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의 모든 챕터: 챕터 1491 - 챕터 1500

1725 챕터

제1491화

재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정은이는... 아직도 야근이야?”민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재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낮게 물었다.“혹시... 내가 모르는 일 있어?”민지는 곁눈질로 서준을 바라봤다. ‘말해야 할까?’서준은 곧장 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정은 누나, 호주 임시 바이러스 연구센터로 박사 과정 지원했어요. 이미 일주일 전에 출국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재석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역시...’곧 놀라움은 가라앉고, 고인 물 같은 침묵이 그를 덮쳤다.사실 재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다만 정은이 떠난 시점이 재석의 생각보다 훨씬 일렀다. 정은은 훨씬 단호하게 움직였을 뿐이다.재석은 정은이 9월 학기 시작을 즈음해서 떠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미 떠나고 없었다.“교수님? 괜찮으세요?”민지가 조심스레 물었다.눈앞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민지는 순간, 그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정은 언니였다면...’재석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응.”민지와 서준은 차에 올라탔다.차가 움직일 때, 민지는 백미러로 한 번 더 재석을 바라보았다.재석은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움직임 하나 없는 그의 모습은 마치 검은 어둠이 삼키는 조각상 같았다....밤늦게, 동네 복싱클럽.마침 문을 닫으려던 관장이 놀란 눈길을 보냈다.“어? 두 시간 전에 나가셨잖아요. 또 오신 거예요?”재석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뭉치를 꺼내 보였다.“시간 괜찮으세요? 두 시간만 더 하게 해주세요.”“네?” 관장은 순간 말을 잃었다.“괜찮죠?”‘괜찮고말고!’ 관장은 곧장 문을 다시 열었다.불을 켜고, 에어컨까지 튼 뒤 구석에서 글러브 두 켤레를 꺼내 왔다.한 켤레를 재석에게 던져주며 웃음을 지었다.“좋아요! 같이 달려봅시다!”...이 시간대는 대부분의 직장인이 야근에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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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2화

지언은 간호사의 설명을 들으며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심계항진이라니...’‘우리 강 여사 그냥 ㅅ에 혼자 오래 있다 보니 가족이 와주길 바라는 거겠지.’“네, 알겠습니다.”[그럼 언제쯤 오실 수 있을까요?]간호사는 조심스레 물었다.이미 충분히 암시했으니, 아들이라면 당연히 ‘지금 바로 가겠다’할 줄 알았다.하지만 돌아온 건 담담한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네, 알았어요.”‘대체 왜? 왜 당장 오겠다는 말이 아닌 거지?’간호사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요즘 같은 세상, 돈 벌기는 힘들고, 재벌가 VIP 환자 상대하는 건 울며 겨자 먹기보다 더 괴롭다. 지언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회의 중이라 당장은 못 갑니다. 끝나는 대로 가겠습니다.”[네... 그럼 강 여사님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간호사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이 말 듣고 진정하시길... 아멘...’통화를 끊은 지언은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지 불과 몇 분 만에 핸드폰이 또 울렸다.화면을 보자마자 짜증이 치밀었고, 그래도 받았다.“무슨 일이에요?”[강 여사님께서 특정 브랜드의 침구를 원하시는데, 병원에서는 제공할 수 없습니다. 혹시 가족분께서...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마지막 부분은 간호사조차 말이 궁색해졌다. ‘이건 좀 환자가 지나치지 않나’ 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묻어났다.지언은 잠시 침묵했다....시립병원, VIP 병실.불빛이 환히 켜져 있었고, 강서원은 카디건 위에 캐시미어 숄을 걸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들어 간호사를 바라봤다.“언제쯤 온대?”간호사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답했다.“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알았어. 나가봐.”간호사가 물러가자, 강서원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검은 밤, 창밖은 아무 풍경도 보이지 않았다.병실 밖에 무슨 풍경이 있겠는가?수술실 앞에서 울고, 병실에서 신음하고, 다들 절망을 토해내는데... 누가 창밖을 즐길 겨를이 있겠나?때로는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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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3화

