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511 - Chapter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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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1화

이조화 일행이 돌아왔을 때, 붉은 노을이 바다 위에 걸려 있었다.예닐곱 명의 교수들 모두가 예외 없이 먼지투성이, 흙투성이 얼굴이었다.평소 같으면 이 시간쯤 다들 자리에 털썩 앉아 쉬거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곤 했다.시료 정리를 맡은 우철한 교수만은 먼저 작업 공간을 향해, 그날 채집한 표본을 처리하고 보관한 뒤에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하지만 오늘은...“장 교수님, 무슨 냄새 못 맡으셨습니까? 이거, 마늘종 볶음 같지 않아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철한 교수의 목에서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교수님도 맡으셨어요? 그러면 환각은 아니네요!”“우리 숙소 쪽에서 나는 게 분명하지요?”“이 섬에서 그런 요리를 할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을 리가...”“안 되겠네요. 직접 가봐야겠어. 전 교수님! 오늘 뭐 맛있는 거라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해산이 두 접시를 양손에 들고 걸어 나왔다.하나는 다름 아닌 제육볶음이었다.그리고 다른 한 접시는 간장불고기였다.‘어머나... 이거 다 진짜 손이 많이 가는 요리잖아?’“전 교수님, 오늘 무슨 날이에요? 이렇게 근사하게 드십니까?”“흥...”전해산은 턱을 씰룩이며 코웃음을 쳤다.“누굴 보고 하는 소리예요?”“설마, 이거 전 교수님 솜씨는 아니겠죠?”“당연히... 아니죠.”“예?”전해산이 어깨를 으쓱였다.“제가 이 정도 실력이면, 우 교수님이 지금처럼 침만 질질 흘리지는 않았겠죠.”“그럼 도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정은이지요”“예? 정은 학생이요? 그 아이가 요리를 한다고요? 정말입니까?”전해산은 킥 웃었다.“우 교수님, 좀 민망하네요. 잠시만 기다려 보시라니까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알게 되실 거예요.”곧 식탁은 가득 차올랐다.한 접시, 또 한 접시...소고기뭇국, 제육볶음, 간장불고기, 동그랑땡.채소 반찬도 빠지지 않았다.데쳐서 무친 시금치나물, 가지볶음, 옥수수전, 깨순 무침.그리고 마지막으로, 푸짐한 된장찌개까지.“이, 이거...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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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2화

정은은 고개를 저었고, 잘 알지 못했다.주광빈은 순간 말문이 막히더니, 마지못해 한마디를 내뱉었다.“너도 참. 배부른 사람은 굶주린 사람 심정은 모른다니까.”정은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설거지 같은 일은 당연히 정은 차례까지 오지 않았다.만춘미 교수가 과일까지 씻어 건네주며 말했다.“정은아, 이거 좀 먹어 봐. 어제 내가 밭에서 딴 블루베리야. 아주 신선해.”정은은 괜히 머쓱해졌다.“감사합니다. 교수님께서 직접 주실 것까지야... 제가 알아서 먹으면 되는데요.”“아니, 아니야. 넌 오늘 큰일을 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진 뒤, 정은도 방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그때 이조화가 불쑥 웃으며 말을 꺼냈다.“역시 오미선 교수가 아꼈던 제자답네. 정말 예상 밖이야.”정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과찬이십니다, 교수님. 들으니 원래 연구센터에서 직접 음식을 하신 분이 교수님이시라고... 저보다는 훨씬 잘하시겠지요.”이조화는 손사래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그렇게 맛있게는 못 해. 오늘 다들 입이 떨어지질 않던데. 하지만...”그 말투가 슬쩍 바뀌었다.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기운이 스쳤다.“요리 잘하는 게 전부는 아니잖아. 우린 연구하는 사람들이야. 요리사는 요리를 잘해야 가치가 있고, 연구자는 연구를 잘해야 가치가 있는 법이지.”“옛말에도 있잖아. 사람마다 잘하는 일이 다 따로 있는 법이라고. 결국 자기 자리를 찾아야 제 가치를 다 발휘할 수 있는 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정은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말씀은 맞습니다. 다만... 좋은 요리사가 훌륭한 연구자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반대로 뛰어난 연구자가 요리를 잘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고요. 자를 대보면 길고 짧음이 갈리지만, 줄자는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으니까요.”이조화의 웃음이 옅어졌다.“역시 젊은 사람 생각은 달라. 흥미롭네. 그런데 그렇게 요리에 자신 있다면, 앞으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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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3화

