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301 - Chapter 1310

1353 Chapters

제1301화

현빈은 그저 한 번 쓱 훑어보고는 곧 시선을 거둬들였다.정은이 바로 안심시켰다.“나 괜찮아요, 아는 사람 좀 만나느라 늦었어요. 금방 올라갈게요. 오빠도 이제 들어가요.”“그래.”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빈은 그대로 차 안에 앉아 정은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안도한 듯 차에 시동을 걸었다.톡톡톡-갑작스러운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현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쥔 손브레이크를 멈췄다. 그는 창문을 반쯤 내리자, 시선 끝에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무슨 일이세요?”하린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미소 지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감싼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뭐지, 이 분위기는...’“안녕하세요, 저 유하린이에요. 정은 씨의... 친구쯤 되겠네요. 혹시 정은 씨 오빠세요?”현빈은 대답하지 않았다.하린은 어색할 법한 상황에서도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성도 ‘소’ 씨예요?”현빈은 그녀를 흘끗 보고는 짧게 말했다.“‘심’ 씨예요.”“처음 뵙겠습니다!”하린은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현빈은 대수롭지 않게 정은의 방 쪽 창문을 한 번 흘겨보고는 말했다.“이제 갑니다. 좀 비켜주시죠.”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올리려 하자, 하린은 재빨리 손을 창가에 올려 살짝 막았다. 살짝 수줍은 듯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처음 뵙는데... 카톡 친구 추가해도 될까요?”현빈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안 돼요.”하린의 손끝이 살짝 떨리며 창문가에 머물렀고, 순간 웃음이 굳어졌다.하지만 금세, 그녀는 다시 환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아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어딘가 여린 기색이 어려 있었다.“딴 뜻은 아니고요... 그냥 여기 있는 동안 친구 하나쯤 사귀고 싶어서요.”‘혹시...’하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이었다.“혹시 정은 씨처럼, 저 귀찮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저 피하시는 거예요?”현빈은 어쩐지 흥미가 동한 듯 물었다.“혹시... 우리나라 사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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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2화

정은은 아무리 바빠도 틈틈이 오미선 교수에게 연락을 시도했다.듣자 하니, 연구팀은 호주에 도착한 뒤 한 달간 현지에 머문 후에야 맥스 군도로 향했다고 한다.그 한 달은 현지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정은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그 기간 동안 오미선 교수는 물갈이를 심하게 앓아 병상에 누워 지냈다.다행히도 연구팀 의료진의 신속한 조치 덕분에 병세는 금방 잡혔고, 오 교수는 몸을 추스른 뒤에야 섬으로 출발했다.“다음엔 이런 일 절대 없게 해주세요!”정은은 걱정과 안도, 그리고 화가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매일 교수님께 전화도 드렸는데, 이렇게 큰일을 한 마디도 안 하셨다고요?!”수화기 너머로 오미선의 웃음소리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그 속엔 특유의 다정한 위로가 묻어 있었다.[너 걱정할까 봐 그랬지. 게다가 금방 괜찮아졌고, 이제 와서 말해봤자 괜한 걱정만 더하잖니.]“실은 제가 알면 귀국하라고 할까 봐, 그러신 거 아니에요?”정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게 아니고...]“앞으로 뭐든 숨기지 마세요.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러셨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전 교수님 상태를 모르는 게 더 힘들어요.”“교수님이 혼자 밖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불안한데, 아무 얘기도 안 하신 상태로... 진짜 무슨 일 생기면, 저... 저 그때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요...”점점 떨리는 목소리에, 오미선도 급히 다정한 약속을 건넸다.[알았어, 알았어, 약속할게. 무슨 일 있으면 꼭 바로 말할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 말고, 몸 좀 챙겨. 민지한테 들었는데, 요즘 맨날 밤샌다며? 그러면 안 돼, 알았지?]정은은 코끝을 훌쩍이며 말했다.“그럼 약속해요. 교수님은 교수님 잘 챙기시고, 교수님 제자들은 제가 잘 챙길게요.”[너는 정말... 그래, 그래, 정은아... 나... 너... 많이...]“여보세요? 교수님? 목소리가 왜 끊기지... 여보세요?!”[정은아, 또... 바람이 불... 신호... 안 좋아... 안...]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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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3화

