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Bab 1291 - Bab 1300

1733 Bab

제1291화

오미선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이젠 나한테 잔소리까지 하네?”정은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당했다.“맞아요, 잔소리할 거예요! 제가 잔소리해도 안 들으시잖아요.”“참나, 이 녀석...”오미선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그 얼굴엔 한없이 부드러운 기색이 맴돌았다.“그래도, 난 갈 거야.”“교수님...”“정은아, 일단 내 말 좀 들어봐.”정은은 꾹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네, 말씀하세요.”“나는 평생 연구 하나에만 매달리며 살아왔어.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결국 혼자야. 근데 이건 내가 선택한 거니까. 좀 아쉽긴 해도, 후회는 안 해.”“사람이 다 가질 순 없다는 걸, 나는 평생 걸려서 깨달았거든. 5년 전, 처음 그 바이러스가 터졌을 때 이미 해외로 나가서 데이터 모을 계획이었어. 위에서도 허락했고, 관련 전문가들과 특별 연구팀까지 꾸렸었지.”정은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그렇게 일찍 준비하신 거예요?”“그렇지.”“근데... 왜 안 가신 거예요?”오미선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정은은 숨을 멈췄다.“저 때문이에요?”순간 머릿속이 번쩍였다.그리고 시간을 거꾸로 계산해 보니, 퍼즐이 맞아떨어졌다.“제가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온 해... 그때죠?”“너 같은 학생은, 내가 정말 오래 기다렸던 학생이었거든. 겨우, 정말 겨우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섰는데, 내가 그때 너 버리고 가버리면 안 되겠다 싶더라. 적어도 몇 년은 옆에서 붙어 있어야 마음 놓을 수 있을 것 같았어.”오미선은 그때 리더였다. 리더가 빠지자 전담 팀 전체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근데 이제는 됐어.”오미선의 눈빛이 달라졌다.“너 이젠 혼자서도 잘하잖아. 서준이도, 민지도 잘 이끌고 있고. 그래서 마음이 놓여. 나에게는 지금까지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한테도, 그리고 내 자신한테도, 이제는 내 역할을 다해야 할 때야.”그 말을 마친 오미선은 웃으며 말했다.“가족이 없으면, 학문에 충실하면 되지. 아내, 엄마는 못 되더라도,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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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2화

정은의 눈가가 붉어지고, 콧끝이 찡했다.“가고 싶으면 가세요... 근데 무슨 죽네 사네 그런 말은 하지 마요, 에이! 퉤퉤퉤! 얼른 퉤퉤퉤! 교수님은 무조건 백살까지 사셔야 해요!”“그래, 그래.”오미선은 웃음을 터뜨렸다.“나도 노력할게.”“그러셔야죠.”...밤이 되어, 정은은 이 얘기를 재석에게 전했다.남자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자기야, 왜 하나도 안 놀라요? 나만 이렇게 충격 받은 거예요?”“내 기억이 맞다면, 그 특별 조사팀은 몇 년 전부터 준비 중이었어. 오 교수님 성격에, 그땐 접어뒀어도 언젠간 다시 꺼낼 거라고 예상했지.”정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왜, 걱정돼?”재석이 물었다.“응... 그 나이에 이제 좀 쉬셔도 될 텐데, 왜 굳이...”그러자 재석은 살짝 웃으며 정은 등을 다독였다.“너한텐 현명하지 않은 선택으로 보여도, 오 교수님한텐 그게 자기 삶을 사는 방식이겠지. 평탄한 길은 교수님 스타일이 아니잖아. 늘 좁은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니까.”...다음 날, 재석은 원래 살던 아파트로 가지 않고 본가로 향했다.“아이고! 재석 도련님 오셨네요...”가사도우미가 반갑게 맞았다.소리를 들은 강서원이 2층에서 후다닥 내려왔다.“재석이? 웬일이야? 잠깐 기다려봐, 부엌에 너 좋아하는 반찬 몇 개 더 올리라고 할게. 오늘은 집에서 저녁 먹고 가.”“네, 좋아요.”재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강서원은 기분 좋게 부엌으로 향했다.재석은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아버지 어디 계세요?”“회장님은 서재에 계셔.”재석은 서재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가, 손을 들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들어오게.”“아버지.”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기봉은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웬일이냐, 네가 다 오고.”“왜요, 오면 안 돼요?”재석이 웃었다.“그럴 리가 있냐. 잘됐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방금 쓴 글씨다, 어때? 감상평 한마디 해봐라.”재석은 다가가 글씨를 내려다보고, 짧게 한마디.“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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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3화

