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의 모든 챕터: 챕터 1521 - 챕터 1530

1725 챕터

제1521화

정은이 그 자리에 모인 교수들을 향해 천천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교수님들께 억울함을 느끼게 해드릴 수 있어서 저는 충분히 기쁩니다. 굳이 실질적인 피해가 따를 필요는 없잖아요.”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게다가 새우 껍질을 까겠다는 선택은 교수님이 직접 하신 거 아닌가요? 아무도 탓할 수 없죠”이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쑥 내뱉었다.“너...!!!”정은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달은 어둡고 바람은 높으니, 어쩌면 뭔가 꺼림칙한 게 나올 수도 있죠. 교수님, 오늘은 일찍 방으로 들어가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조화는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그날 밤, 그는 끝내 잠에 들지 못했다.한밤중, 악몽에 시달리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자,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바깥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은 기묘한 울음소리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마치 귀신이 우는 것 같은 소리였다.이조화는 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온몸을 둘둘 감았지만, 이불 속에서도 몸이 떨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아침이 되자, 떠오르는 태양이 내뿜는 햇살이 바다 위로 내려앉아 황금빛 물결을 만들었다.“교수님, 어젯밤에 잠을 설치신 거 아니에요?”의사인 만춘미는 이조화의 상태를 단번에 알아챘다.정은도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이조화를 바라보았다.이조화는 즉각 허리를 곧게 펴고, 태연한 척 손을 내저었다.“괜찮습니다. 최근에 업무가 과중해서 피로가 좀 쌓였을 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만춘미는 곧바로 제안했다.“혹시 모르니까, 오늘 저녁에 돌아오시면 제가 교수님 상태를 전반적으로 체크해 드리는 게 어떨까요?”정은이 맞장구쳤다.“맞아요, 교수님. 건강은 꼭 챙기셔야 합니다.”이조화의 표정이 굳어졌다.“필요 없다니까, 됐어. 출발하지.”오늘은 정은이 처음으로 팀과 함께 현장에 나가는 날이었다.다른 교수 두 명은 연구센터에 남아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둘은 요리 실력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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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2화

점심은 간단한 간식으로 때웠다. 정은도 예외는 아니었다.먹고 나서 30분 남짓 쉬고는 다시 일을 이어가야 했다.정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절대 만만치 않다는 것을.섬은 워낙 넓었고, 연구팀이 섬에 온 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채취한 구역은 섬 전체 면적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이 속도대로라면 십 년이 지나도 전부를 다 훑지는 못할 것이다.‘사람 손으로만 한다면, 도저히 속도가 나지 않아...’오후에도 일행은 시료 채취를 이어갔다.걷다 보니 정은은 점점 무리에서 멀어졌다. 문득 낯설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곳은 올리버가 만든 지도에서 봤던 동북쪽 구석이 아닌가?조금만 더 가면 바로 늪지였다.이조화 교수가 입을 열었다.“모두 도구 확인해요. 늘 하던 대로 시료 채취통 잘 밀봉됐는지 검사하고. 이상 없으면 동북 방향으로 계속 갑시다.”그때, 정은이 무리로 돌아왔다.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이조화의 냉소 섞인 목소리가 그를 끊어냈다.“정은, 네가 부주의해서 시료 채취통도 안 챙겨왔지만, 어쨌든 같이 다니는 이상 놀러 온 건 아니지 않니? 최소한 뭐라도 거들어야 할 거 아니야?”정은이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탐색이라도 하면 되지 않습니까?”“탐색? 무슨 탐색?”이조화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정은의 표정이 단호해졌다.“더는 앞으로 가지 마십시오. 앞은 늪지라 위험합니다.”“늪지? 흥...”이조화가 짧게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확실해?”하여순 교수가 이미 지도를 펼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짚으며 말했다.“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헛소리야? 지도에는 분명 초지로 표시돼 있는데.”정은이 깊은 눈빛으로 하여순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에 하여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정말이라니까요! 못 믿겠으면 다 같이 보시죠.”전해산과 주광빈이 동시에 다가와 지도를 확인했다. 잠시 후 서로 눈을 마주쳤다.전해산이 입을 열었다.“정은 학생, 이 지도에는 분명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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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3화