다음 날 아침, 이조화 일행은 또다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그 틈을 타 주광빈이 입을 열었다.“연구센터에는 정은이랑 전 교수님이 남아 있으니, 저도 오늘은 같이 움직여도 되겠지요?”이조화가 잠시 멈칫하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주광빈이 재빨리 덧붙였다.“필요한 도구랑 안전 장비는 모두 챙겨놨습니다.”‘날 연구소에 붙잡아두려는 생각은 접어라.’이조화는 정은을 힐끗 보더니,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그래, 연구센터에는 둘만 남아도 충분하지. 어쩌면 한 명이면 더 좋을지도 몰라. 정은이 혼자서도 모두 먹을 만큼 음식을 만들 수 있으니까.”그렇게 일행은 연구센터를 떠났다.정은은 이조화의 마지막 말을 곱씹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걸 본 전해산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정은아, 서운해하지 마. 그냥 칭찬이라 생각해.”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제가 화난 것처럼 보였나요?”전해산은 고개를 흔들었다.오히려 화를 내지 않는 그 모습이 더 낯설고 묘했다.“전 교수님, 어제 보니까 교수님께서 짬 내서 참고문헌 정리하시던데, 오늘 오전에는 연구에 집중하시죠. 점심이랑 저녁은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정은의 말에 전해산의 마음이 찡했다.어제 잠깐 문헌을 들춰본 것뿐인데, 그걸 정은이 눈여겨본 모양이었다.“내가 어떻게 너 혼자 일하게 두겠냐. 요리는 못 해도 손발은 맞춰줄 수 있지.”“점심은 저희 둘뿐이잖아요. 간단하게 차리면 돼요. 오전엔 연구하시고, 오후에 재료 손질할 때 제가 부르면 그때만 오셔서 도와주세요.”정은의 말대로 정작 힘든 건 불 앞에 서는 게 아니라, 수많은 채소와 고기를 씻고 써는 일이었다.열댓 명이 하루 종일 일한 뒤에 먹는 것이라 양이 엄청났으니까.“알았다!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전해산은 흔쾌히 수락했다....점심때, 정은이 부르기 전까지 전해산은 아예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12시 반.순식간에 네 시간이 흘러 있었다.“갑니다, 갑니다!”전해산은 허겁지겁 펜 뚜껑을 덮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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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4화

“오미선 교수가 초기에 당번표를 짰거든. 다들 돌아가면서 요리를 맡는 방식이었지.”“물론 이조화 교수가 센터에 남아 밥을 짓는 날이 조금 더 많긴 했어. 그래도 며칠 차이 날 뿐이었고, 나는 그게 합리적이라 생각했지.”전해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애초에 요리할 줄 안다는 게 이조화를 뽑은 이유 중 하나였으니...’‘당연히 업무 배분에서 그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지.’‘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왜 그를 선택했겠어.’“그런데...”전해산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오미선 교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위에서 이조화를 임시 책임 교수로 지명했어. 그러면서 원래의 당번표도 무용지물이 됐지.”정은이 고개를 기울였다.“그럼 왜 전 교수님이랑 주 교수님만 고정으로 연구센터에 남으신 건가요? 다른 분들은요?”순간 전해산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그게, 우리 둘 말고는 밥을 ‘먹을 수 있게’라도 하는 사람이 없어. 적어도 쌀을 익히고 반찬 몇 개쯤은 만들 수 있는 게 우리뿐이라서.”정은은 말없이 전해산을 바라봤다.‘교수님, 정말 밥을 제대로 익히실 수 있는 거 맞아요?’‘엊그제 먹었던 그 반쯤 생쌀이었던 죽은 내가 헛걸 본 건가?’정은은 평소 궁금했던 걸 조심스레 물었다.“그렇게 힘드신데, 차라리 돈을 주고 요리사를 모시는 게 낫지 않나요?”“어디서 구해? 섬 안에서? 불가능해. 여기 토박이들은 아예 조리 도구 쓰는 법도 몰라. 섬 밖에서 우리 교포분들을 데려올 수는 있지. 그런데 문제는... 다들 안 오려고 해. 근무 환경이 이렇게 열악하다는 걸 듣자마자 고개를 가로젓지.”“그럼 급여를 좀 올리면 어떨까요? 큰 상에는 큰 용사가 모인다’라는 말처럼.”전해산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말처럼 쉽지가 않아. 연구팀 예산은 항목별로 다 묶여 있거든. 식비도 1인당 정해진 액수가 있어. 거기서 요리사 월급을 떼어주려면, 그만큼 식재료비를 줄여야 해.”“결국 간단히 말하면 이거야. 환경은 열악하지, 돈은 부족하지... 누가 이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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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5화