리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건 저랑 지언 씨 사이의 일이에요.”말끝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즉, 강서원과는 상관없으니 간섭하지 말라는.강서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리아는 숨을 고르더니 차갑게 이어갔다.“쉽게 말하자면, 지언 씨랑 함께하기 전부터 저희는 약속한 게 있습니다.”“약속? 무슨 약속인데?”그제야 리아의 눈빛에 짜증이 스쳤다.“그게 여사님과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죠?”강서원의 눈이 커졌다. 믿기 어렵다는 듯, 그녀는 리아를 노려보았다.“너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리아는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이런 질문에 굳이 답해야 하나?’“이만 가보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리아는 단호히 돌아섰다.강서원이 무슨 말을 내뱉든,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강서원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변리아가, 이런 애였어?’...한편, SP그룹 회의실.지언이 회의 종료를 선언하자, 임원들은 모두 동시에 긴 숨을 내쉬었다.큰 재난에서 살아남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겨우 살았다.’그가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오늘만 몇 번째인지 알 수도 없었다.받자마자 지언은 목소리를 높였다.“어머니!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저 지금 회의 중이라고!”한 번, 두 번, 그렇게 말해도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끝이 없었다.수화기 너머, 강서원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이제 회의 끝났잖아? 끝났으면 바로 병원으로 와.]뚝!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지언은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답이 없다.’지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바람만 맴돌았다.지금 당장 리아의 집으로 가서 안방 침대에 누워, 따뜻한 ‘여자친구’를 품에 안고 한숨 푹 자고 싶다는 것.하지만 곧 망설임이 고개를 들었다.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결국 리아에게 톡으로 현재 상황을 알렸다.그러고는 핸들을 돌렸다.차는 리아의 집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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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4화

지언은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아...?”리아는 대놓고 지언에게 눈을 부라렸다.“아? 아, 뭐. 비켜요. 짐 싸야 하니까.”지언은 어이없으면서도 속으로는 안도했다.“그럼, 우리 어머니 때문에 화난 건 아니에요?”“음... 조금은요.”리아는 가볍게 받아쳤다.지언은 리아의 긍정에 대꾸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리아는 옷가지를 곱게 접어 캐리어에 넣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조언 하나 해줄까요? 바닷가 근처에 별장 하나 사드리세요. 바다는 얼마나 넓어요. 지언 씨 어머님이 통제하고 싶으면 거기서 마음껏 하시라고 하고, 저한테만 안 하시면 돼요.”지언은 피식 웃다가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그러네요. 내일 바로 사람 보내서 현장 실사 할게요.”“푸핫...”리아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당신도 진짜 효자 맞네요.”지언은 코끝을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그건 내 의지에 달린 거죠. 오늘 같은 심부름, 다시는 안 합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알았어요.”지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시선을 멈췄다.“근데, 짐은 왜 싸는 거예요?”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내일 호주 가요. 한동안 애들은 당신이 봐야겠네요. 문제없죠?”“호주? 내일?”지언은 그대로 말문이 닫혔다.“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그 먼데를 왜 가는데요? 전에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리아는 군더더기 없이 짧게 말했다.“볼 일이 있어서요. 급하게 결정됐어요.”며칠 전, 유순구에게서 ‘맥스 군도’라는 지명이 흘러나왔을 때, 설수환은 즉시 사람을 호주로 보냈다.그리고 이틀 전 돌아온 보고에는 유하린이 실제로 한동안 맥스 군도에서 지낸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들어있었다. 그 이후 행적은 묘연했다.결국, 맥스 군도에 유하린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래서 리아는 직접 그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지언이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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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5화