저녁상을 물리자 재석은 곧장 일어났다.강서원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이 녀석, 이대로 그냥 가게? 잠깐 앉았다 바로 가는 거야?”조기봉은 묵묵히 앉아있었다.“그리고, 당신은 왜 또 말이 없어요? 아들에게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요! 응?”강서원이 팔꿈치로 조기봉을 쿡 찔렀다. 그제야 조기봉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나 방금 못 들었는데...”강서원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진짜, 하나같이 사람 미치게 하네!’...밤이 깊고,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은다.안방은 숨죽인 듯 고요했고, 강서원은 어느새 깊게 잠들어 있었다.그런데 어둠 속에서 조기봉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발소리 없이 발코니로 나간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몇 년, 아니 수십 년 만에 처음 눌러보는 번호였다.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쯤,‘아, 지금 새벽인데... 자고 있겠지.’조기봉은 순간적으로 끊을까 했다.그런데...[여보세요? 네, 누구세요?]목구멍이 뻣뻣하게 굳은 듯했다.조기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야.”...“메이크업이요?”전화를 받은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저쪽에서 애영 아주머니가 말했다.[응, 교수님께서 그러시더라고. 메이크업 좀 하고 싶다고... 혹시 와줄 수 있겠니?]“네, 당연히요! 메이크업 박스 챙겨서 갈게요. 음... 한 30분쯤 걸릴 것 같아요.”[그래, 그래! 내가 교수님께 전할게.]...정은이 도착했을 땐, 오미선 교수는 미리 마당에 나와 있었다.짙은 쪽빛 전통풍 원피스를 입고, 은빛 구름 무늬가 소매와 깃에 수놓아져 있었다.작고 가지런한 옥색 단추가 줄지어 있고, 하얗게 센 머리는 곱게 틀어 나무 비녀로 고정해 두었다.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그림 같았다.“정은아, 고생스럽게 이 밤중에 불러서 미안하다.”정은은 씩 웃었다.“교수님, 또 그렇게 거리두시면 저 진짜 섭섭해요?”“알았어, 알았어. 거리 안 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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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4화

두 사람이 눈을 맞춘 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스르르 사라진 듯 고요해졌다.정은은 너무 놀라 두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오 교수님이랑... 재석 씨 아버지?!’‘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박애영은 그 표정을 보고는 재빨리 눈치껏 정은을 안으로 이끌었다.“들어가자, 들어가자. 두 분이서 얘기 좀 나누시게.”...“아주머니, 교수님이랑 재석 씨 아버지... 두 분 무슨 사이예요?”정은이 조심스레 물었다.박애영 아주머니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다 지난 일이야.”정은은 순간 말이 막혔다.“재석 씨도 알아요?”“알지.”“혹시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어요? 교수님한테선 한 번도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어서...”박애영은 채소를 다듬으며 낮게 말했다.“나도 다 아는 건 아니야. 젊었을 때 둘이 한때는 함께였는데, 어느 순간 이유도 모른 채 헤어졌어.”갈라진 뒤로 둘은 각자의 길을 갔다.조기봉은 예정된 대로 결혼해, 자식을 셋 두었고, 오미선은 평생 학문에만 몰두하여, 세상에 남긴 건 연구 성과뿐이었다....20분쯤 지난 후, 밖에서 오미선의 목소리가 들렸다.“정은아.”“네, 나가요!”정은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교수님, 부르셨어요?”오미선은 부드럽게 웃었다.“손님, 문 앞까지 배웅 좀 해드려.”조기봉은 무언가 말을 꺼낼 듯하다 멈췄고, 정은은 몸을 비켜 길을 터주며 말했다.“제가 모실게요.”“그래.”둘은 정원을 지나 문 앞까지 걸었다.그때, 조기봉이 갑자기 물었다.“정은아, 오 교수가 연구팀이랑 호주 간다던데, 너는 그거 찬성이야?”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저보다 교수님을 더 잘 아시잖아요. 교수님은 한 번 마음먹은 일엔, 쉽게 흔들리는 분이 아니에요.”조기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그저 그 사람 몸이 걱정돼서 그래. 평생 연구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 그 나이에 또 그 위험한 데를 간다고... 내가, 내가 정말 오 교수처럼 고집 센 사람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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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5화