엘리베이터 앞, 꼭대기층.“진짜 끝까지 이럴래? 내가 몇 번 말해, 나 너 모른다고!”하린의 목소리였다.“웃기시네? 네 얼굴로 그런 소리 한다고? 하, 진짜...”이번엔 변리아.하린은 리아를 피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리아가 한 발 먼저 막아섰다.“대체 뭐 하자는 건데?”하린의 말투엔 이미 짜증이 가득했다.잠깐의 정적.그 순간, 리아가 갑자기 손을 뻗어 하린의 가슴팍을 움켜잡으려 했다.“꺄아악...!”하린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미쳤어?! 너, 나 진짜 경찰에 신고한다? 성추행으로...”하지만 리아는 막무가내였다. 하린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겨 옆으로 젖혔다.순간 드러난 어깨라인.아무것도 없었다.리아는 멍했다.‘없다고?’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하린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벗어나더니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었다.그때, 정은이 엘리베이터에서 막 걸어나오며 말했다.“어? 두 사람도 여기 있었어요?”정은은 마치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하린은 한순간 눈빛이 흔들리더니, 바로 미소를 띠었다.“아, 나... 여기 실험 자료 제출하러 왔다가 잘못 올라왔어요. 원래 층이 아니었나 봐요.”리아는 말이 없었다. 그저 시선을 살짝 내리깔더니, 두 사람 곁을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갔다.하린은 속으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휴... 살았다.’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의 시선이 바늘처럼 꽂혔다.그 눈빛은 겉으론 부드럽지만, 속에는 날이 서 있었다.“하린 씨, 변리아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였어요?”정은이 부드럽게 웃었다.하린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름이 변리아예요? 이름은 예쁘네. 근데 눈은 별로 안 좋은가 봐요.”“그래요?”“아까부터 나를 누구랑 착각하더라고요. 나는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말이에요.”정은은 가만히 하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빛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너머로 무언가를 꿰뚫으려는 듯한 기척이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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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4화

재석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 유하린이라는 여학생 어디가 수상하다고 보는 거야?”정은은 잠시 시선을 떨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문제 있어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옛날에 알던 사람 같아요.”“이상하게? 옛날 알던 사람하고 닮았단 건 눈으로 본 거 아냐? 왜 느낌이라고 해?”‘느낌이라...’정은은 잠깐 말끝을 흐렸다.“얼굴은 전혀 달라요. 하나도 안 닮았어요.”하지만 자신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닮았는데, 분명히...’재석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어디가 그렇게 닮았는데?”정은은 작게 웃었다.“멍청한 데요.”‘갑자기 왜 욕을 하는 건데?’재석은 이해가 안 됐다.“둘 다 너무 멍청한 게 닮았어요.”둘이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방 안은 금세 고요해졌지만, 어둠 속에서 재석이 입을 열었다.“진짜 신경 쓰이면, 한번 알아볼까?”정은은 벌떡 몸을 돌려 재석 품에 파고들었다.“자기가 알아봐 줄 거예요?”“그럼, 너더러 하게 놔두겠어?”“자기야, 진짜 최고예용!”“아직 더 보여줄 수 있는데, 볼래?”“지금 몇 신데, 내일 일찍 안 일어날 거예요?”“왕도 절세미녀 앞에선 못 일어난다는데, 내가 왕보다 대단하겠냐?”“내가 무슨 절세미녀예요?”“음... 확실히, 딱 하나 다르긴 해요.”“뭐가요?”“몸매가... 좀 차이 나지.”“뭐라고요?! 지금 나한테 볼륨 없다고 디스한 거예요?!”“아니! 전혀 그런 뜻 아니야.”“거짓말하지 마요! 다시 기회 줄게요. 제대로 말해봐요.”“그럼... 한 번 더 만져보고? 신중히 대답할까?”“...”긴 밤은 속삭임으로 채워졌다.몇 시까지였는지, 정은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볼 힘조차 없을 만큼 탈진한 채, 눈을 감자마자 잠이 쏟아졌다.다음 날, 역시나 예상대로 정은과 재석은 늦잠을 잤다.둘 다 허겁지겁 집을 나서느라 아침밥은 꿈도 못 꿨다.주차장에서 각자 차에 오를 때, 재석은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은 채 운전석 창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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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5화