샤워를 마치고 나온 리아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지언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자신이 대충 던져 넣었던 옷들을 하나하나 반듯하게 개켜 캐리어에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자기야, 이 화장품이랑 스킨케어 제품들, 그리고 액세서리나 귀걸이 같은 거... 이것들도 챙길까요?”테이블 위에 올려둔 물건들을 가리키며 지언이 물었다.리아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대꾸했다.“응, 자주 쓰는 것만...”지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익숙한 듯 몇 개만 골라 담았다.리아가 흘깃 보니, 정말 평소 자신이 쓰던 것들이었다.“당신... 이걸 다 기억하고 있어요?”“뭐요?”리아는 입술로 탁자 위를 가리켰다.“어떤 게 내가 자주 쓰는 건지, 안 쓰는 건지, 다 안다는 거잖아요.”지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당연하죠. 내가 안 쓰는 것이어도 매일 보는데, 모를 리가 있나요? 당신이 자주 쓰는 건 눈에 딱 박혀 있거든요. 그 정도 골라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예요.”‘이걸 당연하게 말하네.’리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이 사람을 쉽게 생각했구나.’마지막 캐리어까지 정리를 마친 지언은 손을 털며 말했다.“이제 끝난 거죠? 더 넣을 거 없어요?”“없어요.”리아가 고개를 저었다.지언은 캐리어를 닫아 구석에 나란히 세워 두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 끝났으니, 이제 우리 잘 시간 아니에요? 응?”말끝을 올리며 농담 섞인 말투였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붙였다.“근데 당신은... 아직 씻지도 않았어요.”“지금 바로 할게요!”지언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분명 능청스러운 행동인데도 리아에게 그 몸짓은 유혹처럼 느껴졌다.리아의 시선이 순간 흔들리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5분 뒤, 욕실 문이 열렸다.지언이는 반쯤 풀어진 가운 차림,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려 목선을 타고 가슴으로 떨어졌다.리아는 순간 지언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뭐하는 거예요? 마치 클럽에서 여자를 꼬시려고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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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6화

리아가 떠난 지 하루만에, 지언은 다시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조지언 씨, 여기는 시립병원인데요...]“압니다.”지언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핵심만 말하세요.”[그게, 강 여사님께서 전에 가져다드린 침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면서...]“두 가지만 묻겠습니다.”지언이 차갑게 끊어쳤다.“첫째, 우리 어머니 건강에 이상 있습니까?”[아... 그건 없습니다.]“좋습니다. 둘째, 지금 어머니 신변은 안전합니까?”[병원에 계시니까... 안전하시겠죠.]“그럼 됐습니다.”뚝-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신호음이 이어졌다....수화기를 들고 있던 간호사는 멍해졌다.옆에 있던 동료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보호자가 뭐래?”“그냥, 끊어버렸어.”“그럴 줄 알았다. 솔직히 환자가 저렇게 계속 문제만 일으키면, 앞으로는 보호자들도 전화 안 받으려 할 걸...”“먹는 게 맘에 안 든다, 물이 이상하다, 침대가 불편하다... 끝도 없잖아. 누가 저런 환자랑 엮이고 싶겠어. 지지리 운도 없지, 불운의 아이콘...”“그럼 우리 어떡해? 계속 전화해야 하나?”“해야지. 보호자가 전화 받으면 그냥 할 말만 전하면 돼. 보호자가 오든 말든 그건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니니까.”“알겠어. 그럼 다시 한번 걸어볼게.”잠시 뒤.“보호자가 이 번호 차단했나 봐...”...그 시각, VIP 병실.강서원은 방 안을 몇 차례 오가며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결국 지언은 나타나지 않았다.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지언이는 재석이랑 달라. 내 말 한마디에 움직여 줄 애가 아니야.’그럴수록 오히려 재석이 그리워졌다.‘재석이는... 벌써 한 달 가까이 얼굴을 못 봤네. 아직도 날 원망하는 걸까?’강서원의 가슴이 씁쓸하게 저려왔다....“에취!”재석이 재채기를 했다.옆에 있던 진욱이 고양이처럼 고개를 쭉 내밀었다.“재석아, 누가 네 생각하나 보다.”“그래...”“혹시 정은일 수도 있잖아.”재석의 손이 잠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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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7화