전해산이 옆에서 도와주니, 재료 손질은 정은이 크게 나설 일이 없었다.“전 교수님, 칼질이 아주 능숙하시네요. 요리를 못 하신다고는 믿기 어려운데요.”정은이 웃으며 말했다.전해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집에서 아내 심부름한 덕이지. 재료 손질, 설거지, 부엌 정리는 내가 수십 년을 해왔거든. 그러니 익숙할 수밖에. 다만... 볶음 요리는, 흠! 그건 말도 꺼내지 말자고.”정은은 눈빛을 살짝 굴렸다.“전 교수님, 오늘은 주 교수님도 현장에 따라가셨잖아요. 교수님도 연구센터에만 계시는 게 답답하시죠? 늘 이렇게 재료 손질만 맡으시고요.”전해산의 손이 순간 멈췄다....저녁 식탁은 또 한 번 푸짐하게 차려졌다.메인 요리 몇 가지가 나오는 순간, 교수들은 모두 의자에서 못 일어날 듯 접시에 시선을 고정했다.일단 밥부터 허겁지겁 비우고, 배가 불러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야, 어김없이 정은을 향해 칭찬이 쏟아졌다.교수들이라고 해서 좋은 음식을 못 먹어본 건 아니었다.하지만 왜 똑같은 재료인데, 정은이 하면 이렇게 맛이 달라질까?그때 이조화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입을 열었다.“정은이 요리 솜씨가 이 정도라면, 지금 당장 식당을 차려도 손색없겠군. 어제 이미 얘기했지만, 앞으로 연구센터 식사는 전부 정은에게 맡기기로 했다.”‘좋아. 네가 그렇게 요리를 잘하고 싶다니... 내가 도와주마.’이조화의 입가엔 더욱 깊은 미소가 번졌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처음에는 다들 환하게 웃었지만, 곧 낯빛이 하나둘 달라졌다.정은은 분명 박사과정을 밟으러 온 학생이다.연구 대신 부엌에 묶여, 냄비와 프라이팬에만 매달리라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정적이 흘렀고, 교수들은 서로 눈빛만 재빨리 주고받았다.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떨구고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힘없이 잡히는 작은 토끼처럼,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그럼에도 아무도 입을 열어 이 부당한 분위기를 깨려 하지 않았다.‘다들 이미 알고 있잖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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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6화

이조화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 그러나 곧 억지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어디까지나 임시 배정일 뿐이지, 계속 이렇게 하자는 건 아닙니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전해산이 제안을 꺼냈다.“앞으로는 예전처럼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일 것 같은데요.”“하지만 저희는 요리를 못 하는데요...”누군가 조심스레 이의를 제기했다.전해산은 씩 웃으며 맞받았다.“오미선 교수님도 살아 계실 때도 다들 당번제 돌려가며 버텼잖아요. 결국 우리 다 살아남았고, 굶어 죽은 사람은 없었어요.”“그럼 그 방식이 충분히 가능했다는 증거죠. 정말 못 하겠으면 배우면 되지 않겠어요? 스승이 바로 여기 앉아 있는데. 물론 정은이가 좀 더 고생해야 하겠지만...”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괜찮습니다. 기꺼이 알려드릴게요. 교수님들께서 연구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파고드시는데, 부엌일이라고 못 배우실 리가 없잖아요.”“그럼 내가 제일 먼저 신청하겠네.”전해산이 손을 번쩍 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요리 좀 배워서 집에 가면 아내한테 한번 뽐내야지. 아마 깜짝 놀랄걸?”“나도 끼겠네.”주광빈도 바로 거들었다.다른 교수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망설였다. 그러다 정은의 얼굴을 보고, 다시 이조화를 흘깃 살폈다.긴 침묵이 흐른 뒤, 장원주와 우철한이 동시에 나섰다.“좋습니다. 우리도 배우지요. 사람은 평생 배우는 거라고 했잖아요. 설마 요리가 논문 쓰는 것보다 더 어렵겠습니까?”뒤이어 만춘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밝혔다.절반 가까운 인원이 전해산의 제안을 지지하자, 나머지 머뭇거리던 이들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찬성 쪽에 섰다.정은은 시선을 이조화에게로 돌렸다.그 순간, 이조화는 더 이상 웃지 못했고,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달빛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파도 소리가 잔잔히 번졌다.세면을 마친 정은이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전해산과 마주쳤다.정은은 성큼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어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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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7화