이조화가 정은을 스치듯 앞질러 가장 앞장섰다.하여순은 지도를 정리해 넣고는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남은 사람들도 하나둘씩 줄줄이 따라나섰다.하지만 하여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세 사람에게 물었다.“전 교수님, 주 교수님, 만 교수님. 세 분은 왜 안 가십니까?”전해산과 주광빈이 잠시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정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정은아...”그들의 눈빛에는 묘한 물음과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그 순간, 정은의 단단한 눈빛이 두 사람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이번만큼은 아니다.’찰나에, 전해산과 주광빈의 흔들리던 시선이 확신과 결단으로 바뀌었다.전해산이 목청을 높였다.“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제 시료 채취통은 이미 다 썼으니, 따라가도 소용없겠군요.”“주 교수님은요?” 하여순이 물었다.주광빈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저는 좀 피곤해서요.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만춘미는 더욱 단호했다.“정은이가 저렇게까지 말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요. 차라리 정은이 말을 믿는 게 낫습니다. 없는 위험이라 치부했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전 안 가겠습니다.”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했다.만춘미는 모험할 마음이 없었다. 여기 남아 상황을 지켜보고, 확실해진 뒤에 움직이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고 판단했다.하여순은 치를 떨듯 이를 악물었다.“도대체 소정은이 당신들한테 무슨 약을 먹이기라도 한 겁니까?”말을 내뱉자, 그는 홱 돌아서 서둘러 무리와 합류했다.“어떻습니까?” 이조화가 묻자 하여순은 목소리를 낮추었다.“넷 다 따라오지 않았습니다.”“흥, 상관없습니다.” 이조화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할 말은 다 했고, 설득도 충분히 했어요. 임무를 못 끝내더라도 우리 책임은 아니죠.”“우린 할 만큼 했습니다.”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교수님, 계속 전진합니까? 앞의 초지가... 방금까지 밟았던 곳이랑은 좀 달라 보입니다.”하여순이 얼굴을 찌푸렸다.“어차피 다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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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4화

절망에 잠식되고 있던 그때, 멀리서 발소리가 다가왔다.“정은이다!”“전 교수님! 주 교수님! 여기예요! 저희 여기 있습니다!”“정말 늪이에요! 다 같이 빠졌습니다!! 살려주세요!!”“살았다! 이제 살 수 있어!”“...”그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환하게 번졌다.어둠 속에서 불빛을 본 듯, 절벽 끝에서 길을 찾은 듯한 격한 기쁨이었고, 그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순간, 모두의 눈길이 정은 일행에게 쏠렸다. 시선 속에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빛이 담겨 있었다.전해산과 주광빈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 속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사실 조금 전만 해도, 정은이 ‘조금 떨어져 뒤따르자’고 주장했을 때 두 교수는 납득하지 못했다.‘아니, 그렇게 강경하게 안 간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슬그머니 뒤를 쫓겠다고?’만약 다른 교수들이 알게 된다면, 비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그래서 전해산과 주광빈은 처음엔 정은을 따라올 마음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정은의 생각은 확고했다. 앞서 무리에 합류하지 않겠다던 단호함과 똑같이, 이번에는 꼭 따라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그리고 이제야 알 수 있었다.정은은 자신을 반대했던 일행을 구하기 위해 오려 했던 것이다.전해산의 눈빛에 놀라움과 감탄이 교차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내다보는 듯한 통찰,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서도 남을 생각하는 넓은 마음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주광빈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앞에 진짜 늪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온 일행이 다 같이 빠질 줄이야...’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이제 큰일 났네.’그때, 정은이 배낭을 열고 기다란 덩굴 두 줄기를 꺼냈다. 손으로 여러 번 잡아당겨 보며 질기고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하나를 늪 속을 향해 내던졌다.나머지 하나는 전해산과 주광빈에게 건넸다.주광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정은아, 이건 어디서 난 거니?”정은이 만춘미를 향해 손짓했다. 함께 힘을 합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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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5화

