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501 - Chapter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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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1화

“섬 환경이 그렇게 열악해요?”정은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아까 도균성이 ‘새도 앉지 않는 곳’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도균성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키고는,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직접 가보면 압니다.”정은은 눈을 껌뻑였다.‘뭐야, 저 애매한 대답은...’그 순간, 전방 갑판에서 소란스러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형! 빨리 와봐요!”앞쪽에서 누군가 도균성을 불렀다.그는 곧장 달려갔고, 정은도 뒤를 따랐다.“형! 여자가 배에 숨어들었어요! 아까 화민이가 화장실 갔다가 그 여자한테 맞고 기절했어요. 우리가 내내 찾아다니다가 겨우 발견한 거예요.”도균성의 눈빛이 단번에 매서워졌다.“사람은 어디 있어?”사람들이 좌우로 흩어져 길을 터주었다.멀지 않은 그릴 앞.방금 구워낸 꼬치가 한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그녀는 꼬치를 마구 뜯어 먹으며 틈틈이 맥주까지 들이켰다.꼭 자기 집 안방처럼 여유로운 꼴이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예 배 주인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세상에, 요즘 도둑은 이렇게 당당한 거야?’그 ‘무서운 여자’는 바로 변리아였다.전날 밤, 리아는 화물칸에 숨어들어 꼬박 밤을 새우고, 오전 내내 허기를 참은 뒤였다.그제야 생각났다.어제 낮, 분위기 그럴듯한 양식당에 들어갔는데, 정작 음식 맛은 영 시원찮았다.‘국내에 오래 있다 보니, 입맛도 다 국내 음식에 길들여졌나. 괜히 구운 고기가 더 당기네...’그녀는 생각이 미치자마자 현실이 따라왔다. 눈앞에 꼬치구이가 차려진 것이다.게다가 맛도 나쁘지 않았다. 질기지도 않고, 타지도 않았다. 불맛까지 적당히 배어 있었다.‘이 정도면 전문 식당도 부럽지 않네.’“형, 저 여자 좀...”도균성이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시선은 오직 리아에게 향해 있었다.“당신 누구야? 우리 배에 왜 몰래 탄 거지?”리아는 시선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막 먹고 있던 꼬치를 내려놓더니, 옆의 꼬치를 또 집어 들었다.그리고 도균성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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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2화

리아가 피식 웃었다.“정은 씨도 결국 여기까지 왔잖아요?”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정은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맥스 군도라... 별일 다 있네요.”리아는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긴 머리를 날렸다.“그러게요.”“근데 왜 배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순간 리아의 표정이 굳었다.“여기가 이렇게까지 외진 줄은 몰랐죠. 개인 소유 배들에는 물어봐도 다 안 들어간다고 하고, 선박회사에 연락한 것도 다 거절당했어요.”“항구에서 이틀이나 서성이다가 겨우 이 배가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정은은 고개를 기울였다.“그럼 그냥 이분께 말씀드리고 같이 태워달라 하면 되잖아요. 왜 숨었어요?”“됐네요.”리아는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이 선원들... 고집이 쇠심줄이에요. 배 탑승 인원은 자기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장이 직접 지시했다면서 모르는 사람은 절대 태울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그 도씨 성 가진 책임자, 완전 철벽이에요. 돈도 소용없고.”도균성이 꿈쩍도 하지 않자, 리아는 다른 선원들을 따로 붙잡아 은밀히 제안했다.처음엔 2만 달러, 그래도 안 되길래 6만 달러까지 올렸다.정은이 물었다.“아무도 안 받았단 거군요?”“안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숨어들었겠어요? 참 답답한 사람들이에요. 눈앞에 돈이 굴러다니는데도 안 집더라고요. 내가 6만 달러까지 얘기했다니까요? 그런데도 꿈쩍도 안 해요.”정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마 저분들에겐,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겠죠.”“그럴지도요.”리아는 무심히 어깨를 으쓱했다.정은이 다시 물었다.“근데 숨어 있던 건 잘했는데, 왜 갑자기 나온 거예요?”리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첫째, 배고팠고요. 둘째, 뒤쪽 갑판에서 정은 씨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제야 확신이 서서 그냥 나온 거죠.”정은은 말없이 리아를 보았다.‘그래, 변 선생님. 상황에 편승하는 법은 확실히 아는군.’리아는 바닷바람을 즐기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배부르고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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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3화