스미스 교수는 박장대소했다.“평소는커녕, 언제 어디서든 조 교수님은 여자들한테 별로 젠틀하지 않거든!”정은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뭔가 사연이 있나요?”“그럼! 있지!”스미스 교수는 슬슬 신이 났다.“듣고 싶은데요?”“물론이지! 들어봐, 조 교수님은 예전부터 여자들한테 인기가 엄청났어. 아무래도... 잘생겨서겠지.”여기서 잠깐, 스미스 교수는 두어 초 멈췄다가 질투 반, 부러움 반으로 어깨를 으쓱였다.“근데 말이야, 그 여자애들이 다들 일정 시간 지나면 죄다 도망가버리는 거 알아? 왜 그런지 알아?”정은은 웃으며 맞장구쳤다.“왜요?”“비 오는 날 자기만 우산 쓰고 여친은 젖게 내버려두는 남자 본 적 있어? 자리 하나 남았는데 자기가 앉고 여친은 서 있게 두는 남자 본 적 있어? 조 교수가 딱 그래.”정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근데...”스미스 교수는 쑥 웃으며 몸을 살짝 기울였다.“내가 보기에 정은이 너라면, 조 교수님은 아마 자기가 젖어도 네 머리 위에 우산 씌워주고, 자기가 서 있는 한이 있어도 널 앉히지 않을까 싶어.”정은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려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진짜예요, 조 교수님?”재석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조금 부정확하네.”“비 오는 날이면, 내가 너 안고 같이 우산 쓰지. 자리 하나 남으면, 내가 먼저 앉고 널 무릎에 앉힐 거고.”정은은 잠시 말없이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참, 이 사람...’마침 요리가 나왔다.음식이 놓이자 셋은 자연스럽게 포크를 들었고, 정은은 스미스 교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교수님, 혹시 이번에 여기 오신 게... 설마 저희와 밥 한 끼 드시려고 오신 건 아니죠?”스미스 교수는 손을 내저었다.“아니지, 아니지. 이번에 M시에 학술대회가 있었거든. 어제 끝났어. 원래 바로 RD국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너랑 조 교수님 생각이 나서 말이야. 어쨌든 우리는 파트너 아니야, 그치?”그는 웃으며 덧붙였다.“어차피 온 김에 얼굴도 보고, 친목도 다지고, 좋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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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6화

“무슨 곤란한 일인데?”정은이 물었다.[일단 와봐요, 그때 얘기할게요!]하린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잠금 화면으로 돌아간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정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재석이 물었다.“갈 거야?”“어딜...?”“유하린 도와주러.”“안 가요.”재석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좋아. 그럼 우리 집에 갈까?”그 말에 정은도 웃으며 그의 팔에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술집 앞.하린은 초조한 듯 이쪽 저쪽을 번갈아보며 서 있었다. 전화 통화가 끝난 지 이미 40분 가까이 지났는데도, 정은의 그림자는커녕 그림자 비슷한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하린은 불안하게 발끝을 톡톡 찼다가, 다시 주위를 서성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옆의 건달 무리들은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건데? 시간 남아도는 줄 알아?”“조금만 더 기다려봐. 올 거야...”“아까 30분이면 된다며? 지금 그 시간 훌쩍 넘었거든?”하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건달 중 한 명이 비죽 웃으며 손가락을 비볐다.“우리도 시간 쓰는 건데, 추가금 좀 줘야지?”하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내가 이미 돈 줬잖아? 아직 판도 안 깔았는데 추가라니, 미쳤냐? 돈에 아주 환장했어?”“쳇. 겉보기엔 예쁘장하고 잘 차려입었으면서, 왜 이렇게 쪼잔하냐? 판 안 깐 건 니가 계속 기다리자고 해서 그러는 거잖아? 우리야 돈 받은 만큼만 일하러 온 거지, 네 시간 때워주러 온 줄 알아?”“너...”“한마디만 할게. 추가금 줄래? 아니면 우리 간다. 아, 혹은...”건달은 하린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우리랑 재밌게 놀래? 그럼 돈 같은 건 필요 없는데. 잘만 얘기하면 다 풀어줄 수 있어.”“꺼져!”하린은 온몸이 떨리면서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다 꺼져! 쓰레기 같은 놈들!”‘어쩌지, 진짜 안 오는 거야? 소정은...’“하, 경고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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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7화