섬으로 출발할 때까지 원래 약속된 기간은 2주 정도.그러나 아직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다.가능하다면 현빈은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아니 훨씬 더 미뤄지기를 바랐다.하지만 전날 밤, 호주 기상청에서 발표가 나왔다.앞으로 일주일간 태풍이 접근해 해상에 극단적인 기상이 예보된다는 소식이었다.결국 선단은 일정을 앞당겨 섬에 오르기로 했다.현빈이 직접 호텔을 찾아온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사실 오기 전까지 현빈은 망설였다.정은에게 굳이 알려야 하나.만약 숨긴다면?약속된 날짜가 됐을 때 ‘태풍 때문에 연기됐다’라고 핑계를 대면 된다.그렇게 되면 정은은 어쩔 수 없이 더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책임은 전부 날씨 탓이니, 원망이 자신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터였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변명일 것이다.‘정은이가 그 정도 속임수에 속을 리 없지.’아마 정은은 겉으로는 현빈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그 순간, 신뢰는 영영 무너질 수도 있다.그래서 현빈은 아쉬움을 삼키고, 결국 정은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배는 언제 출발해요?”정은의 눈빛이 번뜩였다.“내일...”짧은 대답과 함께, 현빈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드리웠다.반대로 정은의 눈동자에는 설렘이 번졌다.그 대비가 현빈을 더욱 허무하게 만들었다.“정은아...”“네?”“내일... 난 배웅하지 않을게. 잘 다녀와.”“알았어요.”짧고 단호한 대답.그 말 한마디에 현빈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그는 잔을 들어 와인을 목구멍 깊숙이 들이켰다. 진득한 향이 남았지만, 마음은 더 공허했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정은의 핸드폰이 울렸다.[주안나 간호사의 약품 내역,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정은은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곧장 노트북을 켰다.메일을 열어 확인한 순간, 단출한 약품 리스트에 시선이 멈췄다.잠시 망설이던 정은은 즉시 전화를 걸었다.“확실히 이게 전부예요?”[네. 진료 기록에서 확인한 것은 저게 다입니다.]정은은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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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8화

“그거라면 알아요.”두리의 말에 정은의 눈빛이 번뜩였다.두리는 곧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을 열고 들어간 공간은 창고처럼 보였다.구석에는 주사기와 거즈 같은 의료 소모품 박스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두리는 박스들을 가볍게 넘어가더니, 뒤편 선반 위에 있던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그리고 정은에게 건넸다.“혹시 찾으시는 게 이거 맞나요?”정은은 상자를 열어 손전등을 비췄다.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안에는 병력 기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표면상 진단명은 ‘치통’, ‘발치’, ‘스케일링’, ‘미백’ 따위뿐.그런데 처방 약물 란에는 파보리주맙, 나볼리맙, 아테졸리주맙, 타목시펜, 레트로졸, 류프롤라이드...정은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누가 치통 때문에 면역항암제나 호르몬제를 처방받는다는 거지?’그 약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였다.모두 ‘항암제’.정은은 손을 떨며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 서 있던 두리는 그 기류가 단번에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겉으로는 치과를 표방하지만, 이곳은 비밀리에 암 환자들에게 약을 공급하는 곳이었다.호주는 항암제 관리가 엄격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더구나 해외 신약은 수입 제한으로 현지에서는 구하는 것도 힘들다.그 틈새를 파고든 회색 지대 클리닉이 존재한다는 걸, 정은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그러다 정은의 손끝이 환자 진료기록 차트 한 장에서 멈췄다.거기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주안나 간호사, 3월 22일.치과를 찾았다는 그날, 주안나는 항암제를 처방받았다.정은의 가슴속에서 하나의 가설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다잡으려 했지만, 손에 쥔 기록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역시...’정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주안나가 가져간 약 목록 속에는 블레오마이신과 파클리탁셀이 있었다.블레오마이신은 항종양 항생제.사용 지침 중 가장 기본적인 금기는 다른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와 병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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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9화