정은이 리아를 위아래로 찬찬히 바라보았다.리아는 괜히 불편해져서 침을 꿀꺽 삼켰다.“왜 그렇게 보세요?”“변 선생님이 헤어지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어요.”“정말요? 제가 그렇게... 음, 대단한 사람인가요?”정은이 웃음을 지었다.변리아라는 사람...화끈하고, 대담하며, 두려움이 없다. 강서원이 눈을 부릅뜨는 건 있어도, 리아가 강서원 앞에서 기죽는 일은 없었다.이 정도면 충분하다.조지언만 끝까지 단단히 버텨주고 지켜주기만 한다면, 두 사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그럼요. 이제 아셨어요? 변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듣기엔 칭찬 같은데, 잘 생각해 보면 약간 비꼬시는 것 같기도 해요.”“칭찬으로 들어주세요.”“말씀은 좀 억지 같지만... 뭐,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정은 씨가 재석 오빠랑 헤어진 건, 본인이 원하신 거예요? 객관적인 이유보다 주관적인 이유가 더 크다는 거죠?”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리아가 ‘역시 말씀 안 해 주시네’ 하고 체념하려던 순간, 정은이 불쑥 입을 열었다.“저는 연애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연애도 하시고, 일도 하시면 되잖아요?”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쉽지 않아요.”“그럼 정은 씨는... 일은 몰라도 연애 쪽은 별로인가?”“...”둘이 술도 마시고, 고기도 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도균성이 다가와 말했다.“소정은 씨, 곧 배가 접안합니다.”“네,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정은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섬이 이미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배는 점점 속도를 줄이며 다가가고 있었다.배에서 내린 순간, 정은은 속으로 감탄했다.‘여긴... 너무 원시적이잖아.’어지럽게 정박한 고깃배 몇 척이 전부인 바닷가에는 다져놓은 방파제도 없고, 갯벌을 걸어 나무다리를 건너야 겨우 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개발되지 않은 어촌마을 같았다.심지어 그보다 더 못했다. 보통의 어촌은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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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4화

“누구 찾으세요?”정은 뒤에서 불쑥 소리가 들려왔다.정은은 알아듣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토착어였다.뒤돌아보니 한 여자가 서 있었다.피부는 햇볕에 그을린 듯한 갈색, 콧대는 뚜렷하고 눈두덩이는 깊게 패었다. 순수 백인은 아니었고, 아마도 아프리카계 혈통이 섞인 듯 보였다.그녀는 정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보고는, 곧바로 섬 주민이 아님을 눈치챘는지 이번엔 영어로 물었다.“Hello, who are you looking for?”억센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정은이 재빨리 대답했다.“혹시 A국에서 온 연구팀이 여기 있나요?”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가리켰다.“이쪽으로 가세요. 저기 갯벌을 돌아서 가면 바로 있어요.”정은은 안내받은 길을 따라 십여 분 정도 걸었다.나무 울타리가 줄지어 서 있었고, 옆에는 소 우리와 양 우리도 보였다. 멀찌감치에 목양견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언뜻 보기엔 시골 농장 같았다.“Hi!”밝은 미소를 띤 백인 청년이 울타리 안에서 걸어 나왔다.또렷한 이목구비, 환한 웃음.“누구 찾으세요?”“전해산 교수님, 아세요?”“어? 전해산 교수님이랑 어떤 사이세요?”“저는 A국에서 왔습니다. 혹시 교수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물론이죠. 따라오세요.”정은은 청년을 따라 울타리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가는 길에, 청년이 자신을 올리버라고 소개했다. 정은도 자신이 쓰는 영어 이름 ‘Selena’로 자신을 올리버에게 소개했다.이 농장은 올리버의 소유였고, A국 연구팀은 뒷마당 쪽 낮은 집들을 임대해 지내고 있었다.“여기 혼자 사세요?”올리버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부모님은 제가 어릴 적에 병으로 돌아가셨고, 이 농장은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혼자인 걸 아셨어요?”정은은 멀찍이 널어둔 빨래를 가리켰다.“옷이 한 사람 것밖에 안 보이더라고요.”“그건... 다른 가족이 오늘은 세탁을 안 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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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5화