그때, 이조화의 몸은 상반신까지 늪에 가라앉고 있었다.공포가 극에 달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정은이 던진 덩굴이 이조화에게 닿았을 때, 그녀는 한동안 얼어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굳어 버린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정은은 다시 덩굴을 던지며 소리쳤다.“죽기 싫으시면 이거 잡으세요!”이조화의 눈동자가 겨우 움직였다. 그러나 이조화가 잡지 못한 덩굴은 하여순이 손으로 움켜쥐었다.“정... 정은! 나부터 끌어줘! 내가 더 깊이 빠졌어. 나를 먼저 끌어올려야 해!”이조화가 번개처럼 고개를 돌려 하여순을 노려보았다.순간 하여순의 얼굴에 죄책감이 스쳤지만, 그건 잠깐일 뿐이었다. 곧 그녀는 억울함을 가장한 당당한 목소리를 내뱉었다.“원래 그렇잖아요! 제가 교수님보다 더 깊이 빠졌는데, 먼저 올라오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책임교수라고 무조건 양보받아야 합니까?”“하 교수님!”이조화는 이를 갈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하여순은 한 치 물러서지 않았다.“사실 아니에요? 애초에 교수님이 앞장서자고만 안 했어도 우리가 늪에 빠질 일은 없었을 겁니다.”“정은이가 경고했는데 왜 무시했습니까? 그깟 책임교수 자존심 세우려고 팀원들 목숨까지 걸어야 했냐고요!”“팀의 안전을 지켜야 할 책임은 교수님께 있었어요. 그런데 정은 학생과 겨루듯 고집을 부리다 이런 꼴이 난 거잖아요!”이조화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박할 말조차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하여순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그렇다. 만약 자신이 고집을 꺾고 정은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정은과 전해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두 여기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그 생각이 스치자 이조화의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고, 두 뺨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정은은 곧 하여순을 먼저 끌어 올렸다. 이어 이조화도 차례대로 늪에서 건져냈다.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오늘 더는 일을 이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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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6화

늪지 사고 이후, 모두가 충격과 부상 탓에 연구는 일시 중단되었다.연구센터에 머물며 회복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몇몇 교수들의 부상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전날 밤, 만춘미 교수가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교수들의 상처 치료를 다 마무리했다.앞으로도 경과 관찰, 약 교체 같은 일은 계속 이어져야 했다.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교수들은 마치 겁에 질린 사람들처럼 맥이 빠졌다.무엇을 해도 의욕이 나지 않았다.이튿날 밤, 장원주와 우철한 두 원로 교수까지 잇따라 고열에 시달렸다.상황은 몹시 위중했다.만춘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섬은 본래 독성이 강한 균주로 가득한 곳입니다. 평소 별일 없었던 건 방호 조치가 철저했고, 오랜 생활로 이곳에 몸이 조금씩 적응하며 항체가 생겨서였죠.”“그런데 늪지 사건으로 다들 몸과 마음이 심하게 지쳐 면역력이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장 교수님, 우 교수님처럼 쓰러지는 경우가 생긴 거예요.”“지금은 간신히 열을 잡아놨습니다만... 만약 추가로 아픈 사람이 생기면 저 혼자선 감당이 안 됩니다.”전해산이 다급히 물었다.“그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만춘미가 한숨을 내쉬었다.“스스로 몸 관리 잘하는 게 제일 큰 도움이에요.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라도 나면, 저는 정말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그녀는 차마 말하지 않았지만, 교차 감염의 위험도 분명히 존재했다.위험 소지를 괜히 입 밖으로 꺼내 불안만 증폭시키는 것은 더 곤란했다.주광빈이 조심스레 물었다.“약품은 충분합니까?”만춘미는 고개를 저었다.“모자랍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예요. 해열제, 항생제는 이미 빠듯하고, 기본적인 소모품인 거즈나 면봉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원래라면 다음 보급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양이었는데, 이번 사고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준비가 전혀 없었죠. 당장은 아껴 쓰면 버틸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멜버른에 나가서 보충해야 합니다.”주광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하지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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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7화

