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라면 알아요.”두리의 말에 정은의 눈빛이 번뜩였다.두리는 곧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을 열고 들어간 공간은 창고처럼 보였다.구석에는 주사기와 거즈 같은 의료 소모품 박스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두리는 박스들을 가볍게 넘어가더니, 뒤편 선반 위에 있던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그리고 정은에게 건넸다.“혹시 찾으시는 게 이거 맞나요?”정은은 상자를 열어 손전등을 비췄다.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안에는 병력 기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표면상 진단명은 ‘치통’, ‘발치’, ‘스케일링’, ‘미백’ 따위뿐.그런데 처방 약물 란에는 파보리주맙, 나볼리맙, 아테졸리주맙, 타목시펜, 레트로졸, 류프롤라이드...정은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누가 치통 때문에 면역항암제나 호르몬제를 처방받는다는 거지?’그 약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였다.모두 ‘항암제’.정은은 손을 떨며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 서 있던 두리는 그 기류가 단번에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겉으로는 치과를 표방하지만, 이곳은 비밀리에 암 환자들에게 약을 공급하는 곳이었다.호주는 항암제 관리가 엄격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더구나 해외 신약은 수입 제한으로 현지에서는 구하는 것도 힘들다.그 틈새를 파고든 회색 지대 클리닉이 존재한다는 걸, 정은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그러다 정은의 손끝이 환자 진료기록 차트 한 장에서 멈췄다.거기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주안나 간호사, 3월 22일.치과를 찾았다는 그날, 주안나는 항암제를 처방받았다.정은의 가슴속에서 하나의 가설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다잡으려 했지만, 손에 쥔 기록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역시...’정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주안나가 가져간 약 목록 속에는 블레오마이신과 파클리탁셀이 있었다.블레오마이신은 항종양 항생제.사용 지침 중 가장 기본적인 금기는 다른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와 병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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