그때만 해도 아무도 오미선 교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섬에서의 생활 여건은 실로 열악했다. 교수들조차 감당하기 힘든데, 젊은 학생이 과연 와서 버틸 수 있을까?하지만 오미선 교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주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요즘 세상에 지도교수랑 마음 터놓고 지내는 학생이 어디 있다고...’‘인터넷에 악성 게시글이나 올리지 않으면 다행이지.’“정말 이렇게 직접 오다니... 아쉽게도 오미선 교수님은 이미...”옛 사람을 입에 올리자, 전해산의 눈가가 금세 젖었다.잠시 후에야 정신을 다잡은 듯, 그가 정은에게 물었다.“그런데... 무슨 일로 왔어?”정은은 가방에서 공문 한 장을 꺼내 펼쳤다.붉은 머리글자가 박힌 제목.〈소정은 서비대학교 박사과정 대학원생, 호주 맥스 군도 임시 바이러스 연구센터 파견 승인〉마치 90년대 대학원 시절 흔히 보던 ‘추천서’처럼 보였다.“학교에서 연구팀 앞으로 정식 메일도 보냈을 겁니다. 그런데 보니까... 여기선 못 받으신 것 같네요?”전해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메일이요? 아이고, 벌써 3주 가까이 인터넷이 끊겼어.”말끝에 자조 섞인 웃음이 흘렀다.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 인터넷이 끊기는 건가요? 오미선 교수님께 들었을 땐, 섬에도 이미 기지국이 설치돼 있다고 하던데요.”“맞아. 설치는 돼 있지. 그런데 날씨가 하도 험해서 고장이 잦아.”“그럼 바로 수리하면 되잖아요?”“수리야 해야지. 하지만 곧 또 태풍이 몰아친다는 예보가 있어서, 괜히 고쳐놔도 다시 무너질 거야. 그래서 이번 태풍이 지나가면 한꺼번에 손볼 계획이고.”정은은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장비에 문제는 없나요?”“없을 리가 없지. 데이터 대부분이 네트워크로 처리하고 저장돼야 하는 건데, 지금은 전혀 안 돼.”“다들 이제 익숙해져서, 인터넷 연결되면 그때 몰아서 작업하고, 끊기면 그냥 밖에 나가서 직접 표본 채집해.”“그래서 요즘은 낮엔 전부 밖에 나가 있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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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6화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학생, 이름이 뭐라고?”주광빈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저는 소정은이라고 합니다.”“소... 정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정은이라... 전 교수, 혹시 들어본 적 있어요?”갑자기 주광빈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아! 생각났다! 자네, 오미선 교수 제자 맞지?!”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순간 주광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목소리도 한결 낮아졌다.“그럼... 오미선 교수가 하신 말씀이 사실이었구먼. 정말 왔구나... 설마 여기까지 온 게, 유품 정리하려고?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야? 미안하네, 요 며칠은 인터넷도 끊겨서 불편이 많을 텐데.”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저는 공부하러 왔습니다.”“공부?”주광빈이 순간 말을 잃었다. 귀를 의심한 듯 되물었다.“무슨 공부?”그때 전해산이 옆에서 조용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이걸 보시죠.”주광빈은 반신반의하며 문서를 받아 펼쳐 보았다.빨간 직인이 또렷하게 찍힌 공식 문서.30초쯤 지났을까...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은을 바라보았다.“설마... 이 섬에 남아서 연구하면서 박사과정을 한다는 거야?”정은은 또렷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두 분 교수님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잠시, 공간이 고요해졌다.전해산과 주광빈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하지만 곧 주광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소정은 학생, 다시 생각해 봐. 이건 장난이 아니야. 섬 환경이 어떤지 방금도 봤잖아. 절대 쉽지 않은 길이야. 신중해야 해.”정은은 과장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한번 해보겠습니다.”전해산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듯했으나, 끝내 내뱉은 건 두 글자뿐이었다.“그래.”정은이 살짝 웃으며 멀찍이 보이는 낮은 집들을 바라봤다.“혹시 제 방이 있나요? 우선 짐부터 풀고 싶습니다.”전해산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아이구, 내가 깜빡했네. 있지, 있고 말고!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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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7화