“소정은 씨? 소정은 씨!”두리가 몇 번이나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크게 소리칠 수는 없었지만, 두리의 표정은 점점 초조해졌다.정은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번쩍 차렸다.“상자, 원래 자리로...”그러나 손은 이미 주안나 간호사의 차트를 빼내고 있었다.두리는 지시대로 상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정은이 짧게 말했다.“가자.”“네.”두 사람은 올 때처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안전한 곳에 도착했을 때, 두리가 겨우 숨을 고르려고 하는데, 정은이 말을 꺼냈다.“오늘 밤 제가 두리 씨랑 같이 야식 먹었어요. 장소는 미식거리 강이네 식당, 메뉴는 곱창구이. 시원한 맥주도 곁들였고요. 누가 물어도 대답은 이거예요. 알겠죠?”두리는 눈을 내리깔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심현빈 대표님이 물어도 똑같이요?”정은은 단호히 끊어 말했다.“제가 말한 건... 누구든...”현빈도 포함이었다.“죄송하지만, 심현빈 대표님은 제 고용주이십니다.”정은이 웃었다.“충성심이 대단하네요? 혹시 우리 오빠한테 신세라도 졌어요? 아니면 은혜?”두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그럼 단순히 고용관계네요.”두리의 미간이 본능적으로 좁혀졌다.정은이 덧붙였다.“두리 씨가 저랑 야식 먹으러 오기 전에, 이미 제 개인 계좌에서 오만 달러가 국내 두리 씨 어머니 계좌로 송금됐어요.”두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걱정 마요. 비밀 계좌고, 깨끗한 돈이에요. 출처도 합법적이고요. 두리 씨 어머니 계좌에 들어간 명분도 확실해요. 고향집을 팔고 받은 돈이라는 명목으로...”두리의 싸늘했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정은이 물었다.“이제 저와도 고용관계로 봐도 무방하죠?”잠시 침묵하다가 두리가 짧게 답했다.“네...”“좋아요. 그럼 고객의 프라이버시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기본적인 직업 윤리는 있겠죠?”“있습니다.”“제 말대로만 해요. 전 그걸로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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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0화

3시간의 항해.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휴게실 공간은 비좁지 않았지만, 한곳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답답함이 몰려오기 마련이다.게다가 바다 위에는 핸드폰 신호조차 잡히지 않았다.정은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신호를 찾다 이내 포기하고, 그냥 갑판으로 나왔다.배는 이미 오래전에 육지를 떠나, 파도를 가르며 바다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푸른 하늘 아래,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정은은 그 장면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소정은 씨?”부두에서 그를 안내해 준 선원 중 한 명, 중년의 사내가 다가왔다.“여긴 바람이 세서 위험합니다. 둘레에 난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이름이 뭐예요?”“도균성입니다.”“우리나라 사람이에요?”도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호주로 일하러 온 겁니다. 국적은 안 바꿨습니다.”정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다른 사람들도요?”“똑같습니다. 다 같은 마을에서 나온 사람들이에요.”“왜 굳이 호주로 오게 된 거죠?”도균성은 피식 웃으며, 무심코 주머니 속 담배를 만지작거렸다.그러다 곧 눈앞에 있는 이가 동료가 아닌, 보스가 신신당부한 귀한 손님이라는 걸 떠올렸다.게다가 상대는 어린 여성이었다.그는 반쯤 꺼낸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우리 마을은 대대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며 살았죠.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섬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어요. 젊은 사람들은 다들 장사로 빠지고, 바다에 나가려는 이는 줄었죠.”“결국 사람들이 소규모 섬, 특히 소규도 하면 어디가 포토존인지만 기억할 뿐, 오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이 얼마나 신선한지는 이제 아무도 관심 없습니다.”산업이 변하면, 새로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스러지는 것도 생긴다.그건 시대의 흐름과 발전에 따라 함께 내려지는 냉정한 결론이었다.아쉽지만, 거스를 수는 없는 흐름일 것이다. 도균성이 말을 이었다.“장사라는 게 얼마나 편합니까. 땡볕에 나가 고생할 필요도 없고, 바다에서 풍랑 걱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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