정은은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그래서요? 그다음은요?”“재석 아버지가 나한테 와서 도움을 청했어. 연구 방향이랑 아이디어 좀 보태달라고. 결국 그 대회에서 1등을 했지. 그때부터였을 거야, 재석이 아버지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진 게.”“그리고... 둘이 사귀게 된 거예요?”정은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렇게 바로는 아니었지.”그 순간, 정은은 처음 보았다. 오미선 얼굴에 엷게 스친, 아주 미묘하고 조용한 수줍은 표정.“그 후로 재석이 아버지가 내 연구실에 자주 왔어. 처음엔 학문 관련한 질문으로, 나중엔 이런저런 핑계로... 그러다 보니 나도 조금씩 마음이 갔던 거지.”“결국 우린 2년 정도 비밀 연애를 했어. 아무도 몰랐지.”“근데 왜 헤어지셨어요?”정은은 속삭이듯 물었다.“재석이 아버지가 졸업하고, 집에서 정해준 혼처가 있었어. 당연히 재석이 아버지는 거부했지. 근데 집안의 벽은 높았고, 나는 연구에 몰두하느라 늘 바빴어. 대부분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고 있었으니까.”오미선의 눈동자에 살짝 그늘이 내렸다.“재석이 아버지가 찾아오면 난 시간이 없었고, 내가 시간을 내 찾아가면 연락이 안 닿고. 반년 넘도록 내내 그렇게 엇갈렸어. 우리 둘 다 마음에 금이 간 걸 느끼면서도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몰랐던 거야.”“결국, 재석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양보했지. 날 인정해주겠다고. 조건은 단 하나, 당장 결혼할 것, 그리고 결혼 후엔 대학 강의는 계속해도 되지만 연구는 접고 가정을 돌볼 것.”정은은 괜히 가슴이 묵직해졌다.너무 익숙한 얘기였다.강서원, 재석의 어머니도 비슷한 말을 했으니까.“나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마침 그 무렵, 재석이 할아버지 건강이 악화됐고, 재석이 아버지는 회사를 물려받아야 했지.”“결국 우린, 선택의 방향이 너무 달랐던 거야. 멀어질 수밖에 없었어.”“마지막은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 재석이 아버지가 몇 번 붙잡았지만, 나는 마음을 굳혔고. 그렇게 끝났지.”오미선은 가만히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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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6화

[정은 학생, 이 교환학생 좀 맡아줘야 할 것 같아.]학교로 돌아가는 길, 정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한중기였다.[그리고 잠깐 부총장실로 와줄래?]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였다....똑똑똑-“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가며,“부총장님, 찾으셨다고요?”한중기가 시계를 흘끔 본다.“오미선 교수 배웅하고 왔어?”“네.”“사실 오미선 교수가 신청서 올렸을 때 나도 고민 많이 했어. 말리기도 했고. 근데 본인이 너무 강경하더라고. 결국 학교로서도 어쩔 수 없었지.”“네, 알고 있어요. 오늘 그 얘기만 하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겠죠?”“역시 똑똑하네.”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한중기.“오미선 교수가 이렇게 떠날 줄 몰랐거든. 그래서 거기에 맞춰서 교환학생도 배정해놨는데, 지금 교수는 가버렸고, 학생은 남았지... 한참 고민하다가...”정은, 살짝 눈썹이 올라간다.“네가 좀 맡아줄래?”“제가요?”웃음이 나올 뻔했다.‘내가 학생인데 학생을 맡으라고?’‘장난하나?’“크흠! 그게 말이지, 정은 학생. 지금 정은 학생은 이미 동기들 수준을 훨씬 넘어섰잖아. 연구 성과도, 논문 실적도 탑급이지. 학생이긴 한데, 그냥 학생은 아니지.”한중기가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지금도 임서준 학생이랑 하민지 학생 지도 중이지? 오미선 교수도 떠나기 전에 탁재민 부탁하고 갔잖아? 학교는 자네의 지도력이 충분하다고 봐.”“하...”어이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부총장님, 저희 사정 되게 잘 아시네요? 탁재민까지 저한테 넘어온 거 어떻게 아셨어요? 평소에 꽤 열심히 지켜보셨나 봐요?”“크흠!”한중기, 머쓱한 듯 코를 만진다.“부총장이 학생들의 교육과 발전에 관심 가지는 게... 당연한 일이지.”더 돌려 말할 필요 없다고 느꼈다.“못 맡아요. 다른 분 찾으세요.”“잠깐...!”“또 뭘요?”“오미선 교수, 교환학생 쪽에 이미 확답했거든. 거기서도 만족도가 엄청 높았고. 이제 와서 교수님이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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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7화