저벅... 저벅...발소리가 한 걸음, 두 걸음.하린에게로 점점 가까워졌다.“누구야?!”하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날카롭게 외쳤다.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서 있었다. 숨소리 하나 없이,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기척만이 느껴졌다.‘가까워. 바로 앞이야. 겨우 1미터, 아니, 더 가까워.’눈은 가려져 있어도, 그 존재감은 또렷했다.그리고 가슴이 미친 듯 두근거리고, 손끝과 발끝까지 떨렸다.“왜, 왜 날 잡은 거야?! 이거 범죄인 거 몰라?!”“뭐, 뭐가 목적인데?! 돈?! 아니면 협박?!”“대답해! 대답하라고! 벙어리야?!”퍽!순간, 하린의 가슴팍 한복판에 강한 발길질이 꽂혔다.그녀는 숨이 턱 막히며 온몸이 덜덜 떨렸다. 비명 같은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시끄러워.”낯선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이 방에 들어온 뒤, 처음 내뱉은 말.하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이 목소리... 이 목소리...!’“너, 너... 설마...!”여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그 순간, 하린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휙 하고 벗겨졌다.강렬한 조명이 눈을 찌르듯 들어오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시야가 열렸다.그리고 하린의 눈앞에 보인 얼굴.차갑고 단정한 이목구비, 감정 없는 눈빛,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표정.어제 꼭대기 층에서 마주쳤던, 자신을 막아세우던 그 여자.“역시, 너였어!”하린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속삭였다.변리아는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그래, 나야. 문제 있니?”하린은 이를 악물며 또박또박 말했다.“말했잖아. 나, 너 아는 사람 아니라고.”리아는 하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점점 시선이 허공으로 흐려졌다. 마치 눈앞의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하린의 뺨을 쓰다듬었다.하린은 흠칫 몸을 비틀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리아의 손이 번개같이 턱을 움켜쥐었다.“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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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8화

하린은 트렁크 안에 처박혔다. 얼굴이 부딪히고, 몸은 구겨진 채로 숨이 턱턱 막혔다.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한참 흔들리던 차가 드디어 멈췄을 때, 하린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끄윽...”누군가 트렁크 문을 열고, 하린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발끝이 바닥을 질질 끌리며 어디론가 끌려갔다. 머리에 덮여 있던 마대가 확 벗겨진 순간, 눈앞에 환한 빛이 번쩍였다.하지만, 그다음에 보인 것은, 차라리 안 보이는 편이 나았다.그 사람.그 남자가,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그림자가 하린의 전신을 덮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조여들었다.‘곧 터질 것 같아. 진짜로, 죽을 것 같아.’“너... 나 구해준 거지? 맞지?”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하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그, 그치...? 이렇게까지 해서 날 데려왔다는 건... 나, 아직 쓸모가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너, 나 안 다치게 할 거잖아... 그치...?”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듯, 마지막 말은 두 번이나 반복됐다.“구했다고?”남자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하... 왜 ‘죽이려고 잡아온 건 아닐까’하는 생각은 안 해봤어?”하린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러나 그 안쪽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공포를 감출 수 없었다.“그럴 리... 없잖아... 나, 날 위해서... 그 많은 돈이랑, 시간이랑, 사람들까지 썼는데... 나, 너한텐 필요한 말...”“그래. 장기판 위의 ‘말’.”남자는 비죽 웃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남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근데 그 말이 지 맘대로 판 위에서 돌아다녀. 명령도 안 듣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하린의 얼굴에서 피기가 싹 사라졌다.“나, 나는...”그녀는 덜덜 떨며 무릎으로 다가가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나는 안 그랬어... 진짜로... 나는 다 네가 시킨 대로...”“안 그랬다고?”남자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와, 하린의 뺨을 거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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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9화