다음 날, 주광빈과 전해산은 모두 현장으로 나갔다.연구센터에는 만춘미가 남아 정은을 도우며, 동시에 요리도 배우기로 했다.만춘미는 오십을 갓 넘긴 듯한 나이였다. 크지 않은 키에 약간 통통한 체형. 얼굴에는 주름이 거의 없을 만큼 탄력이 있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새치가 제법 많이 섞여 있었다.말투는 늘 차분하고 온화했다. 특유의 강단 있는 카리스마나 압박감 같은 건 전혀 없고, 오히려 동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자한 아주머니 같은 느낌이었다.“정은이는 손이 참 빠르네.”만춘미가 웃으며 칭찬했다. 그 미소에는 과장이 없었고, 그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정은도 웃으며 맞받았다.“제 국자 잡는 손이 교수님 수술칼 잡는 손에 비할 수 있겠어요?”만춘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비교하면 안 되지. 국자는 생활이고, 수술칼은 추구야. 생활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추구도 오래 못 가.”“교수님, 철학 공부도 하셨어요?”“흠... 학부 때 철학을 복수 전공했거든. 조금 아는 정도지, 뭐.”“어쩐지 교수님 말씀엔 늘 철학이 묻어나요.”정은이 웃으며 덧붙였다.‘칭찬은 절대 헛되지 않아.’만춘미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그 순간, 오십대 여성에게서 보기 힘든 소녀 같은 수줍음이 스쳤다.그러나 막상 팬을 잡게 하니, 그 순진함은 더 뚜렷해졌다.만춘미는 손발이 엉켜 허둥대며, 간장 하나도 구분하지 못했다. 맛간장이 생소하다는 듯 멈칫하더니, 정은이 ‘생간장 종류’라고 알려주자 그제야 무릎을 쳤다.“아, 이제 알았어!”딱 봐도 주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문제는 이미 쉰을 넘겼다는 사실.보통 이 정도 나이의 여성이라면, 아무리 요리를 안 해도 기본 상식 정도는 있을 법한데.만춘미의 시선은 어린 대학생처럼 맑았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창피함과 난감함이 뒤섞여 있었다.“미안해... 집에서는 늘 남편이 밥을 했거든.”그녀가 조용히 털어놓았다.“연구팀에 합류하기 전에도 일부러 확인했어. 밥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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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8화

“네.”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이가 연구센터에 나타난 순간, 짐작했어.”만춘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왜 나는 저런 제자를 못 만났을까... 오미선 교수님은 참 복도 많으시지.’‘하지만 끝내 그렇게 되시다니...’그날 저녁, 해질녘에 돌아온 교수들은 예상대로 또다시 뜨끈하고 맛있는 냄새 가득한 밥상을 마주했다.다음 날, 정은과 함께 연구센터에 남은 사람은 우철한 교수였다.그는 바이러스학 권위자로, 이미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 머리칼은 눈처럼 하얗게 세어 있었고, 짧게 자른 상고머리가 단정했다.정은은 그의 나이를 생각해, 애초에 그를 제대로 부엌일에 세울 생각은 없었다.“정은아, 내가 뭐 좀 할 게 없을까? 나도 요리 배우고 싶네. 언제쯤 가르쳐 줄 거야?”우철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세상에... 스스로 일감을 찾아오는 교수님도 다 있구나. 좋아, 그렇다면 해보시죠.’셋째 날, 이번에는 장원주 교수가 남았다.“정은아! 우 교수님이 그러는데, 너랑 같이 요리 배우는 게 그렇게 재밌다며? 우리는 언제 시작할까?”말하면서 벌써 소매를 걷어 올리며 들뜬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정은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교수님,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아세요? 아직 아침 여덟 시예요! 방금 아침 드셨잖아요. 벌써 점심 준비부터 하시게요?”“흠, 그러네. 조금 이르지?”장원주가 머쓱하게 웃었다....그 뒤로 10일 동안, 연구센터에 남는 사람은 날마다 달라졌다.정은은 차례대로 팀원들에게 요리를 가르쳤고, 그렇게 모두 한 번씩 국자와 칼을 잡아보았다.이조화를 제외하고는.“내일은 이조화 교수님 차례네요. 교수님도 기꺼이 남아 주시겠죠?”저녁 식사 후, 정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이조화의 미간이 단번에 좁혀졌다.“나는 책임교수야.”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럼요. 저도 알죠. 이 교수님처럼 늘 ‘임시 책임교수’라는 자리를 잊지 않고 솔선수범하시는 분이 어디 있겠어요.”굳이 ‘임시’라는 단어를 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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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9화