유하린, 바로 H국에서 온 그 교환학생이었다.정은은 상황을 파악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게, 이렇게 또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인연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네요.”하린이 식판 위를 힐끔 내려다봤다.“잠깐만요. 나도 밥 좀 가져올게요! 기다려줘요!”활짝 웃으며 뛰어갔다.금세 돌아온 하린의 식판엔 정은과 똑같은 반찬들이 올라와 있었다.“이번 학기... 정은 씨가 내 담당 맞죠?”하린이 물었다.“정확히 말하면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중간에 상황이 바뀌어서 맡게 됐어요.”“그럼... 나한텐 사실상 지도교수님 같은 거네요?”“아니에요. 나도 아직 대학원생이라 그냥 임시 담당일 뿐이에요.”“뭐, 어차피 비슷하네요. 앞으로 문제 생기면 정은 씨한테 물어보면 되죠?”밥을 한 숟갈 뜨던 정은이 조용히 말했다.“학문적인 질문은... 내가 모르면 다른 교수님께 물어봐줄 수 있어요. 근데 학교생활 관련 문제는 담당 관리 선생님께 말해요.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오케이.”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몇 숟가락 먹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혹시... 정은 씨, 나를 귀찮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걸 멈추지 않고, 정은이 솔직히 대답했다.“음, 좀.”...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하린이 조용히 뒤따라왔다.꼭 교수를 따라오는 학생처럼.“뭐, 아직 할 말 있어요?”정은이가 물었다.하린 눈동자가 반짝였다.“정은 씨 실험실이 교내에 없고 학교 밖에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마침 오후에 수업 없는데 내가 가서 구경해봐도 돼요?”정은은 곧장 하린을 바라봤다.알 수 없는 표정.“나에 대해서, 꽤 잘 알아봤네요?”하린이 싱긋 웃었다.“그럼요. 원래는 오미선 교수님이 담당이었는데 출장 가신다고 해서, 제일 유능한 제자 분이 맡는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정은 씨에 대해 알아봤어요.”“그래요?”정은이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정은 씨는 진짜 대단해요. 실험실도 직접 세웠고, 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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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8화

새벽 시간, 한 파출소.“오... 유학생이었어요? 그러면 공부 꽤 잘하겠네요? 우리나라 최고 대학까지 왔으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뭐하러 클럽 같은 데 가요?”“그런 데가 얼마나 시끄럽고 어지러운 줄 알아요? 이런 사건, 우리 하루에도 몇 건씩 처리한다니까...”“네, 네...”하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중얼댔다.“자.”경찰이 서류철을 정은 쪽으로 밀어준다.“여기 서명해요. 이제 데리고 가도 돼요.”“네, 감사합니다.”정은이 서명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 나간다.하린은 황급히 뒤따랐다.파출소 밖에 나서서야 가까스로 정은을 붙잡았다.“정은 씨! 잠깐만요!”정은이는 걸음을 멈추더니 차갑게 돌아선다.“다음번은 없어요.”“나, 나 그냥... 심심해서 클럽 가서 음악 좀 듣다 온 건데, 진짜예요! 근데 그 남자가... 갑자기 어깨에 손 올리고, 같이 호텔 가자 그러고... 내가 그걸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하.”정은이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래서 맥주병으로 머리를 깼다고요?”“그, 그냥 손에 잡히는 게 그거였어요.”하린은 아주 당당하게 변명했다.정은은 속으로 더욱더 어이가 없었다.“첫째,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는 본인의 선택이에요. 나는 뭐라 할 자격도 없고, 할 생각도 없어요.”“근데 하린 씨가 내 번호로 연락을 했다는 건, 그 순간부터 이 일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 돼요.”‘지금쯤이면 스미스 교수님이랑 화상으로 내일 실험 데이터 정리하고 있었을텐데.’정은의 머릿속이 아찔했다.“둘째, 내가 점심 때 말했을 텐데요? 학교생활 문제는 담당 선생님한테 해결하라고. 하린 씨가 사고 쳤다고 내가 뒷수습까지 해줘야 할 의무는 없어요. 학교에서 나한테 그런 일로 월급 주는 것도 아니고, 하린 씨는 더더욱 아니고요.”“마지막으로, 이번 일을 꼭 교훈 삼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오는 거, 그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줄 알아요? 왔으면 뭔가 배우고, 뭔가 얻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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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9화