“너,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임.시.호!!”하린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그러나 눈은 곧게 남자를 꿰뚫었다.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시호는 순간 미묘하게 굳었다.그러더니 곧 입꼬리를 들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봐라, 너도 아주 구제불능은 아니네.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네.”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자기 뺨을 쓰다듬었다.“네가 말했지. 내 새 이름은 유하린, H국 유씨 집안의 사생아라고. 근데... 넌 한 번도 말 안 했어. 이 세상에 진짜 유하린이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시호의 웃음이 더 깊어졌다.“방금 칭찬했더니 또 바보짓 하네? 세상에 무에서 창조되는 신분은 없어. 네가 새 얼굴로 새 인생을 살고 싶으면,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왜 하필 성이 유씨겠어? 이씨, 왕씨, 그게 더 쉬웠겠지?”하린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근데 알아? 진짜 유하린을 아는 사람이 찾아왔어.”시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건조하게 물었다.“그래서?”“방금 나 납치했던 여자. 그 여자가 물었어. 이 얼굴 주인이 어디 있냐고.”시호는 그제야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빛은 평온했다.“넌 이 얘길 한 번도 안 했어. 그래서 변리아가 캐물을 때, 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멍청히 서 있었어.”“말했잖아. 장기판 위의 말은, 많은 걸 알 필요 없어.”“그럼, 진짜 유하린은... 어디 있어?”그 순간, 시호의 눈매가 차갑게 꺾였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린을 정면으로 바라봤다.“고양이가 왜 죽는지 알아? 호기심 때문이야. 알 필요 없는 건 묻지 마. 그래야 오래 살아.”‘미쳤다. 진짜, 다 미쳤어.’하린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아까 변리아에게 발로 차인 곳이었다.‘변리아, 저 여잔 그냥 미친년이야.’‘이대로면 절대 안 끝내. 끝까지 날 쫓겠지...’그러나 시호는 담담했다.“걱정 마. 변리아, 당분간 널 못 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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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0화

“누구 전화였어요?”정은은 화장실에서 나오며 무심히 물었다.“변리아 선생님.”“변 선생님이요? 이 아침부터 실험실로 불러내는 거예요?”“정반대.”“응?”“휴가 내신대.”“참 드문 일이네요. 무슨 일로 그러는지 말했어요?”“그냥 일이 있다고. 자세히는 안 말했어.”아침을 먹고,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재석은 실험실로, 정은은 학교 국제교류처로 향했다.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면, 지도교수가 교환학생의 평가 점수를 매기는 게 절차였다.총 5단계.A+, A, B+, B, C.비록 공식 지도교수는 아니었지만, 정은은 그 역할을 대부분 도맡아왔다.평가도 그녀가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국제교류처 직원이 종이 서류와 펜을 건넸다.“소정은 선생님, 저쪽에 앉아서 천천히 작성하시면 돼요.”한없이 공손한 말투였다.총장, 부총장이 직접 챙기는 인물에게 누가 대충 대하겠는가?옆자리 직원은 일회용 컵에 따뜻한 물까지 챙겨왔다.“소정은 선생님, 물이에요. 따뜻한 거로.”행정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다 눈치가 만렙이었다.“감사합니다.”정은은 웃으며 답했다.몇 분 후.“다 작성했습니다. 어디 두면 될까요?”“저에게 주세요.”직원은 자연스럽게 서류를 받아 들었고, 그런데 문득, 시선이 서류에 잠시 멈췄다. 눈이 조금 커지더니, 고개를 들어 정은을 봤다.“저... 이거...”정은은 살짝 웃었다.“뭔가 문제라도 있나요?”“원칙적으로는 문제는 없습니다.”“그럼 됐네요.”정은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돌아섰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녀가 나간 뒤, 옆자리 직원이 슬그머니 다가왔다.“왜? 너 방금 표정 좀 심각하던데...”“직접 봐.”“어?”서류를 들여다본 순간, 옆자리 직원의 눈도 동그래졌다.“야, 너도 별 다르진 않네.”두 사람 사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정은이 실험실에 도착한 건 이미 점심때였다.“정은 언니! 오셨어요!”민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마침 잘 왔어요! 얼른 와서 밥 먹어요. 서준이가 만들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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