이른 새벽, 하늘이 점차 밝아오고 해가 막 떠올랐다.정은은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연구팀을 배웅했다.그런데 유독 어색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조화였다.몇 달 동안 임시 책임교수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남은 적 없었던 이조화는, 오랜만에 다른 이들을 내보내고 혼자 연구센터에 남는 기분을 다시 맛보고 있었다.그 감각은 낯설었다. 아니, 불편했다.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다른 이들이 밖에서 표본을 채집하고, 연구에 결정적인 성과를 내는 동안, 자신은 주방에 매여 하루하루를 밥 짓고 설거지하며 보내야 했던 그 시절로.‘왜 나만 이래야 하지?’‘나도 연구자고, 나도 교수인데... 왜 나만 이러냐고?’다행히 기회가 와서 책임교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이제 학교에서 ‘임시’라는 꼬리표만 떼어 주면 진짜로 책임교수가 될 수 있었다.이조화는 확신했다. 자신이 이끄는 연구팀은 2년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다고.“이 교수님? 이 교수님!”“뭐지?”이조화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정은이 웃음을 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벌써 다들 멀리 가셨어요.”“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나?”이조화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러나 정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그냥 알려드리려고 했어요. 아침 식사 금방 식겠어요, 교수님. 드실 거면 따뜻할 때 드셔야죠.”“아, 그리고 한 시간 뒤에 부엌에서 뵐게요. 오늘은 소 곱창 조림을 할 거거든요. 어제 마을 주민한테서 직접 사 온 건데 손질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그래서 오늘은 미리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이조화의 표정이 굳었다....한 시간 뒤, 주방.큰 대야에 담긴 검은빛의 곱창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이조화는 보는 순간 얼굴이 시커메졌다.요리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았다. 저 내장을 씻어내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역겨운 일인지.하지만 정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싱긋 웃으며 곱창 앞에 쭈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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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0화

겨우 점심 식사를 끝냈다. 바늘방석에 앉아서 하는 듯한 식사였다.이조화가 몸도 마음도 지쳐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교수님, 잠시만요.”정은이 불러 세웠다.이조화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억지로 돌아섰다.“왜? 또 뭐가 남았어?”“있죠.”정은은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아직 그릇도 안 씻었고, 조리대도 안 치웠어요.”“그래서? 네가 시키는 대로 나더러 치우라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아니면요? 우철한 교수님도, 장원주 교수님도 다 씻고 치우셨어요. 설마... 이 교수님만은 특별하다, 더 고귀하다, 그렇게 생각하세요?”“네가 너무 앞서가는구나.”이조화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특별하다, 고귀하다가 아니라 단순히 역할이 다른 거지. 오늘 점심 준비는 같이했잖아. 그럼 네 일은 뭐야?”정은의 눈빛이 고요히 흔들렸다.“저도 당연히 할 일이 따로 있죠...”“됐어. 그러면 네가 설거지 하고, 내가 네 일을 대신 하지.”이조화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정은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정말 그렇게 하시겠어요?”“역할 분담을 조정하는 것뿐이야. 합리적이지 않니?”이조화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랐다.“알겠습니다.”정은은 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그럼 제가 설거지할 테니, 교수님은 저기 있는 새우 좀 손질해 주세요. 껍질만 벗기시면 안 되고, 등 쪽 내장도 꼭 빼내셔야 해요.”“뭐라고?”설거지는 많지 않았다. 정은은 금세 마무리하고 주방을 나서려다 잠시 돌아봤다.작은 의자에 앉은 이조화 앞에는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대야 하나.열 명이 넘는 인원이 먹을 양이라 그 수량은 엄청났고, 이조화가 처리한 건 고작 열 마리 남짓이었다.정은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교수님, 수고 많으세요.”이조화는 대꾸하지 못했다....저녁 식탁은 그 어느 때보다 푸짐했다.투명하게 빛나는 새우살, 향이 진한 새우볶음, 그리고 마늘 소스 새우까지.전해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와, 껍질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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