사람을 빼냈다고 정은이 그 죄까지 뒤집어쓸 이유는 없었다.규정대로 처리하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어젯밤 미뤄둔 미팅은 오늘로 넘어왔다.정은이는 하루 종일 쳇바퀴처럼 돌아다니다 겨우 해가 지기 전 모든 일을 끝냈다.그녀는 결국 긴 숨을 내쉬고 나서야 핸드폰을 집어들었다.잠금 해제.‘뭐야, 이건.’부재중 전화 열 몇 통.전부 하린이었다.정은의 미간이 잠깐 움직였지만, 별다른 표정 없이 화면을 위로 쓸어 넘겼다.콜백할 생각은 없었다.실험대를 정리하고 가운을 갈아입었다.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여자의 발걸음이 멈췄다.“재석 씨? ...여긴 웬일이에요?”익숙한 폭스바겐 옆, 환한 웃음을 띤 얼굴로 서 있는 남자.“오늘은 좀 여유가 있길래. 데리러 왔지.”재석은 웃으며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그때, 옆에서 불쑥 그림자 하나가 뛰어나왔다.“정은 씨!”“하린 씨?”정은은 눈살이 살짝 좁혀지면서 하린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봤다.“여긴 왜요?”“전화 여러 번 드렸는데 안 받으시길래... 실험실 위치 알아보고 기다리고 있었어요.”“용건은요?”정은의 말투가 짧아졌다.“그게... 어젯밤 도와주셔서요. 생각해보니까 감사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식사라도...”“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정은은 몸을 돌려 재석의 손을 다시 잡았다.그제야 하린의 시선이 두 사람 손에 꽂혔다.“저분은...?”하린이 한두 번 눈을 깜박이더니 바로 물었다.“혹시... 두 분 사이가?”“보이는 그대로예요. 더 할 말 있어요?”“그럼 두 분 같이 저녁이라도... 내가 대접할게요. 감사의 의미로.”“괜찮아요. 우리 일정 있어서요.”“아, 네. 그럼 다음에 꼭 한 번...”“...”정은이 별다른 대답 없이 차에 오르자, 폭스바겐은 곧 매연을 남기며 멀어졌다.하린은 차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실험실 건물을 올려다봤다.7-8층 정도 되는 작은 건물.전 세계 최첨단 AI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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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0화

“재석 씨 출장 갔어요.”정은이 말했다.“어디로?”이춘재가 물었다.“M시에요. 모레쯤 돌아온대요.”“아이고, 조 교수 운이 없네. 너 외할머니가 조 교수 좋아하는 반찬 두 개나 만들어놨는데.”“그럼 제가 대신 좀 더 먹을까요?”정은이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스쳤다.“너도 참... 그래, 너라도 좀 더 먹어라. 요즘 너무 말랐어. 많이 바빴냐?”이춘재가 이어서 말했다.“네, 조금이요.”그녀는 대답하면서 슬리퍼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섰다.심현빈이 눈에 띄자 정은도 자연스럽게 인사했다.“오빠.”그리고 표정은 평온했다.정은은 오전에 일찍 온 터라 점심을 먹었지만 봉수진이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하도 성화하는 바람에, 결국 못 이기는 척 남았다.현빈 같이 바쁜 사람도 웬일로 모처럼 시간을 냈다. 아마 이춘재, 봉수진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는 마음일 것이다.저녁을 먹고 시계를 보니 제법 늦은 시간.정은이 일어섰다.“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저 먼저 갈게요. L시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그래, 알겠다.”현빈이 옆에서 차 키를 챙기며 같이 일어났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이번엔 재석이 없는 틈.현빈은 드디어 정은을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었다.‘왜 이렇게 길이 금방이지.’‘왜 이렇게 차가 빠르지.’속으로만 삼키며 도착한 동네 골목.30분도 안 걸렸다.“오빠,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전 이만 들어갈게요.”“그래. 조심히 들어가.”현빈은 정은이 올라가는 길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결국 그는 자리에서 멈춘 채로, 그대로 서서 눈으로만 배웅했다.“응.”차문을 닫고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정은.현빈은 시동을 걸지 않은 채,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그 순간.단지 앞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하린 씨?”‘또 유하린?’“네!”하린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저기... 할 말 있어요?”“내 일, 다 정리됐다고 말하려고 왔어요. 상대가 합의해줘서, 사건도 종결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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