라. 민지야, 데이터 곧 나온다. 모니터링해.”민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봤다.“후! 다행이다! 문제 없네!”서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빛이 부드럽게 풀리며 속으로 생각했다.‘아휴, 귀여워 죽겠네...’...정은은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주차를 마치고 골목길을 걷다가 냉장고가 비어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정은은 근처 마트로 발길을 돌렸다.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마트 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것저것 장을 보는 사람들.정은은 카트를 밀며 신선식품 코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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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9화

사실... 재석은 입맛이 썼다.창밖으로 달빛이 물처럼 쏟아지고, 방 안은 봄기운이 가득했다.모든 게 끝난 뒤, 재석은 정은을 품에 안았다.정은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게으르고 한가로운 고양이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그런데 정은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아, 큰일 났다... 중요한 거 까먹었어요!”말하며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거울 앞에 서서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재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일어나? 어디 가려고?”“스미스 교수님이랑 열 시 반에 미팅 잡았었는데, 깜빡했어요!”정은은 손목시계를 힐끔 봤다.“아직 십 분 남았네... 교수님... 자기야, 노트북 좀 건네줄래?”재석이 노트북을 내밀자, 정은은 그것을 받아들고 방을 나서려 했다.“자기야, 나 거실에서 할게요. 먼저 쉬고 있어요.”“아냐, 그냥 여기서 해.”“응...?”“여기서 영상통화로 해. 나 방해 안 할게.”생각해보면 평소에 정은은 종종 침실에서 회의에 참석했었다.잠깐 고민하던 정은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대 앞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헤드셋을 꽂고 자료들을 빠르게 정리했다.정각, 스미스 교수의 영상 통화 요청이 떴다.연결하자마자 최근 이틀간의 실험 진행 상황과 데이터 분석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어느새 30분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스미스 교수 쪽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고, 정은 역시 정리할 내용이 꽤 많았다.두 사람의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졌다.그 사이, 재석은 말없이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정은의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또 한참이 지나, 어느새 옷까지 다 챙겨 입은 재석이 정은 곁으로 다가왔다.손짓으로 이어폰을 빼보라는 신호를 보냈다.정은은 잠시 놀랐지만 그대로 따라 했다.귀에서 이어폰이 빠지는 순간,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방 안에도 또렷하게 울렸다.“앞으로 일주일 계획은 대략 이렇고. 정은아, 다른 질문 있나?”“지금은 없어요.”“좋아. 거긴 지금 밤이지? 나도 출장 중인데,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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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0화

통화가 끝나자, 정은은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스미스 교수님, 왜 자기 말은 그렇게 잘 들어요?”사실 그전에도 정은은 회의 시간을 좀 조정해보려고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그런데 스미스 교수라는 사람, 고집 세고, 자기만의 룰이 확실했다.쉽게 말해, 남 얘기를 잘 안 듣고 타협이 잘 안 되는 타입이었다.자기 스케줄을 누가 건드리려 하면 더더욱.그래서 결국 정은은 지금까지 묵묵히 밤샘 루틴을 감수하고 있었다.재석은 시크하게 말했다.“스미스 교수님, 나 무서워해.”정은이는 믿지 않은 눈빛이었다.“크흠! 몇 년 전 할로윈 때, 내가 도사 복장 입고 노란 종이에 빨간 펜으로 부적을 하나 그렸거든. 그 뒤로 날 보면 피해 다녀.”“왜?”“음... 동양의 신비한 힘이 두려운가 봐?”“푸흣... 자기야, 일부러 그랬죠?”“도사 복장은 아니었는데, 부적은 일부러.”“왜 무서워하게 만들어요?”“크흠...”재석은 살짝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그분이 자꾸 나 붙잡고 수다 떨었어. 연구 얘기면 괜찮은데, 맨날 날씨, 바닷가, 모래 얘기... 거절해도, 다음엔 또 강제 토크... 결국 부적을 그려서 스미스 교수 어깨에 얹어줬다니까.”정은 정말 믿지 않았다.‘하, 내 남자친구 이렇게 웃긴 사람이었어?’재석은 노트북을 덮더니 갑자기 정은을 번쩍 안아 올렸다.정은은 놀라서 반사적으로 두 팔을 남자의 목에 감았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정은은 살짝 입술을 눌렀다.“뭐 하는 거예요? 얼른 내려놔요...”“안 놔. 이제 본격적으로 할 일 해야지.”“아까 했잖아요?!”“절차가 좀 복잡해서, 몇 번은 더 해야 될지도.”남자가 한 여자를 숨막히게 원할 때는 어떤 이성도, 어떤 논리도 먹히지 않는다.그리고 밤은... 기니까. 벌어질 일도 많을 것이다....4월 말, 오미선 교수가 D국에서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예년 같으면 이제 곧 오미선 교수 같은 원로 교수들이 요양을 위해 해외로 나갈 시점이었다.식사 자리에서, 정은은 아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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