바닷가.도균성이 선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젊은 선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형, 소정은 씨는 도대체 약을 이렇게 많이 가져다 뭐에 쓰려는 걸까요?”도균성이 흘끗 그를 보며 낮게 말했다.“우린 그냥 실어 나르기만 하면 된다. 쓸데없는 건 묻지 마라.”“헤헤, 그냥 궁금해서요. 그런데... 심현빈 대표님은 소정은 씨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 정말 둘이 남매 맞아요?”도균성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일주일 전, 정은의 전화를 받은 뒤 그는 곰곰이 고민하다 결국 현빈에게 연락해 상황을 알렸다.첫째, 배는 현빈 소유였다.둘째, 자신은 현빈이 고용한 사람이었다.이 사실만으로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예상대로 현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도균성은 정은의 전화를 받자마자 눈치를 챘다.만약 정은이 먼저 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이 일을 자신이 아닌 현빈이 직접 맡았을 테니까.그런데 정은은 현빈을 건너뛰고 곧장 자신에게 연락했다.‘심현빈 대표 쪽이 훨씬 적극적인 건 사실이지.’‘하지만 정은 씨는... 오히려 폐 끼치고 싶지 않은 거구나.’도균성이 잠시 젊은 선원을 노려보았다.선원은 얼른 목을 움츠리더니 입술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도착했습니다! 소정은 씨예요!”선원의 외침에 도균성은 고개를 돌렸다.다음 순간,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배에서 뛰어내려 물살을 가르며 정은에게 걸어갔다.이건 단순한 맞이함이 아니라 정은에 대한 예우였다.배 위에서는 곧 사다리가 내려졌다.정은과 전해산, 주광빈, 만춘미 네 사람이 차례로 올라섰다.전해산은 발을 옮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리고 눈에 놀라움이 점점 커졌다.배의 규모며 자재며, 연구팀이 쓰던 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훨씬 견고하고, 훨씬 안전해 보였다.‘세상에, 갑판에 바비큐대까지 있네?’해풍을 맞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갓 구운 고기를 뜯는 상상을 하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이런 배를 타고 다닌다면... 연구가 아니라 여행이지, 여행.’주광빈도 전해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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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8화

이 정도의 큰 움직임으로 연구센터 안 사람들 중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처음에는 창문으로 고개만 내밀던 이들이, 곧 병든 몸을 이끌고 하나둘 방에서 나와 웅성거렸다.한 교수가 주광빈의 팔을 붙잡았다.“주 교수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많은 짐은 어디서 난 겁니까? 도대체 뭐가 이렇게 많아요?”땀범벅이 된 주광빈은 들고 있던 물을 단숨에 반병이나 들이켰다.숨을 고른 그는 짧게 대답했다.“별거 다 있습니다. 먹을 것도 있고, 마실 것도 있고... 무엇보다 여러분 살릴 약이 있습니다.”“약... 약품입니까?!”순간, 공기마저 고여 버린 듯 조용해졌다.이곳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진통제는 날마다 줄어들어 끝내 사라졌고, 약통은 텅 비어 갔다.드레싱 교체 주기는 하루에서 이틀, 이틀에서 사흘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남은 거즈가 하나도 없어 상처를 덮을 수도 없었다.하여순이 방 침대에 여전히 누워 고열로 의식을 잃은 채 앓고 있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만춘미가 일부러 주사를 놓지 않는 게 아니었다.애초에 해열제와 주삿바늘이 없었다.사람들의 마음에 조용한 안도감이 흘렀다.‘그래도 우린 약이 있을 때 앓았으니... 그만큼 고생은 덜했지.’만약 하여순처럼 지금 아팠더라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이거... 정말 약품 맞습니까?!”누군가가 다시 물었다.주광빈은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뭐겠습니까?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겠소?”“하지만 우리 배는 고장 났잖습니까. 이런 게 어떻게 섬으로 들어올 수 있죠?”“다 정은 학생 인맥 덕분입니다. 정은 학생이 아니었으면 우리 전부 굶어 죽고 말랐을 겁니다. 다들 정은이 덕을 본 거예요.”말은 거칠었지만,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주광빈은 둘러선 사람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이조화 교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 물품들 아직 대금 결제도 안 됐습니다. 이 교수님께서 당장 연결해서 정은에게 송금하시도록 하세요.”정적이 흘렀다.“그게... 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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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9화