“이미 역할을 분담했으니, 약속대로 지키는 게 맞겠죠.”이조화의 한마디에 주광빈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그 순간, 이조화의 시선이 문득 구석에 머무르더니 정은을 향했다.“우리 연구센터에 새 얼굴이 있군요?”“아, 맞다.”주광빈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했다.“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름은 소정은이에요.”뜻밖에 이름이 언급되자, 정은은 숨기지 않고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밝은 웃음을 띠고 인사를 건넸다.“교수님들, 저는 소정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앞으로라니...”이조화는 그 한마디에서 다른 뜻을 읽어냈다. 곧 다른 연구원들도 술렁였다.“오미선 교수님 제자라고?”“예전에 이름을 들은 적 있는데... 정말 왔구나.”“맞아, 바로 이 학생이었어!”웅성거림 속에서도 정은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잠시 후, 이조화는 주광빈에게서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물었다.“연구하러 왔다고?”“네, 학교에서 공식 문서를 보냈습니다.”순간, 이조화의 눈이 흔들리더니 이내 다가와 두 팔을 벌려 정은을 가볍게 안아 주었다. 예상치 못한 포옹에 정은은 몸이 순간 굳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이조화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오미선 교수님의 눈이 틀리지 않았네. 그분이 가장 아끼고 믿던 제자가 맞네. 우리 팀에 온 걸 환영해.”정은이 고개 숙여 답했다.“감사합니다, 교수님. 오늘이 첫 대면이지만, 사실 저는 예전부터 선생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그래? 오미선 교수가 뭐라고 했어?”정은은 슬쩍 몸을 뒤로 물러 반걸음 거리를 두며 대답했다.“우리 교수님 말씀으론, 이 교수님은 차분하시고 인내심도 대단하시고, 성실하신 데다 무엇보다도 끈기가 대단하시다고요.”“에이, 내가 무슨...”이조화는 손사래를 쳤지만, 곧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분과는 수십 년 인연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허망하게 떠날 줄은 몰랐어.”정은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저희 교수님도 이 교수님이 이렇게 마음 써 주신 걸 아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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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8화

정은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충분합니다. 어르신을 공경하고 젊은 사람이 양보하는 건 우리나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미덕이죠.”“저는 학생이니 당연히 더 참고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교수님께서 다른 교수님들과 같은 대우를 받으실 수 있는데도 이렇게 스스로 엄격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비록 아직 공식적으로 책임교수라는 임명장이 내려오진 않았지만, 곧 학교에서도 확정 소식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정도로 늦춰지는 건 좀 이상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오미선 교수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몇 달. 아직도 ‘임시’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건 분명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터였다.예상대로 이조화의 웃음이 잠시 멎었다.“책임교수니 뭐니, 그저 감투일 뿐이지.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중요한 건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연구팀이 점점 힘을 내고, 좋은 성과를 내는 거다.”정은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이 교수님의 넓은 안목에 감탄할 뿐입니다.”이조화는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웃었다.“됐고, 이제 씻어라. 첫날이니까 굳이 빡빡하게 안 해도 돼. 10분 안쪽으로만 마치면 된다.”그 말에도 정은은 5분 만에 씻고 나왔다.자신이 시간을 끌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힘들어지니까.‘처음부터 철판 깔고 편하게 맘대로 할 순 없지.’“어, 정은이 벌써 나왔어?”이조화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천천히 하지, 10분 준다고 했잖아. 에휴, 뭐 어쩔 수 없지. 섬은 환경이 이런 걸. 앞으로는 불편한 일이 더 많을 거야. 혹시라도 적응 못 해서 중간에 포기만 안 하면 다행이지.”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달빛에 비친 고요한 얼굴로 답했다.“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기 전부터 각오한 일입니다. 이렇게라도 씻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데요. 집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는 배우러 온 거지 쉬러 온 게 아니니까요. 감수할 건 감수할 생각입니다.”그녀는 천천히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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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9화

전해산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에이, 에이, 다들 힘든데요... 뭐.”주광빈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고, 정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오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정은은 전체 연구센터 주위를 크게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생각보다 이 농장은 꽤 넓었다. 연구팀이 묵고 있는 낮은 단층집 외에도 집이 두 채 더 있었다.중앙에 있는 집은 농장 주인이 거주하는 듯했고, 또 다른 한 채는 오른쪽에 위치해, 바다 쪽으로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두 집 모두 연구팀 숙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외관도 그렇고, 위치도 그렇고, 한눈에 보아도 더 나았다.특히 바닷가에 붙어 있는 집은 외벽이 반짝 새것 같았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티가 났다.앞마당 잔디는 푸르게 자라 있었고,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꾸준히 관리하는 게 분명했다.멀리에는 밀밭과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밀을 재배하다니... 신기하네.’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다른 섬나라도 많잖아. 거기선 벼도 잘만 키우는데.’정은은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더 멀리 나가는 걸 멈추고, 연구소로 발길을 돌렸다....점심은 찐빵과 죽, 그리고 작은 접시에 담긴 김치 몇 조각이었다.전해산이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헤헤... 더울 땐 죽이 딱 좋지. 찐빵은 방금 쪘어. 뜨거울 때 먹어.”정은은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국물과 쌀알이 따로 노는 죽, 그리고 퍽퍽하고 단단해서 베물기도 어려운 찐빵.긴 침묵이 흘렀다.그 침묵이 오히려 불평보다 더 크게 와닿았는지, 전해산은 머쓱하게 코를 긁적였다.“에이,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 정도라. 그냥 배만 채우자고.”주광빈은 이미 익숙한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식욕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고, 대신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는 듯했다.이윽고 이가 ‘딱’ 하고 부딪힐 정도로 굳게 입을 다문 뒤, 눈을 질끈 감고 찐빵을 베어 물었다.죽 한 숟갈, 김치 한 점.그 모습을 본 전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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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0화

고기반찬 두 가지, 채소 반찬 두 가지. 결국 접시를 싹 비웠다.전해산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말했다.“내가 호주 온 뒤로 이렇게 맛있게 먹은 건 처음이야. 정은이 너는 지금 내 마음 알기나 해? 감동이야, 진짜...”말하면서 손으로 눈꼬리를 꾹 눌렀다.주광빈은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배부르게 먹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까 네가 ‘그냥 반찬 몇 개 하겠다’라고 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속으로는 요즘 애들 허세만 있어서 걱정했는데... 너는 진짜 다르구나.”설거지는 전해산과 주광빈이 함께했다.정은이 거들겠다고 다가갔지만.“손대지 마! 절대 대지 마! 우린 괜찮아. 넌 옆에서 좀 쉬어.” 전해산이 막아섰다.“과일 안에 있을 거야. 가서 좀 먹어. 여긴 나랑 전 교수만 있으면 충분해.” 주광빈도 맞장구쳤다.그렇게 해서 정은이 과일을 먹고 돌아왔을 때는, 설거지까지 이미 끝나 있었다.할 일이 없어지자, 정은은 방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였다.그녀는 눈을 떴을 땐 오후 2시.전해산과 주광빈은 어디론가 나가 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정은은 홀로 방을 나와 복도와 마당을 거닐다 어느새 다른 집 앞에 도착했다.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말을 타고 달려온 올리버가 보였다.그는 재빠르게 고삐를 잡아당겨 말의 속도를 멈추게 하고, 정은 앞에 섰다.올리버가 능숙하게 말에서 내려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또 보네요.”정은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안녕하세요.”올리버는 말을 마구간으로 끌고 들어가 물통에 물을 채워주었다.그러고는 정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커피 한잔하실래요?”정은은 뒤에 있는 집을 한 번 흘깃 돌아보고, 시선을 다시 올리버에게 돌렸다.“영광입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집 안은 예상대로 꽤 근사했다.벽난로, 소파, 에어컨, 카펫, TV까지.전형적인 미국식 빈티지 인테리어였다.올리버는 손을 깨끗이 씻고 직접 커피를 내려 정은에게 내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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