이조화는 그 일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아직 병중이라,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태도였다.겉으로는 누구도 뭐라 말하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만약 정은이 사전에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늪에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사고였을 것이다. 불운이라 여기고 넘길 수도 있었을 터였다.하지만 문제는 정은이 미리 알렸다는 데 있었다. 그것도 여러 번.그런데도 이조화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정은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연구팀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여기에는 ‘경고를 무시한 책임’, 그리고 ‘팀원의 의견을 짓밟은 잘못’이 분명히 있었다.겉으로 드러나는 책임이 전부가 아니었다.사람들의 눈빛 속에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원망이 숨어 있었다.정은이 ‘앞에 늪이 있다’, ‘가지 말자’라고 했을 때 단호하게 막았다면, 지금의 고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조화는 오히려 앞장서 걸었고, 모두를 그 길로 끌고 갔다.결과는 뻔했다. 진짜 늪에 빠진 것이다.누군가는 기겁했고, 누군가는 병에 걸렸다.한마디로, 아찔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셈이었다.전해산, 주광빈, 만춘미, 그리고 연구센터에 남아 식사 준비를 하느라 간신히 위험을 피했던 두 명의 교수까지.직접 늪에 빠지진 않았어도, 다른 팀원들의 병시중과 대혼란 속에서 진이 다 빠졌다.이 모든 고생이 이조화와 무관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이들은 겉으로는 차분했다.앞에서는 큰소리로 따지거나 다투지도 않았다.사건이 터진 뒤 지금까지, 누구도 공개적으로 이조화를 비난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이조화의 자만심, 그리고 정은을 향한 사사로운 감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그 모든 게 겹쳐, 이조화는 연구팀 안에서 서서히 신뢰를 잃어 가고 있었다.이조화를 책임교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필요한 건,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단 하나의 작은 계기만 있으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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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0화

책임교수 자리는 뭔가 대단한 자리가 아니었다.연구팀의 업무 절차는 모두가 익숙했다.책임교수가 평소 어떤 일을 하는지도 다들 눈으로 봐 왔기 때문이었다.밥은 안 지어도 굴뚝에 연기 나는 건 다 보아왔다는 말처럼.“좋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하죠.”주광빈이 손뼉을 치듯 말했다.“그리고... 하 교수님, 수고스럽지만 이번 투표 결과는 아직 병석에 계신 이 교수님께 직접 전해 주시겠습니까?”“예?”하여순의 얼굴에 순식간에 물음표가 그려졌다.병에서 갓 회복된 그의 얼굴은 원래도 마른 편이었는데, 지금은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입술까지 창백해, 금방이라도 바람에 휘청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사실 전해산은 애초에 하여순의 표만은 방으로 직접 들고 가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하여순은 굳이 병든 몸을 이끌고 투표장에 나왔다.그리고 맨 먼저 용지를 작성해 투표함에 넣었다.그때의 하여순은 뭔가 간절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정은은 그 곁에서 모든 걸 똑똑히 보았다.하여순이 분명히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을.‘이상하다. 이 교수님이 책임교수 자리에서 밀려났는데, 하 교수님은 왜 안도하지?’‘늪지 사건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이 교수님 눈치만 보던 분인데...’‘내가 집을 나서기 전에, 내 도구 가방에서 시료 채취 통을 슬쩍 챙겨 간 것도 하 교수님이었잖아.’‘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이 교수님의 몰락을 바란다는 건가?’정은은 속으로 혀를 찼다.‘역시 세상엔 영원한 친구란 없어. 존재하는 건... 영원한 이해관계뿐.’‘학계도 예외는 아니지.’하여순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왜 꼭 제가 가야 합니까?”주광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야 두 분이 가까우시잖습니까. 하 교수님이 전하는 게 제일 적절하지요.”하여순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방 안.하여순이 문을 열었을 때, 이조화는 창가에 서 있었다.습기가 가득한 방, 희미한 불빛, 공기 속에 짙게 배어 있는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코끝을 찔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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